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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네모네
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상모는 아직 길게 남아있는 줄을 보며 고인 숨을 토해냈다. 간단하게 끝나리라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30분이 지나고도 줄어들 기세가 없으니 괜스레 목이 타면서 이마 언저리가 근질근질했다. 탁자에 올려 진 생수병을 힐끗 쳐다본다. 물은 진즉에 동이나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켜보아도 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따끔거림만 심해질 뿐이었다. 예정된 대로라면 지금쯤 가볍게나마 휴식을 가졌어야 할 시간이건만, 담당자는 멀찍이 떨어져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헤벌쭉하게 벌어진 입이며, 짙은 호선을 그린 눈꼬리를 보아 연인쯤 되리라.
“저기요?”
“아, 네.”
상모는 반쯤 놓았던 정신을 챙기며 다시 바쁘게 손을 놀렸다. 눈앞의 여인이 손에 쥔 책을 건네 왔다. ‘감동 실화’, ‘80만 부 돌파’, ‘감성적인 작가 박상모’등의 어구들로 치장된 흰색 바탕의 표지 중안에는 붉은색으로 ‘아네모네’라고 쓰여 있었다. 책장을 넘겨 서명을 했다. 구불구불한 모양세가 박상모라는 글자를 연상시켰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여인이 괴성을 지르며 사라지고 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에게 더 서명을 해서야 담당자는 태연하게 걸어왔다.
“이제 슬슬 휴식 하셔야죠.”
후안무치한 태도에 쓴웃음이 났지만 이제야 쉴 수 있다는 생각에 상모는 넘어가기로 했다.
“그럼 그럴까요?”
‘그러시죠.’라며 고개를 끄덕인 담당자는 큰 소리로 서명회의 종료를 알렸고 줄을 서있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여기저기서 불만 섞인 함성이 터져 나왔고 완고한 담당자의 태도에 애꿎은 상모에게만 힐난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사람들의 간절함과 무언의 압력이 담긴 눈총에 상모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그의 귓가로 여린 목소리가 들렸다.
“싸인 더 해주시면 안 돼요?”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린 상모는 휠체어에 탄 창백한 피부의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자신이 쓴 책을 품에 고이 안고 있는 소년은 병을 알고 있는 듯 한눈에 보기에도 가냘파 보였다. 깊이 눌러쓴 모자는 눈썹 위부터 머리 전체를 가리고 있었으며, 점퍼를 덧입은 상의가 무색하게, 힘없이 드러난 푸른 빛깔 환자복 하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소년의 얇은 다리 선을 그려냈다. 병마와의 사투. 육신의 소유를 둘러싼 사투. 너무나도 잔혹하고 너무나도 애잔한 그 싸움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상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온 기억의 향수는 거대한 파장이 되어 온몸에 과거를 진동 시켰다. 알싸하게 났던 소독약 냄새. 귓가에 웅웅 울렸던 공간의 고동 소리. 시야를 뿌옇게 흐려왔던 아련한 습기와 뜨겁게 시큰거렸던 눈까지도… 상모의 의식이 까마득히 침전되어갔다.
나무들이 하나둘 형형색색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밤낮가리지 않고 열을 토해냈던 여름은 할당된 양 만큼의 일을 끝 맞추었다고 말하듯, 아차 하는 순간 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제 상모는 좁고 밀폐된 버스에서 혹여나 땀 냄새로 남을 괴롭히면 어쩌나 하는 유의 걱정은 거둘 수 있었다.
“창문 닫으려고?”
진모의 말에 상모는 창문으로 향하던 손을 멈추었다.
“어 춥지 않을까 해서.”
“별로. 괜찮아 적당히 시원하고 좋은 걸.”
“그러냐.”
진모에게 한번 눈길을 준 상모는 창가에서 돌아와 침상에 앉았다. 하긴. 창문이라도 열어놓지 않으면 소독약 냄새 때문에 스스로가 버티질 못할 터였다.
“그보다 나 사과나 좀 깎아 줄래?”
상모는 일언반구의 대답도 없이 능숙한 솜씨로 사과의 껍질을 벗겨 나갔다. 묵묵히 사과의 꼭지를 때어내는 상모를 보며 진모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은 사과를 진모에게 넘겨주던 참에 젊은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상모 와 있었구나.”
자주 얼굴을 비추는 간호사였다. 간호사가 자못 친한 체를 해오는 통에 상모는 적당히 웃으며 목례를 해야 했다.
“자, 먹어.”
“하하 고마워.”
진모 사과 한쪽을 집어 크게 한 입 베어 먹었다.
“우와 맛있다.”
링거 교체를 멈추고, 간호사는 설레발을 치며 사과를 먹는 진모와 간병자용 침상에 앉아 책을 읽는 상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은 쌍둥이 인데도 상당히 다른 느낌이야.”
“어떤 식으로요?”
한층 밝게 싱글거리는 진모의 미소에 상모는 희미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는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동생이. 자신의 얼굴에서 안경만 뺀 모습의 저 쌍둥이 동생이 저런 사이한 웃음을 흘릴 때에는 그의 내심이 겉으로 보이는 양 평온하지 않다는 걸. 물론 그 허상을 판별해 내는 것이 다른 사람들, 심지어 부모님마저도 불가능해 보이지만 말이다. 상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진모의 미소가 마냥 유순해 보였다.
“음, 상모는 오빠 같은 믿음직한 느낌인데, 진모는… 솔직히 철없는 남동생 같아.”
진모가 연신 싱글벙글 웃자 그 웃음에 홀린 간호사는 실수를 범해버렸다. 상대에 따라서는 적잖이 실례가 되는 말일 텐데도 아무 거리낌 없이 입 밖으로 꺼내고 만 것이다. 이처럼 그의 미소는 상대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리는 기이한 능력이 있었다. 그는 천진난만한 악동의 모습으로 입 안에서는 뱀을 키우는, 그런 두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진모의 웃음이 그 속에 어떤 독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상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모 앞에서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필요에 의해서 상대방의 입을 통해 원하는 사실을 알아내는 진모를 볼 때면 그의 앞에서 말하고 싶은 기분이 모조리 사라졌었다.
“그런가요?”
“그래 그렇다니까.”
호호 깔깔 거리는 간호사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웃는 진모의 모습이 상모는 어색하기만 했다. 한참을 웃고 떠들던 간호사는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더니 인사를 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그녀가 돌아간 것 역시 자의는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돌아가고 싶게끔 진모가 적당히 분위기를 식혔으니, 자의와 타의 그 중간 어디쯤이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간호사가 나가자 진모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왜? 기분 좋아?”
태워버리고 싶었다. 진모의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어투도, 투정 아닌 투정도 모조리 쓸어 담아 한 줌의 재로 소각시켜 버릴 수 만 있다면.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의지되고, 믿음직한 오빠 말이야.기분 좋지? 그래 네 눈엔 나도 돌봐주어야 할 어린애로 보일거야. 난 철부지 남동생이니까.”
-아니야. 내게 넌 어린애 따위가 아니야. 넌…
꿀꺽.
목 언저리까지 올라온 말을 도로 삼키며 상모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네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
“몰라? 내가 화를 내? 나 화 안냈어, 안냈다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진모가 사과접시를 집어 던졌다. 다행히 플라스틱 일회용 접시를 썼기에 접시가 깨지는 화는 피했지만, 애써 깎은 사과들이 먼지와 함께 바닥에서 뒹굴게 됐다.
바닥에 떨어져 제 역할을 상실한 자신의 정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상모는, 침착하게 허리를 숙여 바닥을 정리 했다.
“왜 묻지 않아?”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상모는 사과들을 다시 접시에 담으며 답했다.
“뭘 묻지 않아?”
“화나지 않았다고 하구선, 화를 낸 이유를 왜 묻지 않느냐는 말이야.”
“궁금하지 않아.”
“아니 궁금해 보여.”
“아니라고.”
“그렇더라도 난 네게 설명해줄 의무가 있어. 넌 내가 어지른 바닥을 청소해주니, 난 네게 내가 화낸 이유를 알려줄게.”
-후-하고 한숨을 내쉰 상모는 접시를 탁자에 올리며 진모를 바라보았다.
“그래. 왜 화를 냈는데?”
“내가 화내길 바라는 것 같아서.”
상모가 두 눈만 깜빡이자 진모는 예의 사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나지도 않은 내게 화났냐고 묻길래, 내가 화내길 원한다고 생각했지.”
진모의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졌다. 깊은 밤에 떠오른 초승달 같은 미소였다.
어머니가 웃으며 사과 한쪽을 주었다.
“우리 아들, 먹어.”
“고마워.”
포크로 찍은 사과를 먹자 아삭하는 소리가 났다. 다만, 어머니의 손 안에서 긴 마사지 끝에 깎아 낸 사과라서인지 묘하게 미지근했다. 사과 하나에 들인 시간과 공에 비해 어머니가 깎은 사과는 투박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껍질도 군데군데 남아있고 하여튼 상모의 사과보다는 상당히 질이 나빴다.
“사과가 미지근해.”
“그러니?”
“그래도 먹을 만 해.”
어머니의 성의를 생각해 먹고는 있지만, 껍질을 벗기던 장면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사과가 푸석푸석하게 느껴져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건 뭐라니?”
“응?”
진모가 남은 사과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던 찰나, 어머니가 검은색 노트를 손에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뭐야?”
“모르겠어. 상모 거 인가?”
어머니가 상모의 이름을 꺼낼 때, 미간에 옅게 내 천(川) 자를 그리는 것을 보며 진모는 또다시 슬쩍 웃음을 흘렸다.
“아마 상모 거 인가봐.”
“그렇겠지?”
“그거 버려도 될 거야.”
기분 나쁜 물건이라도 만진 것처럼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가 노트를 원래의 위치로 가져가려 했지만 진모는 그를 제지했다.
“이걸 버려도 된다고?”
“어, 그 녀석 성격상 챙겨야 할 물건을 이렇게 쉽게 놔두고 갈 리 없잖아?”
“그런가?”
“그래 그렇다니까.”
어머니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금세 그런 기색을 지우며 노트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하긴, 정말 중요한 거였으면 직접 챙겼겠지. 그런 아이니깐.”
“아무렴. 그렇고말고.”
어머니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나간 후, 진모는 조소를 지었다.
진모는 또렷하게 기억했다. 어제, 그러니깐 일요일 날 상모가 수행평가라며 문학 책을 펴놓고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던 장면을 말이다. 십중팔구 그 노트가 수행평과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진모는 즐거웠다. 몸이 아프기 시작한 뒤, 상모를 괴롭히고 골탕 먹이면 묘한 쾌감이 뒤따랐다. 이젠 일련의 행동들이 끊을 수 없는 마약처럼 돌발적일 때도 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그의 형에게 어떤 장난을 치던 진모는 물론이고 상모 또한 남에게 발설하지 않는다. 그건 어디까지나 형제간의 터부 같은 것이므로.
“그나저나 엄마는 무슨 화장실을 이렇게 자주 가는 거야. 변비인가?”
요즘 들어 화장실을 자주 가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진모를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밤이 깊어 어머니가 집에 돌아간 밤. 썰렁한 일인 병실에 티브이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을 때, 정적을 깨며 교복을 입은 상모가 들어왔다. 인사도 없이 자신을 지나쳐 가는 상모가 왠지 우스웠다. 책상에 다다라 주위를 살피는 상모에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나타났다.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움찔 몸을 떠는 상모. 상모는 우물쭈물 하더니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내 노트 봤어?”
달려들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표정이었다. 아마 노트의 행방이 어렴풋이 짐작 되었나 보다.
“아 그게 네 거였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버렸는데. 어떡하지?”
상모의 주먹이 가볍게 떨렸다.
“뭔데? 비싼 거야?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하나 사줄까?”
상모의 잇새로 작은 신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됐어. 그거 그냥 버려도 되는 거 맞아.”
팽팽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언제나 그렇듯 진모였다.
“그렇지? 그런데 버려도 되는 물건을 찾으러 이 밤에 굳이 찾아온 이유는 뭐야?”
상모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제발 봐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뭐, 아무렴 어때. 볼일 끝났으면 이제 나가지? 그만 자고 싶은데.”
상모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마디의 인사도 없이 병실을 나섰다. 진모는 이유 모를 화가 났다.
이불에 쌓인 발이 눅눅했다. 온종일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않고 있으니 좀이 쑤시는 건 둘째 치더라도 비어 나온 땀으로 발이 젖는 건 도저히 적응이 되질 않았다. 발가락을 움직일라 치면 발가락끼리 붙은 접착력이 어찌나 센지, 떨어질 때 쩍 하는 환청이 들렸다. 시원하게라도 있으면 괜찮을까 싶어 창문을 열어도 어머니가 철저하게 막아서니 그 또한 불가능 했다. 그렇다고 발이 찝찝해질 때마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너무 귀찮았다. 차라리 하루에 두 세 번이나 쓸까 말까한 이 발모가지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바퀴라도 박아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진모의 고민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슬슬 쌀쌀해 지니 따뜻한 수면양말을 사주겠다며 그의 속을 긁었다.
정말로 그런 끔찍한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모는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말이야 양말해서 생각난 건데, 4년 전, 그러니까 나 초등학교 5학년 때 일 기억나?”
“무슨 일?”
“상모가 새로 산지 일주일도 안 된 옷을 찢어먹은 사건 말이야.”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기억나. 애가 갑자기 망령이 들었는지 삼촌 결혼식 날 입으려고 산 새 옷을 커터칼로 누더기를 만들어 놨었지. 그때는 그 애가 정말 미쳐버린 줄 알았어.”
어머니가 또 다시 혀를 한번 찼다.
“생각해 보면 그리 유별난 일도 아니었지. 워낙 말수도 없고 감정표현도 없고. 여간 잔망스런 아니가 아니니까.”
어머니의 기억은 나무랄 데가 없이 완벽했다. 조작한 그대로의 기억이었다. 변명한마디 않고 자신의 죄를 모조리 뒤집어쓰던 상모가 떠올라 진모는 기분이 즐거워 졌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설마 내 손에 멀쩡한 상태인 진모의 새 옷과 커터칼이 함께 들려있었으리라고는, 상모 그 바보 같은 쌍둥이 형이 누명을 썼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근데 그 이야기는 왜?”
말하고 싶은 속마음을 꾹 내리 누르며 진모는 대답했다.
“그냥 상모 생각이 나서.”
“얘도 참 싱겁긴.”
“하하 그런가.”
묘한 정적이 흐르며 왠지 모르게 어머니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결국 마지막 글자, 마침표 하나까지 모두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지향하는 세계에 먼저 걸음을 내딛은 선배의 작품을 탄복어린 눈빛으로 또다시 훑어본다. 과연 이었고. 역시나 이었다. 수번을 읽은 작품이지만 매 읽을 때마다 감회가 새로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이었다. 한 번 더 읽을까 하여 책장의 첫 페이지로 손을 올리지만 시기적절하게 틀어진 티브이 소리가 책장에 올린 손이 무안할 정도로 크게 터져 나왔다. 폭발할 만치 커다란 소리는 읽을 수 있으면 읽어보라며 그를 기만했다. 이런 환경에서 책을 읽는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고쳐말하면 그리 어렵지만도 않다-지만 공연히 자극해 리모컨을 쥐고 있는 저 손에 호승심이라는 불을 붙일 연유도 없기에 상모는 책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시선을 올려 바라본 진모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여과없이 나타나 있었다.
“더 안 읽어? 그 책을 들기만 하면 적어도 3시간은 앉아서 움직이질 않잖아.”
“슬슬 어머니 올 시간이니까.”
진모가 뭐라고 떠들은 상모는 바보가 되어, 움직이는 화면을 응시했다.
버럭 소리를 지르면 만족할지, 엉엉 소리 내어 울면 만족할지. 진모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의 이죽거림이 자신의 건강한 육체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보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으면 있지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콕 집어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표표히 유영하는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해 끄집어 내자면 질투보다는 자기학적 쾌감의 그것에 가깝다. 아니면 그것과 질투가 뒤섞인 어떤 것일지도…
“물 떨어졌더라. 좀 떠다줄래.”
진모는 상모에게 페트병을 툭 던졌다. 냉장고 안에 어머니가 집에서 떠온 보리차가 있음을 알면서도 상모는 그 페트병을 들고 병실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탁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상모가 두고 간 가방이 보였다. 가방을 끄집어 당겨 무릎에 얹고 안을 뒤져보았다. 필통, 책, 노트, 지갑들이 들어있었다. 별 신통찮은 물건만 가득한 가방에 딱 하나 진모의 관심을 끄는 물건이 있었다. 원고지 뭉치였다.
“별 같잖은 짓을 다 하네.”
원고지의 한쪽 끝을 파라락 넘겼다. 상모의 깨끗한 글씨가 빼곡히 적혀져있는 원고지. 원고지 안에는 그의 소설이 담겨져 있었다.
제목은 정해지지 않은 그의 소설에 진모의 가슴에 칼 한 자루가 뽑혀져 나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무형의 칼날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진모의 눈이 칼의 예기를 닮아갔고 돌연 그의 손이 원고지를 찢어버렸다. 좍좍하고 잘잘하게 찢어진 원고지는 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게 되었고 종이꽃이 되어 병실에 흩뜨렸다. 마지막 종이 조각까지 바닥에 내려앉았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상모가 들어왔다.
“이게 무슨…”
상모의 망막에 난장판이 되어있는 병실이 먼저 맺히고, 뒤를 이어 진모의 미소가 맺혔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한 그 미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들고 있던 페트병을 내동댕이치며 바닥에 낭자한 꽃종이들을 살폈다. 원고지 조각이었다.
“미안 실수였어. 찢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평소와는 다른 느낌의 비아냥거림이었지만 눈치체지 못한고 와락 달려들었다. 진모의 멱살을 움켜쥐고 벽에 밀쳐 붙이며 울컥 욕지거리를 토했다.
“한 달 걸려 작성한 수행평가를 쓰레기 버리듯 버렸을 때도, 말도 안 돼는 누명으로 부모님 눈 밖에 나게 한 것도, 아끼던 책을 강우에 집어 던졌을 때도, 그 외의 때에도 참았다. 짜증나게 하는 것도, 화나게 하는 것도 참았어. 뭐든 한 걸음 양보했지. 근데 그게 두 걸음 세 걸음이 되더니, 이게 그 결과냐? 말해봐! 이게 내가 너에게 모든 걸 양보한 결과냐고!”
상모의 눈빛이 매섭게 이글거렸다. 졸린 목이 아파 켁켁 거리는 와중에도 진모는 상모가 전에 없이 화내는 모습에 놀라고 있었다.
“이, 이것 좀 노, 놓고…”
호흡이 달리며 눈물이 찔끔 나왔다.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짝 소리와 함께 목을 죄던 압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목을 부여잡고 연신 기침을 해대며 바라본 곳에는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는 상모와 어머니가있었다. 어머니였다.
“아픈 애한테 도대체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생각이 있니 없니?”
이번만큼은 사과를 하려했는데 어느새 들어와 눈을 부라리는 어머니 덕택에 진모는 어머니 등 뒤로 숨은 꼴이 되었다.
“말해봐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고요한 병실에 어머니의 호통소리만 점점이 퍼졌다. 상모는 어머니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내달렸다. 문턱을 넘어가기 직전, 진모는 상모와 눈이 마주쳤다. 타오르던 분노는 모두 소각됐는가. 텅 빈 눈동자엔 재만이 남아있었다.
정밀검사를 받은 후면 언제나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환자 대우를 받으니 몸이 기분이 상해, 자신의 건강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했다. 문뜩 달력을 보니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가 병간호를 해주시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진모는 한 달 가까이 상모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헛기침을 몇 번하고 창밖을 내려다보니 가을 날씨가 무척이나 좋았다. 병동 주변에 잘 가꾸어 진 산책로가 걷고 싶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새하얀 환자복을 입었지만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거닐고 있는 그들은 흡사 소풍이라도 나선 것 같았다.
“엄마 우리 산책이나 나가자.”
이불속 발가락이 끈적거렸다.
날씨가 쌀쌀하다며 극구 반대하는 어머니 때문에 가을 날씨의 청량함과 일광욕의 이점에 대해 일장연설을 펼치고, 그도 모자라 담당의사의 허락을 받아낸 후에야 진모는 산책을 나설 수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등을 떠밀다 시피 산책을 강요하던 의사가 기분 나쁜 눈빛으로 쳐다보아 조금 고깝게 느껴졌다. 부득불 따라 나서긴 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병실로 돌아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물론 진모는 간만의 산책을 충분히 만끽할 때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과연 날씨는 창으로 보았던, 아니 그 이상으로 쾌청했다. 색색 벽돌로 잘 포장된 산책로 가운데에는 차선이 자동차 차로를 양단하듯 산책로를 평행으로 하여 화단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듬성듬성 그 색을 변모한 단풍이 약간은 더운 햇빛을 가리며 차양역할도 해 주었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도 진모의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물론 그 역시 나비의 날갯짓으로 날려 온 산들바람이 시원하게 어루만져 주었기에 기분 좋은 땀이었다.
약 30분 정도의 산보 후 진모는 단풍 그늘 아래의 벤치에 앉아 들뜬 심장을 진정시켰다. 벤치엔 나무그늘과 햇빛이 알맞게 섞여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바람이 불면 반짝거리는 그늘 사이의 태양처럼 그의 기분도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작은 탄성과 함께 어머니가 몸을 일으켰다.
“엄마 화장실 좀 다녀올게. 기다리기 싫으면 먼저 들어가 있어도 돼.”
종종걸음으로 병원 건물을 향해 뛰어가는 어머니. 어머니 손의 휴대폰도 빛나고 있었다.
터덜터덜 병실로 가던 중 진모는 어머니가 흰 가운의 의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의사가 무어라 입을 움직였다.
그의 수명이 3개월 남았더랬다.
날이 갈수록 진모는 말이 없어지고 표정도 없어졌다. 죽음을 직감한 감성이 서서히 존재를 지워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는 더욱더 외벽을 두터이 하며 본연의 슬픔의 방에 타인에 대한 일말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세계에 사는 듯 행동했던 것이다. 눈 밑에가 거무죽죽하게 그늘이 져 있었고 눈빛은 쾡 하니 죽어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철옹성처럼 단단히 세워져 있던 성벽을 뛰어넘어, 무언가가 그의 시계(視界)에 들어왔다. 원고지였다. 원고지를 쥔 손을 따라 바라본 곳에는 상모가 서 있었다.
“뭐야?”
싸늘한 목소리는 상모가 몸서리를 치게 했다.
“읽어봐. 전에 네가 찢었던 그 소설이야.”
제법 두툼하게 포개져있는 종이더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진모는 그것을 들고 찬찬히 읽어 보았다. 한 장 한 장 원고지가 넘어갔고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도 넘어간 순간 왈칵 진모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주인공은 결국 병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거야?”
“그래.”
“주인공의 형은?”
“동생과 함께 무척이나 행복하게 살아가.”
진모는 꺼이꺼이 눈물을 흘려댔다. 상모는 말없이 그런 진모를 보듬어 주었다. 한참을 울고서야 진모는 목이 메는지 탁하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 사과나 깎아 줄래?”
“그래.”
언제나처럼, 상모가 깎아준 사과는 맛도 모양도 훌륭했다. 진모는 비로써 인정했다. 어머니의 사과보다 상모의 사과가 더 먹고 싶었음을. 어느 때라도 말이다.
사과를 먹던 진모는 그제야 상모의 손에 꽃송이가 들렸음을 알아차렸다.
“그거 내꺼야?”
“어. 오다가 샀어.”
“저기 화분에 담아줄래?”
진모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간 진모는 주섬주섬 꽃을 옮겨 담았다.
“그거 꽃 이름이 뭐였지?”
“아네모네.”
“맞아 아네모네. 옛날 우리 생일에 할머니가 그 꽃을 사온 적 있었지?”
“맞아. 내게는 빨강색을, 너에겐 보라색을 주셨었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쌍둥이는 웃었다.
“그때 할머니가 이 꽃에 꽃말을 말씀해 주셨는데 기억나질 않네. 뭐였는지 생각나?”
“아니, 모르겠는데. 그나저나 넌 정말 학습능력이 떨어지는 구나.”
“무슨 소리야?”
“그때 분명 내가 빨강색은 싫다고 했잖아.”
상모는 화분의 붉은 꽃을 보며 슬리퍼를 바닥에 꾹꾹 눌렀다.
“난 빨강색이 좋은데.”
“그건 네 이야기고. 이게 내 선물이지 네 선물이야? 난 보라색이 더 좋단 말이야.”
“그럼 어떡할까. 바꿔올까?”
상모의 말에 진모는 고개를 가로 흔들었다.
“괜찮아 이대로 둬. 이제부터는 나도 빨강색 꽃을 좋아할까봐.”
둘은 말없이 꽃을 응시했다.
"나 꼭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살아남을꺼야.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즐겁게 살아가겠어."
서산마루에 붉은 놀이 넘어가고 있었다.
“박상모씨?”
불현 듯 낯선 목소리가 들리며 상모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네?”
“싸인 해주시느라 수고 했습니다.”
“아, 예.”
간이 의자에 앉은 상모의 몸은 물먹은 스펀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줄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을 일일이 싸인 해주시다니.”
“아니요 당연한 거죠.”
“역시 성공한 작가님은 마음자세부터가 다르시군요.”
몸은 기진맥진했지만, 가슴 깊은 곳부터 올라오는 뿌듯함에 상모는 히죽 웃었다.
“그래, 뒤풀이는 어디서 할까요?”
“죄송해요. 제 싸인회 뒤풀이에 제가 빠진다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오늘 꼭 지켜야 할 약속이 있거든요.”
상모의 난처한 얼굴에 아쉬운 표정을 짓던 담당자는 금세 눈을 가늘게 뜨며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 무성하게 소문난 베일의 여자친구?”
“아뇨. 남동생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몇 가지 간단한 절차를 끝낸 뒤, 상모는 차에 올라타며 시간을 확인했다. 폐장 시간까지 약 두 시간 남아있었다.
“이런, 늦을지도 모르겠는데.”
안전벨트를 매며 조수석에 놓은 꽃다발을 확인했다.
붉은색 아네모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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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형제간의 애증과 화해 및 삶의 의지가 주제같긴 한데...
저 같으면 남은 3개월 동안 병원에 출퇴근하면서 남동생 목을 조를 것 같은데요. 우헤헤 이런 괴성과 함께요.
사이코패스 드라마? ㅋㅋㅋ
보고갑니당크킄
잘보고갑니다~!
잼나요~
잘볼게요
잘보고가요!^.^
잘보고 가요!!ㅎㅎ
잘 보고갑니다~
잘 보고 갑니당 ㅎㅎ
재미있어요
잘보고갑니다 ㅎㅎ
잘보고 갑니다. :)
재밌게 보고 가요~
잘봤어요~!
잘보고 갑니다~
결국 진모는 어떻게 됬나요?ㅠㅠ 재밌게 잘보고갑니다
죽었어요.
헉
폐장은 납골당 폐장 시간입니다.
붉은 아네모네, 누군가에겐 사랑을 누군가에겐 희망을 또 어떤이에게는 둘 다를 안겨주는 이에게 꼭 어울리는 꽃말을 가진 꽃입니다. 곧 진모에게도 붉은 아네모네가 꼭 어울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요ㅎㅎ
잘봤습니다~~
잘보고 갑니다. :D
잘보고가요~
재밋네용ㅎㅎㅎㅎ
잘보고가요~
ㅠㅠ 잘봤습니다 ㅠㅠ
재미있네요
잘봤어요!!
재밌어요! :)
재밌어요~~
재밌게 잘봤어요.
우와 소살진짜 잘쓴다 ..
정말 잼잇네요 ㅎㅎㅎㅎ 동생은 살앗나요?궁금
동생 죽었어요ㅠㅠ
잘보고갑니다~
잘보고 가요~ㅎ
우와 완전잘쓰시네요!!! 잘봤어요!!!!!!
우와 뭔가 탄탄해 스토리가
잘봤어요~
잘보고가요!
와.. 글에서 단어나 표현이나 묘사 같은 게 좋네요.. 진짜 잘보고갑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