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끌어안아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
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4월 7일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 강론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삶을 위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진리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크고 깊습니다. 그 사랑은 한결같으며 언제나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고, 우리를 일으켜 주며 지탱해 주고 이끌어 줍니다.
요한복음서(20,19-28)에 따르면, 토마스 사도는 하느님의 자비를 뼛속 깊이 체험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구체적인 형태, 곧 예수님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다른 사도들이 토마스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했지만, 그는 이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토마스에게는 사흗날에 부활하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그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예수님은 고집불통인 토마스를 불신 속에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한 주간의 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토마스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지 않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토마스는 자신이 미천한 존재이며 미약한 믿음을 지녔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처럼 토마스는 매우 간결하면서도 믿음 충만한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분의 인내에 응답했습니다. 토마스는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서계신 예수님에게서, 그분의 손과 발에 난 못 자국과 옆구리의 상처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았고 신뢰를 되찾았습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굳건하게 믿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예수님께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때에 세 번씩이나 그분을 배신했습니다. 그렇게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을 보았습니다(루카 22,60-61). 예수님은 인내를 보이며 아무 말씀 없이 눈빛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너의 나약함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베드로는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눈빛을 느끼고는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님의 눈빛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얼마나 부드러운 눈빛입니까!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인내로운 자비에 대한 신뢰를 절대로 잃지 마십시오!
엠마오를 향하던 두 제자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슬픈 얼굴빛을 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맥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절망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당신에 관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또한 함께 식사하기 위해 머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즉시 이루고자 하는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내심이 없는 우리와 전혀 다른 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인내심을 보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고 바라며, 신뢰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절교하지 않고 용서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에게서 멀리 떠나갈 때에도 늘 우리를 기다려 주십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께 돌아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우리를 안아 주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루카복음서에 나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을 때마다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이 비유는 늘 저에게 큰 희망을 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머물면서 사랑받던 작은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기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챙겨 집을 떠납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는 가장 비천한 처지에 놓이고 아버지에게서 더욱 멀어지게 됩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아들은 아버지 집에서 느꼈던 온기를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땠을까요? 아들을 잊고 있었을까요? 아니, 결코 그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간 아들을 떠올리면서 매일 매 순간 아들이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비록 자신을 버리고 떠나가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자유를 남용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늘 사랑하는 아들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인내와 사랑으로, 희망과 자비로 아들을 기다리며 한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알아보고는 달려가 꾸지람 한 마디 없이 사랑으로, 곧 하느님의 사랑으로 끌어안았습니다. 아들이 돌아왔다! 이것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는 것으로 모든 기쁨을 표현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기다리며 지치는 일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그와 같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인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희망을 되찾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독일 출신의 위대한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당신의 인내심으로 응답하시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희망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나약함과 하느님의 인내 사이에 오가는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이 대화를 나누기만 하면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얻게 됩니다.
저는 또 다른 요소 하나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떤 잘못을 하고 어떤 죄를 범한다 해도, 하느님의 인내가 우리 마음에서 그분께 되돌아갈 용기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당신의 손과 발과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상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상처를 실제로 만져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성사에 참여할 때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납니다.
베르나르도(1090-1153) 성인은 아주 멋진 강론을 통해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상처를 통해 바위에서 나오는 꿀을 빨아 먹고 차돌 바위에서 나오는 기름을 먹을 수 있습니다(신명 32,13).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상처 안에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있고 거기서 그분 성심의 무한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토마스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그 사랑을 받기 위해 자신이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혹시 자신의 공로에 의지해야 하는지 자문한 뒤 말했습니다.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공로는 하느님의 자비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넘치는 한 내게는 공로가 전혀 부족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자비가 풍성하다면, 나의 공로도 풍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자비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그분의 인내를 신뢰하며 그분 사랑의 상처 속으로 피신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한 용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베르나르도 성인은 마침내 단언했습니다. “내 자신이 지은 많은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면 어떡해야 합니까?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로마 5,20)
어쩌면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 죄가 이렇게 크고, 나와 하느님의 거리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작은아들의 경우보다 더 멀며, 나의 불신이 토마스의 불신과 같구나. 그러니 나는 하느님께 돌아갈 용기도, 그분이 나를 기다리며 기꺼이 나를 맞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할 용기도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당신께 돌아올 용기만 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저는 사목생활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신부님, 저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매번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세속적인 제안을 받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의 제안만을 받아들입시다. 그분의 제안은 사랑의 손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헤아리시는 다수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중요한 존재, 그분이 소유하신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죄인이라고 해도 우리는 하느님 마음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교황 즉위 첫 강론집) / 바오로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