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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가깝고 하천이 발달하였던 평택지방은 예로부터 나루와 포구가 발달했다. 큰 나루만도 현덕면의 계두진과 구진, 포승읍의 신전포와 한나루, 안중읍의 호구포, 청북면의 옹포, 팽성읍의 경양포 등 수십 개가 넘는다. 만호리에 항구가 조성된 것은 여말선초다. 지형이 자궁 모양이어서 나루의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초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겪으면서 도만호가 설치됐다. 도만호는 나중에 수군첨절제사로 명칭이 바뀌었다. 만호리라는 지명은 도만호에서 왔다. 도만호가 주둔했던 곳은 만호4리 원터다. 원터마을에는 아직도 옛 건물지의 흔적과 기와편이 무수하다. 만호리에서 만난 이원길(77)씨는 원터마을의 황장군 전설을 이야기했다. 옛날 출중한 무예와 신출귀몰한 능력을 갖춘 황장군이 있어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성을 쌓고 왜적을 무찔렀다는 이야기. 어쩌면 황장군은 원터마을에 상주하였던 수군첨사일 가능성도 있다. 만호리 앞바다의 영웅바위 전설도 왜구와 관련 있다. 바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영웅바위는 조선 전기만 해도 높이가 100척이 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왜적이 바다로 침입했다. 그러자 영웅바위는 장군으로 변하였고 주변의 작은 바위는 병사들로 바뀌었다. 갑자기 나타난 군대에 혼비백산한 왜적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면서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 농사지으며 고기 잡으며 한평생을 살다
# 평택항 개발의 빛과 어두움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진은 접안시설과 드넓은 갯벌을 앞에 둔 항구마을이었다. 38번 국도가 시작되는 솔개바위 들물식당에서 만도아파트 방면으로 뻗은 일직선상의 길 좌우에는 수많은 횟집과 식당이 즐비하였고, 나루터가 바라보이는 산모퉁이에는 포장마차가 성업중이었다. 나루터에는 3~ 4에서 10 내외의 어선 수십 척이 떠있는 것도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정치망과 삼중망으로 새우·꽃게·우어·숭어 등을 가득 잡은 어선들은 바닷가에 고기를 퍼내리기 바빴다. 겨울에는 함지박과 망태기에 굴과 조개를 가득 담은 아주머니들이 배에서 내렸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주말이면 마을 입구부터 바닷가까지 자동차가 늘어섰고, 거리에는 횟집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지경엽씨는 어선수리업을 하러 마을에 들어온 이다. 당시에는 어선만 50척이 넘어서 돈벌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관광객들이 몰려들자 부인이 횟집을 열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전망대횟집이다. 어선을 갖고 있던 이웃집들도 횟집을 열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초에는 스물여섯 집이나 되었다.
대진의 상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86년 평택·당진항이 개항하면서부터다. 1990년대초 갯벌을 매립하고 본격적인 항만공사가 시작되면서는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어업활동도 중단되었고 어항이 갖고 있던 자연경관도 변하였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고깃배에서 내려 항만청에 입사하였다. 초기에는 거친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만족해했다. 하지만 평생 거친 파도와 싸웠던 사람들이 회사생활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어민들은 IMF가 닥치면서 회사측에서 내민 1억5천만원의 보상금을 받고 회사를 나왔다. 생업이 중단되자 보상금은 금방 없어졌다. 돈도 잃고 생업도 잃은 사람들은 고향을 떠났다.
나루터의 경관이 변하면서 관광객이 감소했다. 바다와 갯벌을 보며 생선회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평택항으로 가로막힌 들물식당·전망대횟집은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다. 들물식당을 운영하는 장영실씨도 그것을 답답해했다. 관광객이 감소하면서 한때 스물여섯집이나 되었던 횟집들도 하나 둘 문을 닫고 타지로 떠났다. 그래서인지 한창 사람으로 붐벼야할 주말 나루터에는 인적이 드물었고, 식당 주인은 콩을 까느라 여념이 없었다. |
첫댓글 네
감사 합니다.오늘도 좋은 시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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