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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뜨거웠다. 한국은 아직 여전히 뜨겁겠지만, 나는 그 열기 속을 머뭇머뭇거리며 빠져나왔다. 늘 사람들로 붐볐던 인천 공항은 섬뜩하리만큼 한산했다. 커피 한 잔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사람들은 저만치 거리를 지켰다.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헤어지느라 서늘한 마음이 더 서늘하다.
마음속은 아직도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던 서울 광화문 어디쯤의 비 오는 거리인데, 그리고 마음에 남은 순간들이 아직 추억이 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비행기표에 적힌 시간이 시키는 대로, 지친 몸을 끌고 또 새 여정을 시작했다. 공항 구석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내가 멈추어 선 공간과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이런 억지스런 중지 혹은 멈춤을 나는 좋아한다. 무언가 브레이크 없이 직진하는 내 삶의 리듬에 부하되는 정지의 거센 사인을. 이런 시간이 되면 여지없이,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삶의 진실들을 헤어 보게 되고, 이제 많이 늙은 친지들의 안부도 염려하게 되며, 열정 많은 젊은이들의 패기를 축복도 하게 된다.
두 달여의 한국 생활은 가득가득 채우고도 흘러 넘치는 정감의 시간이었다. 그것이 줌의 공간이 되었든, 내가 머물던 홍제동 집이 되었던, 나누어진 삶의 진실들은 내게 다가와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저~ 이거 함께 먹어요”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게 코로나 상황이어도, 늘 우리는 함께 음식을 먹고, 마셨다. 내게 하늘나라를 느끼고 만지고 하는 일은,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상대에게 주고, 또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내게 던지는, “자 무얼 먹을까요?”라고 물어주는 그 순간에 발생하는 것 같다.
공항의 쓸쓸한 모습. 한 소녀가 텅 빈 공항에서 누군가를 마중한다. ©️박정은
미국 공항에서 차를 타고 텅 빈 집에 도착해서, 우편함을 열어 보니, 나보다 먼저 도착한 한국에서 보낸 엽서가 와 있다. 공간과 시간이 바뀌는 어색한 이 순간에, 미리 성탄을 축하한다는 지인의 따스한 배려가 나를 웃게 했다. 수녀님들은 전화를 해 주며, 조심스레, “뭘 먹었니?” 하고 묻는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 사람을 염려하고 사랑해 준다는 것은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행위로 자주 표현 되는 것 같다. 인사동 찻집에서 즐겁게 먹은 두텁떡, 친구가 앱으로 주문한 떡볶이, 홍제동으로 날아온 팥빙수, 힘내라고 함께 먹던 갈비탕, 북 토크 때 가져온 샌드위치와 옥수수는 내게 성사적 의미로 다가온다. 음식의 맛과 추억은 늘 내 안에 살아, 공유되는 삶의 기쁨으로 현재화 될 것이다.
내 비루한 삶이 감히 예언자 엘리야와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내 집에 도착하고 긴 잠을 잔 후, 만난 말씀은, 하느님의 천사가 건네시는 다정한 말씀, “일어나서 무얼 좀 먹어라”(1열왕기 16장)다. 이 본문을 보면, 천사의 이 다정한 말씀은 두 번이나 반복되다가, 그래야 먼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말로 마무리된다. 그러니 내가 친구들과 즐겁게 먹은 음식들은, 내 긴 여행을 준비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현대 사회의 음식이 포장되어지고, 상품화 된 것이라고 해도, 내 앞에 앉은 친구를 바라보며 함께 나눈 음식은 성찬이 되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실 모든 성찬에는 죽음이 담긴다. 이번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어느 날 아침 기적처럼 매미들이 울기 시작했었다. 긴 기간을 기다렸다 이 세상에 나왔기에 축하하는 마음으로 매미들의 장한 울음을 들었는데, 유독, 여기저기 길거리에서 죽은 매미들을 자주 발견했다. 유난히 이번 여름에 많이 보이는 매미들의 죽음을 보면서,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2주를 온전히 살아간 삶의 흔적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혹시 기후 변화로 인해, 매미가 제대로 살지 못하고, 길에 떨어져 죽은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사실 마음이 쓰이긴 나비들도 마찬가지였다. 왠지 날개가 찢긴 나비를 여러 번 목격했다. 온전하지 못한 날개를 가지고 날으려면 나비가 더 힘들 것 같았다. 왠지 자주 꽃잎 위에 쉬는, 찢긴 날개를 가진 나비를 보면 안쓰러웠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오던 날도 한 나비가 꽃잎 위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가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 모습이 이상했다. 그 나비가 아프다는 걸 그제야 알아챈 나는 부채질을 해 주고, 그늘을 조금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싸느라 부산했는데, 나비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개미들이 나비를 둘러쌌다. 내게는 나비를 지킬 능력도, 개미를 비난할 권리도 없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그저 부채를 부쳐 주고, 생명의 먼 여행을 잘 가라고 속삭여 주는 것밖에는.... 집을 나서면서 그 꽃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개미도 나비도 흔적이 없다. 그냥 나비가 날아갔다고 믿고 싶지만, 아니래도 할 수 없다. 너무 더운 날씨에 매미들도 나비들도 모두 더위를 먹은 것 같다. 내가 나비에게 해 준, 뭐라도 ‘좀 먹어 보란’ 말은 그저 엉성하게 그늘을 좀 만들어 주고 부채를 부치는 손길이 될 것이다.
꽃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 나비. 먼 길 떠나는 그에게 건네는 인사는 나의 서툰 손 부채질과 약간의 그늘. ©️박정은
사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느끼는 배고픔이 꼭 먹고 마시는 일에 제한되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는 이 세상에서 안녕한가를 묻고, 이 세상 사는 일이 너무 고되고 외롭지는 않는가를 물어 주는 일이 결국, “친구야 자 일어나 무언가를 좀 먹어 봐”라는 인사가 될 것이다.
최소한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 상처받고, 고립되어 자신없고, 피로감을 느끼는 내 이웃에게, 일어나서 뭘 좀 먹으라고 권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꼭 멋진 메뉴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요즘 한창 제철인 복숭아 한 개일 수도 있고, 구운 옥수수 한 자루, 혹은 친절한 한 줄의 노트일 수도 있다. 우리가 가야 할 여정은 길고, 세상은 황량한데, 그래도 건네주는 다정한 한 마디 “일어나서 좀 먹어 봐”가 또 누군가에게는 하늘나라를 만나는 성사가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나도 보내준 카드와 염려 담긴 안부를 마음에 안고, 곧 시작 될 새 학기를 향해 걸어간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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