돔배기에 대한 추억
돔배기란 상어를 토막으로 썰어 놓은 고기를 일컫는 이름이다. 그 어원은 ‘토막고기’의 의미로 경상북도 사투리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돔배기 산적은 돔배기를 길쭉한 직육면체 모양으로 포를 뜬 후 대나무 살이나 싸리나뭇가지로 만든 꼬지에 꿰어 만든다. 이렇게 만든 산적을 채반에 얹어 찌거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익혀 제상에 올린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는 상어가 사람을 잡아먹는 고기라 하여 제사음식으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경상도 지방(특히 안동, 의성, 영천 지방)에서는 돔배기 산적이 없으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할 정도로 돔배기 산적이 제사음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제상에 제수를 진설할 때도 산적은 밥과 국 가까이 동편 가장 중요한 자리를 배려하고 있다.
돔배기는 가시가 없고 비린내가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겨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옛말에 ‘고래고기 열 두 가지 맛’ 이란 말이 있다. 부위에 따라 고래 고기의 맛이 각기 다름을 뜻하는 말로써 고래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이 말에 공감하고 있다. 돔배기도 고래 고기만큼 다양한 맛은 아니지만 상어의 종류(약 250여종)와 고기의 부위에 따라 맛이 다르다고 한다. 맛이 있는 돔배기는 살이 쫀득쫀득하고 찰기가 있어 씹는 맛이 좋아 자주 젓가락이 가지만, 맛이 없는 돔배기는 퍼석퍼석하고 솜 씹는 것 같아 두 번 다시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명절제사나 기제사를 준비하느라고 장 보러 갈 때면 돔배기는 꼭 단골 생선가게에서 산다. 그때마다 맛있는 것으로 골라 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생선가게 주인도 돔배기 고르는 노하우가 부족해서인지 사올 때마다 각기 맛이 달랐다. 단골집을 바꾸어 가면서 여러 번 시도해 보았으나, 시행착오만 거듭할 뿐 뾰족한 묘책이 없어 운수소관으로 돌리고 시각적인 선택에 의지할 뿐이다.
우리 집은 지차 집이라 제사가 없었다. 옛날부터 제사는 맏집에서 지낸다는 전통에 따라 대게의 제사는 종손 집에서 지내왔다. 5대 봉사를 하는 종손 집에서는 1년 내내 제사를 지내야 했고 그로 인한 경제적인 부담도 컸다. 이러한 짐을 덜어주기 위해 재산상속 때 맏아들에게는 제사 비용으로 쓸 묘위답을 따로 물려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즘은 인사말이 언제 만나든지 ‘안녕하십니까?’로 통일되어 있지만, 내가 어릴 대는 만나는 때에 따라 인사말이 달랐다. 아침에 만나면 ’아침 잡수셨습니까?‘ 저녁에 만나면 ’저녁 잡수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다. 인사말에서 보듯이 그 당시에는 끼니를 때우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루 세끼 밥만 먹을 수 있어도 부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얀 쌀밥에 돔배기 산적을 맛볼 수 있는 제삿날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지 않았던가.
종손 집에서는 자주 지내야 되는 제사 때문에 돔배기를 한꺼번에 많이 사서 갈무리해두었다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패나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로 소금항아리나 소금상자에 보관했다.
그러다 보니 간이 알맞은 간간한 돔배기는 처음 사올 때 지내는 제삿날 이 후에는 먹기 힘들었다. 돔배기 한 토막이면 제삿밥 한 그릇은 거뜬히 먹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짰는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소금기를 서리처럼 뽀오얗게 뒤집어쓴 그 짜라빠진 돔배기 한 토막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산적 소쿠리에 자주 눈을 주던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돔배기 맛을 못 잊어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러놓고 다음 제삿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일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겨울철에 지내는 제삿날에는 제삿밥 한 그릇 먹기 위해 여러 가지 고역을 치러야 했다. 제사는 주로 자정이 되어야 지냈는데 자정까지 잠을 자지 않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 첫째 고역이었고, 한밤중에 차가운 물에 세수를 하고 정신을 가다듬는 일이 둘째 고역이었고, 방을 차지할 나이가 못되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 셋째 고역이었고,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손발을 애는 듯한 추위를 참아야 하는 것이 넷째 고역이었다. 이러한 고역도 하얀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을 넣어 비빈 제삿밥과 짜라빠진 돔배기 한 토막 주는 유혹을 생각하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제사시간을 맞추기 위해 북두칠성의 위치를 관찰하러 마당에 나가곤 하였는데, 그때는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도 반짝였다는 생각이 든다.
공교롭게도 삼월 열아흐레날은 할머니 제삿날이었고, 스무날은 할아버지 제삿날이었다. 이틀 동안 언거푸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맏집에서는 경제적으로나 노동적으로 부담이 많았다. 의논한 결과 할아버지 제사는 우리 집에서 지내기로 결정하였다. 부모님은 우리 집에서 제사를 모시는 것을 좋아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제삿장을 보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제사음식을 푸짐하고 정갈스럽게 준비하는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할아버지 제사 입젯날에는 솥뚜껑에서 금방 부쳐낸 고구마 전 두 서 너 개를 얻어 들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며 어깨춤을 추던 일도 생각난다. 할아버지 제삿날에는 눈치를 보지 않고 제사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특히 간이 알맞은 돔배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파젯날에는 이웃어른들을 초청하여 제사음식을 대접하였는데, 이웃어른들을 모시는 신나는 심부름은 내 몫으로 달리느라 숨이 차고 다리가 아파도 싫지가 않았다. 방안 가득 모여 앉아 제사음식을 먹으며 담소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은 장면이었다. 개중에는 해가 중천에 올 때까지 술을 마시며 귀찮은 시중을 요구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으나, 부모님은 싫은 기색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 제사를 두 서 너 번밖에 못 지냈던 것 같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제사를 나누어 지내면 복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맏집에서 도로 가지고 가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얀 쌀밥과 간간한 돔배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기회도 빼앗기고 말았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서운했던지 며칠 동안 풀이 죽어 시무룩했던 일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제 우리 집에도 제사를 지낸다. 이틀 후인 동짓달 초닷샛날은 아버님 기일이다. 제삿장을 보기 위하여 아내와 같이 관문 시장에 갔다. 아내는 종이쪽지에 가득 적힌 제수목록을 보면서 좋은 식품을 고르느라 애를 쓰고 있다. 제수를 장만할 때는 가급적 값은 흥정하지 말고 무조건 좋은 물건을 고르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오늘도 단골 생선가게에 찾아간다. 번번이 시행착오를 체험하면서도 주인에게 맛좋은 돔배기를 골라 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하얀 쌀밥과 간이 맞는 간간한 돔배기를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내 어릴 적 소원은 이미 사리진지 오래지만, 맛있는 돔배기를 사겠다는 욕심은 돔배기에 대한 내 어릴 적 추억과 함께 여전히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