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 박정희전대통령의 10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데 각종 행사들을 기념(?)하는 뜻으로 박정희전대통령의 그간의 만행에 대해서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조 부탁드립니다.
1. 간첩조작/사법살인
국가안보라는 이유로 수 많은 무고한사람들은 국가반역자나간첩으로 몰아 잡아가두었으며 고문으로 거짓자백을 강요, 제대로된 재판 없이 유죄를 만들어냈다. 일부사람들은 무기징역과 사형이라는 극형을 받았으며 극형을 면한사람들도 모진고문으로 장애나 추후 목숨을 잃었고 형을 마치지 못한채 감옥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들도 다수.
1-1. 인민혁명당 사건 - 링크
1960~70년대 중앙정보부가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을 결성했다'고 발표하여, 다수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 교수, 학생 등이 검거된 사건. 2007년과 2008년 사법부의 재심에서 관련자 전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1-2. 민청학련 사건 - 링크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全國民主靑年學生總聯盟, 약칭 민청학련)을 중심으로 180명이 구속·기소된 사건.
1-3. 동백림 사건 - 링크
1967년 7월 8일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대규모 공안사건.
1-4.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 링크
삼척에 일가족 12명이 한국전쟁 당시 월북했다가 남파된 친지와 접촉해 지하당을 조직한 뒤 북한을 찬양·고무하고 동해안 경비 상황과 군사기밀을 탐지했다는 등의 혐의로 지난 1979년 8월 기소됐고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이를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으로 명명해 발표했다.
1-5. 이수근 사건 - 링크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이수근(李穗根)이 남측에 귀순하여 살다가 1969년 1월 여권을 위조하여 해외로 출국하여 체포된 후 간첩으로 몰리게 된 사건.
1-6. 유럽 간첩단 사건 - 링크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는 1969년 4월 박 교수 등을 서울 남산 분실로 연행해 평양에서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국가 기밀을 빼냈다는 ‘유럽 간첩단 사건’ 누명을 씌웠다.
1-7. 심문규 이중간첩 사건 - 링크
1955년 북파돼 특수 임무를 수행하다 북한군에 체포된 뒤 1년7개월 가량의 대남간첩교육 후 다시 남파된 심문규씨는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자수했으나 '위장자수' 혐의로 불법구금 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1-8.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 링크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의 발단은 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앙정보부는 같은 해 ‘통일혁명당’ 사건을 수사하던 중 노동운동 방안을 논의하던 재야 모임을 발견, 참가자인 권씨 등 13명을 연행해 조사한 뒤 이들이 ‘남조선해방전략당’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고 발표했다.
1-9. 고려대학교 NH회 사건 - 링크
중앙정보부는 1973년 5월 24일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낙중을 간첩활동 혐의로, 고대생 정발기 등 10명의 학생을 반국가단체조직, 불온유인물 살포 등의 혐의로 구속하는 등 도합 13명을 반국가활동 혐의로 구속, 검찰에 송치했다.
1-10. 울릉도 간첩단 사건 - 링크
울릉도 간첩단 사건은 1974년 중앙정보부가 울릉도 주민들과 일본 농업 연수를 다녀온 47명을 장기간 불법구금하고 고문해 간첩행위에 대한 허위자백을 받아낸 사건이다.
1-11. 문인간첩단 사건 - 링크
문인간첩단 사건은 1974년 1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문인 61명이 개헌지지 성명을 낸 데서 비롯됐다. 이에 국가보안사령부(보안사)는 서명에 참여한 문인 가운데 김 씨와 이호철 임헌영 장병희 정을병 씨 등 5명을 총련계가 민단계로 위장해 발행하는 잡지 ‘한양’에 글을 게재한 것을 빌미 삼아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처벌했다.
1-12. 11.22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사건 - 링크
1975년 11월 22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임받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 국장이었던 김기춘은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 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하였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다.
2. 독재정치/정적탄압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부정선건, 유신선포등을 통해 독재정권을 유지했으며 본인에 위협이 되는 정치상대는 말살하려 하였다. 또한 언론 탄압과 과거사를 은폐하여 본인 우상화를 시도하였다. 그 밖에도 문화와 종교를 탄압하여 노래나 만화등을 금지 및 검열하였고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2-1. 10월유신 - 링크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헌법적 비상조치.
2-2. 긴급조치 - 링크
제4공화국 헌법(유신헌법)에 규정되어 있던, 헌법적 효력을 가진 특별조치.
2-3. 언론파동 - 링크
1964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언론규제입법에 반발하여 일어난 사건.
2-4.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 - 링크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은 1969년 6월 20일 밤 10시 15분 경 귀가 도중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의 차량에 괴한 3명이 질산이 든 병을 던진 사건이다.
2-5. 신민당 각목 사건 - 링크
신민당 각목사건(新民黨角木事件)은 1976년 5월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이다.
1974년 신민당 당수 유진산이 사망하고, 같은 해 8월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75년을 거치면서 반유신 선명노선이 약화되면서 김영삼의 지도력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하여 1976년 5월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때 이철승이 최고위원죄를 도입하고 지도체제를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웠다. 그러나 김영삼, 김대중을 위시한 반독재 강경파는 이철승의 행동이 불순한 정치공작으로 판단했다. 박정희와 차지철은 이철승이 새 총재로 선출되어 집단지도체제가 되면 야당이 약화될 것을 예상하고 이철승을 지원하는 공작을 펼쳤다.
2-6. 김영삼의원 제명 파동 - 링크
김영삼 의원제명 파동은 1979년 9월 29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에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永三)의 1979년 9월 16일자 〈뉴욕 타임스〉와의 기자회견 중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내용을 문제삼아 10월 4일 국회에 징계동의안을 제출, 김영삼을 징계, 의원직을 박탈한 사건이다.[1] 김영삼의 제명은 부마 항쟁을 촉발했고, 이는 유신 정권 종식의 계기가 되었다.
2-7. 김대중 납치사건 - 링크
김대중 납치 사건(金大中拉致事件)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누군가의 섭렵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이다.
2-8. 열악한 노동환경 - 링크
이 시기의 대표적 사례로는 전태일 열사의 사건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조
2-9. 실미도 사건 - 링크
1971년 8월 23일 인천 중구 실미도에 있던 북파부대원들이 기간병들을 살해하고 탈출해 청와대로 향하던 중 자폭한 사건.
2-10. 부마항쟁 - 링크
1979년 10월 16일부터 10월 20일까지 부산광역시, 마산(지금의 창원시 서부) 등의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항쟁. 박정희의 제4공화국 유신 독재 체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3. 부정부패/성상납
국사의 재산을 사유화하고 해외에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뇌물을 뿌렸으며 스위스에 비밀 계좌를 보유했다. 또한 문란한 여자관계를 가졌는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연예인,여대생,유부녀 등 원치 않는 상대와도 관계를 가졌다.
3-1. 코리아게이트 - 링크
코리아게이트(Koreagate)은 1976년에 일어난 정치 스캔들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박동선을 통해 미국 정치인들에게 뇌물을 주어 미국 정부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3-2. 스위스 비밀계좌 - 링크
코리아게이트의 주범인 박동선은 당시 청와대가 스위스 취리히 소재의 은행을 통해 자신에게 19만 달러(2012년 당시 시세 100억원 상당)를 건넸다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스위스 은행을 통해 거액의 비자금을 운용해왔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3-3. 성상납/채홍사 - 링크
[궁정동 안가에서의 술자리는 박정희 혼자 즐기는 소행사와 10.26의 그날처럼 경호실장, 중정부장 등 3, 4명의 최측근이 함께 하는 대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대행사는 월 2회, 소행사는 월 8회 정도 치러졌다고 한다. 대통령 술자리에 한 번씩 왔다 간 여성들은 당시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입을 벌릴 만한 TV탤런트와 가수 등 연예계의 일류 스타들이었다고 '대통령의 채홍사' 노릇을 한 박선호 전 중정부 의전과장은 증언한다.
증언에 따르면 술자리 여성으로는 유명한 기성 배우보다는 20대 초반의 연예계 지망생이 더 선호됐다고 하며, 그중에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학과 재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채홍사가 구해 온 여성들은 먼저 경호실장 차지철이 심사했으며, 심사에 이어 여성들은 술자리에 들어가기 전 보안서약과 동시에 접대법을 교육받았다고 한다. 김재규는 “궁정동 안가의 특별한 만찬은, 절대군주나 봉건영주 시대가 아닌 20세기말 자유민주주의 국가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라며 개탄했다.] - 나무위키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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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수천년 빈곤 국가를 살렸는지는 우리나라 경제를 키우고 다졌는지는모르겠는데 절대로 위인으로 평가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박정희가 소박하고 인간미넘치고 국민만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는 평가나 어쩔 수 없이 독재를 한 첨렴한 독재자라는 소리를 하는분들이 간혹(?) 많은데 일고의 여지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됩니다. 박정희도 여는 독재자들과 다르지 않은 부패하고 악랄한 독재자일 뿐. 암만 경제성장의 공이 있다고 해도 그 공을 자꾸 인정하라는 저의가 뭘까요? 결국 박정희의 업적을 기리고자 한다는건데 개인적으론 독재자의 업적 따위는 가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 어떤걸로 불러줄까? 친일 빨갱이야..
친일파와 빨갱이를 동시에 이루어낸 것은 그의 업적중 하나이죠.
남들은 하나도 힘들거 두개나! ㅋㅋㅋ
그 국부라 불리는 이승만이는 정작 하나도 없긴한대 말이죠......ㅎㅎㅎㅎㅎ
이런거보면 확실히 박정희는 올타임넘버원인듯요... 다른의미로 ㅎㅎ
333 대단합니다
혜화에 사무실이 있는데 밖에 집회하느라, 새마을 노래, 애국가 나오는데 시끄러 죽겠네요.
다카키 마사오를 한국의 위인으로 볼 수가 없는거죠.
스크롤 압박 어쩔 ㅋ
선추천 후감상 할려 했는데 혈압오를거 뻔하므로 페스
탕탕절 누가 지었는지 참 절묘함 ㅎㅎ
지금 베트남 다낭 패키지 중인데 가이드 박정희 찬양 안하는척 하며 빨고 있네요;;; 장인장모만 같이 안계셨음 벌써 반박했을텐데 걍 인상쓰고 있네요;;
미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작성한 프레이저 보고서를 보면 부정부패 규모가 이명박은 귀여운 수준이라 하네요. 경제발전 업적은 개뿔, 미국이 당시 전략적으로 키워준 덕을 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