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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0, 22 -30
(사도행전 11, 19-26)
오늘복음에서
“내 양은 내 목소리를 듣는다”
예수님은 당신자신을 ‘목자’로,
우리들을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중요한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을 따르는것..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더 많은 증거를 눈으로 보는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알아듣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목소리를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따라 ‘행동’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생명에 참여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관계적 친밀함임을 얘기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오늘 제 1독서 사도행전에서는
박해로 흩어진 이들이 복음을 전하고,
특히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확장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그들을 보고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기 시작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닮았다”는 외부로 부터의 증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말씀대로 살았으며
그 결과,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두 말씀을 함께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복음은
내적으로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을,
사도행전은 외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드러내는 공동체의 삶을
즉,
예수님을 ‘듣는’ 사람은 결국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가는것이 아닐까요?
신앙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멈추지 않고,
삶과 공동체 안에서 보이는 증거로 이어지는것 같습니다.
오늘 기도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어떨까요?
- 나는 정말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별’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더 많은 확신과 증거만을 요구하고 있는가?
-내 삶은 그분을 증거하고 있는가?(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그분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가? )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10 28)
(정 루치아나 수녀님)
4월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10,22-30
말씀이 성체와 흡수되어야 하는 이유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
찬미 예수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라며
지적 확인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지루한 신학적 증명을 늘어놓는 대신, 당신의 양들은 당신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관계의 신비를 말씀하십니다.
왜 양들은 신학적 논리가 아니라 목소리에 반응할까요? 그것은 그 목소리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그들의 생존을 결정짓는 '유전자적 각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에너지와 말씀이 결합할 때 일어나는
이 지울 수 없는 각인의 신비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교육을 통해 정보를 습득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는 금방 잊힙니다.
뇌과학에 따르면, 정보가 뇌세포 사이의 시냅스에 영구적으로 고착화되려면 반드시 ATP라는
에너지와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되어야 합니다. 즉, '먹는 행위(에너지)'가 '듣는 행위(정보)'와
동시에 일어날 때 그 정보는 존재의 일부가 됩니다.
동물 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의 『솔로몬의 반지』에 나오는 회색기러기들의 각인 현상이 바로 이것을 증명합니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기러기에게 처음 들리는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해 줄 '유일한 에너지원'의 신호입니다.
새끼 기러기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모든 생존 시스템을 그 주파수에 고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각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무리 옳은 '말씀'이라도 그 말에 '피(희생)'가 섞이지 않으면 인간에게 그것은
단지 지루한 '잔소리'로 들릴 뿐이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의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였던
'손 씻기'가 한때는 수만 명을 죽인 '미친놈의 잔소리' 취급을 받았던 사건입니다.
1840년대 오스트리아 빈 병원의 의사였던 이냐츠 제멜바이스(Ignaz Semmelweis)는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어가는 원인이 의사들의 더러운 손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동료 의사들에게 "환자를 보기 전 반드시 손을 씻으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수만 명의 생명을 살릴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오만한 의사들에게 제멜바이스의 외침은 그저 "우리가 더럽다고 비난하는 기분 나쁜 잔소리"일 뿐이었습니다.
제멜바이스는 말(정보)만 했지, 그 말을 증명할 에너지를 주지 못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말을
비웃으며 계속해서 씻지 않은 손으로 산모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결국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거기서 간수들에게 매를 맞다 상처가 덧나 '패혈증'으로 죽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은 그의 죽음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그가 죽자 사람들은 그가 그토록 외쳤던
'손 씻기'라는 말씀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미친 게 아니라 진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 말씀은 비로소 의학계의 지울 수 없는 '법칙'으로 각인되었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뿌린 수만 장의 전단지는 쓰레기였으나, 그의 죽음이라는 피가 섞였을 때 그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는 목자의 말은 잔소리가 되지만, 피를 쏟은 목자의 말은 영혼의 유전자가 됩니다. (출처: 셔윈 뉼랜드, 『의학의 역사』)
현상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경험하는 '하나 됨'은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일어납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양수라는 액체를 통해 어머니의 심장 박동과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때 목소리는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가벼운 소리가 아닙니다.
양수라는 육체적 에너지를 통해 태아의 온몸을 때리는 강력한 '물리적 진동'입니다.
어머니의 목소리(정보)가 양수의 파동(에너지)과 결합하여 태아의 뼈와 근육에 새겨질 때, 태아는 비로소 '인간의 시스템'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수만 명의 목소리 중에서도 어머니의 음성을 단 1초 만에 식별해 냅니다.
그 음성은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태내의 신비와 같습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피라는 거룩한 양수 안으로 침잠할 때, 그분의 말씀은 우리 영혼의 시냅스를 재구성합니다.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에서 듣는 말씀은 지루한 신학이 되지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말씀은 우리 존재를 하느님으로 변형시키는 '최초의 울림'이 됩니다.
최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가수 서인영 씨의 고백은 이 원리를 아주 절절하게 보여줍니다.
그녀는 과거 욕설 논란과 이혼이라는 풍파를 겪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생각할 만큼 깊은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시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마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는 절망 속에서 그녀는 꿈에 나타난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내가 너 대신 죽은 거야!"
서인영 씨는 이 한마디를 "내가 너를 대신해 죽었으니까, 너는 이제 정말 잘 살아야 해!"라는 목소리로 알아들었습니다.
이전까지 "잘 살아라"라는 말은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평범한 도덕적 잔소리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이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처절한 희생의 에너지와 결합하여 전달되었을 때, 그것은 서인영 씨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운영체제'로 각인되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셔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정보만 주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시며 "내가 너를 위해 죽었다"는 생명 에너지를 먼저 주셨습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으며 듣는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제 뇌가 아니라 세포에 새겨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딸을 다시 살게 하는 법이 되었듯, 그리스도의 성체는 그분의 말씀을 우리 인생의 유전자로 각인시키는 유일한 활성 코드입니다.
피를 마시지 않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잊어버리지만, 피를 수혈받은 자는 그 목소리를 자기 본성으로 삼게 됩니다.
영화 'A.I. Artificial Intelligence' (2001)에는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로봇 소년 데이비드가 인간 어머니를 진짜 어머니로 사랑하게 되는 '각인 절차'입니다.
어머니가 데이비드의 목 뒷부분을 만지며(에너지 접촉), 일곱 개의 특정 단어(정보)를 말해줄 때
데이비드의 전자 회로는 영구적으로 재프로그래밍됩니다.
이 절차가 끝나면 데이비드는 오직 그 어머니만을 향한 일편단심의 존재가 됩니다.
에너지가 수반된 말씀이 기계의 논리를 생명의 논리로 바꾼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먹고 마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행위가 바로 이 각인 절차입니다.
왜 신앙이 지루하게 느껴질까요? 에너지가 빠진 정보만을 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 없는 말씀 공부는 머리만 키울 뿐 영혼을 각인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말씀 없는 성체성사는 맹목적인 에너지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첫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를 통해 하느님 말씀이 각인되어 예수님을 보고 바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 목소리가 “하느님의 어린양” 곧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기에 그분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당신의 살과 피라는 무한한 에너지를 내어주십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파동에 실어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는 거대한 정체성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쏘아 보내십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날 위한 수난을 묵상하십시오.
그 뜨거운 가슴이 없다면 말씀은 각인되지 못합니다.
각인되지 못하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기에 하늘로 오를 수 없습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0,22-30
저는 제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바람도 없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봉독되는 요한복음의 주제는 착한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양들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말의 의미는?
양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의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한 딱한 상황, 난감한 처지를 경청해준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고통과 혹독한 상처를 누군가가 헤아려주고, 말없이 동반해주며,
가장 힘겨운 순간 없을 지켜준다면, 그 누군들 그를 믿고 따르고 의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방식의 목자와 양들의 관계는 멀리 떨어져서, 혹은 말로만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항상 함께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신 것입니다.
꽃같은 청춘 시절에도 함께 하시지만, 점차 쪼그라들고 소멸되는 노년기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승승장구할 때도 함께 하시지만, 처철한 실패 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대 교황님들 가운데 가장 푸근하고 따뜻한 교황님을 선택하라면 저는 즉시 요한 23세 교황님을 추천합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 그가 처음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살짝 실망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통상 교황님들에게 어울리는 지적이고 세련된 용모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뚱뚱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이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편안하고 유머러스한 말씀 몇 마디는 즉시 사람들을 마음을 사로 잡았습니다.
“여러분, 콘클라베는 미인 선발대회가 아닙니다.
저는 제 선임자만큼 대단한 교황이 못될 것입니다. 잘 생기기도 않았고요.
이 귀 좀 보세요. 하지만 여러분은 제 곁에서 편안히 지낼 수는 있을 것입니다.”
“착한 목자요 아버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주교로서 내 삶의 이상입니다.
호의와 이웃 사랑,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길로 초대받았다는 메시지를 단순명료하게 딱 한마디로 요약하십니다.
“누군가는 목자의 지팡이를 들고 거룩해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빗자루를 들고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마냥 착하고 좋은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허허실실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 집무실 책상 위에는 지구본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지구본을 들여다보며 매일 온 나라를 살폈으며, 매일 세상에 태어날 아기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따뜻한 아버지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 23세 교황님은 기도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인류가 큰 위기 앞에 섰을 때 밤잠도 자지 않고 기도하였습니다.
동서 양진영의 책임자들과의 만남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평화를 촉구하며 중재자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의 그런 그의 노력은 백척간두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지구촌 전쟁의 불길을 진화시켰습니다.
이런 배경 아래 그는 자신의 마지막 회칙 ‘지상의 평화’를 집필하셨습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이 쓰신 ‘영혼의 일기’의 한 대목이 제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저는 제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별다른 바람도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시며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제게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당신은 아십니다.
그것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화요일 강론>
(2026. 4. 28. 화)(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있는 솔로몬 주랑을 거닐고 계셨는데, 유다인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말하였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그러나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22-30)>
1)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비유나 상징을 사용하지 말고,
‘나는 메시아다.’ 라고 직접 말하시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메시아라고 분명히 말해 주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다.” 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는 우리가 판단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메시아로 믿을 것인지 안 믿을 것인지도 우리가 결정하겠다.
우선 먼저 당신 자신이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말하시오.” 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다는 뜻인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메시아다.” 라고 직접 표현하신 적은 없어도,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이미 충분히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안에서만 보아도,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14).” 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나는 메시아다.” 라고 밝히신 말씀들입니다.
2)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속을 태울 작정이오?” 라는 말은, 예수님을 당국에 고발하고 싶어 하는 속마음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명확하게 “나는 메시아다.” 라고 선언하시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반란죄로 로마 당국에 고발할 것이고, 그리고 “예수는 가짜 메시아다.” 라고 백성들을 선동할 것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제자들까지도, 모두 예수님을 떠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비유나 상징으로만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그 비유나 상징만으로는 예수님을 당국에 고발할 수도 없었고, 백성들을 선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은 그것을 답답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결국 30절의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씀을 꼬투리로 삼아서 ‘하느님을 모독한 죄’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요한 10,31.33).
3)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나를 증언한다.” 라는 말씀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내가 하는 일들을 본다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고,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메시아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인정하는 증거이고,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작정한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처음부터 예수님을 안 믿으려고 했을까?
이 질문의 답은 요한복음 7장에 있습니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요한 7,42)”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52).”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며 가난한 목수라는 것 때문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으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4) “너희는 믿지 않는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는, “너희는 믿지 않기 때문에, 내 양이
될 수 없다.”입니다.
<‘양이 아닌’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양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는, “내 양이 되려면 내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나를 따라야 한다.”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과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신성불가침이고, 완전하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임을 나타냅니다.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죽음도, 병도, 마귀도 감히 건들지 못하는 ‘하느님의 생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병들고 늙어가면서 영원히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과 같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권한은 하느님의 권한과 같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의 근거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