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698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쌍계사 가는 길
화개장터에서 맑디맑은 화개천 물길을 따라 4킬로미터쯤 거슬러 올라가면 쌍계사에 이른다. 조선 인조 5년(1632)에 나온 『진양지(晉陽誌)』 「불우(佛宇)」조의 기록에 따르면, 화개면 일대에 암자와 절이 53개 있었고, 이륙이 지은 『유산기(遊山記)』에는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 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나 넓이나 몇백 리인지 모른다. ······ 시내를 따라 의신, 신흥, 쌍계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 20리 지점에 칠불사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이 있고,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아주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 절은 모두 나무판자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만이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두 사람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은 영신사의 작은 샘물에서 시작되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던 절들이 지금은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해 몇몇만 남았을 뿐이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10리 벚꽃길이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김동리가 『역마』에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 있을 때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머리)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쌍계사화개장터에서 맑디맑은 화개천 물길을 따라 4킬로미터쯤 거슬러 올라가면 쌍계사에 이른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절 초입에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바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雙磎)’, ‘석문(石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이 절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하나씩 다시 세운 것이다. 대웅전, 화엄전, 명부전, 칠성각, 설선당, 팔영루, 일주문 등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의 대웅전은 광해군 12년(1620)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의 기둥이 높은 아름다운 건물로, 보물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부도비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속하는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년(887)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미터, 폭이 1미터인 검은 대리석비다. 당대의 문장가 최치원이 짓고 썼는데 특히 그 글씨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수난을 입어 옆구리에 쇠판을 대고 있다.
쌍계사에서 10킬로미터쯤 산길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절이 칠불암(七佛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