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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樂soccer 원문보기 글쓴이: 서초패왕 항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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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 출처 : 『대란』 , 『이순신세가』 이진성 화백
1. 대부의 광전사, 권응수
- 영천성 전투 당시의 기록 -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安東)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朴晋)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해(申海)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鄭天賚)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級)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나머지는 차등있게 상직(賞職)이 주어졌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8월 1일 무자 10번째 기사
2. 신기의 활솜씨, 황진
- 안덕원 전투 당시의 기록 -
왜노들이 전주(全州)를 침범하자 공이 말을 달려 안덕원(安德院)에서 왜노들을 크게 격파하고 우두머리를 활로 쏘아 맞혀 죽였으니, 이로부터 왜노들이 감히 전주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였다.
『강한집』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安德院)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邀擊)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敵將)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7월 초의 일이었다.
『포저집』
- 이치 전투 당시의 기록 -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 위대기(魏大奇),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고개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조위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 라고 썼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7월 1일 무오 2번째 기사
황진이 나무에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고, 적의 진격이 멈추고 황진을 목표로 집중사격을 가하여 황진이 부상을 당하자 적이 연속으로 뛰어 들어와 우리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려 하므로 권율이 후퇴하는 자를 참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황진도 부상당한 몸으로 다시 싸우니 군사들이 일당백으로 싸워 적이 크게 패하여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연려실기술』
- 수원 전투 당시의 기록 -
척후(斥候)로 전방에 나가 있던 중에 적을 만나 역전(力戰)을 벌이고 나서 그 말을 빼앗아 타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 공으로 절충 장군(折衝將軍)으로 품계가 오르면서 충청도 조방장(忠淸道助防將)이 되었고, 계사년(癸巳年) 봄에는 본도(本道)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국조인물고』 권54 「왜난시 입절인(倭難時立節人)」 피구인부(被拘人附)
▶▶ 황진이 활솜씨 뿐만이 아니라 근접전과 기창술에도 능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3. 명나라가 인정한 용장 1, 정기룡
- 단기로 돌진하여 조경을 구하다 -
한 왜적이 긴 칼을 가지고 마구 들어와 조경을 치려 하였는데, 조경이 맨손으로 그 왜적을 껴안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을 무렵 군관 정기룡이 돌진하여 그 왜적을 베니 조경이 살아날 수 있었다.
『난중잡록』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鄭起龍)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趙儆)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判官)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才略)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牧民)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尙州)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判官)을 목사(牧使)로 올리면 다시 판관은 낼 필요가 없다.’ 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
『선조실록』 44권, 선조 26년 11월 5일 을묘 1번째 기사
▶▶ (행장 제외)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기룡의 무용, 확실히 능력이 뛰어난 장수인 건 맞는 듯
- 앞장서 적들의 목을 베어 공훈을 올린 정기룡 -
(1) 도원수 권율이 한명련과 정기룡의 공을 치계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한명련(韓明璉)과 정기룡(鄭起龍)이 합세하여 우도(右道)의 왜적을 나포해서 벤 19급(級)을 전부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게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13일 무진 6번째 기사
(2) 마귀 제독이 언급한 정기룡의 공로
상(임금, 선조)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너무나 서운합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나는 나이가 들었고 또 재략(才略)도 없으니 여기 있어야 도움될 것이 없습니다. 중원에는 호걸들이 많으니 나 대신 그들이 나오면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변보(邊報)를 듣건대, 지난 3월 24일 정기룡(鄭起龍)이 적 24명의 목을 베었다 하고, 또 나의 가정(家丁)들도 고군(孤軍)으로 적의 수급 23개를 베었다고 하며, 또 진주(晉州)의 적과 싸울 때도 70여 수급을 베었을 뿐 아니라 마필(馬匹)도 그에 상응하게 노획했으며 조선인을 쇄출(刷出)한 것도 1백여 인에 달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전일 도산(島山) 싸움에서도 적들은 내성(內城)만 지키고 있으면서 외성(外城)이 깨졌는데도 구어(救禦)에 뜻이 없었으며, 행장(行長) 역시 제 진만 굳게 지켰을 뿐 원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러한 일들로 미루어 볼 때 적을 평정하기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 4월 3일 정사 4번째 기사
- 명나라에게 인정받다 -
(1) 마귀 제독이 믿을 수 있는 용장으로 정기룡과 한명련을 논하다.
마 제독(마귀)이 말하기를,
"만약 저들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마땅히 대병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鄭起龍), 김응서(金應瑞), 한명련(韓明璉)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그리고 김응서를 불러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략)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1일 을미 3번째 기사
(2) 마귀 제독이 조선 제일의 명장으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정기룡, 한명련을 논하다.
"근일 남쪽 소식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임금, 선조)이 말하기를,
"수로(水路)의 보고를 들으니, 진 도독(陳都督) 대인이 상당히 참획하였는데 소방(小邦)의 수군도 황제의 위엄을 힘입어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자, (마귀)제독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 정기룡(鄭起龍), 한명련(韓明璉), 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예단을 올렸으나 받지 않았다. 상이 작별하고 나왔다.
『선조실록』 103권, 선조 31년 8월 15일 무진 1번째 기사
(3) 유격 모국기가 정기룡과 이운룡을 언급하다.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대인께서 해상에서 오셨으니 적의 정세에 대해 들은 것이 없소이까? 듣고 본 것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라외다."
하자, (모국기)유격이 말하기를,
"지금 수길(秀吉)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의 아들이 대를 이어 군사를 훈련한다고 하니 수년 사이에 병화가 그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귀국에서 적당한 인재를 장수로 임명하여 전수(戰守)하는 계책을 강구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제가 올라올 때 고령(高靈) 등처를 살펴보니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서 기근이 대단히 심하고 매우 허술하였으니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지난번 울산의 적은 제가 후진(後陣)에서 막았기 때문에 예봉(銳鋒)이 경성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심으로 감사하외다."
하였다. 유격이 말하기를,
"상께서 해상에 대해 진념하시어 병선을 많이 만드신다면 적이 염탐하고서 반드시 방비(防備)가 완전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귀국의 수로 총병(水路總兵) 이운룡(李雲龍)과 육로 총병(陸路總兵) 정기룡(鄭起龍)은 두 훌륭한 장수로 몸을 돌보지 않고 나아가 싸우는 것은 이 두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분부하여 주시니 진심으로 감사하외다."
하였다.
『선조실록』 118권, 선조 32년 10월 2일 무진 4번째 기사
4. 명나라가 인정한 용장 2, 한명련
- 황해도 출신의 천민, 용맹과 재주를 인정받다 -
"변장(邊將)과 수령(守令) 가운데 공적이 현저하여 칭송할 만한 자는 없는가?"
하니, 아뢰기를,
"한명련(韓明連)이 제일 잘 싸웠다고 합니다. 권희인(權希仁)도 잘 싸운 사람인데 적탄을 맞아 죽었고, 이빈(李薲)의 군사 90여 인이 전투에 익숙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이천(李薦)은 늙었지만 전투에 용감하였는데 동궁(東宮)이 이천(伊川)에 있을 때에 방어사를 삼아 내보냈으나 직무를 수행하던 중에 옥등(玉登)에 왜적이 들이닥쳤는데도 달려가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로 그 직을 제수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일 임자 3번째 기사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쪽 변방의 장사(將士)들이 해를 넘기면서 풍찬 노숙(風餐露宿)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매양 외로운 군대로 역전(力戰)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도 장사를 대우할 때에는 반드시 호상(犒賞)을 후하게 하여 죽을 각오로 싸울 결심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탄 사람에겐 1 은(銀)을 주고 말에서 내린 사람에게는 1 금(金)을 주었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전번에 김태허(金太虛)·박의장(朴毅長)·고언백(高彦伯)에게는 이미 표리(表裏)를 내렸습니다만, 선거이(宣居怡)·홍계남(洪季男)·정희현(鄭希玄)·권응수(權應銖)·백사림(白士霖)·한명련(韓明連)도 다같은 역전의 용장들인데 아직 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 최상중(崔尙重)이 갈 적에 청람(靑藍) 삼승포(三升布) 각 2필씩을 부송하여 한편으로는 고전한 공로를 포장하고 또 한편으로는 군심(軍心)을 용동시키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21일 경자 3번째 기사
상(임금, 선조)이 이르기를,
"나의 의견으로는 기용할 만하다. 그리고 한명련(韓明璉)은 어떤 사람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의 군대는 이미 지쳐 있으며 단지 40∼50인이 있을 뿐인데도 날마다 교전(交戰)할 때처럼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소신이 때때로 불러다가 재주를 시험해 보았는데 말 달리고 칼 쓰는 것이 가장 날랬습니다. 당상관의 신분으로서 졸오(卒伍)와 같이 처신하여 산비탈을 오르내릴 때 혹 걸어다니기도 하였는데, 같은 당상관들이 비웃기라도 하면 의(義)로써 그들을 나무랐다고 하니, 이 일은 매우 가상합니다."
『선조실록』 81권, 선조 29년 10월 21일 갑신 3번째 기사
- 항상 앞장서 싸우며 자랑한 뛰어난 무용 -
(1) 공주-회덕에서 왜적 수백인을 사살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이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와 합세해서 왜적을 토벌하면서 공주(公州)·회덕(懷德) 지경에 이르러 유숙하다가, 왜적이 진산(珍山)으로부터 산길을 경유하여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2일에 잠자리에서 아침밥을 먹고 나서 변을 기다렸는데 왜적의 선봉이 갑자기 이르러 서로 교전하였습니다. 얼마후에는 수많은 왜적들이 크게 쳐들어와 종일토록 힘껏 싸워 쏘아 죽인 것이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지만, 중과 부적인 데다가 날도 어두워져 다만 6급(級)만 베어가지고 왔기에 그 귀를 베어 올려 보냅니다. 이날 싸움에서 앞을 다투어 돌진하고 좌우로 분격(奮擊)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매우 많았는데, 창황한 나머지 전진(戰陣)에 버려두고 다 가져 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힘껏 싸운 사람에 대해서는 권장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군공(軍功)의 등급에 대하여 계문(啓聞)할 계획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선조실록』 92권, 선조 30년 9월 7일 갑오 4번째 기사
(2) 소초평에서 수많은 왜인들을 참살하다.
경기 감사 홍이상(洪履祥)이 치계(馳啓)하였다.
"중전(中殿)과 동궁(東宮)이 상수참(湘水站)에서 주정(晝停)하였는데, 지정된 각관(各官)들이 모두 나와 대기하지 않아 공상(供上)을 전폐하였습니다. 저녁에 마전(麻田) 앞 강에 이르렀는데 작은 배 4척 만이 있었으므로 수많은 인마(人馬)와 배종한 사람들이 도로를 꽉 메운 채 밤중에야 강을 건너 마전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도되고 미안스러운 상황을 차마 말할 수 없는데 몹시 비통스러운 심정으로 석고 대죄(席蒿待罪)합니다. 별장(別將) 한명련(韓明連)이 소초평(蘇草坪)에서 싸워 참살(斬殺)한 바가 매우 많았습니다."
(3) 도원수 권율이 한명련과 정기룡의 공을 치계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한명련(韓明璉)과 정기룡(鄭起龍)이 합세하여 우도(右道)의 왜적을 나포해서 벤 19급(級)을 전부 올려보냅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게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2월 13일 무진 6번째 기사
- 명나라에게 인정받다 -
(1) 마귀 제독이 믿을 수 있는 용장으로 정기룡과 한명련을 논하다.
마 제독(마귀)이 말하기를,
"만약 저들이 물러가지 않는다면 마땅히 대병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귀국인 가운데 정기룡(鄭起龍), 김응서(金應瑞), 한명련(韓明璉)은 모두 의협심이 대단한 사람들로 왜적을 잘 사살하니 함께 적을 토멸할 만합니다. 그리고 김응서를 불러오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명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마 제독이 말하기를,
"고려인 중 총(銃)을 잘 쏘는 사람 2백여 명을 징발하여 전투에 나가게 하여 주소서. 저들이 총으로 하면 우리도 총으로 대항하고 저들이 말을 타고 싸우면 우리도 말이 있으니, 두 가지 기술로 당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번 아군의 대구(大邱)와 삼가(三嘉) 전투에서는 한명련이 선전(善戰)하였습니다. 지난날 귀국에서는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간과(干戈)는 일삼지 않았으므로 전투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배웠는데 전투를 제일 잘 하고 있습니다. 저도 중상을 내리고 칭찬해 줄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은 귀왕께서도 모두 포상하여 다른 사람들을 권면시키소서."
『선조실록』 100권, 선조 31년 5월 11일 을미 3번째 기사
(2) 마귀 제독이 조선 제일의 명장으로 이순신, 권율과 함께 정기룡, 한명련을 논하다.
"근일 남쪽 소식은 어떻습니까?"
하니, 상(임금, 선조)이 말하기를,
"수로(水路)의 보고를 들으니, 진 도독(陳都督) 대인이 상당히 참획하였는데 소방(小邦)의 수군도 황제의 위엄을 힘입어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하자, (마귀)제독이 말하기를,
"저도 들었는데 이순신(李舜臣)이 아니었던들 중국 군대가 작은 승리를 얻는 것도 어려웠으리라고 하였습니다. 국왕께서는 조선의 여러 장수 가운데 누가 양장(良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순신(李舜臣), 정기룡(鄭起龍), 한명련(韓明璉), 권율(權慄) 등이 제일이라고 여깁니다. 저번에 군문에게 이 말을 하였더니 군문이 상품을 나누어 보내 그들의 마음을 격려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예단을 올렸으나 받지 않았다. 상이 작별하고 나왔다.
『선조실록』 103권, 선조 31년 8월 15일 무진 1번째 기사
첫댓글 5천연을 지켜온 전투민족 조선민국 만세 ~~
전투민족의 단점 - 지도자를 잘 만나야 ..
원씨를 만나면 몰살 당하고
이씨를 만나면 몰살 시킨다
하여간 예나 지금이나 우두머리를 잘 만나야.되고.
정치하는 것들도 문제고...
국민들이 대단하죠. 자랑스런 우리의 조상님들.
임진왜란 당시 부산에 도착한 왜군은 20일만에 한양을 접수한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고속도로도 없고 철도도 없는데 말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올수있었을까?
혹시 왜군들을 도와준 사람들은 없었을까?
물론 있었다
왜군이 한양 가까이 오자 문무백관들과 유생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신의주로 도망간다
백성들을 데리고 간것도 아니고 몇명의 신하들만 데리고 말이다
지혼자 살려고 도망갈꺼면 곱게나 가지 만약을 위해 임진강에 만들어둔 배 2.000척을
자기만 건넌뒤 배를 모두 불태워 버려 임진강을 건너지 못한 군졸들과 백성들은
왜군들에게 도륙 당하게 된다
그후 360년뒤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만 건넌뒤 서울에 딱 하나있는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
대한민국 국군전력의 대부분이 소실되고 한강이북 국민들은 인질이 된다
지금 현재 광화문 입구에 가면 이런 안내문이 있다
광화문은 임진왜란때 불탄후 ....어쩌구 저쩌구..
이글만 보면 꼭 왜놈들이 불지른것처럼 이해된다
진짜로 왜놈들이 그랬을까?
만약 백성들을 버리고 지혼자 도망간 임금에게 화가난 백성들에 의한 방화라면
역사 왜곡이 되는건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이 싸운 상대는 왜군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차승원과 황정민이 출연한 영화 "그르믈 버서난 달처럼"이란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조선 정부가 왜군에 의해 혜체되자 정여립.황정학.이몽학등이 민초들을 모아
왜군에 대항하게 된다
그러나 선조는 연전연승하는 이순신 장군의 권력을 두려워했드시
이들 또한 권력을 가지는것을 두려워해 역모로 몰아 대동계를 해체하고
적으로 구분짓는다
정말 영화에서만 그랬을까?
이정재가 주연한 영화 "대립군"은 그냥 영화감독의 뇌피셜일까?
물론 조선신록에는 선조 본인의 하자는 기록하지 않았겠지
근데 어디 조선에 글을 아는 사람이 선조 한명뿐이 였을까?
우리의 역사를 인정 받을려면 그 전쟁에 관련된 참가국인 명나라.일본. 조선의 기록들에서
최소한의 고통된 기록들을 발굴하고 검증 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월남전 참전중 대한민국 최대의 승리는 안케페스작전이라고 배웠다
우리는 우리의 승리로 월맹도 월맹의 승리로 주장한다
그렇다면 미군 기록에는 어떻게 기록되어있을까?
5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참전 군인들은 정말로 최대의 승리로 기억할까?
@달타냥(서울 중구) 물론 역사를 곧이 곧데로 가르칠수는 없다
그러나 가능하다면 진실에 가까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들은 물론 상대편에게도 동의 받을수있기 때문이다
상대편의 인정과 동의가 없는 역사를 우리들은 허구나 왜곡이라고 한다
중국의 동북아 공정과 일본의 주장들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고있다
역지사지이다
독도가 누구것인지를 가지고 반백면 넘게 두나라가 싸우고있는데
다른것이야 오죽하겠는가
참고로 안케페스작전의 영웅으로 태극 무공훈장과 미국 최고의 훈장을 수여한
유일한 대한민국 군인인 이무표씨는
제가 6사단 군복무중이던 1982년 우리 수색대 대대장님이였음
@달타냥(서울 중구) 역사왜곡에 관해 하나 더
동학혁명의 창시자 최재우도 우리는 아직 역적으로 알고있는것 아닌가 해서
언제 기회있으면 동학이 왜 발생했으며 과정은 어떻했고 그 결말은 또 어떻했는지
그리고 동학이 한국 근대사에 어떻한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동학을 진압하기위해 청나라군대가 오고 청나라군대가 오니 일본군이 오고
일본군이 청나라군을 이기니 을사 보호조약이 체결되고 결국 한일합방이되고
해방이 되지만 일본군 무장 해제라는 명분으로 쏘련과 미군이 오고
단일 정부에 실패하니 남북이 갈라지고 결국 6.25가 나고
그렇게 70년 넘는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당시 조정이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국차원에서 동학 문제를 해결하였으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미 지난 역사에 만약은 없는것이지만
같은 돌에 두번 걸려 너머지면 그것이 어디 돌의 잘못이겠습니다
돌에 걸려 넘어진 내 잘못이지..
100여년전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
지금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에 보나스로 북한..
100년전 역사를 교훈 삼아 이번에는 절대 외세의 힘을 빌리지 맙시다
죽이되던 밥이되던 우리끼리 해결합시다
@달타냥(서울 중구) 위에 나열된 장군들 대부분은 전쟁이 끝나고 어떤 대우도 못 받았다
명나라는 물론이고 심지어 왜군 조차도 그 공을 인정하는데 말이다
전쟁이 끝난후 선조가 내린 수백명의 포상 대상자 명단에는
목숨을 바친 장군들의 이름 대신 본인이 신주의까지 도망 다닐때 수발을 든 신하들의 이름으로 채워져있었다
그렇게 상을 받은 후손들은 한일합방 할때까지 30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게 된다
당시 그걸 바꿔 보겠다고 주장하다 귀냥살이 19년하고 쓸쓸히 죽어간 광해군
임굼이 백성을 버리는데 어던 백성이 나라를 지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가지 싸우며 목숨을 바친 그분들에게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달타냥(서울 중구) 그래서 조선왕중 선조를 으뜸으로 칩니다 인물들이 차고 넘치는데....
믿거나 말거나
오늘의 분단책임은
외세의 힘을 빌린 신라가 그 뿌리다.
유교는 '인(仁 : 어질 인)’을 최고 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 가정을 평안히.)·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 : 천하를 평화롭게 함.)의 실천을 목표로 했고 정치와 개인의 최고의 덕목으로 인 의 예 지 신을 근본을 삼았는데
조선의 창립부터 이성계역신의 욕심으로 위화도 회군으로 중국을 신으로 삼고 유교정신대신 신분차별 남여유별
대부분 서민을노예로 인권을 완전 말살시켰고 당파와 왕족과 귀족삶을 최우선가치로 기득권 정치를 하여 수많은 백성을 공녀공남으로 중국에 보내고 우리사서를 불태우고 왕씨, 천주교인 동학교도, 그리고 전쟁영웅을 쳐죽인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왕조와 귀족임을 이제 역사에 기록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