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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파주/월롱] 용상이 머문 자리에 마련된 절집, ‘월롱산 용상사’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247 13.07.31 09:25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거란의 침입에 피신하여 머문 현종의 암자,

월롱산 용상사(月籠山 龍床寺)’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산137-1 / 031-945-4489

 

고려 현종의

시름과 아픔을 간직한 월롱산,

자신을 비호한 산에

암자를 지어 감사를 전했습니다.

용상사,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 합니다.

 

 

용상사 '일주문(一柱門)'

2004년 신축된 일주문으로,

콘크리트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올리고 굵은 두리기둥을 세워 평방을 받치고 있는 모습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파주 금촌시내와 일산시내를 내려보는 월롱산(月籠山)’,

해발 229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입니다.

그 중턱에는 용상사라는 작은 절집이 하나 있습니다. 군사보호구역 내에 자리한 이유로 울창한 숲속에 가려져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러한 절집입니다. 비록 작은 터에 단촐한 전각이지만 그 역사는 고려시대로 올라갑니다.

 

고려 8대왕 현종(顯宗, 992~1031)이 거란의 침입으로 월롱산에 머물다가 난이 평정 되면서 자신의 목숨을 구한 월롱산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고자 암자를 짓고 임금이 머물던 곳이라는 뜻으로 용상사(龍床寺)’라 하였습니다.

 

 

 

  

  용상사 '대웅전(大雄殿)'

용상사의 본당으로 1997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건물 아래에는 요사가 자리하고 콘크리트를 기단으로 삼아 대웅전이 자리한는 독특한 구조입니다.

외벽으로 팔상도와 심우도를 단청하였고, 3, 4분합 빗꽃살창호로 용문양과 법륜이 조각되어 있는것도 여느 절집과 다른 모습입니다.

 

 

 

고려 현종1(1010),

거란은 중국 당말, 당나라와 송나라의 과도기에 중원에 머물던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5(五代)’를 정복하여 중국정복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를 공격하기에 송나라와 화친을 하면서 북진정책을 하던 고려가 걸림돌이 됩니다. 이에 중국정복의 야욕에 위협이 되는 고려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 처음은 9931차 침입하였으나, 서희의 외교적인 성과로 압록강 이남의 강동6주를 소유하게 되었고, 거란은 이에 대한 반환을 요구하다가 4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공격하게 됩니다.

고려를 친 이유는 강조가 고려왕 목종(穆宗)을 죽이고 새 임금을 세운 것을 물으려 하는 것이라며 “‘강조를 보내면서 비단옷과 은그릇을 가지고 나와 항복하라.”는 서신을 고려에 보냅니다.

이에 고려의 이부상서 겸 참지정사 강조(吏部尙書 兼 參知政事 康兆, ? ~1010)’30만 대군을 이끌고 통주(현 평안북도 선천군)으로 가서 거란과 대전합니다. 그러나 수차례의 격전에 대패하여 군사 30만을 잃고 거란에 잡혀 거란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고려인이 어찌 너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느냐며 거부 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거란의 침입 이면에는 고려왕실의 분위기에 있습니다.

혼란속의 왕실분위기에 그 틈을 이용하여 고려를 공격한 것입니다. 허울이야 강조의 변이 구실이었으나 실제는 고려의 정복이었지요. 그리고 송나라와 5대를 점령하고자 하는 야욕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고려왕실은 어떠했을까요?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한마디로 개판이었습니다.

고려7대왕 목종(穆宗, 980~1009)’은 많은 치적을 쌓았으나 후사가 없었습니다. 또한 재위 초기에는 모후 헌애왕후(獻哀王后, 964~1029=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였고, 이 후에는 헌애왕후의 외숙 김치양(金致陽, ? ~1009)’이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분명 외족입니다.

그런데 그 둘은 정부사이였으며, 고려목종6(1003)에는 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됩니다.

 

그러자 아들이 없던 목종의 뒤를 자신들의 아들을 책봉하게 하려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고려의 왕씨 왕조가 김씨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유일의 걸림돌인 조카,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 고려8대왕 현종)’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왕순의 나이 10살에 이르자 강제로 머리를 깍아 숭교사(崇敎寺)’로 출가를 시키고 절집에 자객을 보내어 살해하려 합니다. 처음에는 주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였고, 이를 눈치 챈 목종과 주지는 신혈사(神穴寺, 현 진관사)’로 거처를 옮기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강조의 변(康兆)’이 일어나게 됩니다.

궁궐을 수비하던 강조는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대량원군 왕순을 왕으로 삼고,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처형하고, 헌애왕후의 인척들을 유배를 보내 버립니다. 또한 목종을 폐하고 목종과 헌애왕후를 충주로 내 ?으면서 자객을 보내어 목종을 적성에서 죽였고, 헌애왕후는 황주로 숨었습니다.

 

 

 

 

복잡함속에 고려 8대왕이 추봉되자,

이 틈을 타서 대군을 이끌고 거란이 쳐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강조의 30만 대군이 패하자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청주로 피신을 하게 되는데, 바로 남쪽으로 내려갈 수 없으니 청정구 현(泉井口 縣, 현 교하)의 월롱산에 임시 은신하였고 양주를 거쳐 청주로 내려가게 되었고, 강감찬(姜邯贊, 948~1031)’장군이 귀주대첩(龜州大捷)’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난이 평전 된 후 환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때 현종이 민복으로 갈아입고 처참한 피난을 떠난 곳이 월롱산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묵숨을 구한 월롱산에 암자를 지어 용상사라 한 것입니다.

 

 

 

  

  

 

월롱산 용상사(月籠山 龍床寺)’,

대한불교 일승종의 사찰입니다. 푸르름이 가득한 월롱산 중턱에 자리 잡은 절집입니다.

현종은 그 자리에서 거란군에 쫓기어 이곳까지 피난을 떠나온 현종의 급박함과 짓밟히고 있는 개성을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을 것이고, 언제 침입을 당할지 모르는 자신의 처참한 신세를 탄식하였을 것입니다.

현종의 창건 이 후 세종27(1445) 덕은화주(德隱化主)’가 석불을 벽장굴에 봉안하면서 중건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병도량으로 왜군의 시체가 골짜기에 가득하다하여 무덤골이라 불릴 정도로 치열하였는데, 그 후로 용상사는 폐사가 되었습니다.

이 후에도 전쟁의 아픔을 간직하고 분단의 쓰라림을 간직하고 있는 땅이 되었습니다. 자유로에 들어서면 분단의 철책을 두고 임진강이 흐르고 한동안 군사보호구역으로 개발의 제한과 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되던 곳입니다.

 

지금의 절터는 옛 용상사의 절터보다 아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일대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분단을 간직한 곳으로 절터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967년 대웅전을 중수하고 산신각을 신축하였고, 1990년대 들어 문수스님이 지금의 용상사의 틀을 마련, 대웅전, 일주문, 명부전을 신축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3789부대와 마을의 사이로 난 신작로를 따라 들어갑니다.

2km 포장도로를 따라 오릅니다. 콘크리트 구조의 일주문을 지나고 급격한 산허리를 돌아서면 용상사의 경내입니다.

보기드문 2층의 구조에 아래층은 요사와 종무소로 사용 되고 있으며, 그 위에 대웅전이 들어 서 있습니다.

우측으로 명부전 다시 그 뒤로 삼성각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1926년 폐허였던 절터에 사찰을 중건하였으나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1964년에 안성 청룡사 만하스님이 법당이 없어 승려의 방에 불상을 모신 인법당(因法堂)’을 지었습니다.

이 후 월롱산 정상부에 있던 가람은 현재의 터로 옮기며 인법당으로 쓰이던 요사를 대웅전으로 중건하고 인근의 벽장굴에 있던 석불을 옮겨와 대웅전에 봉안하게 됩니다.

 

1977년에 문수스님이 옛 대웅전을 헐고 터를 다져 축대를 쌓고 가람을 새로이 중건하였으며, 2004년에는 일주문, 이듬해에는 명부전을 신축하였고, 삼성각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상부의 용상사 옛터는 마을 이름을 따서 덕은리사지(德隱里寺址)’로 불리는 용산사지(龍床寺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맑은 날, 월롱산 정상에 올라서면 시원스런 자유로와 정면에는 파주, 우측으로 일산시내가 한 눈에 조망되는 곳입니다.

 

옛 절집은 사라져 고고한 느낌은 없으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은 지금의 절집을 보듬어 품고 있습니다.

아니온 듯 다녀가기 좋은 곳,

용상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용상사 '명부전(冥府殿)' 

옛 법당의 자리에 세워진 건물로 정면3칸, 측면3칸으로 낮은 콘크리트 기단에 원형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공포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계 맞배지붕입니다. 명부시왕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용상사 '삼성각(三聖閣)'

원래의 정면1칸, 측면1칸의 건물을 새로이 중수하여 정면3칸, 측면1칸의 건물로 지었습니다. 현재 단청이 되지 않은 자연목의 모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그 모습이 푸른 자연과 더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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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7.31 09:58

    첫댓글 고려의 역사가 숨어있는 산과 절집이군요 신축한절집이라 오랜멋은 없지만 역사가 있어 가볼만한 곳이군요 좋은이야기와 풍경을 잘 보고갑니다

  • 작성자 13.08.01 05:51

    콘크리트 더미가 조금은 불편했습니다.
    왠지 정감이 없는 느낌입니다. 그래도 숲 풍경이 좋아 둘러 볼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 13.08.01 12:59

    파주에 이러한곳이...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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