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예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마음이 영영 예쁘게 있을 수는 없고, 마음이 무겁다고 말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계속 무거울 수는 없는 것이다. 마음은 도대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미주와 미주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다른 책을 읽다가
뒷목 위로
언젠가 미주가 제목을 짚어주었던 노래가 흘러나오고
미주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미주를 바라보았을 때
미주만이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따뜻하다고 말해도 미주의 마음이 따뜻한 채로 있을 수는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도무지 없는 것이라서, 마음이 흐를 곳을 찾도록 내버려둘 뿐입니다.
너는 미주의 노래와 만난 적 없다
미주의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주의 노래일 뿐이다
〈유혜빈 시인〉
△ 1997년 서울 출생
△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2020 제20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
△ 시집 : '밤새도록 이마를 쓰다듬는 꿈속에서'
사진 〈Pinterest〉
오늘 태어나는 말들에게
유 혜 빈
오늘 우리는
누군가의 낮에 그늘을 만들 수도 있고
누군가의 밤에서 어둠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말이 생각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공기에서 태어났다고 해야 할까요. 진짜 같은 말과 가짜 같은 말들. 아마도. 조금은. 언젠가와 같은 단어는 마음이 숨도록 내버려두기 좋습니다. 진짜 같은 마음에 취하도록 빚으시고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도록 만드신 날들.
어쨌거나 말은 지금은 여기에서 태어났다 말은 이곳을 맴돌다가 누구의 귓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이 흐를 때 말은 곧이곧대로 흐르기로 결심한다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얼굴들. 당신이 기억에서 왔다면 이 꿈이 끝난 뒤에는 어디로 갑니까. 누구에게 건넨 말들은 누구의 귓가에 뿌리내립니까. 영영 모르는 이의 귓가로 흘러가는가요. 평생을 솜털처럼 날아가는가요. 내 뜻과는 상관없네요.
사선으로 놓인 빛을 따라 말들이 지나간다 시간보다 이른 속도로 도착하고 있다
그 애는 혼자서도 먼 곳으로 흐르며 일렁이고 있다
영원히 오해받을 수 있는 시간들 오해받아야 하는 시간들
언제고 뒤늦은 시간들 속에서
사진 〈Pinterest〉
춤
유 혜 빈
내게 기쁨만을 보여주세요
당신은 매일매일 같은 시간에 나타나 우리는 언덕 위에 일렬로 서서 총을 겨누고 언제나 충분히 죽이지 못해서 그 환한 낮이면 다시
낮마다 언덕을 기어 올라가고
나는 당신을 죽이고
잠을 자고 일어나서 다시
언덕을 기어 올라오고
늘 같은 하루를 살고 당신에게 겨누며
우리는 죽였고 당신은 언덕을 기어 올라오고
내게 기쁨만을 알게 해줘요 당신은 언덕을 올라오고 싶지만 언젠가 도착하고 싶지만 않고 조금은 발을 멀리 뗀 채로 그래야만 바다에 떠밀려 젖지도 않고 그렇다고 발 딛고 살아갈 용기는 없는 그렇게 언덕을 닿지는 못한 채로
영원히 언덕을 올라가고만 싶은 사람으로
그렇게 남아주세요
당신이 나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둔하게 웃어요 영원히 달려요
사진 〈Pinterest〉
雨
유 혜 빈
물 위에 지은 집.
어젯밤에 삼킨 알약이. 아침까지. 씁쓸하게 맴도는 이유가 뭐야. 몰라. 알 게 뭐야.
언제부터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이 익숙해졌을까. 외로울까봐 나는 집에도 못 가요. 이상하고 어눌한 사투리로.
씩씩하게. 올라가는 역사의 에스컬레이터. 가방끈을 두 손으로 쥐고. 명량만화에 나오는 누구처럼. CCTV를 노려보며. 익숙해지지 않도록. 중요한 느낌이 그냥 지나가버리지 않도록.
숲에 물감을 엎질렀는데, 다행히 홍수를 피해서 다시 색칠할 수 있어요. 다시 색칠하면 돼요. (정말?) 오늘은 명량소녀 내일은 말괄량이. 그래도 항생제는 쓰리게 녹고 나는 녹아내리는 그의 집이 되고.
그럼 언젠가는 나 쉴 곳도 내가 될까요?
놓인 것은 열하나. 약은 물에서 느리게 녹고, 쉽게 삼킨다. 너도 위로가 필요하니. 고개를 숙이면 쏟아지는 하루. 혼자 돌아오는 길도 모르는. 저 너머의 수도꼭지.
사진 〈Pinterest〉
식 도 염
유 혜 빈
집에 들어가는 것은
내가 아는 가장 괜찮은 기억을 낚으러 가는 일입니다
닫힌 문을 열며 머뭇거립니다 생경한 예감입니다
안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만큼 안으로 들어갑니다
내 방으로 들어갑니다 저 방에 들렀다가 다시 나와도 됩니다
여전히 내 방이거든요
손님이 끊긴 지 오래인지라 가지고 있는 기억은 조약합니다
해묵은 독에서 어제의 쌀을 길어 올립니다
낡은 가구를 고쳐 쓰는 일이 즐겁습니다
나도 모르게 떨어뜨린 물건들을 찾으러 다닙니다
이 안에는 오직 내가 걸어온 무구한 길
손수 만든 발자국으로만 채웠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초대하지 않은 그림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누구 여기에 있으라 한 적 없지만
가난한 마음으로도 충분히 이곳을 지킵니다
묵은 쌀의 까끌함이
살아 있다는 괴로움을 쏟아붓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늘의 쌀을 씹어 삼키지 못하는 것은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2020년 제20회 창비신인시인상』선정 이유
유혜빈의 시는 고요하고 단정한 언어를 구사한다. 이 고요와 단정을 통해 시인은 모호한 미감을 발생시키고 때로는 구체성 짙은 삶의 비의를 드러낼 줄 안다.
아울러 이러한 모호와 구체의 간극은 정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진지한 사유를 통해 확장되고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이에 더해 하나의 선명한 장면을 다른 선명한 장면과 겹쳐놓는 미학적인 단절을 통해 예기치 못한 것들을 환기시키는 능력도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