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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에 대한 판결 규례
민 35:22-34
22 악의가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을 때에 이는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25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거기 거주할 것이니라
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가면
27 피를 보복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피 흘린 죄가 없나니
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야 할 것임이라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 소유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
29 이는 너희의 대대로 거주하는 곳에서 판결하는 규례라
30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31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
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주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
민 35:22-34 / 아무런 미움도 없이 실수로 사람을 밀어 넘어뜨려 사람을 죽였거나 또는 나쁜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닌데 연장을 잘못 던져 사람이 맞아 죽었거나 23) 또는 미처 사람을 보지 못하고 돌을 떨어뜨려 죽였을 경우, 그 사람은 무슨 미움이 있거나 나쁜 마음을 먹고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지만 240 공동체 식구들과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피붙이 앞에서 일단 재판을 받아야 한다. 25) 그 후에 죽은 사람의 가장 가까운 피붙이가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를 그가 피신해 있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내라. 그 사람은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260 하지만 사람을 죽인 그가 대제사장이 죽기 이전에 도피성 밖으로 도망쳤을 경우 27) 죽은 사람의 피붙이가 그를 만나 죽였다면 죽인 사람은 살인죄를 쓰지 않는다. 28) 사람을 죽인 그가 도피성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오직 당대의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이다. 그때에는 아무런 걱정 없이 자기가 살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29) 이 규정은 너희뿐만 아니라 너희 후손들까지도 너희가 들어갈 땅 어디서 살든지 반드시 지켜야 할 규정이다. 30) 사람을 죽인 자를 재판할 때에는 반드시 여러 증인의 말을 들어 보고 판결을 해야 한다. 증인이 한 사람밖에 없을 경우에는 그 살인범에게 사형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31) 살인죄에 해당된다고 판결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몸값을 받고 그를 살려주어서는 안 된다. 32) 또한 도피성으로 몸을 피한 사람을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몸값을 받고 집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 33) 너희는 피를 흘려서 너희가 살고 있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피를 흘린 그 사람의 피가 아니고서는 더러워진 땅을 깨끗게 할 수 없다. 34) 너희가 살고 있는 땅이 곧 내가 살고 있는 땅이다. 그러니 그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나 여호와가 너희 이스라엘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땅이 피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더럽혀진 곳은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발적인 살인자 처벌 규정(22-28) 전혀 의도가 없이 사람을 죽였다면 우발적 살해자가 됩니다. 이것은 고의적인 죄와 우발적인 실수들 사이의 차이와 유사하며, 우발적 살인을 범한 사람은 비록 자유를 잃긴 했지만, 피의 보복자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였든지 부지중에 죽게 하였든지 회중이 모인 가운데서 재판장이 판결을 한 후에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도망한 사람을 재판하여 고의로 죽이지 않았다고 판결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살아야 됩니다. 만약에 도피성에서 있지 않고 나왔을 때, 피해자의 가족들이 보고 달려들어 죽여도 죄가 안됩니다. 도피성에 있는 사람이 죄가 없어졌기 때문에 용서해 주시는 것이 아니며, 죄가 있을지라도 도피성에 있을 때만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시행되면 살인죄가 많이 줄어들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상황과 의도를 모두 고려하신 후의 나타나는 공의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그들의 여건과 의도를 고려하지 않고 우리 마음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살인자 처벌과 땅을 더럽히지 말 것(29-34) 고의적인 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서 속죄가 없었듯이 살인자의 생명을 위한 속전은 없었습니다. 율법은 친족 남자가 합법적으로 보복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친족 남자가 없는 과부들의 경우에 하나님이 직접 그 역할을 맡기도 하셨습니다(출 22:22-24). 스스로 보복하지 말고 원수 갚는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명령하십니다(롬 12:19). 두 명 이상의 증인을 요구함으로써 정의는 강화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호소하신 지속적인 원칙이고, 사도들이 예수의 증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증거가 법적으로 유효한 것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홀로 가지 아니하고 짝을 이루어서 파송 하셨습니다. 한편, 도피성의 근본 이유는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라고 언급하는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거하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했습니다. 정의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들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 땅에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도피성을 주신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입니다.
적용: 최종적인 판단은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럼에도 당신은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까?
사회를 보면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 사고가 일어납니다. 도피성은 우연한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위해 준비된 성입니다. 그리고 그 성의 규례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상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의 생명이 유지될 것입니다.
< 설 교 >
생 명
민 35:30-34 / 김중석 목사
A Life. 지난 석 달 동안 북서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의 방향이 남동쪽으로 바뀌었다. 봄이 왔다. 메말랐던 가지에 물이 오르고 새싹이 트고 있다. 대지에서도 파란 새싹이 돋고 있다. 3월은 [생명의 달]이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하나님께서 생을 명하시매 호흡하며 활동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매 혼이 떠나가고 숨을 거둔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선하고 아름답고 끈질기다/ 사람의 생명은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나게 지으셨다. 죽지도 않고 굶주리지도 않고 우열도 없으며 모든 생명을 다스릴 수 있게 존귀와 위엄을 지닌 존재로 지으셨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고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 했다. 뱀의 모습으로 나타난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였다. 그 후로부터 사람은 하나님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람의 존귀와 위엄을 잃어버리고 죽기를 평생 두려워하게 되었고 일에 기쁨이 사라지고 대신 고통이 따르게 되었고 짐승처럼 먹을 것을 위하여 허덕이게 되었고 마침내 늙고 병들어 죽게 되었다. 죄가 많아지면서 수명도 점점 짧아져 한정하신 120년도 살지 못하게 되었고 사람들 간에도 사랑하는 대신에 미움이 협력대신에 갈등과 경쟁을 하므로 고통을 더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셔서 사람에게 계속 생명을 공급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할렐루야! [생명]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망에서 생명으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축원한다.
1. 생명은 귀중하다.
우리가 가진 이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이렇게 귀한 생명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 생명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는가? 얼마나 감사했나? 오히려 원망하진 않았나? 돈이 적다고, 키가 작다고, 못 생겼다고, 명이 짧다고, 온갖 이유로 자기에게 주신 생을 원망 불만 불평하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가 이 시간 단단히 회개해야 하겠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었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그 격이 아니었던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내었다. 죽은 듯했다. 열심히 인공호흡을 시키고 애를 썼다. 그런데 기색을 하며 회생했다. 얼마나 기쁜가! 반대로 그가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다. 얼마나 안타깝나! 회생하고 못하고는 천양지차(天壤之差)이다. 이 때 우리는 생명의 귀중함을 느낀다. 병이 들어봐야 건강의 귀중함을 알고, 호흡이 막혀봐야 호흡의 귀중함을 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또 생명의 귀중함을 잊고 조금만 뭐해도 불만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주신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저주하고 포기하기까지 한다. 정말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잘살고 못사는 것을 떠나서 생명주심을 감사하며 살자. 살전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최근 한국 대법원에서 사형제도 합헌결정을 내렸다. 5:4비율이었다. 18년 전에는 7:2였다. 한기총은 사형제 존속을 주장하고 교회협은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다. 한기총은 사형제는 성경적이고 타인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교회협은 인위적으로 생명을 거두는 것은 생명존중에 반한다 하고 대신 영구 격리하면 된다고 한다. 어느 쪽이 생명을 존중하는 것일까? 민35:30 이하를 보면 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죽일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복수(複數)증인이 있어야 한다. 고의적 살인이라는 증거가 들어나면 반드시 죽이라. 고의가 없고 실수로 살인했다는 증거가 있을 경우에는 살려야 하고 격리수용(도피성)하라. 그 기간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다. 현대 법제도가 민수기 수준에 못 미치고 있다. 고의적 살인자, 그것도 무고한 사람을 여럿 죽이는, 묻지마 살인도 그의 생명을 존중해서 사형하면 안 된다면 이것이 옳은가? 그것은 옳지 않다. 범죄자의 생명은 귀중하고 무고한 시민의 생명은 귀중하지 않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형제 폐지도 합당치 않지만 사형제 남용도 합당치 않다. 사형제가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종교적으로 악용되어서도 안 된다. 죽일 권한이 하나님께 있다. 그 권한을 국가가 위임 받는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성경적 기준에 합당하게 하면 된다. 베트남에서는 경찰명령에 불복하면 현장에서 사살이 가능하다고 한다. 생명경시 사형제 남용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어린이 노인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는 데까지 나아가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야 한다.
2. 생명을 풍성케 하신다.
요10:10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사는 동안에 사는 것처럼 살게 하고, 영원한 생명까지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할렐루야! 어떻게? 예수를 믿으면 된다. 예수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시면 된다. 그 순간 우리는 거듭난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 생명을 좀먹고 죽이는 모든 죄와 얽매이는 것에서 해방된다. 요8:3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것은 사실이다.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다 경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도 죄를 짖기도 하고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지만 나는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 내 호흡은 끊어져도 내 영혼을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거할 것이고 내 몸도 주님 오실 때 부활하여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천국에서 영화로울 것을 확신한다. (찬492)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슬픈 일을 많이 보고 늘 고생하여도 하늘 영광 밝음이 어둔 그늘 헤치니 예수 공로 의지하여 항상 빛을 보도다. 무슨 자격으로? 예수의 피의 공로로.
생명의 풍성은 이렇게도 나타난다. 마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살려고 발버둥친다고 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죽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죽음은 빨리 다가온다. 전장에서 죽을 사람은 아무리 숨어도 총알이 찾아와 맞춘다. 살 사람은 총알이 비 오듯 해도 산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生卽必死 死卽必生]이다. 생명의 풍성은 이것이다. 예수님 없이 살고자 하는가? 그러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영원히 죽을 것이다. 예수님 함께 죽고자 하는가? 그러면 반드시 살 것이요 영원히 살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나누면 생명은 더 풍성해진다.
[창 끝 End of Spear]이라는 선교영화가 작년에 한국에서 상영되었다. 1956년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다. 명문 휫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젊은 선교사들이 남이 에콰도르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뒤 실종되었다. 그때 언론에서는 ‘이 무슨 낭비인가? 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랐다. 정글생존훈련 및 아우카족과 친해지는 방법을 터득하고 아우카족 마을로 들어갔다. 정성껏 아우카족을 섬겼다. 추장을 비롯한 부족민들은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나는 날 아우카 추장이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줬다. 놀라운 말이 거기에 있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또 다른 글도 있었다.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5명중 하나인 테드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는 사업을 하다가 선교사가 되어 아우카족에게 들어갔다. 추장은 누가 아버지를 살해했는지 궁금해하는 스티브를 강가로 데려갔다. 5명의 아우카가 그 자리에서 스티브에게 자기들이 창으로 5명을 찔렀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찌른 창을 아들 스티브에게 건네줬다. 아우카의 미덕인 아버지의 복수를 아들이 하라는 것이다. 스티브는 창을 들었다. 그 끝을 그들로 향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버지들의 고통을. 그리고 그들을 용서했다.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5명중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됐다 할렐루야! (사진들)
예수 외에 우리에게 생명을 줄 자 없다. 정치가 경제가 학자 자선가 도덕가 사상가 종교가. 그 누구도 예수 외에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요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9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꼴을 얻는다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 :11 나는 선한 목자라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우리가 그 은혜를 입었다. 주여, 우리도 예수님처럼 목숨 버려 생명을 더 풍성케 하소서!
{말씀의 은혜 속으로}
1.우리가 가진 생명은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 설교 서론 참조
2.사람의 생명이 어느 정도 귀중합니까? 마16:26 살전5:18
3.사형제는 합당합니까 불합당합니까? 민35:30-34
4.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무엇이라 적었습니까? 요10:10 8:33
5.생명을 풍성케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16:25 요10:8-11
6.[오늘의 양식]큐티와 기도, 생활 속에서 얻은 은혜를 나누십시오.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민수기 35:33-34, 요한계시록 19:1-3
서 론
우리나라는 인구대국인 중국과 경제대국엔 일본 사이에 끼어 고생이 많습니다. 중국은 경제고 대국이 되었는데 계절도 없이 실어 보내는 초미세먼지와 황사를 우리나라로 들여보냅니다. 군사력 증강에 돈을 그만 쏟고 환경에 더 많이 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방사능에 오염된 바닷물과 생선이 우리나라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제발 그런 것들은 그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이 두 나라 때문에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중국 대륙에 나라가 새로 설 때마다 한반도를 쳐들어와서 수없는 침범을 당했습니다. 섬사람 일본인들은 왜구로 들어와 약탈을 일삼았고, 일제강점기에는 몹쓸 고통을 많이 주었습니다. 이런 수난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가 약하기에 강합니다. 중국이 그렇게 쳐들어왔지만 중국화되지 않았고, 일본이 그렇게 탐내고 지배야욕을 버리지 않았지만 일본화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이 한국화된 것을 감사하고 또 한류가 세계 여러 나라들을 강타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발표에 의하면 지구상에서 하루 평균 130여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짐승, 물고기, 벌레, 식물 등 무분별 개발로 인한 서식지 파괴와 남획 그리고 환경오염 등 변화 때문에 지구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땅의 오염이 주원인입니다. 지금 빠르게 진행되는 사막화도 지구의 생물을 사라지게 하는 중요한 원인인 것입니다.
지금 지구가 대변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지구의 높낮이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높아지는 산이 있는가 하면, 새로 생겨나는 섬도 있고, 지구 곳곳에서는 물 부족 사태로 고통을 당하고 있고, 사막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빙하와 만년설이 급속하게 녹고 있으며,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습니다. 세계 이곳저곳에서 이상 기후이 증세가 나타나고 있어 폭설로 고생하는가 하면, 태풍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지구가 잔뜩 성이 난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땅이 황폐하게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2025년에는 아프리카의 농지 3분의 2가 사라질 것이라고 합니다. 지구온난화를 방치하게 되면 2020년에는 세계인구 5명 중 1명이 굶주려 죽게 되고, 농산물의 가격폭등이 우려되고 있습니다. 여러 나라 가운데 적도 인근국가들의 피해가 가장 클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땅이 문제입니다. 땅을 살리는 것이 가장 시급한 지구적 과제입니다.
창세기 3:18에는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이 죄를 지은 다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벌을 주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깊은 골은 땅을 파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나라는 고래로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했습니다. 정말 비단결 같은 우리 국토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금수강산’이 황폐하게 변하지 않게 잘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땅을 잘 보존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최후의 승자, 세계를 다스리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배달민족’인 것은 아시지요? 요즘 우스개로 뭐든지 배달해준다고 하여 배달민족이랍니다. 고수부지에 자장면을 배달해주는 민족이니 가히 그 말을 들을 만 합니다. 원래 ‘배달’이란 말은 ‘밝달’ 즉 ‘밝은 땅’이란 말이랍니다. 밝고 따뜻한 삶, 밝고 환하고 크고 하나인 삶(한=韓=桓)을 추구했던 한국인입니다. 이름대로 밝은 땅을 잘 보존하는 배달민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고, 잘 보존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25:23에는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합니다. 땅은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왔다가 가는 손님이며, 하나님의 동거자라고 합니다. 우리 땅이 아니니 우리가 마음대로 더럽히면 주인께 예의가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는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거주하는 땅인데, 이 땅이 내 것인데 왜 간섭하냐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땅을 더럽히지 않아야 하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더럽히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더럽히지 않는 것이 인류에 공헌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더럽히지 않는 것이 지구를 살리는 길입니다. 넷째는 더럽히지 않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이 아침에 우리의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잘 새겨듣기를 바랍니다.
첫째, 서로 죽이고 죽으면 거주하는 땅이 더러워집니다.
민수기 35:33에는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고 합니다. 피 흘림이란 생명을 잃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피는 생명입니다. 성경은 피 흘림을 거부합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금지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부정적인 산물입니다. 로마서 6:23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합니다. 사망이란 죄의 결과란 말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은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살인자를 죽이지 않고 방임하는 것은 곧 땅을 계속적으로 부정케 하는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말인데 이 말은 죽이라는 뜻이 아니라 절대로 죽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강조법입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죄를 가지고 땅을 잘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땅은 가나안에 무사히 도착한 선민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에 땅을 나누는 것을 기업을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가 땅을 더럽히지 않고 보존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사마리아는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나라가 나누어진 후에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곳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 시대인 BC 721년에 앗수르의 살람에셀 왕의 침공으로 앗수르에 멸망당하고 속국이 되었습니다. 앗수르는 사마리아인을 강제이주 시키고 바빌론인 등 이방인들을 사마리아로 이주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혈통이 혼혈이 되자 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더러운 혈통이라고 하였고, 땅도 더러워졌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경내에 들어가지 않았고, 건너편에 갈 때에도 사마리아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 갔습니다. 그 땅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마리아인이 더러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을 착한 사람으로 등장시켰고, 10명의 한센병자 중 돌아와서 감사한 한 사람이 사마리아인이었고, 예수님은 사마리아로 들어가셔서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시고 그녀가 주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땅은 그렇게 해서 더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가 땅을 더럽게 합니다. 인간의 죄로 땅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인도의 신분제도는 엄청나게 엄격합니다. ‘마하르 카스트’(불가촉천민)는 밖에 나와서 다닐 때에 침이 땅을 더럽힌다고 하여 목에 항아리를 달고 다녀야 합니다. 발이 땅을 더럽힌다고 하여 발자국을 지울 수 있는 빗자루를 엉덩이 달고 다니면서 자신이 디딘 발자국을 쓸면서 다녔습니다. 이들이 땅을 더럽힙니까? 아닙니다. 피 흘리기를 예사로 하는 지체 높은 신분들이 이 땅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가이아’(Gaea)라는 땅의 여신이 있습니다. ‘가이아’는 ‘우라노스’(Uranos)라는 하늘 신의 어머니이며 동시에 아내입니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땅의 신을 만물의 어머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을 신성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옛날 농경사회에서는 땅을 만물을 생성하는 모태로 생각하였습니다.
실제로 땅이 살아야 생물이 삽니다. 땅은 모든 생물의 어머니입니다. 땅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흙은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니지만 생명을 키우는 모체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을 때 비로소 사람이 ‘생령’이 되었습니다. 땅은 생명을 주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굉장히 중요한 생명의 바탕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땅이 더러워져서 씨를 뿌리고 심어도 나지 않는 땅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이 땅이 황폐하게 되어 뿌려도 나지 않습니다. 북한도 열심히 뿌리지만 땅이 망가져서 수확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도 좋은 땅들이 척박한 땅으로 변한 곳이 많습니다. 이것이 땅을 더럽힌 인간에게 되돌아온 재앙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시각장애인을 만나셔서 이상한 방법으로 고쳐주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눈을 뜰 텐데 예수님은 침을 뱉어 흙을 이겨 바르시고 실로암이란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십니다. 당시에 시각장애인이 눈에 흙을 바르고 우스운 모양으로 실로암까지 더듬으며 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세요. 요즘은 덜 하지만 우리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시각장애인들은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었는데 얼마나 아이들이 놀려댔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놀림감이 되게 하셨습니다. 왜 흙을 바르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게 하셨을까요? 흙과 물은 생명을 부여하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눈만 뜨게 하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의 흙을 절대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흙이 더러워지면 모든 생명은 살 수가 없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는 씨앗은 하나입니다. 같은 씨앗이지만 어디에 떨어졌나에 따라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하고, 맺기도 합니다. 같은 씨앗이지만 좋은 땅에 떨어지면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씨가 좋아도 땅이 좋지 않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땅을 잘 보존합시다. 땅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마음 밭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2에는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라고 합니다. 음녀가 땅을 더럽게 한 이유는 음행입니다. 인간의 죄가 땅을 더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인간의 죄는 땅을 더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더럽히지 말고, 땅을 살립시다. 폐기물들을 잘 버려야 합니다. 폐기물을 아무데나 묻어버리는 것은 양심을 버리는 것 이상으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썩지 않는 쓰레기를 분리하여 잘 버려야 합니다. 화학제품이나 종이나 음식쓰레기는 반드시 분리수거해야 합니다.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것은 환경보존의 관점 이상으로 성경적 관점에서 따라야 합니다. 땅을 기름지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주하시기 때문
민수기 35:34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선민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선민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성지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시므로 성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은 우상 숭배이며,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이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파괴된 인간은 다른 사람과, 자연과 관계를 파괴하고 더럽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어디든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더럽히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다른 곳과는 전혀 다른 구별된 곳입니다. 출애굽기 3:5에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그 땅에 왜 거룩한 땅입니까? 하나님이 임재하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5:22에는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하십니다. 그 곳이 왜 거룩한 곳입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속죄하시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6:7에는 “이 성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그 뜨는 곳에서 다듬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성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곳에서는 시끄러운 소리조차 들리지 말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34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합니다. 왜 하늘로 맹세하지 못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더러운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더러운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배당도 마찬가지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당에서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남의 흉을 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세속적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필요하지 않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당 안으로 음식물을 가지고 들어오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에 방해되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분쟁이 생기면 서로 예배를 방해합니다. 한쪽이 기도하면 다른 쪽이 찬송을 하고, 설교를 시작하면 박수를 치며 찬양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 아무리 서로 싸워도 예배당에서는 그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인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옛날 왕정시대를 보세요. 어전에 들어갈 때는 무장을 해제합니다. 상스러운 말을 금지합니다. 임금께는 고개도 쳐들지 못하게 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임금이 계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계시는 자리를 더럽힐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역이라는 곳에 가 보세요. 현충사, 독립기념관, 왕릉 등에 가보면 소음방지, 고성방가금지, 금주금연 등 제재하는 것이 많습니다. 쓰레기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예배당은 이보다 훨씬 거룩한 곳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가 이보다 못하면 절대 안 됩니다.
부모님 면전에서 자녀들이 싸우면 이는 큰 죄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신문에 보니 부모님 면전에서 아들들이 싸웠습니다. 아들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든지 어머니가 자살하였다고 합니다. 부모님이 계시는 집에서 큰소리 내지 말아야 하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의 집에서 큰 소리를 내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갑니다. 외로운 밤에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그는 하나님을 만난 그 자리에 자신이 베고 잤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전과 같은 자리지만 하나님을 만난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다른 곳과 같은 자리이지만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깨끗한 곳입니다. 이제 더 이상 더럽히지 말아야 할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만난,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복음성가 가운데는 “오직 주의 임재 안에 갇혀 내 영 기뻐 찬양합니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찬양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갇혀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입니다.
다니엘 1:8에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라고 합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는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 자기를 더럽히지 않아야 합니까? 우리의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內住)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계시므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예기’(禮記)에는 “부위인자자 출필고 반필면 소유 필유상”(夫爲人子者 出必告 反必面 所遊 必有常)이란 말이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집 나갈 때 반드시 부모님께 고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부모님의 얼굴을 대하고 인사를 드리며, 밖에 돌아다닐 때에는 목적지가 일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님께 대한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그런데 펄 벅 여사는 “한국인은 죽어서 가장 오래 사는 민족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국인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마치 살아 계신 듯 영정을 보고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라고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늘 부모님의 면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한국인이라는 것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내 안에 계시게 살아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거하는 땅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 론
오래 전 경주에 있는 우향 김두선선생의 ‘서라벌요’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우향선생께서 요즘은 좋은 흙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흔한 흙이 없는 시대입니다. 흙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쓸 만한 흙이 없어진 것입니다. 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은 많은데 마실만한 물이 없습니다. 땅을 더럽히고, 물을 더럽히면 내가 죽습니다.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못살게 굴었던지 자연이 인간에게 보복하고 있는 듯합니다.
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더럽힐 자격조차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스리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 아닌 공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산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하나님의 임재 안에 갇혀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의 인생원칙
민 35:22-34 / 최문환 목사
첫째, 죄를 철저하게 미워해야 한다.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도피성으로 피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피성에도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살인자가 도피성으로 도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 도피성으로 가면 그 때 공개재판이 열린다. 재판에서 고의적 살인이냐, 아니면 우발적 살인이냐를 가린다. 그래서 고의적 살인이면 복수자(고엘)에게 내어주어 죽이게 한다. 그러나 우발적 살인으로 판명되면 도피성 안에서 보호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무조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다. 고의로 지은 죄와 실수로 지은 죄를 분명하게 구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고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벌을 받게 하시고, 실수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긍휼을 베푸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고의로 지은 죄와 실수로 지은 죄를 똑같이 대우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 아니겠죠? 하나님은 고의성이 없는 경우에 실수나 연약함으로 인하여 범한 죄에 대해 관대히 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의로 살인한 자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한 원칙을 세우셨다.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고의로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죽이라고 하신다.(16, 17, 18, 20, 21절) 왜인가? 3가지 이유 때문이다. ➀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➁죄는 땅을 더럽히기 때문이다.(33절) ➂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도 없기 때문이다.(33절) 피는 오직 피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요, 하나님의 공의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것은, 우발적 살인도 죄라는 것이다.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하는 것, 즉 과실치사도 무죄는 아니다. 그러하기에 26-27절에 보면,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복수자가 그를 죽일 수 있게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가 절대 착각하지 말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라는 점이다.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는지,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자기 아들 예수님까지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실 정도로 죄를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성도가 절대 지켜야 할 원칙은 죄를 철저히 미워하는 것이다.
둘째, 항상 주님 안에 거해야 한다.
도피성 제도의 특이점은 도피성에 들어가 목숨을 건진 사람은 사건이 일어난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기전까지는 도피성을 나갈수 없다는 점이다. 25절, 28절, 32절에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죽기 전에는”이라는 말씀이 반복된다. 만일 대제사장이 1년만에 죽으면 일년만에 도피성에서 해방되고, 만일 대제사장이 30년후에 죽으면 30년동안 도피성에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의 자유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실수로 죽인 죄, 즉 과실치사도 죄이기 때문에, 그의 죄를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피가 흘러야, 또는 대제사장이 죽어야 속죄가 된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와 사망에서 자유하게 하고 해방할 것임을 선포하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훨씬 더 좋은 도피성>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➀예수님은 구약의 도피성보다 훨씬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이다. 구약시대는 도피성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피의 복수자가 쉽게 쫓아온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마음으로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이 나의 구주시며 도피성”이시라는 것을 믿으면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신다. ➁예수님은 실수로 지은 죄 뿐 아니라, 고의로 지은 죄까지도 용서하시는 도피성이 되시기 때문이다. 구약의 도피성은 실수로 죄지은 사람만 받아줬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의든, 실수든, 큰 죄든, 작은 죄든 모든 죄인을 다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구주가 되신다. ➂예수님은 일시적인 피난처가 아니라, 영원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피난처가 되신다. 오직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참된 피난처 되신 예수님은 우리가 새벽에 부르짖는 기도에 응답하시며,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을 용납하시며, 영원히 인도하시는 좋은 분이다. 도피성보다 훨씬 더 좋은 예수님 안에 날마다 거하는 성도가 되라.
죄를 이기는 방법
민 35:22-34 / 장석환 목사(하늘기쁨교회)
오늘 본문은 악의 없이 살인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도피성 제도와 죄에 대한 단호한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죄를 이기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1. 제도적 장치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연히, 그리고 때로는 감정적으로 죄를 행합니다. 그들이 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만히 놔두면 악을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성경에서는 도피성을 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의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복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복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23-25절) 악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주의나 우연의 일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우연히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임을 당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당한 자의 입장에서는 또 그 사람을 죽인 사람에 대한 피의 복수를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부족함에 의한 사고가 살인의 연속 고리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도피성 제도를 두었던 것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죄를 멈추게 합니다. 죄의 고리를 끊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의 연약함에서 오는 죄를 끊을 수 있는 좋은 제도들이 필요합니다. 오늘날에는 도피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람들 안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죄는 계속하여 죄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끊을 수 있는 좋은 제도들이 필요합니다. 이 땅의 죄를 끊고 선을 창출하는 좋은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죄를 이기게 하는 나의 제도는 무엇이 있습니까? 나만의 제도로서 나의 약점을 보완해 주고, 세상에 선을 만들어 갈 수 있게 하는 나의 제도는 무엇입니까? 새벽예배일 수도 있고, 성경읽기 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화가 날 때 말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제도를 만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수 많은 죄와 자신의 죄를 이길 수 있게 하십시오.
2. 단호한 자세
죄를 이기기 위해서는 단호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의로 살인죄를 범한 살인자는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31절) 매우 단호한 말씀입니다. 살인에 대한 이러한 단호한 자세는 그 한 사람만을 생각하거나 그 한 가지 사건만 생각할 때는 조금은 가혹한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호할 때 더 많은 다른 사람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살인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단호할 때 다음에는 더 바르게 살게 됩니다. 그래서 단호한 것은 그 당시에는 가혹한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이 사랑입니다.
성경대로 오늘날 우리가 살인한 사람을 모두 죽일 수는 없습니다. 성경 당시의 시대와 오늘날의 시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늘날 어떤 판사가 그렇게 모든 살인자에게 사형을 언도한다면 그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맥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적용은 성경을 모르는 자세입니다. 성경은 항상 그렇게 말씀하는 환경이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우리가 말씀을 따르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만큼 오늘날 우리의 죄에 대해 단호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단호함이 때로는 더 큰 문제를 낳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단호함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그래서 단호하게 비난합니다. 단호하게 공동체에 문제를 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단호함을 우리는 오늘날 기독교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경우 자기 자신을 향한 단호함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향한 단호함은 개인적인 주관과 오류와 비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단호하십시오. 자기 자신은 자기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그래도 가장 오류가 적을 것이요,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책망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단호하게 죄에 대응해야 죄의 유혹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 단호한 편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잘 보이는데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우유부단하지는 않습니까?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 조금더 더 단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모든 전쟁에는 전략이 필요하듯이 죄를 이기기 위해 좋은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그냥 싸우면 죄에 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죄를 이기기 위한 좋은 제도를 만드십시오. 그리고 단호한 자세를 가지십시오. 그래서 죄를 더 잘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카지노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카지노란 ‘오락시설을 갖춘 공인 도박장’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락시설을 갖춘 화려한 그 공인 도박장에서는 재미 있는 일들이 벌어진답니다. ‘카지노 앵벌이’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카지노 앵벌이란 “카지노에서 전재산을 탕진해 오갈 데가 없어진 이들이 카지노를 직장 삼아 매일 출근하면서 게임보조, 심부름, 게임좌석판매 등으로 얻은 몇 푼의 돈으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신종 직업군”이랍니다. 현재 이들의 규모는 강원랜드에만 500명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산된답니다. "땅거미가 지면 귀신에게 홀린 듯 기차에 몸을 싣는다...이번이 마지막이다...본전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되찾아야겠다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미친놈처럼 그 먼 곳을 갔던 내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나 자신이 정말 한심하다 못해 저주스럽다" 카지노 앵벌이로 살고 있는 한 사람이 과거를 후회하며 쓴 글입니다. 이 사람은 어느 날 친구를 따라 왔던 강원랜드에서 순식간에 1억원이라는 거액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본전을 찾기 위해 틈만 나면 서울 청량리역에서 강원랜드가 있는 고한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귀신에 홀린 듯 청량리역과 고한역을 오고간지 1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대박이 아니라 '전재산 11억원 탕진, 아내와의 이혼'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제불능의 도박 중독자로 낙인돼 세상에서 버림받은 그가 다시 찾아갈 수 있었던 유일한 안식처는 선배 앵벌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패배자로 만든 카지노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자기처럼 서서히 파멸의 늪으로 빠져가는 사장님들(앵벌이들의 고객)을 보면서 카지노에서 민생고를 해결하는 앵벌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돈만 생기면 인생역전을 위해 또 다시 배팅을 하는 앵벌이 생활이었습니다.
죄 많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죄를 쌓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죄의 하수인으로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까?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것도 부족하여 그곳에서 (자기처럼 파멸해 가는 다른 사람을 지켜보면서)앵벌이를 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오늘 성경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면서 레위인에게 성 48개를 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48개의 성중에 6개의 성을 도피성으로 만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서 사는 자세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그냥 죄의 하수인으로서 살아야 하는지 아니면 다른 길이 있는지 말씀에서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죄는 이 땅에서 필연적입니다
성경에서는 죄를 어떻게 다룰까요? 성경에서는 죄인을 어떻게 다룰까요? 죄인은 이 세상에 한 명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여야 한다고 말할까요? 우리에게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죄가 없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죄인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죄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인이 없나니 한 명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라도 말해 보십시오. 그들은 많은 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도 죄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민수기의 저자인 모세도 많은 죄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성군이라고 말하는 다윗도 죄가 많았습니다. 온 인류는 모두 죄덩어리였습니다. 성경이 그들의 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와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두 가지를 기록하고 있는데요. 먼저 레위인에게 주는 성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레위인들에게 성 48개와 그 인근의 농경지와 초지를 주도록 하고 있는데요. 본래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지파로 분리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전(성막)과 말씀에 봉사를 위해 분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속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그들은 가나안에 땅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12지파가 내는 십일조로 생활을 하도록 했습니다. 12지파의 십일조면 1개 지파에 해당하는 레위인들이 먹고 살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따로 성과 땅을 주고 있습니까? 비록 이 땅이 이스라엘 전체 땅에 비교하면 0.1%의 땅에 불과한 작은 땅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레위인들이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보장해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이 약해져서 언제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최소한의 생활장치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실재로 이후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일을 해야 되고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 그 때 이 최소한의 성읍과 땅은 그래도 많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읍과 땅은 무엇을 전제로 하여 주어진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제대로 내지 않을 때를 전제로 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도피성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관장하는 도피성을 만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도피성은 더욱더 인간의 죄와 연약함을 인정하는 제도입니다. 특히 도피성은 살인과 관련된 성인데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너희들은 살인이라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해도 지금 이스라엘의 분위기로는 충분히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데 무슨 살인을 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조건 우리를 내치십시오”라고 말할 만한 그런 상황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살인이라는 가장 큰 죄까지도 가정하면서 그에 맞는 법을 주시고 계십니다. 도피성이라는 것은 만약 어떤 사람이 고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피할 수 있는 성이었습니다. 이 도피성 제도를 보면 사람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죽이는 그런 큰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인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에 관련된 재미있는 한 부분이 나옵니다. 만약 도피성에 피한 사람이 도피성 밖으로 나오면 보수자(죽임을 당한 사람의 인척)에게 죽임을 당해도 그 보수자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고의로 죽인 것이 아니어도 죽임을 당한 사람 측에서의 입장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고의가 아니었어도 살인을 당한 사람의 마음은 원통하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망자는 꼭 도피성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일정 기간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죄는 이 세상에 있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필연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이 땅에 살면서 죄에서 자유로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꿈에 그리던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죄는 여전히 따라갈 것입니다. 죄는 그렇게 인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렇게 따라다니면서 인간을 괴롭혔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냥 선하게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인 된 우리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죄인 된 우리를 잘 아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갑자기 완전히 거룩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 있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죄 많은 그 속에서도 우리가 죄를 극복하고 선을 만들어 가기 위해 싸우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죄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도 그 죄와 싸워서 그 죄를 이겨가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특히 세상에서의 크고 작은 수없이 많은 죄들의 반복은 우리를 죄에 대해 무디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한 두 번 해 보려다 안 된 것은 더욱더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죄와 싸울 때는 열 번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싸워야 죄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종으로 삼은 악을 이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와 싸우십시오. 그 진보가 눈꼽만큼 밖에 없어도 앞으로 나가십시오. 아니 어떤 때는 좁쌀만큼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죄와의 싸움을 선포하면서 앞으로 나가십시오. 그렇게 죄와 싸움을 선포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싸우지 않기 때문에 죄는 더욱더 기세 등등합니다. 죄에 맞서 싸울 때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맞서 싸울 때 죄는 우리 안에서 기세가 꺾입니다. 사람도 가만히 놔두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더욱더 기세등등하지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그동안 나를 휘어잡던 죄와 싸워야 합니다. 이제는 주도권을 우리가 쥐어야 합니다. 죄가 내 생의 주도권을 쥔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다 이기지는 못한다 하여도 하나하나씩 싸워 물리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시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가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인 된 우리가 우리의 죄를 알면 우리의 죄를 씻어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과 합력하여 ‘죄 씻어내기 프로젝트’를 가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죄를 모르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한 해를 마치며 죄 뿐인 자기를 발견합니까? 그렇다면 기뻐하십시오. 그것을 알게 되었으면 50%는 성공한 것입니다. 이제 나머지 50%의 성공을 위해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내년에도 죄와 싸우기 위해 계획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싸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람들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은 ‘피흘림의 죄’에 대해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피흘림을 왜 그리 엄격하게 말씀할까요? 그 피는 한 사람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따라 창조된 참으로 소중한 한 사람의 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는 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합니다. 우리의 죄는 사람을 직접 죽이지는 않아도 직간접적으로 수 없이 사람들에게 화살을 날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재로 수많은 영혼이 죽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우리의 죄에 대해 그렇게 수수방관하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의 죄에 대해 태연자적할 수 있겠습니까?
죄와 싸우십시오. 그 과정이 때로는 많이 힘들고, 길고 긴 여정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합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싸운다는 것 자체가 이기는 것입니다.
2007년 마지막 주입니다. 한 해를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죄 많은 세상에서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까? 그리고 더욱더 가슴 아픈 일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가슴에 피멍을 들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어떡합니까? 그것이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으로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만은 분명히 하십시오. 그 죄에 체념하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발견도 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더욱더 안 되고요.
일어나 죄와 싸우십시오. 아주 조금밖에 가지 못할지라도, 죄와 싸우는 것이 힘들지라도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야 하는 복된 길입니다. 그것이 죄 많은 세상이어도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싸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됩니다. 싸우려고 일어서기만 하면 됩니다. 싸우려고 일어서서도 또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그렇게 싸우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으로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죄의 하수인으로 ‘카지노 앵벌이’처럼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땅이 비록 죄가 가득하지만 그러기에 더욱더 일어나 이 땅의 죄를 극복하고 씻어내며 아름답게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민수기 35:33-34 / 코너스톤장로교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피로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여기서 피로 더럽히다는 말은 ‘살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는 것이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더럽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땅을 더럽게 한다는 말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일어난 사건과 연결해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땅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땅에서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나기 시작했고, 땅은 이전처럼 인간에게 우호적인 곳이 아닌 종신토록 땀을 흘려가며 일을 할 때만 먹을 것을 내주는 상태로 변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류의 대표였던 아담이 죄를 짓자 그가 거주한 땅의 상태를 악화시킨 것이죠. 물론 본문에서 말하는 땅이 더럽혀진다는 말은 실제로 땅 위에서 쓰레기가 뒹굴고 피 비린내가 나는 것처럼 실제로 더러워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을 때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영적으로 더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이 범죄하였을 때 만물이 저주를 받고, 파괴되었던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될 때 분명 커다란 영향이 그들의 거하는 장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본문 말씀 33-3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는 말씀을 두 번씩이나 강조해서 반복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이 말씀은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33절에 사용된 ‘더럽히다’란 단어는 히브리어 ‘타하니푸’가 사용되었고, 34절에 사용된 ‘더럽히다’란 단어는 ‘테탐메’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 두 단어는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성경에서 이처럼 뜻이 유사한 두 개의 다른 동사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은 의미를 더욱 더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이 명령은 강한 어조로 그들에게 전달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성막’까지 짓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도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따라서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어 그들의 땅을 더럽게 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 시키며,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거하는 땅을 떠나시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주하는 땅은 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 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땅을 죄로 더럽히지 않고 거룩한 상태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34절 말씀을 한 번 더 함께 읽겠습니다. “(민 35:34)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주지는 단순히 그들만 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거주하시는 곳 입니다. 34절 후반절에 나오는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는 말씀에 ‘거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쇼켄’이란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느 장소에 장막을 치고 거하다’라는 의미가 있어서 한 장소에 정착한 모습을 묘사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그 땅 가운데 하나님의 장막인 성막을 치시고 자리 잡고 지속적으로 거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거하고 계신 이스라엘 백성의 땅은 죄를 상징하는 피로 더러워져서는 안되며 거룩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장막을 치고 살지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막’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놀라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 말씀을 함께 찾아 읽도록 하겠습니다.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의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혼 안에 있던 죄의 법을 깨트리시고 그 안에 생명의 법, 즉 성령의 법을 새롭게 심으십니다. 그로 인해 죽었던 사람의 영혼이 살아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거듭남이라 말하며, 신학적으로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중생을 통하여 신자는 그의 의신 안에서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게 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이고 동시에 자신의 주인이심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심’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성령의 역사인 ‘중생’을 통하여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 그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함께 거하시게 됩니다. 바로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성막을 치시고 거주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는 신자의 영혼 안을 영적인 성전으로 만드시고 그 안에서 성령으로 거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제 신자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는 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하게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졌던 것과 같이, 이제 신자는 그의 영혼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죄를 다 정리하고 깨끗이 씻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갔던 것처럼, 신자가 죄를 짓게 되면 그의 영혼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가장 큰 고통이며 동시에 형벌 입니다. 따라서 누구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하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평상시 집 안을 잘 청소하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귀한 손님이 오시는 날이 다가오면 깨끗이 집을 청소하는 법 입니다. 방을 쓸고, 걸레질 하고, 청소기를 돌리며, 평상시에는 어지럽혀 있던 모든 집안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합니다. 심지어 이사 와서 한 번도 닦지 않았던 액자나 가구의 선반에 쌓인 먼지까지 닦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이런 청소를 합니까? 정리되지 않고 지저분한 집안에서 사는 모습은 부끄럽기 때문 입니다. 또한 집 안의 물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기 때문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인 손님을 맞이할 때도 집안 청소를 하는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주 하신다는데, 회개를 통해서 죄로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의 영혼은 성령의 전이며, 그 안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 성령이 그 안에 거주하고 계십니다.
혹시 지금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해 더러워진 채로 있어, 성령을 소멸케 하지는 않았습니까?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는 냄새가 나고, 범죄로 인한 삶의 쓰레기들이 수북이 쌓여 있지는 않습니까? 쓰레기통도 안 비우고, 설거지도 안 해놓고, 땀에 찌든 빨래가 널브러져 있는 집에는 사람도 들어가기 싫어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죄로 인해 더러워진 영혼에 성령을 초대하는 것은 무례한 초대 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를 통해 우리의 더러워진 영혼을 깨끗하게 청소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갈망하십니까? 우리 삶에 더 가까이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원하십니까? 마음을 정리하십시오. 죄로 더러워진 영혼부터 청소하십시오. 그리할 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이 찾아오시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