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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위하여 도피성을 정하라
민 35:9-21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자니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이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요
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면 그는 살인한 자니 그 살인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
19 피를 보복하는 자는 그 살인한 자를 자신이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면 죽일 것이요
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21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죽이면 그 친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살인하였음이라 피를 보복하는 자는 살인자를 만나면 죽일 것이니라
민 35:9-21 / [도피성]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10)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주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발을 내딛거든 11) 도피성을 꼭 지정하여라. 그래서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가 그 성읍으로 도망 쳐 몸을 피하게 하여라. 12) 실수로 사람을 죽인 그 사람이 공동체 앞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 그 성으로 몸을 피하여 복수하려는 피붙이가 무조건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여라. 13) 레위인들에게 떼어 줄 성읍 가운데에서 여섯 성읍을 도피성으로 삼아 14) 세 성읍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또 세 성읍은 서쪽인 가나안 땅에 두도록 하여라. 15) 이 여섯 도피성은 너희 이스라엘 공동체 식구들이든 또는 잠시 동안 너희에게 몸붙여 사는 이방인이든 이방인이면서 너희와 늘 함께 사는 사람이든지간에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에 몸을 피하여 도망할 수 있는 곳이다. 16) 쇠로 만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였으면 일부러 사람을 죽인 것이므로 그는 살인범이다. 따라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7) 또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돌로 쳐죽였으면 일부러 사람을 죽인 것이므로 그는 살인범이다. 따라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8)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한 나무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였으면 그는 살인범이다. 따라서 그 살인범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19)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피붙이가 그 살인범을 죽여야 할 책임이 있다. 그 피붙이는 살인범을 만나거든 죽여라. 20) 어떤 사람이 누구를 미워하여 밀어 넘어뜨려 죽였거나 틈을 엿보다가 그에게 무엇을 던져 죽였거나 21) 또는 나쁜 마음을 먹고 주먹을 휘둘러 죽였다면 그 사람도 마찬가지로 죽여야 한다. 그 사람은 살인범이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피붙이가 그를 죽일 책임이 있다. 그 피붙이는 살인범을 만나거든 죽여라.
도피성의 기능은 우발적인 살해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 조치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9-15) 요단 강 동쪽에 세 성읍과 강 서편에 세 성읍을 지정하여 도피성을 만들되 가까운 곳에 만들고 또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길을 잘 닦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살인한 자가 아직 판결을 받기 전에 피할 수 있는 도피성 여섯 개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성읍은 모두 48개입니다. 그 중 여섯 성읍은 도피성으로 정하여 만일 누군가 과실로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복수를 피해 도피성 중 한 곳으로 달아나 판결을 받기까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무분별한 사적 복수를 막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우발적인 실수로 살인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의적 살인(16-21) 하나님께서는 살인한 사람에 관한 규례를 주시면서 악한 마음에서 고의로 자행한 살인과 과실치사를 구별하여 저리하게 하십니다. 어떤 살인은 계획적인 것이며 매복하여 기다리다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입니다. 의도적으로 살인을 했다면 그 책임이 크기 때문에 죽음에 처해졌습니다. 철은 강력한 무기를 의미하며, 철 연장으로 사람을 죽이면 그는 살해할 목적으로 범죄한 살인자입니다. 고의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짓밟는 행위로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죽이면 돌의 크기와 사용 방법을 불문하여 용서받지 못합니다. 살해자에게는 도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는 재료라도 역시 의도를 살펴야 했습니다. 피를 보복하는 자는 피해자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보복을 하는 것이 당시의 권리이고 의무였습니다. 사법체계가 완전히 확립되지 못한 사회였기에 주어진 권리였습니다. 또한 고의적 살인한 자를 살려두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여 생명을 빼앗아도 좋다는 것을 용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의 원인이 미워하는 까닭이라면 사랑의 자리에 미움과 증오가 대치 되고 쌓여 갈 때에 살인이 마지막에 일어납니다. 또한 원한에 의한 것이라면 미움과 오해가 풀리지 않고 계속 쌓여서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갈등을 해소하고 미움이나 원한이 쌓여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적용: 미움은 창조의 질서를 파괴하는 살인으로 확대됩니다. 그 미움의 자리에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누구든 고향을 떠올리고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인이라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도 도피성이라는 피할 곳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피할 곳이 있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거나 심지어 죄를 지었을 때에도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는 곳 그곳이 바로 주님의 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품 안에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기 바랍니다.
< 설 교 >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민수기 35:9~15 / 피영민 목사
서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표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을 이끄시는 목자로도 상징되고 어둠을 비추시는 빛으로도 상징되고 생명의 떡으로도 상징됩니다. 그 가운데 아름다운 상징 중 하나는 도피성입니다.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신 19:5). 사람을 죽일 의도나 계획이 전혀 없었는데 과실로 인하여 사람을 죽인 경우를 과실치사(manslaughter)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를 구약성경은 어떻게 다루고 있습니까? 과실치사자는 전혀 죄가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민수기 35장 12절을 보게 되면 ‘보수할 자’가 나옵니다. ‘보수’(avenger)라는 말은 복수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보통 보수하는 자는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는데 과실치사자를 쫓아가서 그를 살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복수하면 또다시 원한을 사게 되고 피의 복수가 반복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과실치사자가 죽지 않고 피하여 생명을 보전할 수 있는 도피성(city of refuge)을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세 개씩 도합 여섯 개를 도피성으로 마련해주셨습니다.
구약성경 중에서 모세오경에만 도피성 제도가 네 군데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35장, 여호수아 20장, 신명기 4장과 19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만큼 도피성 제도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이고 하나님의 자비는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우리의 도피성이 되시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공의를 알아야 됩니다. 성경은 사람의 생명이 존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의 생명이 다 존엄합니다. 짐승과 사람이 다른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불의하게 빼앗고 피를 흘린 사람은 반드시 똑같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살인죄는 사형으로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공의를 시행할 수 있는 주체는 국가나 정상적인 자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는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민 35:33).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사람이 피를 흘리지 않으면 그 땅은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민 35:31). 또한, 부자라고 살인한 뒤에 돈으로 해결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이거나 권력이 많은 자라도 남의 생명을 부당하게 빼앗은 사람은 동일한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인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살인죄가 고살죄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입니다. 죽이려고 하는 동기나 의도가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민수기 35장 16~21절을 보면 무엇이 고살죄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손에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였다면 그것은 고살죄입니다. 그리고 미움이나 원한을 가지고 사람을 밀쳤는데 죽었다면 그것도 고살죄입니다. 하지만 민수기 35장 22~23절을 볼 때 아무런 원한이나 미움이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쳤거나 돌을 던졌는데 맞아서 죽게 되면 과실치사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과실치사도 무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보수하는 자가 되어 과실치사자를 만나면 죽일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됩니다.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민 35:19).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흘린 죄가 없나니” (민 35:27). 보수하는 자가 과실치사자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하나님의 사랑만을 강조하다가 하나님의 공의를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실로 지은 죄든 고의로 지은 죄든 모든 죄에 대해서 정당한 형벌을 부과하실 권세가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어떤 죄든지 그 형벌은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육신의 사망을 형벌로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주장하려면 늙지 않고 죽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늙어 죽는다는 것은 아담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하여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신의 사망으로만 죗값이 끝나면 그나마 좋겠지만 육신이 죽고 난 후에 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죽은 후의 심판을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계 20:13~14). 우리의 죗값은 육신의 사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불못에 던져지는 둘째 사망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의로 지은 죄든 과실로 지은 죄든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는 사람은 결국 이런 죗값을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도피성 제도는 먼저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Ⅱ.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배분해주실 때 요셉에게는 두 몫을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기근으로 인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살려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한 몫씩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열두지파인데 요셉이 두 몫을 차지하게 되었으니 땅을 열셋으로 나눠야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가 큰 몫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져서 48개의 성읍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왜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느냐? 그것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아들들에게 예언할 때 레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창 49:7). 레위의 분기가 맹렬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중에 흩어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디나라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디나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위가 노하여 세겜 남자들에게 사기를 쳤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누이를 주겠다고 해놓고선 할례를 받은 남자들이 아파서 힘을 못 쓸 때 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야곱은 레위를 저주하게 되었고 그 결과 레위 지파는 48개 성읍만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레위도 누이를 겁탈한 자를 그냥 두는 것이 맞느냐며 정당방위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정당방위를 넘어선 과잉방위였습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게 주신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은 하나님이 도피성으로 지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팔 성읍을 주고 그들도 함께 주되” (민 35:6~7). 레위인들도 살인으로 인해 가나안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에 과실치사로 살인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받아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레위가 살인죄를 저질러 가나안 땅 전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기 때문에 레위인들에게 준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이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입니다.
사고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도피성으로 가는 길 외에는 살아날 방법이 없습니다. 여호수아 20장 1~6절을 보게 되면 과실치사를 한 사람은 도피성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자기가 저지른 사고를 고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장로들이 그의 말을 듣고 도피성에 들여 한 곳을 내어주고 먹을 것을 주며 보수하는 자가 와서 그 사람을 내어놓으라고 해도 내어주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회중 앞에서 살인자에 대해 자세한 재판을 합니다.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 재판하는 것입니다. 살인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과실로 살인했다는 것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보수하는 자가 와서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피성 밖으로 나가게 되면 보수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으로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그때는 도피성에서 해방되어 자기 집으로 가도 안전하게 됩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이 자기의 죽음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으로 간주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제도입니다. 첫째, 도피성은 요단강 동편과 서편에 세 개씩 있습니다. 왜 도피성을 동편과 서편으로 흩어놨느냐?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혐원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치 아니하나 두렵건대 보수자의 마음이 뜨거워서 살인자를 따르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미쳐서 죽일까 하노라” (신 19:6). 도피성으로 가는 길이 멀면 보수하는 자로부터 죽임을 당할까봐 어느 지파에서도 가깝고 쉽게 갈 수 있도록 흩어놓은 것입니다. 둘째, 도피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가는 곳이 아닙니다. 이방인도 가고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도 갈 수 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민 35:15).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타국인이나 여행객이나 어떤 사람이라도 과실로 죄를 범했을 때에는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도피성은 24시간 열려있었습니다. 닫혀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도피성 문 앞까지 와서 문이 닫혀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넷째, 도피성 안에는 과실치사자가 먹고 살 수 있는 음식들이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맞아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굶어 죽지 않도록 준비해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를 빈틈없이 만들어주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이십니까?
Ⅲ.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나은 도피성’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도 ‘더 좋은 도피성’(better refuge)이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히 6:18).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피난처에 피하여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우리 중에 의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가 있지만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피난처에는 용서가 있고 소망이 있고 안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피난처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용서하시겠다고 맹세하셨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분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성도가 피난처를 신뢰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좋은 피난처이십니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도피성보다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 10:6~7).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천국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8~10).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우리의 입술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면 그 즉시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오실 정도 만큼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며 도피성이시라는 것을 믿으면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과실로 지은 죄뿐만이 아니라 고의로 지은 죄까지도 공의의 심판에서 해방시키시는 도피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에는 과실로 죄를 지은 사람만 받아줬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의든 과실이든 큰 죄든 작은 죄든 모든 죄인들을 다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며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5). 아주 극악한 죄인까지도 구원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죄가 큰데 용서받을 수 있냐고 물어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받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무슨 죄가 있냐며 자신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은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왔느냐 밖에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어떤 죄라도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영구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사람은 아무도 내어 쫓지 않습니다. 용서가 있고 평안이 있으며 소망이 있고 영생이 있으며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죽긴 죽지만 다시 살아납니다.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둘째 사망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기 때문에 첫째 사망도 극복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셔서 그 날개 그늘 아래 피하러 온 성도들을 영원토록 보호해주십니다.
결 론
구약의 도피성 제도는 과실로 죄지은 사람에게 두 가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도피성 안으로 들어와야 됩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도피성에는 부자가 되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병 나으려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똑똑해지거나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죽지 않고 살려면 도피성으로 와야 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생명을 보존해주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대신 가줄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 아내가 교회 다니기 때문에 천국에 갈 때 아내 치맛자락 잡고 가겠다고 농담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렇게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녀도 저절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 본인이 들어와야 됩니다. 둘째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도피성을 떠나지 말아야 됩니다.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죄인된 인간에게도 두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는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피해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습니다. 각자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둘째 사망에서 건져주시는 나의 도피성이 되신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도피성 안에 영원히 거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 예수님을 믿게 되면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의 책임은 한가지로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초청된 여러분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됩니다. 하나는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었으니까 내 죄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받겠다고 한다면 영영한 불못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나도 죄가 있지만 불못에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 나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마련해놓은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의 한 분도 도피성 밖에 머물러 공의의 심판을 받으시는 분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아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섯 개의 도피성
민수기 35:9-15 / 피영민 목사
하나님은 민수기 3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업을 주시는데 애매모호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명백한 경계가 있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요단 강을 건너가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진정 우리에게 주실지, 주지 않으실지 고민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라는 확실한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그 곳에 들어가 살면서 지켜야 할 세 가지 규례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민수기 35장에 두 가지, 36장에 마지막 한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주의해야 할 세 가지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전거를 사주면서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은 민수기 35장에 기록된 두 가지 규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Ⅰ.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에 관한 규례(1~8절)
민수기 35장 1~8절까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8장 20~21절에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땅을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대신 십일조를 줄 테니 농업에 종사하는 다른 백성들처럼 먹고 살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십일조만 받아서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레위인들도 자식이 있으면 집에 살아야 하고, 가축이 있는 경우 들도 있어야 합니다. 집도 있어야 하고 땅도 있어야 하고 들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땅을 주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 평의 땅도 허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일절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레위지파에게 땅을 주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다른 지파들처럼 별도의 큰 땅을 허락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무 것도 주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대신 레위 지파 사람들은 다른 지파의 땅에 있는 성읍들에 들어가 섞여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이스라엘 땅 전역에 흩어 놓으셨습니다. 이유는 레위 지파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고 다소 난폭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 7절에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각 지파를 향해 예언하며 레위를 향해 나누어 흩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이 살던 밧단아람에 2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다시 고향 땅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을 때, 세겜이라는 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딸 디나가 그곳에서 세겜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세겜은 야곱에게 디나와 결혼할 수 있도록 간청했지만, 어차피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야곱은 할례 받지 않은 족속에게 딸을 내어 줄 수 없다며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래서 세겜의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3일 후,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와서 쩔쩔매고 있는 세겜의 남자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잔인한 것입니다.
야곱이 볼 때 이들을 한 군데 붙여 놨다가는 큰 일이 나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레위 지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이것은 도리어 레위 지파에게 큰 복이 되었습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을 흩어져 살게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갈등이 생겼을 때 재판도 해 주고 하나님이 백성들과 늘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물론 죄에 대한 심판 때문에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은혜로 심판을 덮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총 12개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는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습니다.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에게 각각 땅을 분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13개 지파가 땅을 분배하는 꼴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분배할 때도 임의로 나누지 말고 지파 별로 대표를 선정하여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땅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을 차지한 12지파는 분배받은 땅 가운데 레위인들이 살 수 있도록 성읍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넓은 땅을 차지한 지파는 많은 성읍을 주고, 좁은 땅을 차지한 지파는 비교적 적은 성읍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레위인들의 성읍은 이스라엘 전역에 48개가 있었습니다.
1개 성읍의 크기는 동서남북으로 이천 규빗이었습니다. 1규빗을 45cm로 환산하면 이천 규빗은 약 900m가 됩니다. 정사각형 모양의 성읍이었는데, 그 안에 집을 짓고 살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를 공간도 필요했기에 성읍 바깥쪽으로 동서남북을 향해 이천 규빗씩 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성읍 내 집과 성읍 바깥쪽 들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략 이 크기를 보면 우리나라 시골의 작은 동네를 연상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할 가나안 땅 전체 면적의 1%도 안 되는 작은 땅이었습니다. 약 10%정도 차지할 수 있는 것을 1%정도 주셨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레위인들은 이제 성읍에 흩어져 살면서 반차를 짜서 돌아가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성전의 일이 끝나면 다시 성읍으로 돌아와 살고, 또 순서가 되면 성전에 올라가 일을 하다가 내려오는 방식으로 성전의 직무를 교대하며 수행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주셨고, 땅도 주셨으며, 살 집도 마련해 주시고, 가축을 기를 수 있도록 들도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고하고 애쓰는 전임 교역자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받게 될 48개 성읍 중 6개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도피성’(City of Refuge)으로 지정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요단 강을 기준으로 동편에 3곳, 서편에 3곳, 도합 6개 성읍이었습니다.
Ⅱ. 도피성에 관한 규례(9~34절)
첫 번째 규례는 레위인들에게 48개 성읍을 주라는 것이고, 두 번째 규례는 48개 성읍 가운데 6개 성읍을 도피성으로 지정하라는 규례입니다.
민수기 35장 9~34절까지 도피성에 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데, 먼저 하나님이 도피성을 지정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5장 34절에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피성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 땅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람의 어떤 행위가 땅을 더럽히는 일이었을까요? 사람의 여러 가지 죄악 된 행위가 땅을 더럽힙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일은 ‘살인’입니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땅을 더럽히는 일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35장 33절에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사람은 돈으로 그 죄를 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야 죽은 사람의 피가 쏟아진 그 땅이 깨끗해진다는 의미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만 쏟아지고 죽인 사람의 피가 쏟아지지 아니한 그 땅은 더러운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그 땅이 깨끗한 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권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살인자의 인권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니라, 살인자의 손에 죽은 사람의 인권을 보호하는 분이십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이지, 죽인 사람의 인권은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부르짖습니다. 그래서 살인자를 살려주는 것도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죽인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인권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타인을 살해하는 것은 인간을 향해서도 중차대한 범죄이지만,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매우 심각한 범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짐승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소나 개, 돼지, 양과 같은 동물들을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물론 다 잡아먹는 것이 꼭 옳은 일인 것은 아닙니다. 건강에 해롭거나 먹지 않는 것이 좋을 동물들도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큰 일 납니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타인을 죽여서도 안 되고 피를 흘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살인은 하나님의 형상을 업신여기고 땅을 더럽히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행위입니다.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않으려면 명확한 규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살인을 똑같이 취급하지 않으신다는 것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고의로 살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살인 사건에 동일한 형벌을 부과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35장에도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고살자’(Murderer)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살이라고도 하고 모살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을 죽인 모살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했습니다. 증인 두 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면 고살자는 반드시 그 생명을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더라도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 판결을 내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동네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이미 증언을 한 사람과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를 재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세 사람의 증언을 듣고 일치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손에 철 연장이나 나무 연장을 들었거나 죽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나 원한 때문에 죽였거나 어떤 물건을 던져서 죽였거나 밀었거나 해서 죽으면 그 사람은 고살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이 고살인 것은 아닙니다. 살해할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과실로 인해 사람을 죽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과실치사라고 합니다. 민수기 35장 22~23절에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무를 찍다가 도끼날이 빠져 옆 사람을 향해 날아가 맞아 죽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자동차 운전을 하는데 급발진이 나서 앞에 있는 사람을 치어 죽인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 과실치사입니다. 이런 경우 도피성으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전케 하신 것입니다. 과실치사의 경우 도피하여 죽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입니까?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12절에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보수할 자’로 번역된 영단어 ‘Avenger’는 ‘대신 복수해 주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보수할 자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도 하는데,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이 ‘고엘’이라는 사람이 하는 네 가지 역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떤 사람이 상속받은 땅을 가난에 못 이겨 다른 사람에게 매매한 경우, 가까운 친척(고엘)이 땅을 사간 사람에게 돈을 지불하면 그 땅을 도로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기에도 보면 이것이 ‘기업 무르기’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은 한 번 팔은 땅을 다시 찾아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고엘이 기업을 무르는 경우 땅을 되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고엘은 ‘기업 무를 자’라고 불렀습니다.
둘째는 어떤 사람이 노예로 팔려간 경우가 있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없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지면 자기 몸을 팔아서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 고엘이 돈을 가지고 가서 노예로 들인 사람에게 돈을 주고 친족을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고엘을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로 어떤 사람의 형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동생이 홀로 남은 형수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첫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형의 아들로 호적에 올려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비록 동생과 낳은 아들이지만, 형의 아들이 되어 형이 받을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동생을 고엘이라고 했고, ‘계대 결혼자’라고 불렀습니다.
넷째로 가까운 친족이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한 경우 억울하게 죽은 친족의 복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19절에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친척이 남의 손에 죽은 경우 가까운 친척이 살인자를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형법시스템이 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를 보수할 자(고엘)가 공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실치사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도망간 경우 보수할 자는 과실치사자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고살자는 도피성으로 피해도 소용이 없었지만, 과실치사자는 달랐습니다. 피를 보수할 자가 함부로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재판을 정당히 받을 때까지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실치사자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첫째,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속히 도망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 도피성 안에 있어야 합니다. 함부로 나왔다가는 보수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회장 앞에서 판결을 받고 고의가 아니었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죽임을 당한 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원한이 있는지 없는지 살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입증되면 보수자는 과실치사자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 대신 도피성 안에만 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도피성 안으로 들어갈 때 대제사장 직무를 수행하고 있던 사람이 죽게 되면 도피성 안에 있던 과실치사자도 해방되어 도피성에서 나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과실치사자도 살인죄에서 해방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곳을 나올 수 없습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으로만 갚아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것이 과실치사자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살인죄에서 벗어나 완전한 해방과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Ⅲ. 도피성 규례가 갖는 현대적 의미
그러면 이러한 도피성에 관한 규례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도피성이 갖는 현대적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도피성을 통해 어떤 사람이라도 한 생명의 가치를 결코 소홀히 여기지 말 것을 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의 생명을 업신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죽인 사람은 하나님도 그의 생명을 업신여기시고 죽음의 형벌을 가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진화론의 영향을 지나치게 많이 받아 인간의 가치를 벌레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진화론은 원숭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원숭이가 사람을 낳았다는 말을 여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대진화를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은 이런 가설들을 주장하는데, 결국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일이나 벌레 한 마리 죽이는 일이나 똑같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생명의 가치를 벌레가 갖는 가치만큼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식해 보이지만 마귀에 홀린 사람들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화론에 많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사람 죽이는 것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합니다. 소위 ‘신세계 질서’라는 것을 부르짖는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앞으로 인구를 5억으로 줄이기 위해 5억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얼마나 사람의 생명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인간 생명을 벌레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 장기 밀매를 위해 사람을 납치해 간다는 것도 이미 뉴스나 신문지상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사람의 몸을 장기 이식하는 부속품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속품을 빼고나면 나머지는 갖다 버리는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전혀 없는 일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외국 여행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잡히면 장기 적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사회인지 모릅니다. 모두 사람의 생명을 천시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사람 보기에 무식하고 비천한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두셨습니다.
둘째, 사회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살인한 사람에게 사형제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형법 250조에 보면 살인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지키지 않습니다. 살인을 해도 판사들이 징역 2년, 3년의 판결을 내립니다. 형벌이 가볍다보니 살인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나누는 과정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부부싸움, 층간 소음 문제나 주차를 하다가도 이웃사촌 간에 살인사건이 벌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는 살인죄에 대해 사형제도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집행된다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럼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법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정통치국가인 이스라엘의 법을 대한민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다만 생명은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에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9장의 기록은 아브라함이나 모세가 태어나기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사회적인 관점에서 살인죄에 대해 사형제도가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신앙적인 관점에서 도피성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하는 부르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살인죄를 범한 죄인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죄로부터 완전히 무죄한 존재들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를 진 것이고, 사람을 미워만 해도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원리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가’는 ‘멍텅구리’라는 의미입니다. 형제를 향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지옥 불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형제의 인격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막말과 욕설을 하는 사람은 살인죄의 형벌과 다름없는 지옥불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이런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문자적으로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이 죄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도피성으로 피해야 합니다. 그리고 도피성 안에 늘 거해야 할 존재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지옥불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에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으로 간주되어 우리는 모두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고 영원한 복을 누리게 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 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엘이십니다. 우리의 죗값을 심판하시는 심판주가 되십니다. 피의 보수자이십니다. 피의 보수자가 되시는 예수님이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죗값을 대신 다 갚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 우리의 죽음으로 간주되어서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민수기 35장은 언뜻 읽으면 얼른 와 닿지 않는 이상한 규례들 같아 보여도 명백한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받으심으로 내가 복을 누리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나는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은 피의 보수자이시면서 아울러 우리의 구속자가 되셨다는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도피성이시고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 예배를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겠다고 작정하시고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예배를 하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시겠지요. 그러나 결국 자기 손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속자요, 도피성이 되십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저주에서 해방되고 축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하라
민 35:9-15 / 박기완 목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간이나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인하여 그 고통의 땅 애굽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계속하여 잘 사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율법을 어기면 엄히 다스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살인자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라고 엄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있을 수 있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은 사람 가운데는 죄도 없는데 무고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애매히 누명을 썼다거나 그 정황을 보면 매우 억울한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였으니 반드시 그 사람도 죽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도 문제의 해결책을 주셨는데, '도피성'을 만들어 피할 길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도피성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도피성이 무엇을 뜻하는지 살펴보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할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진리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도피성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도피성은 말 그대로 도망하여 피하는 곳입니다. 이곳은 오살자의 피난처입니다. '오살자' 란 자기의 뜻이 아니라 실수나 과오로 인하여 사람을 죽인 사람을 가르켜 성경은 오살자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때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데도 결과적으로 살인을 하게 되는 경우가 간혹 발생합니다. 이것을 세상 법정에서는 과실치사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생긴 살인은... 살인은 살인이지만 고의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통위반 특례법'으로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도 실수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을 특별히 다루는 것입니다.
교통사고 외에도 연탄가스 중독이나, 건물이 붕괴되고 다리가 붕괴되는 사고 등의 경우처럼... 본의 아니게 남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는 참 많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도피성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이는 무고히 오살한 자, 즉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피신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신19:5절 말씀에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그로 죽게함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또한 민35:22-25절 말씀에서도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 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 했습니다.
즉, 우발적인 사고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 살인자가 피신하여 살 수 있는 장소와 방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나 가족이 손해를 입고 상처를 받으면 쉽게 감정대로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동기나 과정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결과만 가지고 흥분하고 화내고 보복하려 합니다.
나 자신이 잘못 했을 때는 "모르고 그랬습니다, 실수로 그랬습니다, 고의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이해와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실수나 고의성이 없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주 다르게, 동기나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만 가지고 무섭게 대응하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삼한(三韓)시대부터 아질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질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 오살자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하면서 가혹한 복수를 하려는 사람이나 그런 형벌을 피하고자 어느 일정한 장소에 숨어 있으면 법적으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신성한 도피소를 말합니다.
마한(馬韓)에는 나라마다 별읍(別邑)이란 게 있었습니다. '별읍'을 다른 말로는 '솟대'라고 했는데, 방울과 북을 단 큰 나무를 세워서 그 영역을 표시하고 큰 죄를 지은 사람이나 쫓기는 이웃 나라 사람이 이곳에 숨어들면 보호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복수를 피해서 아질에 숨어 시간을 벌면, 그동안에 화도 가라앉고 또 속죄금(贖罪金)으로 흥정을 하는 등 화해의 시간을 벌어서 극악한 살상을 면케하는 사법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질의 관습은 서양에도 있었는데 프랑스에서는 1539년에, 영국에서는 1642년에 폐지되기까지, 그리고 독일에서는 18세기 후반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도피성도 아질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다 분배받은 뒤에 요단강 양쪽에 3개씩의 도피성을 지정하라고 하셨습니다.
3절에 보면 '부지중 오살한 사람' 즉, 실수로 우연히 사람을 죽게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하여 감정적으로 즉각 보복하고자 하는 사람들로부터 이 도피성으로 피하도록 했습니다.
창 9:5-6에 보면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고의로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죽여서도 안되지만, 고의로 죽이지 않았는데 단지 복수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여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전혀 뜻하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때도 있고 심지어 사람이 죽는 경우도 발생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결과만 가지고 흥분하여 보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만 보시지 않고 동기도 보시고 그 과정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만약 그 동기에 고의성이 없었다면 분노하는 보복자로 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도피성의 제도는 몇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먼저는 무고한 오살자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무고히 사람을 죽인 자가 보복을 당하여 다시 죽임을 당하는 것은 생명을 함부로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은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무고한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뿐만아니라, 도피성의 제도는 정확한 판결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35:12절 말씀에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했습니다.
또한 도피성의 제도는 언약의 땅을 더럽히지 않기 위함입니다.
민35:34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 했습니다.
복수의 피는 또다른 복수의 피를 낳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마다 복수를 하게 되면 언약의 땅을 더럽히는 것이요, 이는 하나님의 뜻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도피성을 만들되 6군데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동쪽에 3군데, 서쪽에 3군데, 모두 6군데에 도피성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셔서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구약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 도피성으로 인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시대의 도피성은 신약시대에 와서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피성에 들어오는 자마다 생명의 보호를 받고 건짐을 받듯이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보호를 받으며, 영생하게 된다는 진리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도피성이 그림자라고 한다면 신약의 예수님은 실체인 것입니다(히10:1).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더 완전하고 더 확실한 피난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피성은 이스라엘의 요단강을 기점으로 하여 48개의 성읍 중에 6곳을 택하였는데, 요단강 동편에 베셀, 길르앗라못, 골란 이 3곳을 정했고, 요단강 서편에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 3곳을 정하였습니다(수20:7-8). 이스라엘이 12지파인데, 2지파에 한 군데씩 6군데를 만들어 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도피성의 제도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무엇을 뜻하며, 또 이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도피성'의 제도를 통해서 영원한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구약의 많은 부분들이 그러하듯이 도피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피성' 제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1. 먼저, 어디서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항상 성소로만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업으로 받은 땅들 가운데, 각기 중앙에 '도피성'을 만들어서 어디서든지 쉽게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경우,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쉽게 '도피성'을 찾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로 해석해 볼 때, 여러분의 도피성은 어디이겠습니까?... 산본지역 근방에 사는 사람은 '산본성광교회'가 도피성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도피성은 멀리 있어서는 안되고 빨리 도망하여 피할 수 있는 제일 가까운 곳으로 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도피성'을 잘 보이는 높은 산지에 두게 하셨는데, 이는 누구나 '도피성'이 있는 곳을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신 특별한 배려였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가는 길은 항상 잘 닦여져 있어야 했습니다.
신 19:3절 말씀에 보면 일년에 한번씩 모든 백성들이 나와서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았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그곳으로 피할 수 있게 했고, 가장 짧은 시간에 도피성에 도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한 번 가기 위해서 그것도 차를 타고 1시간 이상을 소비한다고 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가까운 곳에 자신의 도피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가서 도피성을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고 위배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로 대형교회들이 성도들을 모으기 위하여 너무 먼 지역까지 차량을 보내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겠습니다. 서울에 있는 교회가 분당이나 과천, 안양, 산본까지 차량 운행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주일 낮에만 서울에 있는 교회를 가고 나머지 주일저녁이나 수요예배, 새벽기도회는 모두 가까운 지역에 있는 교회를 다닙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을 보면 소속감이 없이 나태하고 안일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성도의 영적 성장에 치명적인 저해를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자기의 도시 지역을 벗어나서 다른 도시까지 차량을 운행하는 교회를 보면서 "과연 저 교회는 기독교적인 양심이 있는가? 저 교회 목사님은 목회자적인 양심이 있는가?", "성경에 나타난 도피성의 의미를 아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도들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면 그 지역에 좋은 교회를 추천해 주어서 성도로 하여금 그 지역에서 마음놓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서적인 의미나, 여러모로 생각해 보아도 도피성은 제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건물에 교회가 2∼3개씩 마구 들어서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안 믿는 세상 사람들이 더 비판하는 사실입니다.
누가 나중에 들어 왔는지 모르겠지만 목회자적 양심이 없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잠23:10, 잠22:28).
뿐만아니라, 도피성은 봄마다 그 길을 보수하고, 물이 흐르는 곳에는 다리를 놓고, 갈래길이 나오면 '도피'라는 표지판을 세워서 누구든지 쉽게 길을 찾도록 했습니다.
물론 글자도 크게 써서 달리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달려가다가 서서 읽어야 되고, 그렇게 지체하다가는 죽임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잘 갈 수 있도록 여러 모양으로 도와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누구나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도피성은 오로지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뿐만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제도였습니다.
15절 말씀에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피성'이 유대인이나 헬라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또한 남녀노소, 빈부귀천, 피부,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 부지중에 살인한 자, 오살자는 절대로 '도피성'을 떠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26-27절을 보면,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 라고 했습니다.
즉, 도피성으로 피한 사람은 반드시 그곳에만 머물러 있어야지 그곳을 떠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도피성 안에 있을 때입니다. 그곳을 이탈하거나 빠져 나오면 보호를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도 영원한 도피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행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도피성인 것입니다.
4. 도피성의 제도는 죽음을 통해 완전한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항상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죄책감을 느껴 동산 숲에 숨어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불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마리의 양이 죽어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이는 성경 최초로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구속의 원칙을 암시해 주는 사건입니다(히9:22).
그 이후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생활을 하면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계속하여 짐승의 피를 흘려 죄 사함을 받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즉, 죄를 지을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 그 제물을 죽이고 그 피를 제단에 뿌림으로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속죄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죄를 지을 때마다 계속하여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짐승의 피는 예수그리스도의 피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죄사함을 받았다면 예수님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인하여 어찌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히9:14)
바로, 이런 '죽음을 통한 구속의 원칙'이 바로 '도피성' 제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수20:6절 말씀에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 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하고 '도피성'에 숨어있던 죄인이 완전히 구속받아 자유로운 몸이 되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인데, 바로 대제사장이 죽는 길 뿐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을 때 도피성에 피해 있던 죄인은 비로소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되어 자기가 속해 있던 사회로 돌아갈 수 있고, 옛 기업도 회복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대제사장의 죽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징이요, 모형입니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피하면 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우리들을 숨겨주는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죄의 짐을 친히 대신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시요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만이 참 생명이시요 산 소망이 되시는 것을 알고... 저 천성을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힘껏 달려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도피성으로 피하라!' 는 말은 다른 말로 '교회로 피하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도피성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시대의 가장 위대한 도피성은 교회이고 우리는 교회로 피신해 온 죄인들입니다.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참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도피성은 죄인들이 모인 장소입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생명의 보호를 받는 곳, 이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단체가 아닙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교회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죄인들이 모여있는 곳이며, 여러 가지 문제와 염려에 사로잡혀 흉한 모습 그대로 오게 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은 예수님의 피로 자유함을 받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왕 같은 제사장이요, 가장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비싸게 사셨기에 우리 모두가 서로 서로 귀하고 존중해야 할 지체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달픈 인생 길을 살아가십니까?.... 고통과 고난의 인생 길이라도 도피성에 들어오시면 구원함을 받는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산본성광교회가 그런 역할을 잘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산본성광교회라는 이 도피성에 오셔서 마음껏 부르짖고 찬양하고 기도하므로...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믿음의 권속들은 참된 도피성되신 예수 안에서 참된 위로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며... 승리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하라
민 35:9-15 / 피영민 목사
서 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제도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용을 하시고 시간이 지나면서 점진적으로 폐지하신 제도입니다. 하나는 유대인 족장들의 일부다처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는 에덴에서 분명히 일부일처제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유대인 족장들에게 일부다처제를 허용하신 것은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시적으로, 잠정적으로 허락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두 번째는 피에 의한 복수 제도입니다. 옛날에는 오늘날처럼 경찰제도가 없었습니다.
검사도 없고 판사제도도 제대로 정립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국가가 질서 있게 조사를 하고, 재판을 하며, 형을 집행하는 제도를 갖출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는 ‘친족 무르기’ 혹은 ‘기업 무르기’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이는 국가의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가족을 보호하고 공의를 시행하는 제도였습니다. 친족 무르기라 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친족이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당했을 때에 그 친족을 도와서 원상을 회복시키는 제도입니다.
친족 무르기는 대체로 네 가지 경우에 적용되었습니다. 첫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노예로 팔렸으면 가까운 친족이 그 빚을 청산해주고 노예에서 해방해주는 경우였습니다. 이때에 그 노예를 산 사람은 “나는 돈을 받지 않고 이 노예를 해방시키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로 친족이 빚에 몰려서 땅을 팔았을 때, 그 가까운 친족이 빚을 갚아주고 땅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주는 경우입니다. 첫째의 경우처럼
그 땅을 산 사람도 “나는 이 땅 다시 팔지 않겠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친족이 후손이 없이 죽은 경우 죽은 친족의 아내를 취해서 자손을 낳고 그 중 첫 아들을 죽은 후손의 대를 잇도록 하는 경우입니다. 이를 소위 계대결혼(繼代結婚)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신명기 25장 5-6절까지를 보면 형님이 결혼을 했는데 죽어서 아내가 혼자되었을 경우, 아우가 형수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자식을 낳아 그 맏아들을 형님의 아들로 입적시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넷째로 친족이 살인자에 의해 죽었을 때, 가까운 친족이 복수를 해주는 경우입니다. 이 사람을 ‘피를 보수(報讎)하는 자’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보수보다는 복수라는 단어가 이해가 더 쉽습니다. 우리가 흔히 원수를 갚는다고 할 때에 ‘복수한다’는 표현을 쓰지만 영어에서는 ‘revenge’라는 단어와 ‘avenge’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개념을 명확히 구분합니다. 감정을 가지고 사람에게 복수한다는 표현은 ‘revenge'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감정을 가지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동일하게 피를 흘려서 공의를 시행한다고 할 때에는 ‘avenge’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피를 보수하는 자’는 ‘avenge’의 의미에서 원수를 갚아주는 것입니다.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고자하는 의도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사형 제도가 생명을 경시하는 것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성경에서 살인자를 죽이라고 명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의도가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존중하고 무죄한 피를 흘림으로써 더러워진 땅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민수기 35장 33절에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서 피가 흘려지면 그 땅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더럽혀진 땅은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살인한 사람의 피를 반드시 흘려야 그 땅이 깨끗하게 되고, 공의가 회복되며, 생명존중 사상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개인이 복수하고 피를 흘리는 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가 제도화되어서 사법제도를 가지고 이를 시행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니 가까운 친족이 복수하라고 되어있다. 그러므로 내가 우리 친족의 억울함을 복수해야 되겠다”고 말하지 마세요. 이것은 그 옛날 국가 제도가 미비한 시대에 하나님의 자구책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인했다고 할지라도 모두 똑같은 동기와 목적으로 살인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자, 즉 보수하는 자가 죽일 수있는 대상은 고의적으로 살인을 한 살인자입니다. 고의성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경우에만 보수하는 자는 그를 죽일 수 있었습니다. 민수기 35장 31절에도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경우에는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의도가 없이 과실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과실치사도 죄는 죄입니다만 그런 경우에는 고의적으로 죽이는 경우와 달리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19장 5절에 기록된 것처럼 산에서 벌목을 하는 도중 그만 도끼가 자루에서 빠지는 바람에 이웃이 죽게 된 경우입니다. 물론 기업 무르는 친족, 즉 피를 보수하는 사람은 고살자(故殺者)이건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이건 가리지 않고 복수하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리 과실 일지라도 사람이 죽었는데 가해자에게 원수를 갚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원시적인 사법제도 하에서라고 할지라도 과실치사자는 보호하는 제도를 두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도피성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1. 도피성 제도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두신 목적은 본문 11-12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도피성은 어떤 사람이 그릇 살인하거나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경우에 재판을 받을 때까지 생명을 보호받기 위해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던 것입니다. 살인자가 도피성에 오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그 살인자를 놓고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판사 한 사람이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로와 회중들이 모여 배심원단을 형성을 한 후, 그 사건을 듣고서 판결을 내렸습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사법제도에도 배심원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판사의 판결을 100% 신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배심원 제도를 시행하는 미국은 판사 혼자서 재판을 하지 않습니다. 배심원들이 사건을 자세히 듣고 결정하는 대로 판사가 재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장로와 회중들이 배심원이 되어서 살인사건을 재판을 할 때에도 아무런 기준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살인자인지, 과실치사자인지에 대한 재판의 기준이 분명히 제시되었습니다.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 만일 사람을 죽일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35:16)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35:19-21)고 했습니다. 고살의 기준은 손에 철 연장이나 돌, 나무 연장을 들었을 경우, 혹은 맨손이더라도 미움이나 원한을 가지고 있어서 밀치거나 무엇을 던져 죽였을 경우입니다.
그런 사람은 도피성으로 들어오더라도 재판을 거쳐서 유죄판결이 나면 피를 보수하는자에게 그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국가가 사형을 집행하지만 옛날에는 국가에 그런 제도가 미비했기 때문에 피를 보수하는 자, 즉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에게 사형을 집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22-25절을 보십시오.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사람이 원한이 없거나 우연히 기회를 엿봄이 없이 살해를 했다는 것은 그냥 장난으로 돌을 던졌는데 사람이 맞아 죽었다 이런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는 고살이 아니기 때문에 도피성 안으로 돌려보내서 도피성 안에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도피성 안에 사는 것도 일종의 형벌입니다. 다른 곳으로 나갈 수가 없기때문에 금고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다른 곳으로 나갔다가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를 만나서 죽여도 죄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 사람은 도피성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도피성 안에서 살게 되면 가족도 만날 수 없고, 사업을 운영할 수도 없고, 밖으로 나갈 수도 없으니까 안전할지라도 형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과실치사도 죄가 되기는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도피성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요?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날 때의 대제사장이 살아있는데 그 분이 일 년 만에 돌아가시면 일 년 만에 도피성에서 해방이 되고, 그 대제사장이 30년 후에 돌아가시면 삼십년 동안 도피성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의 소원은 ‘대제사장님이 빨리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이 해방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것은 과실치사도 죄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의 피가 흘려지고, 그가 죽고 난 후에야 속죄가 된다는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대제사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흘려져야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도 해방이 된다는 복음입니다. 대제사장이 죽고 난 후에는 도피성에서 나와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아무도 그를 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 바로 도피성 제도입니다.
이 도피성은 네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도피성은 레위 지파의 성읍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열 두 지파에게 땅을 나눠줬습니다. 그러나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큰 땅을 배분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고 적게 받은 사람은 적게 내놓고 해서 마흔 여덟 개의 성읍을 레위 지파의 성읍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 사방 이천규빗의 들판도 레위 지파 사람들의 가축을 먹일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이마흔 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을 하나님께서 도피성으로 지정하셨습니다. 요단강 동편에 세 개, 그리고 요단강 서편에 세 개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피성은 원래 제사장의 성읍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억울한 사람들을 돌봐주도록 지시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는 상심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낙심한 사람들, 죄로 말미암아 고통당한 사람들이 몰려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새 힘을 얻어 해방 받고 구원의 은총을 체험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도피성 제도는 실수로 사람을 죽인 억울한 사람들을 제사장들이 보호해주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둘째로 도피성은 접근하기 쉬운 곳에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도피성을 마련하셨습니다. 신명기 19장 3절과 6절에 도피성으로 가는 도로를 잘 닦아놓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중간에 강이 있으면 다리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겨울이 지나면 도로가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봄이 되면 장로들이 돌아보고 그 망가진 곳은 다 고치도록 했습니다. 만약 삼거리가 나오게 되면 삼거리에 큰 표시를 해두어서 도피성이 어느 방향인지 정확하게 표시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가는 길이 멀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도피성이 있는데 중강진에 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면 부산에서 죄를 지은 사람이 중강진까지 도망하다가 그만 가기도 전에 피를 보수하는 사람의 손에 잡혀서 죽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하룻길만 가면, 혹은 반나절만 가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문은 24시간 항상 열어놓아서 언제라도 누구든지 바로 바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실수로 살인을 했는데 뒤에서 보수하는 자가 망치를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보세요. 간신히 도피성에 도착했는데 문이 닫혀있다면 그만 도피성 문 앞에서 죽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문을 언제나 열어놓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도피성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35:15)고 기록되었습니다. 도피성을 이용하는 데는 민족의 차별이 없다는 말입니다. 유대인도 들어갈 수 있고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넷째로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셔서 안전을 보장해 주시는 곳입니다. 도피성이 안전한 이유는 담이 높아서나 땅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아무도 손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2.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
도피성은 과실치사범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도피성의 영적인 의미는 분명합니다. 죄인들이 피하여 구원받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라고 하는 증거가 성경에 있을까요? 물론 ‘도피성은 예수님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8)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를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사람들, 즉 지금 도피성으로 피하여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로 표현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즉 나의 도피성이라고 노래했습니다.
물론 도피성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과실치사자만을 보호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께 피하는 자들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를 영원히, 그리고 완전히 용서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도피성이시지만 구약시대의 도피성보다도 더 우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마음에 평강이 없기 마련입니다. 율법이 보수자가 되어 죄인들을 쫓기 때문입니다. “야! 너 죄지었지? 살인했지? 간음했지? 도적질 했지?”하면서 따라옵니다. 뿐만 아니라 마귀도 쫓아옵니다. “너는 내 종인데 어딜 가려고 하느냐?”고 하며 쫓아옵니다. 율법이 쫓아오는 사람에게는 참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죄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도피성이 되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 10:13)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한나절 거리에 있는 도피성으로 들어갔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주 예수여! 내가 죄로 말미암아 마음에 평강이 없습니다. 나를 용서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기만 하면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그 곳에는 아무런 차별도 없습니다. 로마서 10장 12절 말씀대로 유대인이나 헬라인의 차별이 없이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신 것입니다.
3. 어리석은 네 종류의 사람
어떤 한 사람이 고의가 없이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보수하는 자, 즉 그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지금 도끼를 들고 쫓아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 만약 이 사람이 이렇게 행동을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내가 비록 살인은 저질렀지만 할 일도 많으니까 내일 도피성으로 가야 되겠다. 오늘 집에 들러서 아내에게 인사도 하고, 친척들에게 인사도 하고, 그동안 먹고 싶었던 것도 좀 먹고 가야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 사람은 집에서 식사하다가 도끼가 날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째로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24장 25절에 나오는 총독 벨릭스가 바로 이런 어리석은 인물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의 복음을 들은 독 벨릭스가 바울에게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시방은 가라” 시방은 지금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틈이 있으면 부를 테니 지금은 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마 총독 벨릭스가 나중에 다시 바울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기를 주저하고 뒤로 미루십니까? 어떤 분들은 죽기 바로 직전에 믿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기 5초전에 믿을 수 있을지 어떻게 확신합니까? 예수 믿는 것을 뒤로 미루는 것은 도피성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 우물쭈물하다가 보수하는 자에게 결국은 생명을 빼앗기게 되는 어리석은 행동과 같은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입니다.
둘째로 도피성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 총합 여섯 개의 도피성을 분명히 만들어 놓으셨는데 도성이 없다고 하는 자도 진실로 어리석은 자요, 앉아서 죽겠다고 하는 사람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해서 그대로 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 때문에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고 슬퍼한다고 해서 구원자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죄에서 해방하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도피성이 아니라 엉뚱한 도시로 피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루살렘이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리로 가면 그는 보수하는 자의 손에 죽게 될 것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도피성으로 해야 합니다. 그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부처도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는 도피성이 아닙니다. 마호메트도 탁월한 정치가이며 종교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호메트도 도피성은 아닙니다. 공자와 맹자는 얼마나 탁월한 학자입니까? 공자와 맹자의 글을 읽으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지혜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도 도피성은 아닙니다. 그리로 피하는 사람은 영원한 사망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신 줄로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이외에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도피성으로 피해봐야 아무 효력이 없는 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하겠습니다.넷째로 죽을죄를 짓고도 죄를 부인하고, 심판을 부인하며, 하나님을 부인하며 희희낙락하는 사람도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목에 칼이 들어왔는데도 “내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죄에 무슨 심판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며 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결 론
인간은 율법의 추격을 당하고 있는 죄인입니다. 율법은 계명을 들이대면서 우리를 쫓아옵니다. 마귀도 옆에서 같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율법의 추격을 받고, 마귀의 추격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시고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피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보수하는 자가 죽일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영원한 사망, 지옥의 형벌을 조만간에 당하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 교회가 장례를 여러 번 치렀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을 믿고 돌아가신 분들이 천국 가셨다는 증거를 하나님께서 다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님은 돌아가시기 3일 전쯤에 깨어나 평온한 모습으로 “천국에서 하나님이 날 부르신다”고 간증 하시면서 평안하게 천국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래서 그 자손들이 더욱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헌신하며 믿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오를 다지게 된 것입니다.
도피성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육신이 사망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망해서 지옥에서 영영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나는 그런 소리 못 들었습니다”라고 핑계 댈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서 들으셨기 때문입니다. 행여여러분이 지옥에 간다 해도 저는 여러분의 피에 대해 책임이 없습니다. 오늘 확실하게 증거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용서가 있고, 보호가 있고, 안전이 있고, 돌보심이 있고,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도피성 안에 들어와 있으면 벌벌 떨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두려워 할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분이 하도 뱃멀미를 심하게 하니까 선장이 와서 위로를 합니다. “여보오. 뱃멀미하다가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걱정 마시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성질을 내면서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그 소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당신이 나보고 죽지 않는다고 하니 그런 소리 마시오.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도리어 나의 소망이요”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피성 안에 있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살면 좋고, 죽어도 더 좋은 것입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도피성은 없습니다. 죄가 있어도, 근심이 있어도, 절망이 있어도 도피성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죄가 있고, 평안이 있고, 소망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도피성 되신 예수님 안에 살기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한 도피성 바깥에 있는 사람들, 죄를 짓고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끌어 도피성 안으로 인도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