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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임금이 홍국영을 얼마나 믿고 의지했는지를 알 수 있어요..
거의 이건 연서 수준이라구 ㅋ
거의 정조의 대부분이 홍국영의 문안을 바라는 글이라는거 ....
홍국영이 너무 튕기신 듯....
암튼 이렇게 의지하던 신하를 내칠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나구 ㅠ.ㅠ
안타까운 인연들인거 같아요.
끝까지 세도를 부리지 않고 정조 옆에서 개혁을 도와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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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6일(정미)
행 도승지 홍국영이 상소하여 치사(致仕)를 청한 데 대해, 비답을 내렸다.
홍국영은,
“오늘은 바로 신이 처음 조정에 나와 전하를 만났던 날이고, 또 물러나기를 청하여 전하께 하직하는 날입니다.
지척의 연석에서 다하지 못한 말이 많기에 지금 또 탑전(榻前)에서 밀부를 바치고 한강 밖으로 돌아와서 만번 죽을 것을 무릅쓰고 다시 진달합니다.
신의 나이 올해 32세입니다. 몸소 나라의 정사에 참여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가문이 매우 번성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맑은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이와 같고 사사로운 가문에서 복을 받은 것이 이와 같으니, 집안이 어찌 무사할 수 있겠으며 나라가 어찌 그 근심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신의 이러한 거조를 보는 자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 저 사람이 필시 나라에 죄를 지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마는, 저 잗단 사람들이 어찌 신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오직 성상께서는 이해하여 살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특별히 신에게 삼자함(三字銜)을 내려주시어 끝까지 은택을 입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도성 문을 한 번 나오자 임금의 모습이 곧 멀어지니 신의 그리워하는 마음은 마치 아이가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같습니다.
종이를 대하자 목이 메어 무어라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하였다.
내가 비답하기를,
“이전의 천고(千古)와 이후의 천고에 누군들 우리와 같은 임금과 신하로서의 만남이 있겠는가. 내가 이미 순(舜) 임금과 우(禹) 임금 같이 밝지 못하고 경이 후직(后稷)과 설(契)처럼 어질지는 못하지만, 그 만남을 돌아보면 천 년에 한 번이나 있을 법한 기회를 만나 심려(心?)를 의탁하였으니, 혹 옛사람과 비교하더라도 그 신의(信義)는 거의 부끄러울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중하게 의탁하고 전적으로 위임하여 지금까지 4년이 되었다.
아, 을미년(1775, 영조51) 동짓달 강석(講席)에서의 이야기와 이듬해인 병신년 3월 여차(廬次)에서 아뢴 말,
작년 6월 가례(嘉禮) 때의 말은 실로 모두 경의 간절한 속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지만 나는 울면서 만류하였다.
그런데 유독 경이 오늘 청한 데 대해서만 내가 곧 울면서 윤허하였으니, 어찌 전에는 윤허를 아끼다가 후에는 따르는 것이겠는가.
오직 나의 마음은 경만이 알 것이고, 오직 나의 뜻은 경만이 이해할 것이다.
내 어찌 차마 많은 말을 하여 말세의 거짓된 풍조를 본뜨겠는가.
아, 경의 말은 곧 나의 말이다.
내가 애써 경의 청을 따라 준 뜻을 알려면 모름지기 경의 소장을 읽어 보아라. 그러면 거의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일전에 새 재상의 선발이 경의 집안에 미쳤던 것 또한 어찌 범연한 뜻이었겠는가.
어찌 세도(世道)를 책임지울 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을 염려하겠는가. 말 밖의 뜻을 경은 묵묵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또한 생각건대, 세상에서 우리 사이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오늘의 일을 보고 오늘의 일을 들으면 반드시 무어라 무어라 할 것인데, 이러한 뜻을 경의 상소에서도 이미 언급하였으니, 일반적인 뜻과 생각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또한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그 사이에서 동요하겠는가.
다소간의 말은 선마(宣麻)하는 날 경의 상소에서 청한 것을 따라 주면서 말할 것이니,
경은 잘 이해하라. 아, 말이 이에 이르니 비답에 임하여 근심스런 마음을 가눌 수 없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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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7일(무신)
전 숙위대장(宿衛大將) 홍국영(洪國榮)에게 하유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경의 어제 요청을 허락한 것이겠는가. 내가 어찌 차마 경의 어제 요청을 허락한 것이겠는가. 겉으로 본다면 우리 사이에 경이 한 번 상소하여 물러나기를 고하자 내가 곧 응하여 허락한 것은 거의 남들이 평소 헤아리던 것과는 동떨어진 일이었다.
아, 내가 비록 신의(信義)를 남들에게 베풀지 않았지만 내가 경에 대해서 그것을 베푼 것은 스스로 과연 부끄럽지 않다고 여긴다.
이와 같음이 있기에 어제의 간청에 대해 애써 따른 것이었으니, 나와 경 사이에 있어 특별히 경을 위한 간절한 마음이 과인을 위해 보호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 남들이 내면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근심하겠는가.
경이 나가고부터는 탑상(榻床) 하나밖에 없어 텅 비었다는 탄식을 면치 못하니, 한밤중까지 옷을 걷어붙이고 나도 모르게 탑상을 돌면서 방황하였다.
지금은 경의 직임이 이미 면직되어 경이 사무에 얽매이지 않는다.
경은 이제 전임(前任) 상서령(尙書令)이 되었고 전임 숙위대장이 되었다.
경에게 있어서야 속세를 벗어나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고 할 만해도 나의 오늘의 마음으로 나의 오늘의 일을 생각한다면 과연 어떠한 마음이 들겠는가.
말이 이에 미치니 오직 목이 메임을 느낄 뿐이다.
이에 조연(朝筵)에 이렇게 입시한 사관들에게 의지하여 나의 속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였다.
경이 이제는 거취에 대해 다시 말할 만한 단서가 없고 또 편안하기 어려운 형세도 없다.
그런데 어찌 빨리 들어와 나를 만나 기거(起居)를 살피는 예를 펴고 겸하여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만나지 못하는 근심을 누그러뜨리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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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7일(무신)
오늘 봉조하(홍국영)의 집에 거둥하겠다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나의 마음에 의당 어떠한 생각이 들겠는가.
내 즉위 이전의 친구인 그의 마음과 정성이 간절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이것이 비록 어쩔 수 없이 애써 허락한 것이었으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기만 하다는 것도 오히려 적당한 말이 아니다.
게다가 생각건대, 선마(宣麻)하기 전에는 결코 입시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선마한 뒤에는 필시 또 나랏일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다소간 미처 상의하지 못한 것이 있으니, 오늘 봉조하(홍국영)의 집에 거둥할 것이다.
정원(政院)은 그리 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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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8일(기유)
봉조하 홍국영에게 하유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정(大庭)에서 선마(宣麻)하여 경은 능히 관직을 내버리고 훌훌 털어 버린 채 조금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게 되었으니 경에게 있어서는 실로 영광이고 다행일 것이다. 오직 나의 오늘 마음은 의당 어떤 마음이겠는가.
경이 매양 내가 부인네와 같은 정만 본뜨고 있다고 누누이 경계시킨 것이 광명정대할 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긴말을 하여 경의 지극하였던 뜻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아, 내가 또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은 쓸쓸하기만 할 것이다.
우의정의 상소에, 구중궁궐에 숙위(宿衛)하는 사람이 없으니
한밤중에도 그리운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 것은 나의 오늘의 회포를 잘 그려낸 말이었다. 내가 몇 번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금은 경이 보답할 방도를 생각하고 내가 마음 붙일 일을 생각하는 것이 모두 문안하러 오는 일과 기거(起居)를 살피는 때에 있으니, 실로 경은 내 말이 없더라도 알고 있으리라.
너무도 그리운 마음에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였으니 경은 이러한 뜻을 체득하여 내일 아침 일찍이 즉시 들어와 이러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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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8일(기유)
검열 이신호가 봉조하 홍국영의 부주(附奏)로 아뢰었다.
홍국영이 서계하기를,
‘신의 오늘 일은 실로 서계(書契)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대우입니다.
신처럼 불초한 사람이 마침내 성취하게 된 것은 곧 전하의 은혜인데 또 지극한 뜻을 펼쳐 보여 주셨습니다.
신이 오늘부터 봉조하로서 기거를 받들어 여쭙는 것은 곧 천신(賤臣)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성상의 하교대로 내일 입궐하겠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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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9월 28일(기유)
봉조하 홍국영(洪國榮)에게 하유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어찌 오늘 아침 문안하는 반열에 나오지 않은 것인가. 경이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리다가 날이 새면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해가 이미 높이 떴는데도 아직까지 조정에 나오지 않으니, 경은 이에 내가 우두커니 서서 기대하고 있던 생각을 저버렸다.
더구나 오늘 선마(宣麻)를 행하려고 하는데, 또 어찌 일찌감치 나오지 않는 것인가.
발돋움하여 기다리던 끝에 자꾸 솟구치는 의심을 감당할 수 없어 다시 이렇게 전유(傳諭)한다.
아, 경이 비록 거취(去就)를 중요하게 여기더라도 보호(保護)의 일을 생각하고 문안하는 예를 펴는 것은 경의 도리에 있어 거취의 중요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경이 문안하는 것의 여부가 어찌 선마를 하기 전이냐 후이냐에 상관이 있겠는가. 경은 잘 이해하도록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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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10월 3일(계축)
봉조하 홍국영(洪國榮)에게 유시(諭示)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은 어째서 여러 날 동안 문안을 여쭈는 예(禮)를 빠뜨렸는가?
내가 지금 생각과 마음을 부치고 있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면 경이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리고 경이 돌아가면 또 이 밤이 지나서 내일 아침에 조정에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경이 만약 이것을 생각한다면 또 어찌 문안을 여쭈는 일에 대해 머뭇거리겠는가.
경은 이 점을 생각하여 즉시 들어와 문안을 여쭈어 나의 이러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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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3년 기해(1779, 건륭 44)
10월 4일(갑인)
오늘은 일찍 들어와 문안을 여쭙도록 하라고 봉조하(홍국영)에게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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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 건륭 45)
1월 25일(갑진)
봉조하 홍국영(洪國榮)에게 하유(下諭)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부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경이 병이 있어 증세가 가볍지 않다고 하기에 편히 조섭하라고 우선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앓고 있던 병은 이제 새해가 되었으니 다 나았으리라 생각된다.
어젯밤부터 내가 또 작은 병이 있어 지금 약을 먹고 조섭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내가 경을 그리워하는 마음과 경이 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경은 일부러 문안하지 않는 것인가?
경의 숙부가 당한 일 때문에 경이 따라서 혐의를 삼고 있으니, 아, 400년을 유지해 온 국법을 경 때문에 경의 숙부에게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의리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경이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니,
병세가 웬만하면 들어와 문안하도록 하라. 경은 모쪼록 헤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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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
정조 4년 경자(1780, 건륭 45)
1월 28일(정미)
봉조하 홍국영(洪國榮)에게 하유(下諭)하였다.
하교하기를,
‘일전에 불렀을 때에는 대계(臺啓)에 대한 비답이 내리지 않아 나와서 문안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제는 대계에 대한 비답을 이미 내렸고 나 또한 병을 조섭하고 있으니,
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평소보다 배나 더하다.
경의 병이 지금은 일어나기 어려운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으리라 여겨지니, 공(公)으로 보나 사(私)로 보나 어찌 한 번 들어와 나를 보지 않는가? 경은 들어와 문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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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즉위년 병신(1776, 건륭 41)
7월 6일(을해)
흥정당(興政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흥정당(興政堂)에서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어제의 윤음은 급하게 불러서 쓰느라고 자구(字句) 등을 미처 교검(校檢)하지 못하였는데, 혹시 고칠 만한 곳은 없던가?”
하니,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이 아뢰기를,
“별로 교정할 만한 곳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相喆)이 아뢰기를,
“이번의 옥사(獄事)가 끝난 뒤에 하나의 책자를 만들어서 중외에 반시(頒示)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잘 생각해서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김양택이 아뢰기를,
“비국(備局)의 부제조가 나오지 않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좌승지 홍국영(洪國榮)은 나이가 비록 젊으나 총민하여 업무 능력이 있으니, 부제조에 차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좌승지는 이미 부제학과 이조 참의를 거쳤으니, 부제조의 직임은 의외의 직책이라 하겠다. 내가 그의 자력(資歷)이 부족하다거나 또는 이 사람에게 청현(淸顯)의 직을 아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어떻게 그를 총민하다고만 일컫고 말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전에 내가 장전(帳前)에서 대략 그 대강을 하유한 일이 있지만, 이것으로 볼 때 그의 작질(爵秩)은 오히려 낮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그를 이 직책에 차하한다고 한다면 하루 이틀에 사면(辭免)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내가 너무 외롭고 위태로워서 잠시라도 그를 떼어 둘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사람을 어떻게 그냥 총민하다고만 일컬을 수가 있겠는가. 춘방(春坊)에 있을 때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목숨까지도 버렸던 자는 오직 이 한 사람뿐이다. 지금 우리 군신(君臣)의 만남이 거의 초야(草野)의 만남과 다름없는 이 시기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자 또한 이 한 사람뿐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의 공로로 말하면 아직도 나는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많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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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4년 경자(1780, 건륭 45)
1월 28일(정미)
가주서 이언호(李彦祜)가 봉조하 홍국영의 부주(附奏)로 아뢰었다.
○ 서계(書啓)하기를,
“신이 성상의 하유를 받들고 봉조하 홍국영에게 달려가 전유하니, ‘신이 성상의 옥후(玉候)가 미령(靡寧)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애가 타서 마음을 추스릴 수 없었는데, 뜻밖에 사관이 와서 또 도타운 부름을 전하니, 신은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고 지금 바로 달려 나아가 문안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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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4년 경자(1780, 건륭 45)
2월 11일(경신)
봉조하(奉朝賀) 홍국영(洪國榮)에게 하유(下諭)하였다.
○ 하교하기를,
“근래에 오래도록 경을 보지 못했으니 매우 마음이 아프다. 곧 오늘 동가(動駕)하여 경숙(經宿)할 때에 반드시 문안을 여쭐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또 들어오지 않으니 몹시도 그리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전에 이미 나의 뜻을 보였는데 이처럼 고집하니 너무도 지나치지 않은가. 더구나 경의 평상시 마음으로 볼 때 나를 만나지 않은 지 며칠이 되었으니, 또 어찌 차마 견디며 머물러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이 이미 처의(處義)하였으므로 나도 부득이 사륜(絲綸)을 펴는 것이니, 경은 잘 헤아려 이전의 고집을 속히 바꾸어 즉시 들어와 문안하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 봉조하에게 전유하라고 명하였다.
첫댓글 디씨에서 본 건데 신기하게도 정조가 홍국영을 처음 만난 날짜와 내친 날짜가 똑같았다고 ㄷㄷㄷ
몹시도 그리운 마음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ㅠㅠ
이건 뭐 연애편지도 이보단 덜할듯...
진짜 연서같다;
홍국영 정말 안타까운인물이긔..욕심이 너무 과했던탓이지.........
경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평소보다 배나 더하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꼬신대..ㅋㅋ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보면 세손의 사나이첩 이라 하셨다나.. 암튼 그정도로 정조가 홍국영을 아꼈다고 하네요.. 그러니 혜경궁 홍씨가 보기에 홍국영은 자기 아들에게 안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매우 홍국영을 싫어하신듯 합니다.
사나이 첩....!!!!!!!!!
!!!!!!!!!!!!!!!!!!!!!!!!!!!!!!정조대왕 넘 존경하는데...자꾸 메모장 열고싶다...혼자만 써서 봐야지
저도 혼자 써 갈기려고 한글 켰긔... 혼자만 불탈테야..
진짜 막 써갈겨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하지만 달리 말하면 주변에 그만큼 의지하고 , 아님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듯 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정조대왕은 알면 알수록 안타까운 삶을 사신듯 해요
저도 그런 생각이 드네요. 어쩜 많이 고독하신 분이셨는지도 모르겠어요.
진짜 연서같다 ㄷㄷㄷㄷㄷㄷ
어우, 오해받을 만한 내용이네.
저런 정조를 결국 배신한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전 홍국영이 싫어요. 권력 욕심이 너무 과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으니....그래서 결론은... 정조정약용 입니다(뭐냐;)
정약용은 언제 쯤 나올까요???
잘읽었습니다^^ 정말 귀중한 자료네요!!!
어우, 진짜 쩌네요.....아 자꾸 이상한 상상하면 안되는데....
222222 아 지금 이산보는데 미치겠다규...........이거 집중이안돼.............
마음이 찢어지긔..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서진이 겹쳐서 넘 웃긴다규
들린다 들린다 ㅋㅋㅋ 한글, 메모장 모두 열어 재끼라규 !!!!!!!!!!!!!!!!!!!!!!!!!!!!!!!!!!!!! ㅋㅋㅋㅋ
가뜩이나 요즘 이서진 완전 똘망똘망하니 귀여워져서ㅋㅋㅋ 이러면 안되는데 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홍국영 왜 그랬어...정조를 왜왜..ㅜㅜ
흑;;홍국영이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홍국영 미워미워 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