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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한복음 13,16-20
세족례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의미를 더 분명히 밝혀 주십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
이 말씀은 단순한 겸손의 권고가 아닙니다. 제자들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다시 세워 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높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사람입니다.
세족례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고,
이제 그 사랑을 살아내는 사람으로 세상에 나가라고 보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많이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감정이 아닙니다. 삶이 하느님의 뜻과 하나가 될 때 오는 깊은 기쁨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 낮아지는 삶, 섬기는 삶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동시에 한 가지 어두운 현실도 말씀하십니다.
함께 식탁에 앉았던 이들 가운데서조차 당신을 배반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빵을 먹던 자가 나를 배반하였다.”
사랑의 자리 안에서도 배반은 일어납니다. 은총의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약함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미리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다’라는 것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19)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어둠 속에서도, 배반 속에서도, 고통 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밝히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제자들의 길을 확인해 주십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20)
제자는 단순히 개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살아 있는 표지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아집니다.
ㆍ 나를 통해 사람들이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ㆍ 내 말과 행동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있는가, 아니면 여전히 나 자신만 드러나고 있는가?
세족례에서 시작된 사랑은
이제 ‘보냄’으로 완성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사랑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하루,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마음이 전해질 수 있기를 청해봅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4월30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요한 13,16-20
사랑을 실천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설계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남의 발을 씻어준다고 정말 다 행복해질까요? 어떤 이들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속으로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라며 분노를 삭입니다.
비굴하게 노예처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오늘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먼저 '스승이요 주님'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해야만 발을 씻어줄 때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심오한 영적 원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존감'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거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1978년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그의 연구팀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과,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장기 추적한 것입니다.
당첨 직후에는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사고 직후에는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3개월에서 1년이 지나자, 두 집단의 행복도는 사고 이전의 '기본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자존감'의 수치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100억이 생겨도 곧 불행해지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출처: Brickman et al., 『Lottery Winners and Accident Victims: Is Happiness Relative?』)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와 명예를 긁어모으려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들 내면에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텅 빈 사람은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야만 비로소 존재감을 느낍니다.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려 할 때, 내 잠재의식은 이미 "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존재다" 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셈입니다. 부족하다고 믿으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주적인 배경'을 가졌음을 압니다.
주님이 나에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박수에
목매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로 높으니, 기꺼이 낮아져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왕의 여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 쉰들러가 울며 "차를 팔았더라면 더 구했을 텐데"
라고 한 고백이 사실인지 궁금해합니다.
역사적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실화에 근거한 진실입니다.
쉰들러는 전쟁 초기 자존감이 낮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여자, 독일 나치 당원이라는 화려한
명예로 자신의 빈 영혼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인들의 비참한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며(구출 사역), 돈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뜹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실제로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 '레오폴드 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쉰들러는 말년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공장주로 돈을 긁어모을 때는 매일 밤 불안과 허무에 시달렸네. 하지만 1,100명의 목숨을 위해 내 전 재산을 탕진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가치, 즉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느꼈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지."
누군가를 높여주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세상의 종이 아니라 '다 가진 자(Haver)'가 된 것입니다. 다 가진 자가 되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한 이유는, 주는 행위 자체가 '나는 남에게 줄 것이 넘치도록 많은 위대한 존재'
라는 자존감을 자신에게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토마스 케닐리, 『쉰들러의 방주』; 미츠코 자크,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
17세기 콜롬비아의 성 베드로 클라베르 신부님은 자존감 전수의 승리를 보여준 성인입니다.
그는 짐승처럼 실려 온 노예들을 씻기며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신부님의 전기 작가 앙헬 발투스는 신부님이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전염병에 걸려 배설물 속에 누워있던 노예 한 명이 신부님의 손길을 받고 "아, 나도 하느님의 아들이군요!"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릴 때, 클라베르 신부님은 그 노예의 썩어가는 발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이 형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저도 제가 누구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명을 전하는 행복한 노예입니다!"
이 인용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누린 행복은 단순히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주어 그를 부활시킬 때, 그를 살려낸 자신 또한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신적 행복'에 동기화된 것입니다.
상대를 하느님으로 대접할 때, 나 자신이 하느님임이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출처: 앙헬 발투스,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생애』)
오늘 주님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는 "너는 닦여야 할 죄인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고귀한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며 여러분의 자존감을 하느님 수준으로 업데이트하십시오.
내가 비굴한 상태에서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봉사를 통해 상대의 인정을 얻어내려는 비참한 '구걸'일 뿐입니다.
그런 세족례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먼저 '다 가진 자'임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인 '다 가진 자'가 되어, 내 곁의 형제도 '다 가진 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누리는 행복은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월30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13,16-20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함을 선택하신 주님!
유학 시절 첫해 성 주간을 이탈리아 한 교구에 가서 주임 신부님 사목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도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꽤 많은 사람이 고백성사를 보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은 사목은 주임 신부님과 구역을 나눠 본당 내 모든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서 가정 축복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초대형견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대환영을 받습니다.
거기 할머니들도 우리 한국의 할머니들 못지않게 인정이 많아, 축복 예식을 마치고 나올 때,
꼬깃꼬깃 접혀있는 쌈짓돈을 찔러주시곤 했는데, 주임 신부님 엄명에 따라 모두 모아 본당 사무실에 드리곤 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사목 보조하던 본당에 유명하신 추기경님이 방문하셔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미리 발씻김 예식에 참여할 신자들 열두명을 선발해서 의자까지 다 셋팅해놓았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한 분이 안나타났습니다.
주임 신부님의 눈짓으로 엉겁결에 제가 부랴부랴 비어있는 한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난꾸러기였는데, 동짓날 어머니께서 큰 가마솥에 팥죽을 쑤고 계셨는데,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왼쪽 발이 펄펄 끓는 솥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큰 화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상흔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는데, 상처도 크고 너무 부끄러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추기경님께서 제 발을 그냥 적당히 씻는 것이 아니라 아주 뽀득뽀득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추기경님께서 제 발에다가 입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부끄럽고,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옛날 2천 년 전 예루살렘 다락방에 앉아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심정도 이러했겠지,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습니다.
세족례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족례를 거행하시기 전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신적 영광을 드러내는 겉옷을 벗으시고 종의 신원을 드러내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세족례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왕 중의 왕,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종들인 제자들이 왕이신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왕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당신은 세상의 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왕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섬김의 왕이고 봉사의 왕이고 겸손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왕에 대한 전통적인 페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으셨습니다.
왕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란 수제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반응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분의
겸손한 제스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우리 것으로 만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권위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어깨에 힘 줘서는 안됩니다.
쥐 꼬리 만한 권위라 할지라도 뭔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족례의 정신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부활 제4주간 목요일 강론>
(2026. 4. 30. 목)(요한 13,16-20)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 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16-20).”
1) 예수님의 수난 때에 사도단 안에서 배반자가 생긴 일은, 사도들의 위신을 크게 추락시키고,
그들의 권위를 많이 손상시킨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신자들이 그 일로 사도단을 비난하지는 않았더라도, 사도들 자신들이 스스로 위축되고 기가 꺾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상황을 예견하셨고, 그래서 그들이 흔들리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라는 말씀은, 당신이 사도들에게 권한과 권위를 주신 일은, 또 그 권한과 권위는 변함이 없음을 확인해 주시고 보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권한과 권위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일이 생겨도, 또 구름 때문에 인간들이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고, 변함없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이고, 그분의 권능과 영광과 사랑은 언제나 항상 똑같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일은, 구름 한 조각이
태양을 잠깐 가리다가 사라진 일과 같습니다.
2)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은, 신자들도, 인간들보다 훨씬 더 높으신(위대하신) 분께서 뽑으시고 파견하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파견된 이 자신의 힘은 보잘것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파견하신 분의 힘은 어떤 인간도 대적할 수 없는 위대하고 강력한 힘입니다.
파견된 이는 바로 그 ‘큰 힘’을 받아서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떤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18.20).”
제자들이(신앙인들이, 또는 예수님의 종들이)
박해를 받는 것은 곧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시고 부활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박해자들의 힘은 예수님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신앙인은 바로 그것을 믿기 때문에, 어떤 위협이나 압박을 받아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신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제자들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배반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 것은, 유다가 ‘스스로’ 회개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라는 말씀은, 제자가 배반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은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결과를 보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되는 ‘신비’입니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내가 나임을’은
‘내가 메시아임을’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배반을 포함해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수난은 모르고 당하신 일도 아니고,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당하신 일도 아니고, ‘인간 구원’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이 스스로 목숨을 내주신 일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4)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고난 때문에 괴로울 때도 있지만, 기쁘고 행복할 때도 많습니다.
사탄과 악의 세력을 경험할 때도 있지만, ‘하느님 체험’과 ‘하느님 나라 체험’을 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이 평생 고생만 하다가 순교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에, 누구나 다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죽어야 한다고 말하면 신앙인이 되겠다고 나설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사도들이 ‘기쁨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지금의 인생이 끝나면 ‘큰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 믿음은 아무 근거도 없이 무턱대고 믿는 믿음이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한 근거가 있는 믿음입니다.
크든지 작든지 간에, 누구든지 신앙생활 과정에서 체험하는 순수하고 참된, ‘영적인 기쁨’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