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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의정부 경전철 구조물
붕괴 사고
2009년 7월 25일 오후 의정부 경전철
제2공구 공사현장에서 대형 철골구조물
이 무너져 김모씨 등 한국인 인부 3명과
베트남 출신 외국인노동자 2명이 숨지
고, 한국인 5명, 중국동포 1명, 베트남인
2명 등 인부 8명이 부상했다.
이 사고로 죽거나 다친 인부들은 그동안
공사현장 인근에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
해 만든 숙소에 머물며 월 120만~200
만원 안팎을 받고 밤낮없이 일했다.
이날 오후 7시20분쯤 의정부시 신곡동 드림밸리아파트와 부용천 사이에 건설
중이던 12m 높이의 교각에서 대형 철골
구조물이 내려앉았다.
무너진 구조물은 폭 6m, 길이 30m의 ‘런칭거더(Launching Girder)’라는 공
사 장비로, 교각과 교각 사이를 옮겨 다니
며 콘크리트 구조물을 끌어올려 교량 상
판을 조립하는 데 사용된다.
사고 당시 현장 인부들은 당일 작업을 마
무리한 뒤 이튿날 작업을 위한 가설준비
작업의 하나로 런칭거더 위에 설치된 고
가이동 기중기(gantry crane)를 옆쪽으
로 수평이동시키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런칭거더 지지대에 충격이
가해졌고, 이 때문에 런칭거더 전체가 붕
괴한 것으로 보인다고 공사 관계자들은
전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총 16명이 작업 중
이었으며, 사상자 13명은 모두 런칭거더
위에서 일하던 인부들인 것으로 알려
졌다.
경찰과 소방서는 사고 발생 직후 구조
인력 230여명과 장비 30여대를 동원해
사상자를 병원으로 후송하고, 추가 희생
자 구조작업을 벌였다.
시행사에 따르면, 무너진 고가이동 기중
기는 6개월마다 한 번씩 한국산업안전보
건공단에서 안전검사를 받게 돼 있다.
또, 위험한 작업이 진행되는 공사현장에
는 그때마다 필요에 따라 안전 패트롤 직
원이 배치돼 원청업체 소속 안전관리자
의 지시를 받게 돼 있다.
안전 패트롤은 기중기 운전사가 기중기
를 이동시킬 때 런칭거더 상부 또는 하부
에서 주변을 살피는 역할을 한다.
사고가 난 기중기는 지난 6월 안전검사
를 받았으며, 사고 당일 현장에는 안전
패트롤 요원 1명이 배치돼 있었다고 시
행사는 밝혔다.
2007년 7월 착공된 의정부경전철 건설
공사는 장암지구~ 송산동 11.1㎞ 구간
을 연결하는 사업이다. 10개 회사로 구
성된 컨소시엄이 공사를 맡아 2011년
8월 완료, 2012년 7월 개통했다.
▶2011년 1세대 무용학자
정병호 선생 별세
▶2004년 재미교포 16세 김시환
US주니어골프 우승
▶2004년 ‘스타우트 인펀트 피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물고기로 호주박물
관에 기록
▶2004년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 발사
지구서 ‘탄처(探測) 2호’ 발사
▶2001년 7월 25일 프랑스 소장 외규장
각 도서 297권을 국내 고문서와 맞교환
하기로 합의
2000년 11월 9일 덕수궁 앞에서 연세대 조하현교수(왼쪽)를 비롯한 대학생들이 프랑스의 외규장각 도서반환을 요구하는 항의집회를 벌이고 있다.
▶2000년 야구선수 김기태, 국내최초로
6타수 6안타 기록
▶2000년 7월 25일 프랑스 콩코드기
추락, 승객 등 112명 사망
▶1994년 이스라엘-요르단, 46년간 적대관계 청산 선언
왼쪽부터 후세인 요르단 국왕, 라빈 이스라엘 총리, 클리턴 미국 대통령.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이 1994년 7월 25일 워싱턴에서 양국 정상간 사상 첫 공식회담을 갖고 지난 46년간 지속된 해묵은 적대관계의 청산을 선언하는 공동선언에 서명했다.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함께 서명한 공동선언은 수 세대 동안의 반목 투쟁을 뒤로 하고 후세인 국왕과 라빈 총리는 "두 국가 사이의 전투상태를 끝낼 것을 전 세계에 엄숙히 선언한다"면서 양국간은 물론 역내의 평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아울러 천명했다.
양국 정상은 선언문에서 이 문서를 바탕으로 상대방의 안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거나 평화협상을 위한 결의에서 벗어난 여하한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과 아랍국가 및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의 공정하고 지속적이며 폭넓은 평화를 위해 매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두 사람을 선견지명을 가진 정치인들이라고 치켜세우며 정상회담 성사에 기쁨과 만족을 표시했다.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1984년 패킷교환 공중데이터
통신망 개통
▶1984년 미국-중국,
항공우주기술협정 체결
▶1983년 고리원자력발전 2호기
상업운전
▶1983년 스리랑카 인종폭동
▶1983년 미국, 레이저무기
미사일격추실험 처음으로 성공
▶1983년 시베리아 가스관 완공
▶1981년 기획원, 외국기업의 대한투자
문호를 확대 427개 업종에 외국인 투자
허용
▶1980년 미국, 군정 볼리비아에
전면 원조중단. 외교관-군요원도 철수
▶1978년 시험관 아기 탄생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 탄생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데일리 메일지를 런던 시민이 읽고 있다. 주인공은 루이스 브라운.
▶1975년 민방위 기본법 공포
▶1974년 우리나라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 사망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3406895&cid=58425&categoryId=58425
생전의 김환기 화백의 모습.
▶1969년 `닉슨독트린` 발표
▶1968년 문화공보부 발족
▶1968년 KAL, 서울~동경간 취항
▶1965년 밥 딜런, 전기기타 연주
▶1964년 최초의 국악관현악단 창립
▶1963년 부분핵실험금지 조약
(PTBT) 조인
▶1957년 튀니지, 공화제 선언
▶1956년 여객선 안드레아 도리아호
침몰
▶1955년 미국, 극동지상군사령부 및
8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 결정
▶1954년 이승만 대통령 방미
▶1953년 베트남에 태풍,
주민 천명 사망
▶1950년 영국, 터키, 필리핀 등
한국전에 지상군 파견 결정
▶1949년 네덜란드,
대한민국을 정식 승인
▶1946년 좌우합작회담 시작
▶1943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실각
▶1939년 경춘선(성동-춘천) 개통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세계대회 모스크바서 개최
▶1934년 돌프스 오스트리아 수상 암살
▶1925년 해태그룹의 창업자
박병규 출생
▶1922년 전국기자연맹 결성
▶1920년 오상순 등 `폐허` 창간
▶1919년 소련, 중국과 제정러시아의
불평등조약 폐기 선언(카라한 선언)
▶1909년 프랑스 항공기 기술자 루이
블레리오, 자신이 만든 `블레리오11`로
도버 해협 횡단 성공
▶1905년 불가리아의 소설가
카네티 출생 - 1981년 노벨문학상 수상
▶1903년 한글학자 정태진 출생
▶1894년 청일전쟁 발발
▶1867년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제1권을 런던서 완성
▶1814년 스티븐슨 증기기관차 시운전 성공
"철도의 시대"를 열다, 조지 스티븐슨
‘기차’를 한자로 쓰면 ‘汽車’다. 뜻을 풀이해보면 ‘물 끓는 김으로 움직이는 차’라는 뜻이다. 옛날엔 물을 끓여 발생하는 수증기를 이용해서 기차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옛날 사진을 보면 기차의 앞 바퀴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증기를 이용해서 움직였던 옛날 기차를 ‘증기기차’라고 한다. 증기기차가 생긴 것은 증기의 힘이 동력을 제공하는 부분인 ‘증기기관차’ 부분이 발명됐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차는 증기기관의 증기 힘을 바퀴 회전에 이용했다. 증기기관차가 생기면서 사람은 가축이나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증기의 힘 만으로 이동을 할 수 있게 됐다.
트레비식 증기기관,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움직이다
기차에 알맞게 증기기관을 적용시키는 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만든 증기기관을 기차의 바퀴에 단순히 연결하기만 한다고 기차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기의 증기기관은 철로 된 무거운 보일러와 피스톤이 달린 실린더로 구성돼 있었다. 따라서 그 자체로 무게가 상당히 나갔다. 증기기관차는 아래 달린 바퀴를 이용해 이 무거운 기관을 움직이게 해야 했는데, 무거운 기관을 움직이려면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와트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무거운 기관을 움직이는 힘을 만들려면 보일러와 실린더의 크기가 커져야 했다. 하지만 이동을 위해 보일러와 실린더의 크기가 무한정 커질 수도 없었다. 또한 증기기관차는 높은 압력을 필요로 했는데 와트의 증기기관은 공기 압력 정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저압 기관이었다. 따라서 증기기차를 위해서는 부피가 작으면서 높은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고압 증기기관이 필요했다.
영국인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 1771~1833)은 ‘트레비식 고압 증기기관’을 제작해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시험 운전하는 데 성공했다. 트레비식 고압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에 있던 응축기를 없앴다. 대신 보일러에서 발생하는 증기로 움직이는 피스톤이 장착된 실린더가 들어갔다. 트레비식 증기기관은 실린더 모양의 보일러에 수평으로 장착된 한 개의 실린더, 보일러 연소에 쓰이는 석탄 가스가 배출되는 연통, 실린더 피스톤 봉에 연결된 바퀴로 구성됐다.
트레비식은 자신의 증기기관을 이용해 최초의 기관차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18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첫 선을 보인 이 기관차는 무게가 5톤이나 나갔지만 70명의 사람과 석탄차를 포함해 모두 25톤이 나가는 차량을 시속 8km로 이동시켰다. 웨일즈 탄광촌 사람들은 말이 아닌 기계가 사람을 나르는 광경을 처음으로 구경했다.
트레비식의 기관차를 발전시켜 본격적인 ‘철도의 시대’를 연 사람은 엔지니어였던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었다. 스티븐슨은 트레비식과 달리 실린더를 수직으로 장착하고 보일러 등을 개량했다. 이를 통해 시속 39km를 낼 수 있는 증기기관차인 ‘로코모션(Locomotion)’을 개발해 최초의 석탄 수송 철도 노선인 ‘스톡턴과 달링턴 노선(Stockton and Darlington Railway; S&DR)’에 투입했다. 스티븐슨은 당시 발달했던 제철 공법을 활용해 기차가 다니는 선로도 개량했다. 육중한 무게의 기관차가 제대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선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829년에는 뒷날 증기기관차의 표준 모델이 된 ‘로켓’호를 개발됐다. 로켓호는 당시 기관차 경진대회에서 시속 48km의 속도로 우승을 했다. 로켓호가 최고 속도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러 개의 관이 들어있는 보일러를 이용해 연소 가스의 열이 증기를 효율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 이전 기관차 보일러에는 한 개의 파이프만 있었으나, 로켓호 보일러에는 25개의 구리 튜브가 들어 있었다. 로켓호에는 두 개의 실린더가 장착됐으며 연소실이 보일러와 분리됐고 연소실 두께도 두 배로 늘어났다. 이전 증기기관차보다 훨씬 효율이 높아진 로켓호는 최초의 여객용 정기 노선인 ‘리버풀과 맨체스터 노선(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L&MR)’에 활용됐다.
여행이 증가하고 시계를 보기 시작하다
증기기관차의 발전은 일상 생활에 여러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과 물자의 이동 시간은 매우 빨라졌고 여행을 하는 것도 이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로켓호가 장착된 기차는 우편 마차보다 두 배나 빨랐고, 요금도 마차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가장 빠른 말로도 시속 18 km 밖에 낼 수 없었지만 기차는 시속 50 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말에게 먹이를 주거나 지친 말을 교체하기 위해 1시간 마다 여행을 멈추는 일들도 사라졌다. 한결 편해진 여행으로 여행객은 점차 증가했다. 맨체스터와 리버풀 노선은 증기기차 개통 후 1년도 채 안 돼 50만 명이 이용했다.
기차의 빠른 속도는 국가 경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들이 인근 지역을 벗어나 멀리까지 팔려나가게 됐기 때문이다. 서울 공장에서 생산된 물건을 다음날 부산에 있는 사람이 구입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되자 점점 더 많은 공장에서 기계를 이용해 더 많은 양의 상품을 생산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철도가 발달하면서 이웃 지역으로 수출하는 상품이 늘어났다. 그러면서 경제의 규모가 전체적으로 커졌다.
또한 증기기차의 발달은 사람들이 시간을 엄격하게 지키는 태도를 갖게 했다. 마차가 다니던 시대에도 마차의 도착 예정 시간이 있었으나 제 시간에 도착하는 경우보다 늦는 경우가 더 많았다. 반면 기차는 거의 정해진 시각에 도착했다. 옛날 마차를 대하던 것처럼 느긋하게 기차역에 도착하면 기차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기차 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했고 이것이 습관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약속 시간도 ‘정오 때쯤’에서 ‘몇 시’로 구체화됐다.
증기기차, 디젤기관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다
증기기관차는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기술에 밀리기 시작했다. 디젤기관차 등 증기기관차보다 편리한 기술이 나타나며 증기기관차의 입지는 점점 약해졌다. 각종 기계 기술의 발달로 초기의 트레비식 증기기관차에 비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했지만, 기관차 가동 전에 충분한 예열 시간이 필요하며 증기 발생을 위해 충분한 물을 필요로 하는 점 등이 불편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며 등장한 것이 디젤기관이다.
증기기관을 작동하는 데는 여러 사람이 필요했지만 디젤기관은 한 사람만으로 작동이 가능했다. 또한 증기기관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날씨 변화에 의한 지장도 거의 없었고 시동과 중지도 훨씬 쉬웠다. 증기기관처럼 늘 정비와 청소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이런 장점들로 인해 디젤 기관차는 증기기관차를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1803년 독일 작곡가
페르디난트 바이어 출생
https://youtu.be/U3HwYdwjG-g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