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바쳐야 합니다.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0. 9. 수)(루카 11,1-4)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1)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실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은, 사실은 ‘우리를(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인데, 그것은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이 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에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기도의 예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이기도 하고,
“기도문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2)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일입니다.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뒤의 11절-12절에,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 풀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선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생선은 싫다고 하면서 뱀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뱀을 주겠느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걀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달걀은
싫다고 하면서 전갈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전갈을 주겠느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빈말’,
또 ‘생떼’를 부리는 ‘고집’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나에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청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할 일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3) ‘주님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민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아직도 ‘일용할’ 양식 자체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생존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의 양식’까지 청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입술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바라고 있다면,
또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입니다.
4) ‘용서’의 경우,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해서,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에,
‘주님의 기도’는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거짓 기도’를 바치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수록 죄만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5) ‘기도’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말을 잘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또 오래 바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양’이 아니라 ‘정성’입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정말 잘하는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또 ‘삶’이 신앙인답지
않다면, 그것은 다음 경고 말씀에 해당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삶이 곧 기도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우기면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백 퍼센트 위선자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