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지는 전남 순천시 와온해변은 인기척 하나 없다. 정이현의 단편집 ‘말하자면 좋은 사람’에 실린 ‘시티투어버스’의 주인공 희정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순천으로 가 시티투어버스를 탄다. /김영근 기자
단편 소설 '시티투어버스'―순천
왕가위의 영화 '중경삼림'에서 금성무는 사랑하는 여자를 잊으려고 유통기한이 똑같은 통조림을 끝도 없이 먹는다. 신경숙 소설의 실연당한 여자 주인공은 늘 같은 역까지 기차를 타고 갔다 돌아오길 반복하고, 일본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주인공은 숨 가쁘게 달리기를 한다.
인간에게 사랑하던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만큼 고통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이별은 언제나 예상보다 늦게 오거나 빨리 오는데, 사랑하는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면 그제야 분명한 방식으로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건 이 세계가 고통의 원리로 설계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이때 고통은 기쁨으로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다. 고통은 더 큰 고통만으로 잊힌다. 환청처럼 들리던 그의 목소리는 뒤늦게 찾아온 날카로운 편두통으로, 밥을 먹을 수 없는 고통은 더 끔찍한 불면증으로 잊힌다. 사실 사랑은 기쁨보다 고통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마음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았을 때, 나는 방 안에 있기보단 어디론가 나가 걷는다. 그중 하나가 버스 정류장에 오는 첫 번째 버스를 타고, 뒷자리에 앉아 종점까지 가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언젠가 정릉과 망원동에 도착했다. 낯선 동네에 가면 늘 허기 비슷한 걸 느꼈기 때문에 버스 종점에 내려 1000원에 10개 하는 붕어빵을 사 먹기도 했다. 그것이 내 고향 서울을 여행자처럼 낯설게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정이현의 단편집 '말하자면 좋은 사람'에 실린 단편 '시티투어버스'의 주인공 희정은 12월 31일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회사에 다니느라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던 그녀는 1년 뒤 불현듯 혼자만의 여행을 계획한다. 무궁화호 9시 30분발 기차를 타고 S시까지 7시간 30분 동안 이동하는 것이었다. S시로 떠난 희정은 혼자가 되기 위해 떠난 길에서조차 막막해지지 않으려고 일부러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도시에서 이동할 계획을 짠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같은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정훈을 만난다. 정훈은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여자 친구로부터 이별을 통보받고 혼자 S시에 왔다. 말하자면, 상실의 공동체인 이들은 이 버스를 타고 함께 여행할 것이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녀가 혼자 떠나는 첫 여행지로 아무 연고도 없는 S시를 택한 건, 거기 시티투어버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S역에 도착해 그걸 타면 S시의 관광지들을 천천히 돌 수 있다고 했다. 새해 첫 아침 가장 낯선 곳의 시티투어버스를 타러 가는 것, 그것이 희정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첫째 목적이었다. 목적이 있다면 아무리 낯선 땅에 도착하더라도 홀로 막막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혼자가 되려고 떠난 길에 기필코 막막해지지 않기 위해 애쓰다니. 지독하게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녀는 씁쓰레하게 웃었다."
희정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던 친구가 묻는다. 7시간 30분이면 괌에 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째서 KTX를 타지 않고 멀리 돌아가느냐는 것이었다. 희정은 "왜냐하면 그게 그곳에 닿기 위한 가장 느린 방법이니까"라고 대답한다.
S시가 어디일까 궁금해졌다. 수원일까? 아니면 사천? 나는 S가 들어가는 도시들을 상상하다가 직접 이 소설을 쓴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묻기로 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S는 전라남도 순천시라고 했다. 아! 순천이었구나. 순천 하면 먼저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松廣寺)가 떠올랐다. 내겐 좀 특별한 절이다. 송광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던 한 공방을 돌아보다가 맘에 드는 참나무 빗을 발견했다. 여러 번 기름을 먹여 반질반질한 것이 꽤 손이 간 것이 분명했지만, 학생에게는 너무 비싼 가격이라 선뜻 사기가 어려웠다. 공방 주인은 나이가 꽤 많이 든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빗을 사라는 말은 통 없고, 그저 빗을 들었다 놨다 하는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본인 목에 사마귀 있는 건 알죠? 그게 앞으로 학생 사주에 안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은데. 나한테 간단히 없애는 방법이 있어요. 아프지 않게 깨끗이 없애줄 테니, 내 방법이 맘에 들면 이 빗 사세요. 값은 깎지 말고."
나는 홀린 것처럼 남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내 머리카락 몇 개를 뽑더니, 그것으로 목에 난 내 사마귀를 단단히 조여 매기 시작했다. 무척 아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머리카락이 며칠 감겨 있으면, 단백질이 수축해 스스로 줄어들며 사마귀를 죄어 고사시킬 거라고 했다. 긴가민가했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별수 없었다. 이미 사마귀에 내 까만 머리카락이 돌돌 말려 있었으니까. 그렇게 사마귀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자 말라서 점점 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것은 마른 딱지처럼 스스로 목에서 떨어졌다. 겁이 많아 병원에 가지 못했던 내겐 놀라운 일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참나무 빗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송광사에 함께 갔던 남자와도 헤어지지 않았다. 15년 전 이야기니 꽤 오래전이다.
애인에게 주었던 선물을 퀵으로 돌려받은 한 후배는 실연의 충격 때문인지 술을 마시며 엉뚱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자 중에 왜 위대한 사학자가 없는 줄 알아요? 역사의식이 부족해서 그래요! 연애도 역사인데 대체 이걸 왜 돌려줘?" 그가 돌려받은 선물 중엔 4개월 된 '푸들'도 있으니, 과격한 그의 발언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냉장고에 있던 맥주를 계속해서 꺼내주다가 말했다.
"술집 투어 말고 시티투어버스를 타보는 건 어때? 검색해보면 운행하는 도시가 꽤 많이 나올걸? 지방까지 갈 것도 없어. 타본 적은 없지만 서울에도 분명히 있을 테니까."
창문을 활짝 연 버스 뒷좌석에 혼자 앉아 고향 서울을 이방인처럼 여행하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올랐다. 종점이 어디든 내 앞에 앉아 있는 15명이 다 내리기 전까지 나는 내리지 않을 것이었다. 울 시간은 충분했다. 열어놓은 창문에선 계속 바람이 불어왔다. 내가 울어도 그 눈물이 금세 마를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