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태조 누루하치는 1621년 광해군에게 보낸 서신에서
“요동의 땅은 원래 조선에 속한 것인데 나중에 중국에 빼앗겼다고 들었다”
고 적었다.
이는 중국 지도자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1950년대 말~1960년대 초 북한 지도자들에게 ‘요동 지방은 원래 조선 땅이었으나 고대 왕조가 조선민족을 압록강변까지 내몰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동은 남만주 요하의 동쪽 지방으로 예로부터 고조선의 영역이었다. 이후 진나라와 한나라가 점령했지만 고구려가 한사군을 몰아내고 수, 당에 맞서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 고구려에 이은 발해의 멸망 뒤 요동은 이민족의 손으로 넘어갔다.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 고토를 회복하기 위한 요동 정벌 움직임은 여러 차례 있었다. 단재 신채호가 ‘일천년래 대사건’이라고 평한 고려 중기 묘청의 서경 천도론과 금나라 정벌론도 그중 하나다.
묘청은 서경, 즉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압록강 연안 및 연해주에서 세력을 모으던 여진족의 금나라를 칠 것을 주장했지만 김부식 등 개경파에 밀려 좌절됐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묘청의 운동을 낭·불 양가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으로 규정했다.
묘청 이후 사대주의가 득세하고 고구려적인 기상을 잃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그린 단군·기자조선·삼한·삼국 중심의 역사를 대단군조선·고조선·부여·고구려 중심으로 서술했다.
실제 군사가 움직인 것은 고려 말 우왕 때였지만 이성계의 회군으로 요동 땅을 밟지는 못했다.
조선을 설계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정도전도 공요, 즉 요동 공벌을 추진했지만 이방원의 정변으로 좌절됐다. <조선실록>은 정도전이 명나라 황제의 미움을 사자 일신의 화를 모면하려고 공요를 준비했다고 적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평가다
정도전이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려는 웅대한 이상으로 공요를 준비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병을 혁파하고 나라의 군제를 확립하기 위한 포석이었다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