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법과 불교의 생활화
고우 큰스님 지음/효림 출판사/2005년 7월 25일 출간>
연기법과 불교의 생활화에 관련된 법문들을 전해주는 책. 지난 2004년 11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월간 '법공양'에 연재하였던 글들을 모아 엮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법과 무아법의 이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생활 속에 적용시키면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불교를 생활화하여, 복되고 평화로운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序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건만, 불교가 너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여 ‘나’의 것으로 만들면, 보다 쉽게 부처님의 법바다 속에서 향상된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근본 가르침일까요? 바로 연기법(緣起法)이요 무아법(無我法)입니다. 이 연기법과 무아의 이치를 ‘나’의 것으로 만들어 생활 속에 적용시키면 참으로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 수가 있고, 불교공부를 잘 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된 법문들을 지난 2004년 11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월간「법공양」에 연재하였고, 그 글들을 다시 엮어 「연기법과 불교의 생활화」라는 제목으로 책을 낸다기에 고맙게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이들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불교를 생활화하여, 복되고 평화로운 삶을 회복하시기를 깊이깊이 축원 드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불기 2529년 7월 1일 태백산 서암에서 고우 합장
1. 불교의 근본 가르침
우리는 본래 부처
불교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불교(佛敎), 곧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이며,그 가르침에 의하여 생활하면 내가 어떻게 되는지를 가장 알고 싶어 합니다.불교를 믿는 우리 불자들! 과연 부처님의 가장 근본이 되는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먼저 옛 조사의 말씀부터 음미해 보십시오
** 옛날 한 수행승이 도를 깨달은 큰스님을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큰스님은 어떠한 방편도 설하지 않고 깨달은 분의 경지에서 사실 그대로 답을 했습니다.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왜 천민이 되려고 하느냐?" "?"
** 이 이야기를 듣는 우리 역시 이 수행자처럼 어리둥절해 하겠지만,도인스님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왜 천민이 되려고 하느냐?'하는 이 말씀 속에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결코 질문을 한 사람을 일부러 어렵게 만들기 위해 이렇게 답한 것이 아닙니다. 불교를 체험한 그 분의 자리에서 사실 그대로 답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뜻을 곧바로 알게 되면,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수준이 아니라 확실히 체험을 하게 됩니다.한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고귀한 신분에 계신 분이 오히려 천민이 되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안 물으면 고귀한 신분으로 그대로 있을텐데 왜 묻느냐?' 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도인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진의(眞意)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에 대해 우리 불자들은 선뜻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성불하신 직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 기특하도다.모든 중생들이 다 부처의 지혜(智慧)와 덕상(德相)을 갖추었건만,오로지 망상(妄想)에 집착 되어 스스로 체득하지 못하는구나,만일 이 망상의 집착만 여윈다면, 바로 일체지(一切智). 자연지(自然智)를 얻게 되는것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성불 후 첫 일성(一聲)은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시작이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입니다.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 45년을 하루같이 갖가지 방편으로 설법하셨습니다.본래 부처! 우리는 본래 부처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릅니다.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착각에 의해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그날부터 부처자리에서 어긋나기 시작한 것입니다.그것도 착각에 의해서....
허나 착각에 의해 '내가 고귀한 부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할지라도 본래 부처라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가 않습니다.그 원리는 그대로 있습니다.이와 관련하여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새끼와 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어둠이 내린 밤중,마당에 새끼줄 한토막이 있다.그런데 어떤 이가 그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을 하였다.그는 깜짝 놀라 매우 당황해 하였다.
여기에는 굉장히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무엇인가? 뱀으로 착각을 하여 놀라고 당황할지라도, 새끼줄은 뱀으로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끼줄은 여전히 새끼줄일 뿐입니다.
우리 또한 본래가 부처인데,착각에 의해 부처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줄이 뱀으로 변화하지 않듯이, 우리가 본래 부처인 그 원리는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있습니다.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은 '나'의 착각을 깨고 '본래 부처'라는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사실! 이제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인스님께서 '고귀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왜 천민이 되려고 하느냐'고 하신 까닭을...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여 아무리 '나는 아니다'고 할지라도,새끼줄이 뱀으로 변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우리는 여전히 '본래 부처'인 것입니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새끼줄을 만든 재료인 '짚'에 대해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짚으로는 새끼줄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짚신도 만들고 가마니도 만들고 멍석도 만들고 삼태기도 만들고 망태기도 만듭니다. 또 초가지붕을 잇기도 합니다.
그런데 짚으로 만들어진 여러 가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그 재료가 짚이라는 사실보다는 선호하는 바에 따라 차별심을 짓습니다. 농사 짓는 사람은 가마니를 좋아하고 포장하는 사람은 새끼줄을 좋아하며, 여행하는 사람은 짚신을 좋아하고, 약초를 캐는 사람은 망태기를 좋아합니다.
가마니,새끼줄,짚신,망태기,멍석 등등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본래의 재료로 보면 하나입니다. 곧 짚이 본래의 재료요, 이 짚이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본래 부처' 입니다.
우리는 이 짚, 본래 부처를 알려고 불교를 배웁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짚이 아닙니다. 가마니로도 되어 있고 새끼줄로도 되어 있고 짚신으로도 되어 있습니다. 각각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남자.여자.나이 많은 사람, 적은 사람,예쁜 사람,못생긴 사람,부자,빈자,귀한 사람,천한 사람 등..
그리고 현재의 모습에 집착하여 갖가지 망상과 차별심을 스스로 일으킵니다. 하지만 본래의 재료를 보십시오. 근본을 보십시오.근본이 되는 본래의 재료에서 볼때는 조그마한 차별도 없고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현재의 모습은 다 달라도 근본은 하나입니다. '본래 부처'라는 이 근본을 알게 되면 부처를 보게 됩니다. 새끼가 짚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고, 그 짚으로 여러 가지 물건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활용하는 이가 부처님입니다.
무아. 곧 근본을 깨달을 때
근본을 아는 것! 근본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변화하고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 위력을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설하셨는가? 「금강경」 에서는, 칠보(七寶)로써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도록 보시를 하는 것보다 더 큰 복덕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남에게 일러주는 복덕 또한 그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복덕입니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복덕이요 위력입니다.
그럼 무엇을 확실히 알아야 본래 부처의 자리를 회복하고 무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가? 원시불교에서는 '연기법(緣起法)을 관찰하여 무아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형상이 있거나 없거나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로써 존재한다. 연기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무아(無我)다.
그리고 「반야심경」 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였습니다. 곧 '나'가 공(空)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가 무아요 공이라는 가르침. 이 가르침을 깊이 체득하면 본래 부처를 알아서 무한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공과 무아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반대로 생각을 합니다. 불교가 무상함이나 아무것도 없음을 가르쳐 허무에 빠져들게 한다고 판단합니다.
슈바이처는 '불교는 비관하는 종교'라 하였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불교의 열반은 일체 모든 것에 무관심 하는 것" 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대석학인 임어당 까지도 "불교는 허무지교(虛無之敎)다" 하였습니다. 무아요 공이라고 하니까 '허무를 말하는 종교'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와같은 판단은 그분들의 오류입니다.무아나 공에 대해 이해를 잘못하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럼 '무아다.공이다'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구름이 완전히 걷힙니다.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무엇이 나옵니까? 밝은 해가 나옵니다.
'나가 있다'고 집착했던 그 마음자리에 '나가 없다[無我]. 공이다'는 것을 알게 되면 구름이 싹 걷힙니다. 곧 구름이 완전히 걷힌 상태를 '공이다. 무아다'하고, 그 순간부터 해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세상은 광명 천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착각에 의해 구름을 가득 끼우며 살고 있습니다. 구름을 걷기만 하면 지혜의 해가 나오는데도..
무아요 공임을 깨달아 구름이 걷히고 지혜의 해가 나오게 되면 우리는 굉장히 자주적이요 자립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인이 되어 능동적이요 창조적으로 움직이며, 참으로 지혜롭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 됩니다.
실로 '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일체의 구름이 없어짐과 동시에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됩니다. 그런데 '나가 있다'는 집착 속에서 살면 어떻게 됩니까? 좋은 일이 나타나면 그 좋은 일에 끄달리고, 나쁜 경계가 나타나면 나쁜 경계에 끄달려 속상해 합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으면 좋아하여 취하려 하고,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배척합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맞고 맞지 않은 경계가 펼쳐지게 되고, '나'의 감정에 따라 좋고 나쁜 일에 얽매인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 있어 내가 힘들다
그러나 '나'가 없음을 알면 무엇보다 먼저 비교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평등심을 이루게 됩니다.여기서 잠깐 「현우경」과 「경률이상(經律異相)」에 나오는 '변소 치는 소년'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서 남의 집 변소의 똥물을 퍼주며 살아가는 전다라(인도의 4성 계급 중 최하위인 수드라보다 더 천한 신분) 소년 니제가 있었습니다. 니제는 자기의 신분과 직업 때문에 자신을 천하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고 구박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날 니제는 똥을 푸다가 걸식을 하러 나오신 부처님과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순간 니제는 생각했습니다.
'부처님은 국왕까지도 경배를 올리는 고귀한 분이시다.똥을 푸는 내가 옆에 가는 것만으로도 부처님을 오염시키는 일이요 잘못하는 짓이다’
니제는 이렇게 자기학대를 하면서 똥통을 둘러메고 도망을 쳤습니다. 순간,니제의 마음을 읽은 부처님께서는 니제가 착각과 자기학대에 빠져있음을 아시고,그의 병을 치료해 주고자 따라갔습니다.
니제는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도망을 치다가 끝내는 똥통까지 깨뜨려 온몸에 오물을 덮어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더욱 부처님 곁에 갈 수가 없어 힘껏 도망을 쳤습니다. 하지만 신통력으로 따라오는 부처님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니제는 부처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부처님시이여,제발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요" 그때 부처님께서 니제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를 때린 적도 없고 욕한 적도 없었는데 왜 괴롭힌다고 생각하느냐?" "저는 천민입니다. 직업도 천합니다. 어떻게 똥물에 오염된 제가 부처님 곁에 갈 수 있겠습니까?"
"네 마음은 참으로 착하구나. 그와 같이 착한 마음을 지녔는데 어찌 너를 천하다고 하겠느냐? 사람은 본래 태어날 때 모두 평등하여 귀천이 없고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또한 직업에도 귀천이 없다. 신분제도는 힘 있고 많인 가진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일 뿐이다. 어찌 귀하고 천한 사람과 귀하고 천한 직업이 따로 있겠느냐? 국왕.대신이라도 나쁜 마음으로 백성을 괴롭히면 천한 사람이요,똥을 푸는 사람이라도 열심히 하면서 착한 마음으로 살면 귀한 사람이니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똥치기 소년 니제는 지옥에서 벗어나 극락에 오르는 것 같았고, 이제까지 지니고 있던 열등의식과 자기학대가 일순간에 사라졌습니다.
니제는 부처님께 제자로 거두어 줄 것을 청하였고, 부처님께서는 그를 갠지스 강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킨 다음 기원정사로 데리고 와서 출가사문을 만들었습니다. 그날부터 용맹정진을 한 니제는 날로 새로워져 열흘 만에 수다원과를 얻었으며, 몇 달 후에는 아라한과를 이루고 육신통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 최하위의 천민이요 남의 집 똥을 푸는 니제는 자기를 구박하고 학대하며 살았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습니까? 스스로 구박하거나 학대하지는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우리 또한 끝없이 자기를 구박하고 학대하며 살고 있습니다. 눈으로 귀로.코로.혀로.몸으로.생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구박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의 눈으로 남의 차를 보면서 우월감을 가지기도 하고 열등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볼 때도 남의 옷을 볼 때도 '나'와 비교하여 열등감과 우월감을 번갈아 가지면서 자기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정녕 그 상처를 남이 준 것입니까? 그 상처를 차나 옷이 준 것입니까? 아닙니다. 차가 주는 것도 다른 사람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가 상처를 만드는 것 입니다.
왜? '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남 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눈으로 보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혀로 코로 몸으로 계속 '나'와 다른 무엇을 비교하는 속에서 우월감을 가졌다가 열등의식에 빠지기를 반복하며 자기를 힘들게 합니다.
결코 똥을 퍼주며 살았던 니제만 자기 학대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앞집은 그랜저를 모는데 우리는 왜 티코냐?" '옆집 아이는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는데 내 자식은 왜 이 모양이냐?'
이렇게 '나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 비교를 아니 할 수가 없고 ,비교를 하게 되면 항상 자기학대를 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알고 보면 이것이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우리는 스스로 만들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스스로가 스트레스를 받고 살게되면 더욱 자기중심적이 되어 기분 나쁜 일은 피하려 하고 기분 좋은 일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마음대로 됩니까? 마음이 좁아지고 '나'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좋지 않은 일들이 많이 찾아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 '나쁘다. 좋다'고 하는 것도 자기가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좋고 나쁜 일은 다가오는 것보다 자신이 만드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나'가 있기 때문에, 비교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좋고 나쁜 일들이 새롭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상태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짚이요 무아요 본래 부처임을 알아서 이 상태에서 해탈해야 합니다. 짚이라는 것을 알면 차별심이 사라집니다. 멍석이 되었던 가마니가 되었던 새끼가 되었던 짚신이 되었던, 모두가 짚 하나입니다. 평등합니다.
공이요 무아요 모두가 본래 부처임을 알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부.귀.빈.천.지위고하가 사라지고 모든 대립이 사라집니다. 이데올로기 싸움, 종교싸움, 인종 싸움, 민족 싸움, 남북 대립, 진보.보수의 대립 등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모두가 '나가 있다'는 데서부터 비롯된 집착이요 모순이요 학대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나가 있음'에서 비롯된 집착과 비교 속에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구박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만 학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옆의 배우자를 구박하고, 자식을 구박하고, 친구를 구박하고, 직원을 구박하고, 국민을 구박하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제대로 사는 삶입니까? 이러한 이야기를 어느 법회에서 하였을 때 '너무나 잘못 살았다'며 흐느껴 우는 보살님들이 있었습니다.
실로 우리가 짚이요 공이요 무아요 본래 부처임을 자각하면 평등심으로 참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나'를 내세우지 않고 평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선행만 하며 삽니다.
남을 해치는 것이 자기를 해치는 것이요, 자기를 해치는 것이 남을 해치는 것이며, 스스로를 돕는 것이 남을 돕고, 남을 돕는 것이 자기를 돕는 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재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그렇게 살아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짚.공.무아.본래 부처의 원리를 먼저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알게 되면 자발적이고 자율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게 되며,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이 굉장히 행복해지고 평화롭고 지혜로워지는 것입니다.
연기이므로 공이요 무아다
이제 우리가 '왜 본래부처요 짚이며,공이요 무아인가?' 규명해봅시다. 어찌하여 본래 부처요 짚이며,공이고 무아인가?
결론부터 얘기하면 연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누누이 밝혔듯이 우리는 본래부처입니다. 짚으로 만든 새끼줄이나 가마니나 망태기나 짚신은 본 모습으로부터 만들어진 형상입니다. 본래 모습은 짚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과 같은 형상만 '나'라고 집착을 합니다. 형상을 만든 근본을 함께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근본이 형상이고 형상이 근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곧 형상과 근본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나'만 본래부처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본래 부처입니다. 모든 존재가 본래부처입니다.
이것을 알면 모든 존재가 평등하다는 것을 명확히 깨닫게 되고, 비교를 하여 자기를 학대하거나 경 쟁 속에서 고된 삶을 사는 어리석음을 벗어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럼 '모든 행복과 지혜를 다 갖추고 있는 본래부처'라는 사실은 어떻게 해야 이해를 할 수 있고 체험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바로 '나'가 무아(無我)라는 것을 알 때 본래부처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나'가 공임을 깨달을 때 본래부처임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가 있다[有我]', '나만의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나'의 행복을 만들어내고 '나'를 내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 '나'는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인 '나'입니다. 그 이기적인 '나'를 위해 우리는 참으로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그 '나'가 있어야 잘 살 수 있고 그 '나'가 있어야 발전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중생의 착각이요 중생이 삶입니다. 이러한 '나'를 내세우고 이러한 '나'를 위해 애를 쓰며 살다보면 어떻게 됩니까? 오히려 부처님 당시의 똥을 푸며 살았던 소년 니제처럼 '나'를 구박하고 학대하고 비하하는 쪽으로 흘러갑니다.그리고 죽음이 임박할 때가 되면 후회를 합니다.
"한 평생의 삶이 덧없도다“ "참으로 어떤 일을 이루지 못해 한스럽다"
결국 '나가 있다'는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하면, 고통스런 중생의 삶에서 해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나', 우리가 생존의 의미로 삼고 있는 '나'에서 벗어나 무아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나가 없다'는 것을 알면, 무아임을 알면 참으로 평등하고 기쁘고 위대한 삶을 살게 됩니다. 위대한 작용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본래부처를 회복하여, 구름 걷힌 하늘의 태양과 같은 빛을 발현하며 살수가 있습니다. 만물을 살려주는 태양이 되어 참으로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들에게 있어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은 참으로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분명히 '내가 보고 내가 듣고 내가 느끼고 내가 아는 것이 있는데, 왜 내가 없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부정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없습니다. '나'라고 할 말한 실체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무아(無我)요 공(空)입니다.
불자들이 즐겨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첫 구절은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度一切苦厄)’으로 시작됩니다. 오온이 다 공하였음을 비추어 봄으로써 일체의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오온은 색.수.상.행.식입니다. 색에는 매우 포괄적인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의 색(色)은 우리의 몸인 육체를 가르키며,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은 정신입니다.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는 '나'가 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나'가 공한 줄을 알고 나니까 일체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조견오온개공'은 원래 '나'가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나'가 공임을 천명한 가르침입니다.
그럼 왜 '나'가 공인가? 연기(緣起)이기 때문에 공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 합니다. "인생이 태어나고 성장해서 늙어 병들어 죽기 때문에 '공'이다 곧 '덧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빈 것'이라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오온개공의 참뜻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오온개공을 생로병사에 대입을 시키면, 태어나는 것 그 상태가 그대로 공입니다. 성장하는 것도 공이요, 늙음과 병 그 자체가 공이며, 죽음 자체가 공입니다. 매 순간이 그대로 공인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매 순간 그대로가 오온개공의 상태요 '나'가 없는 무아인 것입니다.
왜?
바로 연기로써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요 무아라는 것입니다.부처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모든 것은 연기로써 존재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삼라만상은 형상이 있는 것이요, 형상이 없는 것에는 정신작용과 허공 등이 포함됩니다. 따라서 형상이 있거나 형상이 없거나 라는 말씀은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통틀어 말씀하신 것이며, 이 속에는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연기의 법칙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 연기(緣起)를 이해하면 불교를 이해하게 되고 우리의 존재원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내가 사는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며, 또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나아가 연기를 이해하면 '아'내가 본래의 그 자리, 본래부처의 자리를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연기의 원리
이토록 거창한 것이 연기이지만,이 연기의 기본원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이 세상 어떠한 것도 단일로 독립되어 있는 것은 없다'
이것이 연기의 원리입니다.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단일로 독립된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홀로 존재하는 고유한 실상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집을 생각해 보십시오. 집은 한 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지세히 보면 수백 수천 가지의 재료가 모여 집이라는 모양을 이루고 있습니다. 결코 하나의 실체가 집을 이룬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을 볼 때는 집 하나를 독립시켜 볼 뿐입니다. 수백 수천 재료가 모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백 수천 재료의 집합체가 집입니다. 집을 하나의 고유한 실체로 보는 것은 우리의 착각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그렇습니다.불교에서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구성요소가 화합하여 이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 과학에서는 60조나 되는 세포의 덩어리가 '이 몸'이라고 합니다. 60조의 세포덩어리....
이 세상에는 결코 단일로 된 물체가 없다. 모두가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깨달은 연기법이요, 연기이므로 공이요 무아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연기법은 매우 발달한 현대 물리학에서도 증명을 하고 있고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최소의 입자로 원자를 많이 이야기 하였고, 그 원자가 양자.전자.중성자의 상호인연 속에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보다 훨씬 작은 '퀴크'라는 물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지구상에서 물체를 생겨나게 하는 최초의 단위로, 머리카락 굵기의 1조 분의 1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퀴크를 발견하고 확신을 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물체를 이루는 최소단위리라. 요것만은 단일로 되었겠지“
그런데 연구를 해 본 결과 그것도 두 가지 세 가지의 물질이 합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쿼크까지도 인연의 화합물이요 연기로써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의 법칙 속에서 수많은 구성요소가 모이고 또 모여 형성된 것입니다. 또 구성요소 어느 하나가 다하면 그 존재는 소멸이 됩니다.
결코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은 없습니다. 실체가 있다고 보는 것은 연기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큰 착각입니다. 내가 '나'라고 주장하는 이 존재도 연기로 잠깐 모인 것일 뿐. '나'는 본래 없습니다. 무아입니다. 공입니다. 오온개공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의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에 집착을 하며 삽니다. 집착하며 살다가 보니 일체고액이 생겨나고,그 일체고액이 '나'를 얽매이는 것입니다.
「아함경」에는 연기법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 연기의 법을 설명할 때 짚단의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짚단은 똑바로 서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두 개의 짚단, 세 개의 짚단을 함께 묶게 되면 그 짚단들이 잘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묶은 끈을 풀면 다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짚단의 예를 손가락으로 바꾸어 연기를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왼손 검지를 'A'라고 하고 오른손 검지를 'B'라고 합시다. 이 두 검지의 끝을 맞대면 삼각형이 됩니다. 이 삼각형이 된 검지를 'C'라고 합시다. 이 C의상태가 계속 유지되고 있으면 사람들은 'C'가 있다고 여깁니다. C에 집착하여 A와 B가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잊어버린채 C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C의 상태가 사라지면 C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있었던 이 삼각 모양의 C는 자기가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거나 자기의 고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A와 B가 만들어 준 것입니다. A와 B가 결합되어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C의 상태가 사라지면 C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A와 B가 흩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꾸만 ‘C’가 생겨났다가 C가 없어졌다고 이야기 합니다. C는 본래 없는 것임에도...
이제 이 C를 '나'에 대입시켜 보십시오. 실체가 있다고 우리는 착각하고 집착하며 살아왔던 '나'또한 본래 없는 것입니다. A.B등 여러 가지가 결합되어 생겨난 연기(緣起)의 존재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연이 모여 생겨나고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이 단순한 연기의 법칙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찾아낸 위대한 발견입니다. 이 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조건이 맞아야 이루어지고 조건이 맞는 것끼리 결합하여 생겨날 뿐입니다.
자연, 인(因)과 연(緣)의 조건이 맞아 이루어진 모든 것은 고유한 실체가 있을 수 없고, 실체가 없으니 공(空이)요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 하겠습니다. A와 B를 결합하여 만들어낸 C는 실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C는 허구요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C는 공이요 무아입니다.따라서 C는 집착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C, 곧 고유한 실체가 있다고 주장해왔던 '나 '때문에 우리는 참으로 많은 잘못을 범하였고, 비교하는 삶 속에서 자기를 학대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착하는 '나'가 본래 없는 존재, 연기로써 이루어진 존재, 집착할 이유가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 보십시오. 그날부터 삶이 바뀝니다. 착각의 구름이 걷히면서 지혜의 해가 나옵니다.
C가 없다는 것, '나'가 본래 무아요 공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공이요 무아라는 것을 이해하는 그 마음바탕에서 엄청난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그 지혜는 우리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가 있다는 그 생각, 그 착각에 의해 지혜가 가리어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이해하여 허구,가짜.착각에서 깨어나면 지혜가 마음바탕에 그대로 나타나게 되고, 지혜로 보면 모든 것이 평등하게 보이며, 어떠한 사람과도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곧 저 사람을 해치는 것이 나를 해치는 일이요 나를 해치는 것이 저 사람을 해치는 것이며, 저 사람을 돕는 것이 나를 도우는 것이요, 나를 도우는 것이 저 사람을 도우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과도 하나가 되고, 자연에 잘못을 저지르면 그 재앙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이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평화롭고 안정되고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에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여 열심히 즐겁게 함으로써 그 일에 전문가가 됩니다.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신지식은 바로 이와 같은 분들일 것입니다. 돈을 잘 벌어야 신지식인이 아니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살며 평화를 누리는 분이 신지식인입니다.
실로 연기의 법칙을 금방 이해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나가 없다'는 무아(無我) '나가 공하다'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체득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연기의 법칙을 A,B,C의 상관관계를 자꾸 궁구해 들어가다 보면 ‘아, 그렇구나’ 하며 이해를 하게 되고, 그날부터 점차 구름이 걷힘과 동시에 밝음이 열리기 시작하여, 주체적으로, 참으로 평화롭고 안정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됩니다.
** 중국 당나라 때의 조주스님은 120살을 살았습니다. 아들 뻘 되는 상좌,손자 뻘 되는 손상좌도 죽는데 스님만은 정정하게 살자 저 아래의 증손상좌들이 여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십니까?" "너희는 시간에 지배를 당하면서 살지만,나는 시간을 지배하며 살고 있다"
** 그렇습니다.연기의 법칙을 공부하여 무아임을 체득하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위대한 행위들을 이루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중심적인 삶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연기의 법칙 속에서 살고 있고 '나'의 실체가 없는 무아임을 깨달아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뜨리고 생활을 하나씩 바꾸어가야 합니다.
연기의 법칙을 깨닫고 무아임을 느끼면 느낄수록 잘못 살아왔다는 것과 생각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100%를 한꺼번에 바꾸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고쳐 가십시오.
처음에는 한 가지 두 가지 고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겠지만, 차츰 서너 가지를 고쳐가다 보면 나중에는 가속도가 붙어 열 가지를 한꺼번에 고칠 수 있게 됩니다.
불교를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공부'라 하는 까닭은 '나'를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고통스런 윤회 속의 '나'가 아니라, 본래부처인 '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끔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공부는 연기를 알 때 체득이 됩니다. 연기임을 알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모든 존재는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법을 보는 자는 여래를 본다"
부처님께서 분명히 선언하신 이 말씀에 따르면, '존재=연기=법=여래=존재'가 됩니다. 이 얼마나 굉장한 말씀입니까? 이 우주의 그 어떤 것도 이 원리를 벗어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연기의 원리를 생각하면서 '나'를 벗어버리십시오.
이제까지 가졌던 '나'로 인한 그릇된 집착을 벗어버리고 참다운 생활인, '나'를 살리는 생활인인 되십시오. 우리가 가졌던 그릇된 관념에서 깨어나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 보십시오. 틀림없이 우리 주위에 행복이 가득해지고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부디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의 법칙인 연기법.무아법.공의 이치를 깨달아 참 '나'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제2장 불교의 세계관
[세계관의 의미] -세계 또는 삶에 대한 올바른 방향과 길에 대한 안목과 신념
[세계관의 중요성] -연기.무아 세계관의 확립이 불교수행의 첫 걸음이면서 신행활동의 근본 생명임. -지혜;세계가 연기의 존재임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터득해 나가는 것 -동체대비행; 연기.무아의 사상과 정신을 체득하여 살아가는 것
[불교의 세계관] -관계의 존재;서로 의지하고 돕는 관계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이 세계→기본 세계관은 연기법 -연기법; 이 세상 모든 존재(세계)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 총체적 관계에 의해 생성되기 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인드라망) -연기를 깨달아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는 것이 불교 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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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답게 살고자 하면
마음이 바뀌면 극락
사람들이 밖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 진정한 행복과는 무관합니다. 밖에 있는 조건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행복해지려면 내면의 행복해지는 그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 발견하신 세계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형상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가치를 매깁니다. 그런 입장에 있으면 밖에 있는 조건이 실제 한다고 생각하고, 외형적인 모습이 어떠한가를 행복의 조건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생들이 추구하는 행복의 조건입니다. 앞에서도 여러차례 이야기 하였듯이 새끼줄을 짚으로 보지 못하고 새끼줄을 새끼줄로만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짚. 본래부처. 무아. 공의 원리에 따라 보는 시각을 바꾸면 생활 속에서 참으로 굉장한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부처님과 중생들이 다른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중생은 형상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에 집착하여 보고, 부처님께서는 본질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견이며, 우리는 이것을 체험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한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그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나'를 보아야 합니다.
'본질을 인식하며 세상을 살아 가라'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불교를 간단히 말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와 달리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다닌 분도 아니고, 어떤 괴력을 가졌던 분도 아닙니다. 우리와는 시각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형상만 보고 그것이 실제한다고 인식하고 사고합니다.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런 형상을 짓게 한 재료나 본지를 보십니다. 없는 것을 한가지 더 보태어 보신 것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본질까지 본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나타난 모습만 육안으로 보고, 부처님께서는 본질까지 포함한 있는 그대로를 혜안으로 다 꿰뚫어 보시는 것입니다.
본래의 있는 그대로의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를 볼 수있게 되면 자기를 보는 시각도 뒤바뀌고 세상을 보는 시각도 바뀝니다. 형상만 보고 형상에만 집착했을 때 때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됩니다.
실제로 부처님의 세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본래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으면 우리도 행복해집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란 말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있는 그대로'가 있는 그대로요, 우리가 본 '있는 그대로'는 잘못된 시각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100% 정확하게 보신 것이고 우리가 보는 있는 그대로는 우리의 착각입니다.
부처님께서 보신 것은 형상이 지어진 원인까지도 보는 것입니다. 형상이 결과라는 것까지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겉모습이요 형상입니다. 우리는 원인을 모르고 결과물만 보며, 거기에 대해 집착을 하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집착과 착각에서 벗어나면 남에게 속는 일이 없습니다. 곧 탐(貪). 진((瞋). 치(癡) 삼독(三毒)중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치(癡) 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발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 내가 아는 부산의 한 보살은 남의 빚보증을 서주다가 번번히 손해를 보았습니다. 마음이 여렸기 때문에 가까운 사람이 찾아와서 급히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돈 많은 친구에게 그들을 데려갔습니다. 자연, 친구는 처음보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하였고, 꼭 빌리려면 보살의 보증을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내가 보증을 서마" 하지만 돈을 빌려간 사람이 빌릴 때와의 마음과는 달리 갚지 않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보살이 대신 갚은 경우가 허다하였습니다. 그래도 보살은 계속 보증을 서주기를 멈출 줄 몰랐습니다. 하루는 그 보살과 친한 젊은 보살이 나에게 차장와 부탁을 했습니다.
"스님,스님이 아니면 그 보살님 버릇을 고칠 분이 없습니다.어떻게 좀 해주세요" '어떻게 저 버릇을 고치지?' 나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강한 자극을 주기로 작정 하였고,그 보살을 만났을 때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왜 그렇게 자꾸 보증을 서주는 거요? 한두 번 당했으면 하지 말아야지" 이 말에 자존심이 상한 보살은 조금 화가 난 듯한 음성을 이야기 했습니다.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 저는 나쁜 게 없습니다" "그렇지 보살이 마음 좋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지 그리고 보살 보고 나쁘다고 할 사람도 없지. 그러나 내가 볼 때 보살은 치인(癡人)이다"
"치인이 뭡니까?" "탐.진.치 중의 치(癡)!" 이 한마디에 보살은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교를 믿어 탐.진.치가 나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는데, 돈 필요한 사람을 위해 보증을 서준 것이 치라리...' 보살은 이 한마디에 그 버릇을 완전히 고쳤습니다.
** 이 보살은 마음이 좋고 여려, 자기도 손해를 보고 남도 죄를 짓게 만드는 일을 자주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치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속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속아줄 수는 있지만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래 부처요 무아요 공임을 이해하기 시작하면 지혜가 샘솟게 되고, 지혜가 있으면 속이려고 접근하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고쳐줄 수 있게 됩니다.
윽박지르고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주면서 스스로가 '아,이제 고쳐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도록 할 수 있습니다.
부디 당부드리오니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내가 본래 부처요 짚이요 무아요 공'임을 이해하고자 애를 써보십시오. 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구름이 걷히고 밝은 해가 나옵니다. 어리석음(치)이 걷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고난이 사라지고 행복만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거늘, 어찌 이 좋은 공부를 마다할 것입니까?
은혜를 알고 사랑하자
불교의 모든 공부는 구름을 걷는 공부입니다. 염불. 간경(看經). 기도. 참회. 봉사. 주력. 참선수행 등 모두가 구름을 걷는 공부입니다. 그럼 어떠한 구름을 걷는 공부인가?
'나'라는 구름을 걷는 공부입니다.
이기적인 '나'를 없애 무아(無我)가 되면 어찌 그곳에 '남'이 있을 것이며, '나다, 너다'하는 구름이 확 걷혀버리면 그냥 그대로 태양이 비치는 대명천지(大明天地)가 되기 마련입니다. 구름만 걷히면 햇빛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가 저절로 발현되는 것입니다.
구름이 걷혀 반야의 지혜가 발현되면 그날부터 우리는 대립을 하지 않습니다.갈등을 하지 않고 분열을 하지 않고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돕고 살되,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도우는 것이요 나를 돕는 것이 남을 도우는 삶이 되어 버립니다. 곧 '나'를 초월하였기 때문에 누구를 위하였던 그 이익이 부메랑처럼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나'에게로 되돌아오는가? 이 반야의 지혜가 우리를 자유롭게 편안하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오손도손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이 사회에는 '남을 도와주면 내가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많이도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고도 감사를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남의 탓'이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침내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 사이게까지 불신이 넘쳐나, 이 나라는 이혼율마저 세계 2위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나'를 초월하면 반야의 밝은 사랑을 나누며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 수가 있는데도 '나'를 내세우는 이기심으로 인간답게 사는 길에서 자꾸만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사는 길!
나는 그 첫번째로 '은혜를 알고 살자', '고마움을 느끼며 살자'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의 인간관계 - 부모와 자식관계, 스승과 제자관계, 남편과 아내관계, 이웃관계, 노사관계, 위정자와 국민의 관계 등 당연히 서로가 사랑해야 할 관계인데도 원만한 인간관계조차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 가지가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은애(恩愛)! 은혜를 알고 고마움을 느끼면 참사랑이 되지만 은혜를 모르고 고마움을 느낄 줄 모르면 참사랑이 이루어지지가 않습니다.
반대로, 옛날에 부모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스승과 제자가 사랑하고, 부부, 노사, 이웃, 위정자와 국민이 서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은혜와 고마움을 마음에 담고서 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애(恩愛)! 바로 ‘사랑 애(愛)’ 앞에 ‘은혜 은(恩)을 두었기 때문에 깊은 사랑이 자연스럽게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은애(恩愛)! 서장(書狀)을 보면 대혜(大慧)스님께서 병으로 다섯 째 아들을 잃은 왕내한(往內翰)에게 보낸 위로의편지가 있으며, 그 편지의 주제는 은애입니다. 이를 간략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부자의 정에는 세세생생 은애의 습기가 흐르고 있다. 부모가 죽은 자식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부모가 죽었을 때 자식이 슬퍼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바로 부모자식 사이에 은애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은 원래 하나이다. 그런데 자식이 죽었는데 부모가 슬퍼하지 않고 부모가 죽었는데 자식이 애통해하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은혜로써 사랑한 사이이기에 슬픔은 너무나 당연하다. 울고 싶으면 실컷 울고,생각하고 싶으면 실컷 생각하라"
이 편지 속의 은애라는 글자를 대하는 순간 나는 크게 느꼈습니다.
"아,요즘 사람과 옛날 사람의 사랑하는 방법이 달랐구나!“
옛날에도 이기적이고 못된 사람이 있어 부모를 괴롭히고, 첩을 두어 아내의 가슴을 시커멓게 만들기도 하였지만, 정상적이고 제대로 된 사람은 은혜를 알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사람들은 은혜[恩]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사랑[愛]만 합니다. 사랑만 주고 받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은혜나 고마움을 모르는 사랑은 이기적으로 흐르기 마련이요, 이기적으로 흐르다보니 자꾸 바라기만 합니다. 자꾸 바라는 사랑은 욕구불만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 욕구불만이 서로를 살리는 사랑의 정상적인 관계를 깨뜨립니다. 이런 부부라면 이혼으로 끝을 맺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지난해 말 동화사에 갔을 때 신혼부부가 인사를 하기에 덕담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지구상의 인구가 60억인데,두 분은 60억대 1로 선택된 분이구려" "아! 예" "60억대 1의 선택, 그것만 하여도 얼마나 고마운 인연입니까? 서로서로 정말 고맙게 생각하며 사십시오.
결혼하여 사랑만 생각하고 살면 이기적이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생활하다 보면 불평불만만 쌓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함께 생활하시면서 서로의 고마운 점을 발견하고자 애를 써 보십시오. 남편이 월급봉투 가져다주는 것도 고맙고, 아내가 따뜻한 밥 해주는 것고 고맙고... 찾아보면 불만스러운 것보다 고마운 것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예 스님 감사합니다" 신혼부부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돌아갔습니다.
**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정상적이어야 할 인간관계가 그릇되게 흘러가는 것은 은애(恩愛)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은(恩)’은 느끼지 못하고 ‘애(愛)’만 하기 때문에, 애(愛)에는 은(恩이 : 은혜. 고마움)이 빠져 있기 때문에 이기적인 사랑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이 되면 불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마움을 못 느끼는 사랑은 요구를 많이 하고,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잘해주어야 흐믓해합니다. 그러나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불만이 생겨나고, 불만이 쌓이면 그토록 사랑하던 사람도 보기가 지겹고 미워지고 화가 치솟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를 느끼고 고마움을 느끼는 사랑은 오히려 요구하지 않습니다. 바라기 보다는 잘해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재가불자들에게 자주 권유를 합니다.
"오늘부터 집의 처사님이 해준 것 중에서 고마운 것이 무엇무엇 있는지를 메모해 보십시오.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매일매일 하나씩이라도 찾아서 메모를 하십시오. 그리고 그 메모를 처사님이 자연스럽게 볼 수 있도록 유도를 해보십시오. 그럼 처사님도 '어? 이 사람이 달라졌어'하며, 아내에 대한 은혜로움을 찾을 것입니다."
한번 실천에 옮겨 보십시오. 부부관계가 저절로 원만해지고 사랑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또한 부모자식, 스승과 제자, 노사관계 등도 은애(恩愛)로 초점을 맞추면 더욱 좋아집니다.
자식은 부모에 대한 은혜를 느끼며 사랑하고, 부모도 자식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며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볼 때 부모가 낳아주고 길러주고 뒷바라지 해 주는 것만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고,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식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요. 제 갈 길을 잘 찾아가는 것만도 고마운 일입니다.
부모나 자식에 대한 욕심을 비우고 고마운 점을 찾아 보십시오. 틀림없이 불만스러운 점 보다는 고마운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요. 그것을 찾으면 좋지 않던 부모 자식 사이도 참으로 정다운 사이로 바뀝니다.
이제 내가 직접 시험해본 이야기 하나를 하겠습니다.
** 경상북도 영주시에 50대 보살이 경영하는 식당이 있습니다. 그 보살은 처음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조그마한 분식점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 분식점에서 비빔국수를 공양 받고 보살에게 말했습니다.
"보살님, 식당을 하면서 도 닦는 법을 가르쳐 줄까요?" '예? 식당을 하면서 어떻게 도를 닦습니까?" "암,닦을 수 있지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도를 닦을 수 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까?" "하겠습니다" 하겠다는 말을 듣고 나는 지난날에 있었던 우스개 이야기부터 해주었습니다.
"절에 자가용이 없던 시절, 해인사에서 재무를 보았던 스님이 대구로 볼 일을 보기 위해 터미널로 버스를 타러 가는데, 대구에서 들어오는 첫 버스에서 관광객 수십 명이 내려 절 쪽으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재무를 보는 스님이 무심코 말했습니다. '와- 저기 자장면 많이 올라온다.' 그때 입장권 한 장이 자장면 한 그릇 값이었는데, 재무스님에게는 그들이 돈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보살님은 식당 문으로 들어오는 손님이 혹시 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까?"
"그렇게까지 생각은 안 해도 비슷한 마음으로 손님을 대합니다" "만일 도인이 식당을 한다면 손님을 무엇으로 볼까요?" "모르겠습니다" "짐작컨대 손님이 은인으로 보일 것입니다.이해가 가십니까?" "예?" "그렇지 않습니까? 그 손님들 덕분에 먹고 살았지요 아이들 공부시켰지요. 은인 아닙니까?"
그러자 보살은 금방 이해를 하였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손님이 은인이네요" "진짜 그렇게 생각이 듭니까?" "예“ "그럼 지금부터 손님이 은인이라는 생각으로 식당을 운영해 보십시오.그 마음 변치 않고 식당을 하면 그것이 곧 도 닦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한달 쯤 뒤, 보살이 환해진 얼굴로 찾아와 말했습니다. "스님,장사가 너무 잘됩니다. 왜 이렇게 잘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다음,그 분식집은 종업원 15명이 바삐 움직이는 식당이 되었습니다.
** 이 보살의 체험이 새끼줄을 짚으로 볼 줄 아는 경우와 새끼줄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경우와의 차이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이기심으로 손님을 돈으로 보게 되는 사람과 '나'를 비우고 손님을 은인처럼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 오는 복의 차이는 하늘과 땅입니다.
'손님을 은인으로 본다’
손님을 은인으로 볼 때는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삿말 속에 담긴 감정부터가 다릅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임하면 식탁을 닦는 것이나 음식을 하는 것이 생계수단으로 하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그렇게 정성으로 음식점을 경영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손님을 대하는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식당은 자연히 번창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 중에는 '잘해주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예상 밖으로 많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불자들 중에도, '공의 정신으로,무아의 마음가짐으로 하라'고 하면, 수궁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스님,그렇게 하면 공장이 안 됩니다. 회사가 망합니다" 그들은 부처님의 무아법,공의 법을 시행하면 남에게 무시당하고 왕따가 되어 바보가 되는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아닙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 이 법을 알면 알수록 자주적인 사람이 됩니다. 자율적이요 능동적인 사람이 되고 이해심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이러한 사람은 한 가정이나 어머니 노릇을 톡톡히 합니다. 어디에 가서든 리더가 됩니다.
노사관계, 기업주와 노동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고마움을 느끼면 당연히 서로 잘됩니다. 핵심은 평등한 시각입니다. 기업에 대해 노사가 평등한 시각을 갖고 보면 은애의 관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업주들이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노동자를 취직시키고 노동자의 생활을 안정되게 해주고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또한 기업주는 노동자를 통해 돈을 벌고 자기의 목표를 성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노동자가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서로가 고맙고 은혜롭다는 것을 느끼기만 하면 집중력이 생겨나, 연장근무를 하지 않더라도 능률이 오르고 불량률은 제로가 됩니다. 자연 기업은 돈을 많이 벌게 되고, 돈이 잘 벌리면 보너스도 두둑해집니다. 이렇듯 노사가 고마움과 은혜를 느끼는 관계가 되면 서로서로가 자꾸자꾸 좋은 관계로 바뀌는 것입니다.
실로 인간관계에 있어 평등한 마음,평등한 시각을 가지면 참으로 행복해집니다.
부부는 원래 평등합니다. 부모와 자식도 평등하고, 스승과 제자도 평등하며, 노사도 평등합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과연 평등합니까? 남편이라 하여 강자로 존재하고, 부모라 하여 자식을 마음대로 만들고자 하며, 기업주로 있으면서 이윤을 독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마음이 평안합니까? 만약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면 아직 복된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있으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평등할 수가 없고 평안할 수가 없습니다. 아울러 고마움이나 은혜로움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욕망, 곧 탐욕이 사라진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오는 것이 평등이요 고마움이요 은혜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사라지지 않으면 구름이 걷히지 않습니다. 해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반대로 이기적인 욕심의 자리를 고마움과 은혜로움으로 탈바꿈시키면 차츰 밝은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열심히 '고맙습니다','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십시오. 은혜롭다는 생각을 마음속에 품으십시오. 그리고 고마음과 은혜로움을 자녀들이나 제자,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심어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온 나라가 '도의 나라'로 바뀌게 됩니다.
도(道)! 생활 속의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움을 알고 고마움을 아는 가운데 있습니다. 신통변화를 일으키고 기적을 일으키는 등의 특별한 것이 도가 아닙니다.
매사에 감사할 줄 알고 은혜를 느끼며 사랑으로 사는 삶! 그리하여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삶! 이것이 참된 도라는 것을 꼭 명심하시고, 생활 속에서 은애(恩愛)를 실천하는 사람다운 사람, 곧 보살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간답게 살기를 가르치는 자녀교육
또 하나 당부드리고 싶은 것은 자녀교육에 대한 마음가짐입니다.
연기인 줄을 아는 사람은 남 따라 살지를 않습니다.
본래 무아인 줄을 알게 되면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자기의 길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자녀 교육을 보면 참으로 그릇되다는 것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교육이 이 나라의 앞날을 가름하고 있는데도, 아이들 교육은 너무도 개인주의적이요 이기적이며, 돈벌이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니다.적어도 불자들은 우리의 자녀들을 불교식으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현재 정부의 교육방침이나 사회 분위기는 학생들을 '돈벌이 하는 기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저의 이 말이 틀렸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자녀들 장래의 중심을 경제, 곧 '돈'에 두고 있습니다. 돈 잘 벌지 못하면 불행해진다며, 돈 잘 버는 돈벌이 기계가 될 것을 은근히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인간을 돈벌이 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리면 행복해집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엄청난 부작용이 나오고, 인성이 망가집니다. 그 아이들은 장래에 절대로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부정부패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참으로 심각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인간의 가치를 돈벌이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인간답게'가 아니라 '돈'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벌이 하는데는 유식.무식이 따로 없습니다. 오히려 유식한 사람이 더 잘 합니다. 비자금을 '차떼기'로까지 받으니까.
이런 차떼기는 해외토픽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어이가 없어 웃습니다. 왜 이와 같은 일이 생겨난 것일까요? 바로 교육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돈 만드는 기계로 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주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을 돈벌이 시키는 기계로 만들지 맙시다." 그런데 가끔씩 반문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럼 스님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교육이라고 보십니까?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분명하게 답을 합니다. "사람을 만들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것이지요"
사람을 만드는 교육이 무엇입니까? 원리는 간단합니다. 머리 좋은 아이들은 머리 쓰는 쪽으로 직업을 살려주면 됩니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은 손재주를 살려주고 성격이 좋고 인간관계가 좋은 사람은 비지니스나 장사 쪽으로 키워주면 됩니다. 이 간단한 원리에 따라 키우면 됩니다.
그런데 왜 능력이나 소질과는 관계없이 명문대학에 보내려고 그렇게 애를 씁니까? 명문대학에 가면 취직 잘되고 돈벌이가 잘 된다고 해서 보내려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남보다 못지않게 살아야 한다는 비교심리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까?
매 년 수능시험을 치고 난 후 대학에 입학원서를 접수할 때가 되면 휴대폰이 불통이 되고 인터넷이 마비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마치 복권당첨을 원하는 것처럼 '어디에 지원하면 비율이 약할까? '요행스럽게 들어 갈가?' 이래서야 어디 교육이 되겠습니까?
남들과 비교하지 말고 아이의 능력과 소질에 맞게 학교를 선택하여, 그 학교 그 학과에서 열심히 배운 다음 사회에 나와 자기가 하는 일에 재미와 의미를 느끼며 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돈은 저절로 붙습니다. 절대로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 일이 무엇이 되었든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굉장히 즐겁고 보람있게 일을 할 수가 있고, 열심히 일을 하다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재물만이 아니라 명예도 함께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소질을 살리고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인성(人性)교육입니다. 인성이 길러지면 돈과 명예는 저절로 뒤따르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구름으로 뒤덮여 밝지 못한 상태에 있는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을 돈벌이 하는 기계로 만드는 교육을 자꾸만 시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생활할 때 과연 행복하게 살아지겠습니까?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직장에 대한 스트레스 부터가 엄청납니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직장인 다섯 사람 중 네 사람은 자기 직장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능률이 오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직장의 스트레스는 직장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으로도 옮겨지고 자신에게도 옮겨집니다. 툭 하면 부부가 헤어지는 가정, 툭 하면 자살을 택하는 사회...
다시 한번 정리를 하겠습니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아이의 소질을 살려주십시오. 우리의 아이들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정말로 즐겁게 할 수 있게 뒷받침을 해 주어 그 일의 전문가로 만드는 것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일이 다른 직업에 비해 높다. 낮다. 귀하다. 천하다는 비교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모든 직업은 평등합니다. 아이의 소질을 살려주어 스스로가 그 일에 대해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가장 귀한 삶이요, 성취를 향해 정진하여 정말로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이 가장 질 높은 삶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이 교육을 시켰다면, 부모노릇 스승노릇을 참으로 잘 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인연을 참으로 잘 가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만드는 교육. 이 교육을 우리는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사회에 희망이 있고 장래가 있습니다. 혹, 어떤 이들은 우려를 표명할 것입니다.
"우리 아이만 그렇게 키우면 다른 아이와의 경쟁에서 뒤떨어지지 않겠습니까?" 물론 지금으로서는 그와 같은 우려도 당연합니다. 온 나라 전체가 불안감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말씀드리건대 절대로 불이익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윤택하고 자주적이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예 또한 많습니다. 요즘은 언론 매체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를 많이 반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직국에서는 그렇게 교육을 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용기있게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자녀교육으로 바꾸어 보십시오. 자녀교육에 대해 가졌던 관념에서 깨어나 우리의 자녀들을 진정으로 살리는 교육에 앞장을 서서, 세세생생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되기를 두손 모아 축원드립니다.
부(富)에 대한 정견
마지막으로 세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꼭 갖추었으면 하는 재물,곧 부(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대혜(大慧)스님의 「서장(書狀)」에 보면 "유루복(有漏福)은 삼생원수(三生怨讐)"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루란 '샌다'는 뜻으로 번뇌의 삶을 가리키며, '내가 있다'라는데 집착해서 이기심으로 사고하고 생활하는 것입니다. 이 유루복이 왜 삼생의 원수인가?
첫번째는 이기심으로 부를 성취하다보니 남에게 피해를 주게 되므로 그것이 일생 원수가 됩니다.
두번째는 그 재산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부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피해를 입히고, 자꾸 욕망을 더 가져 자신에게도 피해를 주게 되므로 이생 원수가 됩니다.
세번째는 그 결과로써 내생 및 미래에 과보를 받아 좋은 세상에 못 태어날뿐 아니라, 미래에도 갖은 고초를 당하기 때문에 삼생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富)에 대한 정견만 가지게 되면 '유루복이 삼생원수'라는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복을 참으로 나도 행복하게 하고 남도 행복하게 하는데 쓸 수 있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부처님 당시의 수달타 장자이십시다.
** 부처님을 너무나 존경하여 기원정사를 지어 바쳤던 수달타 장자는 어느날 행복에 대한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습니다.
"행복의 조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행복하게 보이고 가치있게 보이는 것도 세월이 지나면 없어지는 무상한 것이니라"
이 말씀을 듣고 수달타 장자는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부처님이시여, 절대적인 행복과 해탈을 얻는데 부(富)가 방해가 된다면, 저의 재산을 다 버리든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끌어 주십시오"
이때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수달타여, 그대는 재산을 버릴 필요가 없다. 더 가져라 더 가질 자격이 있다.그대는 재산으로 자신을 해치지 않을뿐더러 남을 돕고 있다. 그러므로 얼마든지 재산을 가져도 좋다"
** 부처님께서는 수달타 장자에게 "너는 재산을 더 가져라. 더 많이 가져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이 가지더라도 자기를 해치거나 남을 해치는 일이 없이 자기에게도 도움을 주고 남에게도 도움을 주는데 그 재산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수달타 장자가 정견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으로 부를 사용하게 되면 그 재물은 삼생원수가 됩니다. 그 부를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자기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부를 성취하는데 있어서도 정당해야 합니다. 가지고 있는 부를 잘 쓰는 것 못지 않게 부를 가지기 위한 과정에서의 노력도 정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삼생원수가 삼생복(三生福)이 될 수 있습니다.
이기심과 욕망으로 부를 성취하고,이기심과 욕망으로 부를 쓰게 되면 그것이 모두 원수가 되어 결과적으로 남을 해칠 뿐아니라 자기를 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를 가질 때도 잘 가져야 하고 부를 쓸 때도 잘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어야만 자기에게도 덕이 되고 남에게도 덕이 됩니다.
사실은 재산의 많고 적음보다는, 그 재산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바로 보고 바로 판단하고 바로 잘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정견입니다. 정견이 갖추어지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런 사회가 되면 정말 사람이 살 수 있는 안전하고 좋은 사회가 됩니다. 그와 같은 정견을 갖춘 사람이라면 법이나 제도로써 강제성을 띄지 않아도 사회의 분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저절로 분배가 이루어집니다.제도나 법이나 타의에 의해서 하는 분배는 진정한 분배가 아닙니다. 제도나 법을 떠나 참된 마음으로 분배를 할 때 진정한 의미의 분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등입니다.
빈부가 평등하다는 말은 이해하기에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빈부가 평등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면 거기에서 지혜로운 행위가 나오게 됩니다.
빈부를 불평등으로 볼 때는 교만이 생겨나고 열등의식을 갖게 되며, 분노와 슬픔 등의 여러 감정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평등한 줄 알면 못 가진 사람도 절대 위축되지 않고, 자기 필요에 의해 열심히 노력하게 됩니다.
가진 사람도 교만해지지 않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한테 지혜롭게 분배를 하게 됩니다. 「탈무드」에 나오듯이 물고기를 그냥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도(道)로써 돈을 쓰는 사람! 정견으로 돈을 쓰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참된 부자요. 이러한 사람에게는 부가 떠날 날이 없습니다. 언제나 풍요롭고 만족하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디 당부드리건데, 은혜를 알고 사랑을 베푸는 불자, 자녀들이나 주위 분들께 인간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불자, 정견으로 돈을 쓰는 불자가 되고자 노력하십시오. 비록 도를 크게 닦지 못했을지라도, 인간관계와 돈에 대한 윤리가 정립되면 세상을 살기가 훨씬 평온해집니다. 3. 불교공부와 마구니
무아의 고향집을 향해
불교의 핵심교리 중에는 삼법인(三法印)이 있습니다.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이 삼법인입니다.
이 삼법인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으로,불경 속에 삼법인의 가르침이 들어 있으면 불법의 도리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요의경(了義經)이라 하고,삼법인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불법의 도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은 불요의경(不了義經)으로 판단합니다.이토록 중요한 가르침이 삼법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삼법인 가운데 제행무상,모든것이 덧없이 변화한다는 가르침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이 사바세계의 삶이 괴롭고 생노병사(生老病死)등의 변화를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열반적정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자리이기 때문에 깊은 이해를 요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문제는 제법무아입니다. 모든 것이 무아다 이 무아야말로 중생인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나가 분명히 있는데 왜 나가 없다고 하느냐?"
사람들은 이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무아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면 열반적정을 이룰 수 있는데도 무아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의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법무아라고 할 때의 그 나는 과연 무엇인가?
아주 깊은 내용보다는 중생의 입장에서 당장극복해야 할 나에 대해 이야기한다면,그것은 바로 이기적인 나 입니다.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나가 본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공부를 계속하여 깊은 경계에 들어가면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게 됩니다.주관과 객관이 사라진자리. 그 자리가 무아(無我) 입니다.거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습니다.이기적인 나 자기중심적인 나가 없습니다.
나가 없기 때문에 아주 공정하고 평등한 마음으로 있을 뿐 남과 비교를 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나가 있다[有我]고 생각하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기심이 작용하여 모든 것을 나에 맞게 생각하고 나 쪽으로 끌어들여 다른 사람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과 계속 비교하면서 자기학대를 합니다.
사실 모든 학대는 자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지 남이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그런데도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오히려 괴로우면 남을 탓하고 주변에 있는 분을 탓합니다. 그리고는 더욱 깊은 괴로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뜨십시오.우리의 본래 모습을 무아입니다.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본래 모습입니다.
제법무아! 저 하늘에 구름이 걷히면 해가 나오듯이 우리가 무아임을 아는 것과 동시에 굉장한 지혜가 발동이 됩니다.
아울러 그 지혜 속에는 나를 가장 잘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며 남과 더불어 반목과 갈등 없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앞의 장에서 짚과 새끼줄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였듯이 우리는 새끼줄을 나로 보고 있습니다.겉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끼줄에 집착하듯이 나가 있다는 생각이 마음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새끼줄이 아닙니다.새끼줄을 만들어낸 것은 짚입니다.무아입니다.
나가 있다는 생각 허구입니다.착각이요 허구이기 때문에 그 나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괴로움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각을 깨고 우리의 존재원리 그대로 새끼줄과 짚이 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허망하고 무상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밝은 지혜가 나와 자주거이고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무아임을 알고 사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가장 잘 보호하는 방법이요 사랑하는 방법입니다.그리고 무아임을 알고 살면 결과적으로 남을 돕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남을 돕는 것이 나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곧 무아이기 때문에 남과 나를 함께 살릴수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돕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세계.
만약 우리의 가정이나 사회가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불국토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무아! 불자의 목표는 무아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면 본래의 자기 집에서 살지를 못합니다.편안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무아의 집에서 살지를 못하고 먼 객지에 가서 고생을 하는 것과 꼭 같이 되어버립니다.어찌 객지의 삶이 편안할 것입니까?
그러나 지금은 비록 객지에 가서 살고 있더라도 우리의 존재원리가 무아임을 알게 되면 그날부터 본래의 집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물론 집에서 멀리 가 있는 사람은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요 멀지 않은 곳에 가 있는 사람은 쉽게 돌아올 것입니다.그리고 대문 밖에 놀고 있었던 이라면 홱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럼 이렇게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바로 불교공부입니다.
참선.염불.기도.봉사활동.경전탐독.관법 등이 모두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공부입니다.만약 이러한 공부를 하다가 잘되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생각하십시오
'아 내가 무아의 고향집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와 있구나 돌아가는데는 넉넉한 시간이 필요하겠구나.그래 부지런히 돌아가자.언젠가는 돌아가게 된다'
실로 무아라는 것을 알고 공부를 해보십시오.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중간과정이 굉장히 즐거워집니다.
나도 현재 고향집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습니다.그렇지만 무아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 굉장히 행복합니다.삶에 대한 보람.공부에 대한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이 즐거움은 세속적인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영화.TV.노래방.스포츠 등은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놀이문화입니다.외적인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 놀이문화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은 한계가 있습니다.그리하여 이전 것보다 더 극적이고 더 좋은것을 찾게 됩니다. 시각을 바깥에다 맞추고 있기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아의 본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각에서 보면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더 깊이 있게 볼 수가 있고 운동경기를 보더라도 훨씬더 재미있게 볼 수가 있습니다.왜냐하면 이것 저것 좋고 나쁨 등이 주관적인 양변(兩邊)을 떠나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변(兩邊)을 떠나 본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시각으로 놀이문화를 수용하게 되면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볼 수 있을 뿐이나라 공부도 됩니다.놀이문화를 즐기는 것까지 공부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러한 무아의 존재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기심으로 끊임없이 자기학대를 합니다. 그리고 불안감이나 불만스러운 생각을 벗어나고자 또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합니다.그러나 또다른 무엇을 구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 줍니까? 나를 더 괴롭게 만들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아의 원리부터 이해하고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이 원리를 알면 참으로 풍요롭고 편안하게 잘 살 수가 있습니다.반대로 이기심으로 살다보면 놀이문화 뿐만이 아니라 발달한 현대문명이 오히려 우리를 힘들게 하고 불안하게 만듭니다.
어려움이 닥쳐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무아의 원리를 아는 이는 어려운 현실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노력하여 해결을 하지만,이기적인 사람은 열심히 노력하기보다는 주변사람을 원망하고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주변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을 괴롭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공부를 꼭 해야 합니다.그래야만 스스로를 보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성불을 목표로 삼아라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듯이 불교의 공부방법은 매우 다양합니다.참선.염불.주력(呪力).관법.경전공부.기도.참회.봉사등 중생의 그릇과 처한 환경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이 모든 공부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성불(成佛)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참선을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부처가 되기 위해 참선을 하는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능력을 지니기 위해 주력수행을 하는것이 아닙니다.부처가 되기 우해 주력을 닦는 것입니다. 극락에 가서 살려고 염불하는 것이 아닙니다.부처가 되기 위해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복을 받으려고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부처가 되려고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기도에 임하겠지만 그 원대한 뜻은 부처가 되는데 있습니다.부처님께서 설정하신 불자들의 공부 목표는 언제나 성불입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불자들은 성불이라는 목표를 잊은 채 이기심에 얽매여 나에게 좋다는 공부방법만 쫓아가고 있습니다. 부처가 되려고 공부하는 것과 단순한 눈 앞의 이익을 위해 불교공부를 하는 것.이 목표의 차이에 의해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봉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 불교의 한 단체에서는 불자들에게 몇 개월 동안 봉사에 대한 교육을 시킨 다음 자격증을 주는데 교육을 마친 사람은 꼭 나에게로 보냅니다.그때마다 나는 그들에게 묻습니다.
"봉사를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하나같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꼬집습니다.
"불교에서 봉사하는 법을 배웠는데 좋은일을 목표로 삼아서야 되겠습니까? 불교의 봉사는 부처님 되는 방법입니다. 봉사하는 그 자체가 부처님 되는 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불교의 봉사는 단순한 선행에 머물지 않습니다.복을짓고 복을 받기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가 되려고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염불.주력.참선.관법.경전공부.기도.참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공부가 부처님 되어가는 과정 입니다.실로 부처님 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서 이러한 공부들을 한다면 그 힘은 매우 커집니다.자동차를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차의 배기량은 6백cc에서 5천cc까지 매우 다양합니다. 그 배기량에 따라 차의 속도나 힘은 큰 차이를 보입니다.그런데 착한 일로 끝나는 봉사나 복을 짓기 위한 봉사는 배기량 6백cc의 차처럼 힘이 없습니다.그러나 부처를 목표로 삼고 봉사를 할 때는 배기량 5천cc 이상의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그 속에서의 깨달음도 다르고 가치도 달라집니다.봉사의 목표가 부처님일 때는 그야말로 운문스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좋은 날 이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불자들은 삶 자체를 부처님 되어가는 과정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흔들리지 않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불자들 중에는 옆에서 염불이 좋다고 하면 염불을 하였다가 누군가 참선이 좋다고 하면 참선으로 바꾸는 사람이 있습니다.좋다고 하면 그냥 따라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목표가 부처님 되는 것이라면 그렇게 쉽게 바꾸지 않습니다.목표가 눈앞의 좋은 것이기 때문에 지조 없이 바꾸는 것입니다.공부의 목표는 분명하여야 합니다.불교공부의 목표는 성불(成佛)입니다.
불교공부의 목표는 달을 보는 것 입니다.그런데 어떤 이들은 달은 보지 않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에 집착합니다. 손가락만 열심히 볼 뿐입니다.실로 참선.염불.봉사.경전읽기 등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손가락에 집착하여 진짜 공부를 잊고 삽니다.
공부하기 보다는 자기 것이 좋다는 것을 자랑하기에 바쁩니다. "선이 최고야,경전은 봐서 뭐해" "말세중생은 염불을 해야 해.선을 닦기에는 근기가 모자라"
하지만 이 모두가 부처님 된다는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입니다.불교공부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비우는 공부입니다. 나를 비우고 또 비워나가는 것이 불교공부입니다.
염불.참선.봉사.기도 등 무엇을 하든 나를 채우고 나를 내세우면 그릇된 공부요 ‘나’를 비우며 무아(無我)를 체득해가면 바른 공부가 됩니다.
** 한 스님의 이야기입니다.그 스님은 강원을 나와 몇철 동안 선방에서 정진하다가 인연이 닿아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그 뒤 미국에서도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유학을 가서 불교학을 전공하는데 한 가지가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이까짓 학문이 무슨 필요가 있나? 참선을 해서 개쳐야지' 이 한 생각이 번뇌가 되어 그 스님을 괴롭힌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다가온 유학의 인연을 포기할 수 없어 끝까지 공부하였고,귀국하여 승가대학의 강사가 되었습니다.그런데 강사가 된 다음에도 그 번민은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강사노릇을 해서 뭐하나? 참선을 하여 견성성불을 하여야지'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나의 법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불교수행은 자기를 비우는 것이다.무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이것이 되면 모든 공부는 다 같다" 말을 들은 그 스님은 크게 느꼈습니다.
'아! 선방에 가고 선을 닦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경을 보면서도 자기를 비우면 선방에 있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계속 자기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던 선에 대한 고집을 내려놓았습니다.그날부터 그 스님은 참으로 편안하고 즐겁게 경을 보고 가르치는 강사가 되었으며,나를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습니다."스님,정말로 감사합니다"
지혜로운 분은 이 이야기를 통하여 이미 이해를 했을 것입니다.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집착하지 말고 달을 보라는 뜻을! 대해스님도 서장을 통하여 이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깨달은 사람은 법의 자리에서 모든 것을 사고하고 말을 하고 행위를 한다.경전을 보거나 조사의 어록을 보거나 봉사를 하거나 그 밖의 무엇을 할지라도 자기라는 것을 비우는 수행이 되면 다 같다"
법의 자리에서 보면 공부에 통일된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의 핵심은 비우고 무아를 체득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방법을 내세우며 자꾸만 분열을 시킵니다.결코 분열을 시키면 안됩니다.통일된 원리에 따라 하나로 모아나가야 합니다. 통일된 그 자리.우리의 목표가 되는 그 자리는 벽이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나의 공부를 고집하여 한 집안 사람끼리 벽을 만들고 분열해서야 되겠습니까? 한 가지만 더 꼬집겠습니다.
나는 평생을 참선정진한 수좌이지만 선종의 사교입선(捨敎入禪) 하라는 가르침에 대해서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사교입선은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하지만 법의 자리에서 볼 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교종에서 경을 왜 봅니까? 글자나 익히고 이론을 배우기 위해 경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깨닫기 위해 경을 보는 것입니다.부처님이 되기 위해 교를 닦는 것입니다.절대로 선을 닦기 위한 기초를 다지기 위해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아닙니다.실로 교종에서도 깨달은 고승들이 참으로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원효.,의상스님도 그러한 분이지 않습니까? 그분들은 경을 철저히 보았습니다. 경전을 성불의 길잡이로 삼아 열심히 뜻을 새기며 자기를 비우고,경전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큰 깨달음을 이룬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교입선을 해야 합니까?
사교입선은 선종에서 스스로를 높혀 한 이야기입니다.따라서 경을 가르치는 강사들은 이에 대해 분명히 반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하지만 오늘날에는 강사스님들까지 선종의 주장을 쫓아 그렇게 가르치고 있고 그러한 마음으로 경을 보고 있습니다.현실이 이러하건데,어찌 교가 발전을 할 수 있겠습니까? 경전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경 속에서도 선의 요소가 참으로 많습니다.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 금강경 -
"망상을 일으키지 말라.망상을 없애려고도 하지 말라 - 원각경"
경전 속에는 이러한 구절이 한이 없습니다.선적인 구절이 참으로 많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선과 교는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선과 교 모두가 목표는 깨달음입니다.성불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매달려 달을 보지 못하게 되면 안됩니다. 분명히 마음에 새겨두십시오.
염불.주력.참선.경전공부.기도.참회.봉사 등 불교의 모든 공부는 부처님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어떠한 공부를 통해서든 나를 비워가야 한다는 것을...
실로 불교를 공부하면 삶에 힘이 붙습니다.나아갈 길이 보이고 삶이 즐겁습니다.
이 좋은 불교공부!
그런데 불자들은 다른 종교인에 비해 공부를 너무도 하지 않습니다.스스로 공부하기 보다는 남에게 의존하기가 다반사입니다.이제부터는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십시오.부처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스스로 노력하고 공부하여 불법을 이해하면 할수록 길이 넓게 열립니다.고난이 스스로 물러나기 때문에 여유롭게 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수 있습니다.
이 사바세계를 살다보면 정말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절망적인 때가 있습니다.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한두번은 겪습니다.이렇게 앞뒤가 꽉 막혀 어떻게 해볼 수 없을 때는 극단적인 생각을 내게 됩니다.죽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때 불자인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음을 택하겠습니까?
** 열심히 일하여 직장에서도 인정을 받고 가정생활도 원만했던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그런데 친구의 꼬임에 빠져 놀음을 하기 시작했습니다.처음에는 가진 돈으로 조그맣게 판을 벌리다가 저금한 돈을 찾아 차츰 큰 판으로 마침내는 노름판에서는 빠져 나올 수 있었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습니다."아,면목 없다.아내와 아이들,사장님을 무슨 낮으로 볼 수 있으리" 그는 자살을 결심하고 약을 사서 공원으로 갔습니다.그때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공원화장실에는 신문이 한 장 있었는데 죽을 용기가 있으면 용서를 빌어라 는 내용의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그 글을 읽고 용기를 얻은 그는 사장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사장이 크게 화를 내고 갖은 욕설을 다하였지만 그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마침내 진심어린 참회와 이전의 성실했던 직장생활태도 덕에 그는 다시 채용되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품으로 돌아가 이전보다 가장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였습니다.
** 불교를 공부하면 최소한 어찌할 수 없는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절망에 빠지기 전에 길이 보입니다. 불교 공부를 하여 나를 비워가기 때문에 절망이 다가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원리가 무엇입니까? 절망은 나가 있기 때문에 찾아듭니다.이기적인 나로 말미암아 이것 아니면 저것 있다 없다.좋고 싫음 이익 손해 등의 상대적인 세계 속에 주저앉아 있기때문에 절망감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드는 것입니다.이제 다시금 공부해 대한 결심을 다지고 부처님의 법을 생활화하고자 노력해 보십시오.
성불을 목표로 삼고 독경.봉사.염불.기도 .참선.참회등 어떠한 수행이라도 부지런히 하면서 나를 비워 가십시오
‘나’를 비우면 비울수록 무아(無我)를 체득하면 할수록 나의 사는 길을 분명히 알게 되고 그 길 속에서 가치와 보람과 자긍심을 느끼며 능동적으로 살 수 있게 됩니다.그리고 우리가 하는 일 모두가 성불의 밑거름이 됩니다.
마구니는 곧 이기심
그럼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참선.염불.경전탐독.기도 등의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념(正念)으로 해야 합니다.
팔정도(八正導)의 일곱 번째인 정념은 두 번째인 정사(正思)와 다릅니다.염(念)과 사(思)는 둘다 생각으로 새기지만 정사는 그야말로 바르게 생각하라는 것이고 정념은 항상 정진하는 마음을 챙겨라는 것입니다.
참선을 한다면 화두에 대한 의심이 한 덩어리가 되도록 챙겨나가는 것이요.염불을 한다면 염도염궁무념처(念道念窮無念處)가 되도록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정념은 한 덩어리로 엉키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밀가루로 풀을 쑤어 식히면 한 덩어리로 엉키듯이 정념 으로 화두나 염불과 한 덩어리가 되도록 챙기라는 것입니다. 한 덩어리가 되도록 정념을 하라! 왜 정념을 하라는것인가?
정념이 되면 주관과 객관이 없어져서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여러가지 수행법은 모두 다 주관과 객관을 초월해서 깨닫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눈으로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어하고 거슬리는 것을 보면 피하고자 합니다.이러한 마음 작용이 마구니로 바뀌어 공부를 방해하는 것입니다.물론 현재의 마음만이 아니라 과거에 좋아했던 것 나빴던 경험 등도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나타나 공부를 방해합니다.
따라서 무아의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공부인은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에 끌려가서는 안됩니다.
양변(兩邊)을 떠나야 합니다.
지금 나의 이기심에 맞는 좋은 것을 갖게 되고 하고 싶은 일이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이 뒤에 가서는 고통으로 되돌아옵니다.마구니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는 사람은 삶 속에서 비교하는 마음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이기심으로 비교하는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괴로움이나 즐거움에 대한 망상을 가지게 되고 마침내 그것이 우리를 마구니의 울타리나 궤짝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마구니의 울타리나 궤짝 속에 갖혀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속에서 항상 마구니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게 되고,마구니의 종이 되면 자기도 괴롭고 남도 괴롭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마구니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나의 이기심이 마구니를 만들어냅니다.
이기심 때문에 마구니의 울타리나 궤짝 속에서 갑갑하고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그리고 마침내 이기심의 마구니가 주인자리를 차지하여 나를 이렇게 부리고 저렇게 부려먹으며,이렇게도 괴롭히고 저렇게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의 욕심에 비유하면 이해가 더욱 쉬울 것입니다.나에게 맞고 좋다는 이유로 욕심을 내고 나면 그 욕심을 이루기 위해 여러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합니다.욕심이라는 마구니가 주인이 되어 나를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들고 저렇게 행동하도록 만들면서 나를 괴롭힙니다.
곧 욕심은 주인이 되고 나는 종이 되어 그 욕심이 하자는대로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변합니까? 매일같이 불평불만을 터뜨리고 남을 비방하면서 남에게도 상처를 주고 자기도 상처를 입으며 살아갑니다.결국 다른 사람은 그릇되었고 자기는 옳다고 하며 살아가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마구니의 삶입니다.이것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우리의 이야기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빠서 마구니의 종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원인은 내가 있다[有我]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마구니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것입니다.그럼 나는 정말로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여러 번 이야기하였듯이 연기(緣起)에 의해 나라는 것이 생겨난 것입니다.나의 본래 마음에는 내가 있다는 생각이 본래 없습니다.있지도 않은 나를 있다고 착각을 하기 때문에 마구니와 함께하는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연기로서 존재하는 우리는 실체가 없습니다.나가 없습니다.무아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더 설명하지 않겠습니다.다만 한 가지 내가 본래 없는데 내가 있다고 착각을 하며 살기 때문에 마구니의 종이 되어 갖가지 괴로움을 받으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가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이기심이 사라지면서 지혜로운 마음이 나오게 되고 그 지혜로운 마음이 나를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며,남도 이롭고 나도 이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동시에 인생이 참으로 재미있어 집니다.인간이 만들어낸 영화 게임 등의 놀이문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크나큰 재미가 있으며 행복감 또한 계속 이어집니다.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거나 즐거움과 괴로움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즐거움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마구니를 상관하지 말라
우리의 존재원리에 대해서는 각 종교마다 다르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기독교에서는 존재원리를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하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신이 만들었다고 합니다.도교에서는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며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만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하나같이 존재를 만드는 무엇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연기로써 존재한다는 존재원리를 주창하셨습니다.이렇게 연기로써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분이 부처님뿐이었습니다.
신이나 조물주가 존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연기의 법칙 속에서 인연따라 서로서로 화합하여 만들어진 것이요 이 원리를 온전하게 체득하게 되면 누구나 부처가 되고 굉장히 위대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원리를 발견하신 부처님께서는 모든 존재를 부처님으로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연기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기심이라는 마구니의 노예가 되어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면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이기심도 없고 욕심도 없어지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아니다 입니다.절대로 손해를 보거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기심이라는 마구니가 사라지면 그 마구니가 차지하고 있던 마음자리에서 수십 개의 해가 뜬 것과 같은 밝은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기심 대신 밝은 지혜가 나오면,그 지혜로 정치가는 요순과 같은 정치를 하고 기업가는 일등기업을 만들며,교육자는 참된 스승이 가정주부는 저절로 현모양처가 됩니다.그리고 장사를 하는 분은 큰 돈을 벌수가 있고,공부인은 도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왜? 지혜의 빛에 의해 밝은 시각으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이기심이라는 마구니 입니다.무아의 진리를 깨달아 이기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기심이라는 마구니가 금방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너무나 오랫동안 마구니의 종노릇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참선.염불. 등의 공부를 하라고 가르칩니다. 정념을 통하여 끊임없이 수행하라고 가르칩니다.스스로를 지혜와 한 덩어리가 될 때까지 몰아가라는 것입니다.
** 수나라 때 중국의 천태종을 개종하신 지자대사는 젊은 시절에 토굴에서 지관의 수행을 닦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관을 닦기 위해 앉기만 하면 어디선가 풍악소리가 울려왔고,그 풍악소리 때문에 수행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저놈의 풍악소리! 도대체 어디서 울려 나오는 것인가? 공부에 이만저만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구나 차라리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갈가?
스님은 풍악소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풍악소리야.너는 너대로 울려라.나는 풍악소리에 상관하지 않고 공부하겠다' 이렇게 결심을 한 다음 스님은 스님대로 공부를 하였고,풍악소리는 풍악소리대로 그치지를 않았습니다. 그 풍악소리는 푸려 9년 동안 계속되다가 마침내 그쳤고,그 순간 천태지자대사는 도를 통하였다고 합니다.
* * 지자대사에게 들려온 이 풍악소리는 누가 울린 것입니까? 외부의 어떤 마구니가 공부를 방해하기 위해 연주를 한 것이 아닙니다.바로 대사의 이기심이 울린 것입니다.다생다겁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던 이기심이 공부를 방해하는 풍악소리로 변하여 들려온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도 불보살님 전에서 기도를 하고 있으면 평소와는 달리 마음이 이곳저곳으로 계속 돌아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생활 속에서와는 달리 번뇌도 참으로 많이 일어납니다.
그럼 평소에는 돌아다니지 않던 마음이 기도를 하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시작을 한 것일까요? 평소에는 일어나지 않던 번뇌가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평소에도 돌아다니고 있었고 번뇌가 많이 일어났지만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기도를 하여 마음이 조금 맑아지나까 평소에 별로 보이지 않던 것이 잘 보이게 된 것일 뿐입니다. 따라서 번뇌가 잘 느껴지고 돌아다니는 마음이 잘 보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기심이 만들어 낸 마구니가 잘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돌아다니는 마음이나 번뇌를 없애려고 노력하면 안 됩니다.없애려고 노력을 하면 이기심이 내민 갈고리에 걸리는 꼴이 되어 애를 먹게 됩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자대사처럼 해야 합니다.
'네가 서울을 가든 부산을 가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상관하지 않는다.나는 관세음보살만 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염불에 정념을 하게 되면 이기심이 만들어 낸 마구니들은 저절로 없어집니다.
참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다가 주위가 시끄러우면 시비를 하는 스님들이 있습니다 '요란한 소리가 난다'며 주지스님을 공격하고 '조용히 안 시켰다'고 힐책을 합니다.그러다가 계속 시끄러우면 결재 중인데도 걸망을 지고 떠나버리는 이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선공부를 하는 이의 태도가 아닙니다.밖이 시끄러울지라도 '너는 시끄러운 것이고 나는 내 할 도리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하면 됩니다.시끄러운 것은 시끄러운 것대로 놓아두고 조용한 것은 조용한 것대로 놓아두고서 공부를 하면 됩니다.더우면 더운대로,추우면 추운대로 놓아두고 공부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놓아두고 공부를 계속하면 그 모든 것이 마침내 화두와 하나가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번뇌가 일어나고 마음이 동할지라도 그냥 돌아다니도록 내버려두고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게 되면 그 돌아다니던 놈이 스스로 미안했다는 듯이 '관세음보살'염불과 함께 합니다 . 마치 '나도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이나 한 듯이 돌아다디넌 마음이 도로 관세음보살 염불 속으로 녹아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다가 마구니의 방해,이기심의 발돌이 생겨날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내가 할 공부를 계속해야 합니다.내버려두면 제풀에 지쳐 스스로 사라집니다.곧 취하지 않으면 진실과 계합을 하는 것이요,마침내 공부를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마구니는 별 것이 아닙니다.내 이기심의 장난입니다.그리고 '방해하려면 방해하라.나는 나대로 간다' '번뇌야 일어나려면 일어나거라.나는 나대로 공부한다'는 자세로 공부하면 절대로 마구니에게 걸려들지 않습니다.
염불,참선,봉사,경전공부,관법,그 무엇을 하더라도 좋습니다.오직 이기심이라는 마구니를 따라가지 말고 내 갈 길을 나대로 간다는 마음으로 정진을 하면 틀림없이 지혜의 해가 밝게 비치는 자리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왜 모르십니까? 공부를 방해하는 마구니가 이기심에서 나온 헛것이라는것을 !
헛것에 상관을 한다는 것은 헛되게 사는 것이요.헛것에 상관을 하지 않고 살면 진실한 삶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어 공부를 잘 지어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4. 불교의 생활화와 정견
정견의 생활화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이때의 달은 목표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목표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손가락에 집착하여서 안됩니다.목표인 달을 보고 달을 체득해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어 행복하고 자재로운 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요,각종 수행방법은 깨어있고 자재한 생활에 이르게 하는 손가락인 것입니다.
이 생활과 수행을 우리 불교에서는 둘로 보지 않습니다.불교의 생활화는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자연,불자는 생활과 수행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가 되게끔 꾸준히 공부를 하여,수행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실로 생활은 생활이요 수행은 수행이라는 식의 가르침은 어떠한 불교에도 없습니다.선(禪)에도 없고 교(敎)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불교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형상만 신도요 불제자일뿐 불교를 믿는 마음가짐과 생활하는 마음가짐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있습니다.이러한 마음가짐은 세상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우리 자신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스님.재가불자 할 것 없이 배우고 닦은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그래야만 스스로도 굉장한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도 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불교를 믿고 수행하는 사람은 불교를 믿지 않고 수행하지도 않는 사람과 분명히 차별화 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수행을 일상 생활 속에 접목시켜 현실의 삶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불교는 동남아의 원시불교와는 달리 방법면에서 생활에 아주 밀착되어 있습니다. 원시불교인 동남아의 불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계율이나 수행 방법에 그들의 생활을 끼워 맞추려는 경향이 강합니다.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가르쳐준 법이 형식화되거나 도식화되기 십상입니다.
심할 때는 박제화되어 완전히 굳어버리기까지 합니다.반면에 우리 불교는 대대로 불교를 생활에 스며들게 하여 생활자체를 변화시키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왔습니다.결코 목표인 달을 잊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인 교리와 계율과 선을 생활에 적용시켜,밥 먹고 잠자고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는 등 활발히 움직이는 가운데 생활을 완성해 가고 불교의 목표를 달성하게끔 이끌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수행과 생활이 둘이 되지 않게끔 하는 것,수행을 통하여 깨어나게 하고 생활 속에서 다시 닦아 더욱 향상의 길로 나아가게끔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불자의 바른 삶인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그럼 불교의 생활화는 어떻게 할 때 이룰 수 있는가?
우선 정견을 갖추어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도 정견으로 밥을 먹과,잠을 잘 때도 정견으로 잠을 자고,일을 할 때도 정견으로 일을 하고,사람을 만날 때도 정견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정견의 생활화인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인 법에 생활이 얽머매이지 않고 생활에 법을 잘 적용시키고 응용하여 살아있고 살아나는 삶을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정견을 갖추어야 합니다.어떻게 할 때 정견이 생겨나는가?
정견은 나타는 현상을 연기(緣起)로 보고 공(空)으로 볼 때 생겨나는 바른 눈입니다.이러한 점에서 원시불교에서 말하는 정견과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은 서로 유사하지만 표현이나 이해의 폭에서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타나는 현상을 연기로 보고 공으로 보아 정견을 갖추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반야심경의 오온개공(五蘊皆空)이 바로 정견입니다.
그런데 남방 불교에서의 생활을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그대로 맞추고자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따라서 상당히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계율이나 연기.사성제.팔정도와 같은 가르침의 틀속에 자기의 생활을 맞추는데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는 생활에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적용시켜 현재의 생활을 극복하고 초월하여 목표를 성취해 가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계율이나 연기.사성제.팔정도와 같은 가르침을 이해하고,그 이해한 것을 하루24시간 일상생활에 적용시켜 실천합니다.곧 삶의 현장에서 생활을 통하여 체험하면서 생활을 완성해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강원에서 첫번째로 배우는 대혜(大慧)스님의 「서장(書狀)」 을 예로 들겠습니다.
「서장」은 선적인 입장에서 정립해야 할 정견과.생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속에 어떻게 정견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책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듯이,아들을 잃은 부모가 슬픔에 빠져있을 때 대혜(大慧)스님은 설하십니다."부모가 되어서 아들이 죽었는데 슬퍼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전제한 다음 ,죽음에 대해 일반적인 상식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곧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생사가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깨달아야 한다.죽음에 대한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하고 승화시켜 생사의 이치를 깨달아 생사에 자유자재할 수 있어야만 진짜 슬퍼하는 것이요,죽은 사람을 진정으로 애도하는 것 이라고 깨우쳐줍니다.
바로 이러한 시각으로 생사를 보고 이러한 시각으로 생각을 정립하는 것이 정견입니다.
또 어떤 분이 모두가 은퇴할 나이에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그러자 주변에서 늙은이가 무슨 벼슬살이를 하느냐 고 비난을 합니다.이때에도 대혜스님은 단호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 사회에 봉사를 하는데 늙고 젊음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 오히려 연륜이 많은 늙은 사람이 하면 더 좋은 점이 있지 않느냐? 정말로 부처님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백성들을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심지어는 열심히 봉사하여 임금을 요순과 같은 군왕이 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를 임명해준 그 은혜를 갚는 반면에 정말로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고 국가를 부강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길이라고 말해줍니다.편견과 사심을 버리고 누구와 갈등하거나 대립함이 없이 공정한 안목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라는 대혜스님의 가르침! 이것이 바로 정견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장」에서는 중도.연기관으로 세상을 보는 정견에 의해 향상된 생활을 성취시키고 완성해 나가도록 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슬픔을 진정으로 극복하여 생사에 자유자재할 수 있도록 하고 봉사를 통하여 생활을 완성해가는 일들이 바로 수행의요 불교의 생활화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떠한 분야에서든지 생활을 통한 정견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생활과 법.생활과 수행은 둘이 아닙니다. 생활 속에서 참선도 하고 보살행도 하고 수행을 하면서 열심히 정견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생활 속의 정견을 실천에 옮기면 더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더 깊이 이해하고 더 깊이 수행할 수 있습니다. 실로 정견을 갖추게 되면 굳이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지 않더라도 삶이 바뀝니다.
정견에 의해서만 생활하려고 노력해도 엄청난 공부가 됩니다.공부가 된다는 것 그것은 마음이 그만큼 편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참선을 하거나 염불.경전탐구.봉사 등의 공부를 하는 이들도 일상의 삶 속에서 정견으로 생활하고자 하는 노력을 진심으로 기울여야 합니다.이것이 불교의 생활화입니다.
그럼 정견을 세운다는 것이 무엇인가?'이기적인 나는 본래 없다'는 것을 정립하는 것입니다.그리하여 '나는 본래 없다'는 것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정과 사회 속에서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서로 돕고 은혜를 느끼면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한번 이기심을 떠난 정견을 생활화하면서 살아보십시오.참으로 가정이 화목해지고 인간관계가 편안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실로 보통사람의 인간관계에는 자존심이 크게 작용을 합니다.아무리 가까운 부부.부모자식 사이에도 자존심은 작용합니다.그런데 이 자손심이 무엇입니까? 내가 있다는 생각에서 생겨난 이기심의 산물입니다.
이 자존심이야말로 허상 중의 허상일 뿐입니다.이제 연기의 법칙을 잘 수행하여 자존심이나 이기심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보십시오.그렇게 하면 정견이 생겨나고,정견을 생활하여야 화목하고 편안한 가정과 사회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정견이 있으면 갈등을 하지 않고 반목을 하지 않습니다.나다 너다는 반목 좋고 나쁜 것이나 더럽고 깨끗한 것에 대한 갈등을 하지 않습니다.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 재가불자들 중에는 절에 와서 변소인 해우소(解憂所)를 들어갈 때 염주를 해우소 밖에 걸어두고 들어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번은 내가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보살님,왜 염주를 밖에 걸어둡니까?" "더러운 곳에 어떻게 염주를 가지고 들어갑니까?" "그렇다면 보살님 보기에 염주와 똥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영험이 있을 것으로 느껴집니까?" "그야 당연히 염주지요" "영험스러운 염주를 더러운 곳에 가지고 가면 염주가 그 더러운 것을 다 정화할 것이 아닙니까?" "예"? "보살님은 염주로 정화하러 들어간다고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염주가 오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벗어놓고 가는 것이 아닙니까? 더럽다.깨뜻하다는 것을 초월한 것이 염주입니다.분별을 내지 말고 편안하게 볼일을 보십시오"
** 이대화에서 느낄 수 있듯이 염주를 해우소 밖에 걸어놓고 들어가는 자체가 소극적이요 부정적인 사고입니다. 정견이 아닌 분별심이요 갈등입니다.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분별심과 갈등입니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인 분별심과 갈등이 없어지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편안해지고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똥과 금의 예를 하나 더 들겠습니다.사람들은 흔히들 똥과 금 중에서 금이 더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깨달은 분의 눈으로 보면 금과 똥이 평등한 가치로 보입니다.왜 그렇겠습니까?
똥으로 가락지를 만들 수 없습니다.동시에 금을 밭의 비료로는 쓸 수가 없습니다.똥으로는 밭을 기름지게 하는 비료를 만들고 금으로는 가락지나 장신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똥과 금 결국 사용의 면에서 볼 때 둘 중 하나가 더 귀한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금은 금대로 똥은 똥대로 평등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똥은 더럽고 불쾌하며 금은 좋고 유용한 것으로 생각합니다.이것이 우리의 관념이요 갈등입니다.이것이 사견(邪見)인 것입니다.이제 우리는 이러한 사견을 하나씩 벗겨가야 합니다.
사견에서 벗어나기! 그럼 사견을 벗어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무엇인가?
연기요 무아인 존재원리를 알고 참선.염불.경전탐구.봉사 등의 공부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하여 이기적인 나를 비워가며 정견의 삶. 지혜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존재원리를 아는 정견의 삶에는 마구니가 깃들지 않습니다.정견의 삶은 유연하여 경직됨이 없습니다.부드럽고 유연한 삶이기에 평화롭고 자유롭습니다.따라서 화를 내거나 속상해하지 않습니다.그야말로 절대적인 행복이 가득하고 즐거움이 넘치는 고향집에서 살 수 있게 됩니다.
정견을 갗추려면 비워야 한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정견을 갖춘다는 것은 중도.연기관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도.연기관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생활화 하는 가운데에서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공부 따로 생활 따로가 되고 있습니다.왜 이렇게 되고 있는가?
우리 마음속에 중도.연기관이 제대로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이 마음속에 욕심이 꽉 차서 이기심으로 살고 이기심으로 수행하다보니,마음속에 공부가 스며들래야 스며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온갖 이기심과 너다 나다 라는 대립과 갈등의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것을 비워낼 때 비로소 그 자리에 중도.연기관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정견을 갖추려면 자꾸자꾸 비워야 합니다.끝없이 비워내냐 합니다.자꾸 비워 자기라는 것을 버릴 때 공정한 안목이 생기게 되고 편견 없이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훌륭한 안목이 점점 더 넓게 형성되어집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열심히 생활하라는 것입니다.나를 더욱 온전히 비우기 위해 화두도 들도 봉사도 하라는 것입니다.
나를 비우면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며 하나가 되면 중도의 생활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생활속에서 주관과 객관을 하나로 만들어 중도의 생활을 완성시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속에 불교가 있는 것입니다.
실로 자기라는 것을 비우고 나면 중도와 연기의 이치가 적용되지 않는 데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저절로 진공묘유(眞空妙有)가 됩니다.
진공묘유는 다른 말이 아닙니다. 자기를 완전히 비운것을 진공이라 하고, 비워서 구름이 걷히고 밝은 햇빚이 온 천지를 비추는 것을 묘유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느때 어느곳이든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세계와 같아집니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어 우리의 모든 생활터전은 온통 광명천지요,저절로 정견이 되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잘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밝은 햇빛이 온전히 나오기 전에도 여러 과정이 있습니다.
완전히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두텁던 구름이 조금씩 조금씩 얇아집니다.그 단계는 참으로 많으며 그것이 수행을 해나가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 속에서 구름이 점점 얇아지면 그만큼 더 환해지므로 생활에 적용하는 면에서도 그만큼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됩니다.이러한 점들은 구체적으로 자기가 스스로 느끼게 되고 마음 속에 행복감이나 기쁨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결국 중도.연기관에 입각한 정견에도 깊이가 있고 높낮이가 있습니다.중도.연기를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중간 과정.나는 그것을 ‘지견(知見)’ 이라고 말합니다.
그 지견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조금 못한 지견,조금 나은 지견 아주 훌륭한 지견 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지견이 점점 열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깊어진 만큼 생활에 적용하는 비율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서장」에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법에 대한 이해와 실천을 깊이 하면 할수록 공부가 점점 더 쉬어진다.선 것은 익어지고 익은 것은 설어진다"
지금은 비록 우리의 의식이 바닥에 있을지라도 자꾸 자기를 비워내고 이해하고 실천하면 할수록 힘도 적게 들고 속도도 붙어 쉬어진다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의식수준을 1%씩이라도 올려나가야 합니다.
당장100% 완성된 세계에 간다는 것은 너무 멀고 아득하니까 1% 2% 3%..자꾸 올라가다 보면 가속이 붙게 됩니다.자기 능력에 맞추어서 열심히 하면 됩니다.
개인의 프로테이지가 올라가다 보면 이 사회에 그런 사람이 점점 더 많아져 한 단체의 프로테이지가 올라가게 되고 단체의 프로테이지가 올라가면 국가의 프로테이지가 올라가게 됩니다.그렇게 되면 불교의 생활화가 보다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영향력이 조금씩 퍼져나가 모든 사람이 더불어 그런 분위기 속에서 수행하면 소위 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붐이 일어나면 정말로 우리 모두가 더 쉽게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그리고 그 힘들어 모여 온 세상이 더불어 그렇게 되기를 염원할 때 불교의 세계화까지도 이루어지는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에서는 나가 있다 는 것을 전제로 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따라서 이 세상에는 갈등과 대립과 투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있습니다.너나 나다를 초월한 안목만 정립되면 이런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나와 너를 초월한 안목! 그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그것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참으로 정견은 중요합니다. 옛날에는 한 지역마다 조실스님이 중심이 되어 지역민의 정견을 열어주셨습니다.정견을 갖추고 수행을 하여 어느 정도의 경지를 체험한 그 분들이 생활을 통해서나 법문을 통해 정견을 제시해주신 것입니다.
자연,조실스님이 제시하는 공부방법에 의해서 생활하고 수행하여 지혜롭고 살고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지도자의 모델이 있었으므로 신심도 생기고 제시된 정견에 의해 생활화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정견과 신심
진정한 불제자란 어떠한 사람인가? 우리의 마음과 행위가 분리되어 따로 따로 놀지 않고 하나가 될 때 비로서 진정한 불자가 됩니다.마음은 마음대로 행위는 행위대로 따로 따로 움직인다면 결코 올바른 불제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위가 일치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정견의 눈을 갖추어야 하며,정견을 갖추고자 하면 반드시 신심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정견만 있고 신심이 없으면 지식에 빠지기 쉽고 반대로 정견이 없는 신심은 맹신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정견과 신심은 둘 줄 하나가 먼저 일수도 있고 동시일 수도 있습니다.
선후가 서로 바뀔 수도 있지만,정견과 신심이 겸해져야 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신심이 완성 되려면 정견이 서야 되고,정견이 완성되려면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신심이 있어도 바르게 보지 못하고 잘못 믿게 되면 바른 믿음이 아닛 삿된 믿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동시에 정견이 우리 생활에 올바르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신심이 바로 서야 합니다.곧 맹신과 지식의 세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견과 신심을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이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은 것입니다.
수레의 양 바퀴가 온전해야 수레가 잘 굴러가듯이 신심이 완성되어야 정견도 완성되고 정견이 완성되어야 신심도 완성되는 것입니다.신심과 정견을 갖추고 그것을 생활과 수행에 잘 적용해 나갈 때,비로소 지혜가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계의 최대 취약점은 신심보다 정견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정견과 신심은 상화 보완적인 관계에 있지만 우리나라 불제자들은 정견에 대한 이해가 특히 부족한 편입니다.생활불교를 이야기하지만 정견을 갖춘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생활에다 불교를 맞추고 끌어 내려 불교를 세속화시키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견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정견에 빠져 지식불교로 흘러버릴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정견과 신심이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어 수행발심에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그렇게 되면 진정한 정견이 서로 진정한 신심이 되는 것입니다.
정견과 신심을 갖춘 발심수행(發心修行) 이것을 불교에서는 발보리심(發菩提心 心)이라고 합니다.
이 발보리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곧 보리심을 낸다고 할 때 이미 완성된 것을 낼 수 도 있고 미완성 상태에서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낼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발심한다 할 때의 발보리심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내는 마음입니다.따라서 발심을 하여 신심과 정견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이루도록 노력하고 그것을 생활화하고 체험하고자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항상 생활화하여 체험하고 체험하여 생활화하는 관계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의식은 또렷하고도 고요한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변해가고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지금 자리에서 빽 돌아선다고 하여 고향집 문 앞에 설 수는 없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 있는 사람이 집에 돌아가는 길을 바라만 보고 어렵다 어렵다 고만 하고 있으면 영영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한발 한발 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한발 한발 나아가십시오.발심을 하여 한발 한발 나아가십시오.마침내 이르게 되는 구경의 고향집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중간 과정도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발심할 때의 출발점과 비교해 보면 중간 과정도 엄청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지금 이 자리의 출발점에서 출발도 하지 않고 목표에 도달할 것만 생각하고 있습니다.우리는 중간과정에 대해 너무 소홀히 생각하고 가치를 두지 않고 있습니다.그 중간과정의 가치에 대해 눈을 떠야 합니다.
고향집을 향해서 완성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생활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고,거기에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며 그것이 바로 우리 불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복과 혜와 정견
마음을 잘 쓰면 복이 찾아온다고들 합니다.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잘 써야 하는가?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견에 의해 마음을 쓰면 됩니다.
우리가 정견을 가지고 어떤 일을 할 때는,그 일을 위해 노력을 하고 정당한 댓가를 받지만 보수가 목표가 되기보다는 그 일에 대한 가치를 더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보수는 자연히 따라 오게 되고 인격도 자연적으로 형성되어 타인에게 존경도 받게 됩니다.그것이 바로 복입니다.
일에 대한 가치와 의미는 등한히 한 채 보수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고 초첨을 맞추어 일을 한다면 당장의 보수는 많이 받을지 몰라도 마음은 절대 복을 닦는 상태가 될 수 없습니다.부처님 당시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었습니다.
** 함께 수행생활을 하는 형제가 있었습니다.형은 계율도 잘 지키고 윤리.도덕적인 생활도 철저히 하고 선정 공부도 아주 열심히 닦았지만 생전에 남에게 베풀 줄을 몰랐습니다.반대로 동생은 계율도 잘 안 지키고 공부도 등한히 하였지만 남에게 베푸는 것만큼은 아주 잘 하였습니다.
죽은 뒤의 다음 생에 형은 공부를 잘한 공덕으로 아라한과까지 증득을 하였지만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했습니다. 탁발을 나가도 밥을 얻어오는 날이 드물었고,일주일 내내 공양을 받지 못해 굶고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어느날 그는 우연히 궁궐 옆을 지나가다가 온몸을 보배로 장식한 코끼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힘도 센 그 코끼리가 전쟁에 나가 큰 공을 세웠으므로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형이 가까이 가서 보니까 그 코끼리가 바로 전생의 자기 동생인 것입니다.
그때 형은 생각했습니다. "전생에 보시를 많이 한 공덕으로 금은 보화로 장식을 하고 잘 먹기는 하지만,수행자가 코기리의 몸을 받다니! 아 ,저 놈도 잘못 살았구나.나도 별 수 없지.수행한 공덕으로 아라한과는 증득했지만 밥도 못 얻어먹는 박복한 사람이 되어 있으니,나도 잘못 살았어"
형은 코끼리 귀에다 대고 말했습니다. "자네나 나나 다 잘못살았네" 그런데 코끼리가 그 말을 알아듣고는 전생사를 깨우쳤습니다.그리고 그날부터 밥을 입에도 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왕이 애가 타서 사육사를 불러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 코끼리가 밥을 먹지 않는 것인가?" "어떤 스님이 와서 코끼리 귀에 대고 무슨 소리를 하고 나서부터는 밥을 안 먹습니다" '그 스님을 잡아 들여라 " 그래서 그 스님을 잡아와서 추궁을 하였더니 전생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 인과의 법칙에서 볼 때 복과 지혜는 별개의 것입니다.복과 지혜는 함께 구족해야 진짜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위의 이야기에서처럼 복이 있어도 지혜가 없으면 코끼리가 된 동생처럼 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없게 되고, 지혜가 있어도 복이 없으면 끼니 걱정을 하는 형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복과 지혜를 함께 갖추어야 합니다.그래야만 진짜 복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 복(福)과 혜(慧)는 우리가 만들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본래부터 우리 모두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 복과 혜에 대한 이해에도 정견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정견을 갖추게 되면 지혜로운 가운데 경제 활동을 하게 되고 인간답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내가 복이 있다 없다 내가 못났다 잘났다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다 평등하다 부처님과 같은 지혜와 복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모든 세상이 다 평등할 뿐아니라 원래 복과 혜를 갖춘 위대한 존재로서 평등한 우리 라는 것을 인식할때 열등의식에 빠지거나 자기를 학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과 혜를 갖춘 위대한 존재임을 자기가 인식하고 그 안목으로 세상을 볼 때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하든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가치와 의미를 가지게 되고 열심히 하게 됩니다.그런 사람은 이 사회에서 절대 박복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정견을 갖추어야 합니다.무엇이 불교의 정견인가? 부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기가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위대한 존재이므로 그 위대한 존재에 맞게끔 사고하는 것이 바로 정견입니다그리고 정견에 의해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안목 속에서 그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고 맡은 바를 열심히 행할 때 지혜와 복은 그냥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부처님 법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자기가 못 나고 못 배우고 박복하다고 한탄하며 자기 학대를 하는 사람은 절대로 잘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실로 주위를 살펴보면 다른 사람에 비해 고통을 많이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런 불행이 올 때,자기가 지은 업이 자기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업은 착각에서 비롯됩니다.착각에 의한 결과를 업이라고 합니다.물론 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착각 속에 있으면 언제나 업과 함께 합니다.그러나 업은 착각에 의한 결과이므로 정견으로 착각을 부수면 그 결과도 같이 없어져 버립니다.
곧 자기가 이 생에서 겪고 있는 고통이나 불행을 업으로 받아들일 때는 그 업을 녹여야 하는 과정이 남게 됩니다.그러나 부처님 말씀대로 인간과 모든 중생과 이 법계가 귀천이나 빈부가 없는 평등하고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할 때 여태껏 잘못 본 착각은 그 순간부터 없어지게 됩니다.그렇게 되면 업을 녹인다 라는 이야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됩니다.
착각을 부스고 바로 보는 것이 정견이요,정견대로 살면 착각에서 생긴 업은 저절로 없어져버립니다.
업! 선종(禪宗)에서는 업이라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다만 착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착각은 사실이 아닌 허구입니다.그러므로 죄도 없고 업도 없는 것입니다.이 모두가 착각에서 오는 것일 뿐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없다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무엇이 실제인가? 정견! 정견만이 실제입니다.
정견이 무엇입니까? 공(空)입니다.무아(無我)입니다.
그렇다고 허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허무한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다고 하는 무아를 알게 되면 굉장히 밝고 활달한 지혜가 나오게 됩니다.평등에서 나오는 자부심으로 위축되지 않고 머뭇거리지 않고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 원리가 연기요 중도요 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해탈하셨습니다. 따라서 연기요 중도임을 몸으로 체득한 분을 이름하여 우리는 부처라 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 연기=중도=공 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연기다 중도다.마음이다 부처다 .성불이다 라고 이름을 많이 지어놓고 그 이름만 갖고 추측하고 짐작해서는 안됩니다.이것은 다만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중생이 변해서 부처가 된다는 것과 우리가 본래 부처인데 착각에 빠졌을 뿐이다.착각에 빠졌다가 도로 부처가 된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자기가 본래 부처 라는 것을 아는 그것이 바로 정견이요 본래 부처다 라는 말이 바로 중도요 연기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존재원리가 중도요 연기라는 것을 이해하고 그 원리에 의해 생각하고 체험해야 합니다.실제로 봐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산중에 사는 나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전화 목소리도 그렇고 말하는 내용도 그렇고 하여 굉장히 젊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왔는데 실제로 와서 나를 만나보니 노스님이라 합니다.그러므로 이름만 듣고 목소리만 듣고 추측하는 것 하고 실제로 보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성이다.부처다.공이다.중도다.연기다 하면서 별소리를 다 해도 그것은 이름일 따름입니다. 실제가 아닙니다.실제로 보면 이름을 지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이름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이 이름을 통해서 달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교종(敎宗)은 이러한 이름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고, 선종(禪宗)은 이름을 떠나 실제를 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종에서도 이름을 통해서 깨달은 분도 많습니다.육조스님 같은 분은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이라는 이름을 통해 깨친 분입니다.
양변을 떠난 중도의 자리를 머무는 바 없는 무소주라 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작용이 이생기심입니다.이름을 통해서 달을 보라는 부처님의 말씀대로 달을 보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이름과 설명이라는 손가락을 통해 달을 보아야 합니다.그런데 요즘 불교강원에서는 강사스님들이 가끔씩 "교를 버리고 선으로 다시 들어가야 된다[捨敎入禪]"고 합니다.이는 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를 비하하는 것입니다.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름을 통하여 교의 수행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 송나라 때의 장수 자선 스님은 능엄경을 보다가 부루나존자가 부처님께 여쭌 "청정본연 인데 어떻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겼습니까?" 라는 단락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하였습니다.그러나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긴 까닭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이름있는 선사인 낭야의 혜각스님을 찾아가 여쭈었습니다. "청정본연이라 하였는데 어떻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겨날 수 있습니까?" 혜각선사는 이 말씀을 되받아 질문했습니다. "청정본연이라 하였는데 어떻게 홀연히 산하대지가 생겨났다고 하는가?" 이 말씀에 장수스님은 대오 하였고 그 뒤 화엄종을 널리 펼쳤습니다.
** 교종의 장수스님은 선종의 조사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그리고 이와 같은 예는 너무나 많습니다.그런데 어찌 강사들 스스로 사교입선(捨敎入禪)을 강조할 것입니까? 공부하는 우리가 선과 교의 우위를 논할 것이 아닙니다.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고 착각에서 깨어나,이름을 통해서도 달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정견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만큼 생활에 적용하려는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지금은 그 노력이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그런데도 많은 불자들은 그와 같은 노력을 참으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생활은 생활이고, 불교는 불교고, 수행은 수행이라는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안 됩니다.하나로 만들어야 합니다.
많은 불자들이 생활하는 현실의 마음과 불교하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겪습니다.그런데 현실생할 쪽에 무게를 두게 되면 수행하고는 거리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반대로 수행 쪽에 무게가 더 실리면 수행해 갈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요? 물론 수행에 두어야 합니다.
수행에 있어 주변 환경이 참으로 중요합니다.대부분 처음부터 수행이나 향상을 포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과 싸우고 갈등하다가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다행히 주변 환경이 수행 쪽에 무게를 두는 환경이라면 그 사람도 수행 쪽으로 갈 확률이 많습니다.
행복을 찾고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불자라면 언제나 정견을 갖추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 발심하여 출발할 때의 정견은 미완성이지만 마지막에는 부처님과 같은 완성된 정견을 이룰 수 있습니다.하루아침에 100% 완성된 정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꾸준히 하다보면 차츰 프로테이지가 높아지므로 단 1%라도 더 올라가겠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손가락을 법이라고 착각을 하고 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달입니다.부처님의 법인 달을 발견하여 완성시켜 나가야 합니다.이 좋은 대승불교를 살려내려면 우리가 본래 부처라는 믿음에서 출발하여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닌 불교의 생활화를 이루고자 하는 진심어린 노력이 필요합니다.
당부드리오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 적용하여 불교의 생활화를 꼭 이루어 보십시오.
참으로 날마다 좋은 날 행복하고 기쁜 날들이 우리와 함께하고 마침내는 큰 깨달음이 우리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처님의 연기법을 깨닫고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생활화하여 다함께 성불하게 되기를 축원드리니다.
정견으로 기도하고 공부하라
실로 행복을 추구하는 불자의 당면 목표는 헛되이 보지 않는 정견을 갖추는 것이요,그 정견을 갖추려면 나를 비워야한다고 했습니다.이제 이것을 우리의 신행생활에 적용시켜 봅시다.먼저 기도의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나를 비우고 정견을 갖춘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기도는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많이 하게 됩니다. 이렇듯 시작은 내 개인적인 욕망에서 출발해도 좋습니다.그러나 일심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일심으로 해야만 모든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관음경」 곧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 ‘일심칭명(一心稱名) 관세음보살’ 이라는 말이 분명히 나옵니다. 일심이 무엇입니까? 생각과 생각들이 생각 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 일심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됩니다.
부르는 나 하고 불려지는 관세음보살과 하나가 될 때 그것이 바로 일심입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은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취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불자는 일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는 일심의 기도가 아니더라도 소원이 성취되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그렇지만 욕심으로 기도하여 설사 바라던 바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좋고 나쁜 것들이 번갈아가며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때마다 또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욕심의 기도를 해야 합니까?
또 빈다고 하여 다 얻어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자꾸 이런 식으로 기도를 한다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심으로 기도하게 되면 처음에는 비록 욕심으로 시작을 하였을지라도 나중에는 그 욕심이 떨어져 나갑니다.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내가 없는데 욕심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때가 되면 개인적인 욕심은 원력(願力)으로 바뀌게 됩니다.그때는 개인의 차원에 머물던 행복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게 됩니다.욕망이 원력으로 바뀌고 번뇌가 반야로 바뀌고 속박이 해탈로 바뀝니다.
욕망과 번뇌와 속박이 없어지므로 저절로 어떤 소원이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심으로 기도하여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마음 상태가 되는 것을 선(禪)에서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합니다. 지극히 고요한 것을 적적 지극히 또렷한 것을 성성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기도의 시작부터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출발한다면 그 의식상태가 적적성성하게 됩니다. 적적이기 때문에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립하지 않고 서로 갈등하지 않습니다.그리고 적적한 마음 상태가 되면 성성한 지혜가 나옵니다.
자연.편견.대립.갈등을 하지 않으려면 나라는 것이 없어져야 하고 이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주관과 객관을 초월하게 되면 결국은 적정성성이 됩니다.
모든 불교의 수행은 그 공부방법에 의해서 적정성성으로 의식이 변해가는 것입니다.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 없이 열심히 봉사할 때 그 상(相)이 없이 하는 봉사행위 자체는 성성이요,상(相)이 없는 마음의 상태는 적적입니다.또 참선하는 이가 화두(話頭)를 잘 들고있으면 저절로 적적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어떤 수행방법을 취하든지 우리 의식이 적적성성으로 되는 것을 기본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염불.참선.봉사. 간경이라는 포장된 색깔은 다를 수있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은 같습니다.모두가 적적성성이요 일심입니다 . 다만 거기에는 조금 빠르고 조금 더 늦은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선종에서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라고 합니다.
한번 딱 깨쳐 여래의 지위에 도달한다고 했습니다.그러나 실제로는 상근기(上根機)인 사람이면 몰라도 일초직입여래지가 참선하는 모든 이에게 적용이 되는 말은 아닙니다.일반적으로 이야기 하면 화두를 참구해서 가는 사람이 다른 공부방법을 택한 사람보다 조금 빨리 갈 수 있는 정도입니다.결국,참선수행한 사람의 의식이나 좀 늦게 도달하는 사람의 의식이나 마침내 적적성성이 된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참선.간경.염불 등의 불교공부를 하게 되면 처음에는 나라는 것이 꽉 들러붙어서 자꾸 이기심을 유발하고 욕망을 일으키고 분별하고 편을 가릅니다.그러므로 적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적적이 안 되니까 자연히 성성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를 비우게 되면 적적이 됩니다. 적적(寂寂)이 열이 되면 성성(惺惺)도 열이 되고 적적이 스물이 되면 성성도 스물이 됩니다.손바닥과 손등처럼 적적과 성성은 항상 함께 갑니다.
여기에 정(定)과 혜(慧), 이(理)와 사(事), 체(體)와 용(用)의 이름을 붙여도 성성.적적과 같은 뜻이 됩니다. 이제 경전공부를 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금강경을 읽을 때 읽는 그 자체는 목표가 아닙니다.금강경을 통해서 생활을 완성해 나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금강경은 물질적으로 봉사하고 행동으로 봉사하고 정신적으로 봉사를 하여 나를 비워가라는 것을 가르침의 골격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없이 봉사하라고 합니다.이 가르침을 다르게 해석하면 우리가 하는 그 행위를 통해서 나를 비우고 또 그 비운 상태에서 행위하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행위를 하면서 나를 비우고 비우면서 행위하기를 거듭해나갈 때 우리 생활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금강경.반야심경 등을 읽는 분은 부지런히 독경을 해야 합니다.단순히 읽기만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읽는것 자체가 자기를 비워가는 하나의 수행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자꾸 읽어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가 바탕이 되어 행위를 하게 되면, 상이 없는 무주상(無住相)을 실현하게 됩니다.
이렇게 금강경을 외워 자꾸 자꾸 자기를 비우고 생활을 완성시켜 가는 것입니다. 뜻을 모르고 금강경을 읽는 경우라 할지라도 효과는 있습니다.우리가 옴마니만메훔 등의 주력을 할 때에 뜻을 모르고 외우지만 효과가 나타나는 것과 같이 금강경을 계속 반복해서 읽다보면 나를 비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주력을 하듯이 금강경을 읽는것을 나무랄 것이 못됩니다.다만 그 뜻을 음미하고 이해하면서 읽게되면 생활에 구현되는 것이 더 빠르고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불교공부는 진심(眞心)으로 해야 합니다.어떠한 수행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어떠한 생활을 하든 마찬가지입니다.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이기심이 있는 사람은 수행도 공부도 생?도 잘 되지 않습니다.
이기심이 있는 한은 절대 진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모든 것을 이해관계로 보고 있는데 어떻게 진심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진심(眞心)이 가장 중요합니다.
진심이되어야 실질적으로 향상의 공부,향상의 수행.향샹의 생활을 하는 것이요 진심이 아닌 특별한 이해관계나 목적으로 하게되면 그것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 할 뿐입니다.
다시 관음염불을 예로 들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을 염불할 때 처음에는 욕망으로 시작하였을 지라도 관세음보살을 일심칭명(一心稱名)하다보면 진심으로 변해갑니다. ‘관세음보살’ 염불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상태에 가면 욕심으로 출발했던 그 소원이 저절로 큰 소원이 되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부자 .츨세.직장 등의 작은 소원들이 ‘일심칭명 관세음보살’ 이 되었을때 해탈을 하여 큰소원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물론 작은 소원들도 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그러므로 공부하고 수행하는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은 진심입니다.모든 일상생활을 진심으로 하게되면 그 자체가 나를 비우는 길입니다.그러므로 나를 비우므로 업이 녹게 되는 것입니다.
진심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업은 점점 적어지게 됩니다.일심이 점점 익어가면 익었던 업이 자연히 녹아 내립니다. 그러니까 업을 따로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업 따로 닦고 수행 따로 하는 것은 올바른 공부방법이 아닙니다.
올바른 생활태도가 아닙니다.수행을 열심히 하면 처음에는 설었던 수행이 자기도 모르게 점점 익어 갑니다. 이기적인 욕심으로 남을 해치던 그런 업들이 점점 사르러집니다.
그러므로 업을 소멸한 다음 공부하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입니다.수행을 열심히 하여 그 수행이 깊어지면 자동적으로 소멸됩니다.
우리가 1%에서부터 시작을 하여 수행을 10%를 성취했을 때는 100%였던 업이 90%로 줄어들게 됩니다.공부가 20%로 올라가면 업은 80%로 줄어듭니다.정확히 그 퍼센테잊니가 반비례합니다. 그러므로 깊이 명심하십시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바로 업장소멸법입니다.업장소멸이 따로 있고 공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진심으로 수행하고 생활하여 공부를 더 이루고 업장소멸을 더 할수록 정견은 더욱더 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큰스님들께서는 공부가 잘 안되면 한차례 기도부터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때 기도하라는 것은 공부의 한 방법으로 봐야 합니다.기도를 열심히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비워집니다. 마음이 비워지면 바로 정견이 갖춰지게 되어 자기가 원력을 세워서 공부한다고 했던 것이 그냥 희망사항이었고 사실은 내가 진심으로 하지 않았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자기의 발견입니다.내가 진심이 아닌 불성실한 마음으로 공부에 임했던 것을 뉘우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그것이 업장소멸이요 그 속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집니다.그 속에서 원력도 생기게 되고 발심도 하게 되고,공부가 하나로 귀결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상좌가 공부가 잘 안 된다고 하면 부처님전에 가서 절을 하라 고 합니다.방법을 알러주지 않고 무조건 하라고합니다.이때 어떻게 하라고 일러주면 그 일러준 방법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그렇게 해서 느낀 것은 진심이 아닙니다.백지 상태에서 자신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그때라야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바로 보고 진심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앉아서 참선만 할 수도 없고 염불만 할수도 없습니다. 가정도 꾸려가고 직장에도 다녀야 하고 사람들도 만나야 합니다.그러므로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해야 합니다.곧 생활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각자 자기가 맡은 일을 활발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까닭은 일상생활을 벗어나 산꼭대기나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닌 이 삶의 현장에서 모든 것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행의 첫 단계부터 정견을 기르고 ,그 정견을 생활에 적용시켜 나가야 합니다. 생활과 수행이 둘이 아닌 불교의 생활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 불교가 세상에 도움을 줄 수 있고 우리 불교가 더욱 잘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디 이를 잘 명심하시어 나를 비우고 또 비워가십시오. 그리하여 정견을 생활화하고 불교를 생활화하여 함께 행복한 세상을 다함께 만들어 봅시다.
불교의본질은 같이 더불어서 잘 사는 세상을 구현하는 것이니...
나무마하반야마라밀 |
출처: 松山 원문보기 글쓴이: 나그네
첫댓글 밤 새워<반야심경>을 읽으며 정진하던 때를 생각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나이다.
많은 불법 공부하고갑나다 감사합나다 성불하십시요
정확한 해석과 비유에 감탄사가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수행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말씀 깊이 새기고 정진하겠습니다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