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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후서 6:1-10
본문 말씀에 들어가기 전에 오늘날 세상 교회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다른 복음, 다른 예수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고 본문에 들어가겠습니다.
오늘날 무당 종교가 되어버린 현대 기독교의 실상,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표적인 게 기복주의죠. 복에 환장한 기독교, 번영신학, 고지론, 거기에 양념으로 뿌려놓은 게 신비주의, 그리고 인간의 이성에 포착되지 않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합리주의, 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사회정의를 위한 기독교, 예를 들어 공동체 운동, 생명 운동, 노동 운동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세상이라는 인본주의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선진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 전하는 교회를 찾아보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우리 교회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요 그들이 원하는 게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내 삶에 도움 되는 예수,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이 되어주는 하나님을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십자가만 이야기하지 말고 부활도 이야기하고, 위로의 하나님, 자기를 인정해주는 하나님, 그리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렇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예수를 원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어요. 예수님의 사도들, 그러니까 성경을 쓴 그들은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단 말이에요.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창조 자체가 우리 인간을 위한 게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창조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가 가능한 피조물이에요. 아들의 피라고 하는 창세 전 언약의 대상으로서 그의 몸 된 교회이기에 하나님의 약속인 십자가를 떠나서 인간의 행복이나 세상 발전을 위한 예수는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술입니다. 이게 복음의 진리예요.
그러나 오늘과 같이 복음의 진리가 실종된 현실에서 고집스럽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나눈다는 것은 그야말로 세상 교회들이 보기에는 미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생명은 그 십자가, 그 언약의 피에만 있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뜻은 자기 사람들에게 영생, 곧 하나님적인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인간 세상의 행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을 영생이라고 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게 영생이라니까요. 그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출발이 잘못되면 멀리 갈수록 돌아올 길이 먼 법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예수와 십자가로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은 다 무너지게 돼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 위에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그 은혜의 복음을 나누고, 오직 예수로만 부족함이 없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빕니다. 제가 지금까지 무식하게 그런 고집을 피워온 것도 그 때문이에요.
그럼,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고린도후서 5장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새 창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들의 피라고 하는 창세 전 언약이 이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고, 그 사랑의 결과물이 바로 새 피조물로서 저와 여러분인 것을 나누었습니다. 그 새 피조물에 강권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불가불 우리가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없고 대신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게 된 것까지가 그리스도의 소유된 자들, 교회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6장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신 예수님의 십자가가 삶의 현실이 된 자 곧 교회의 거룩이 어떻게 주어지고 지켜지는지에 대한 바울 사도 자신의 삶이 간증과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몸 된 교회의 의와 거룩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지켜주시는가에 대한 내용이 고린도후서 6장이에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에게 입혀주신 그리스도라는 의와 거룩,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거룩은 뭔가 하면 우리에게 옷 입혀주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와 거룩이란 말입니다.
옷을 입었다는 말은 우리의 본질,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몸은 변한 게 없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싫어하고, 여전히 부정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찬 이 몸인데, 자기만 사랑하고 자기 영광만 챙기는 그런 몸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히셨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입혀진 그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의와 거룩으로 보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거예요. 구약에도 보면 모든 물건들을 정결케 하는 게 뭐라고 합니까? 피를 뿌려서 정결케 한다고 하잖아요. 그 피가 생명이고, 그 피가 거룩이라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 본문은 우리에게 입혀주신 그리스도라는 의와 거룩을 우리가 지켜내야만 우리 구원이 완성된다는 말이 아니고 십자가로 이미 단번에 주어진 그 의와 거룩을 그분의 사랑 안에서 끝까지 지켜주시는 것까지가 하나님 약속의 완성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걸 알고 오늘 강론을 들으시면 이해가 잘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이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오늘 본문은 ‘성도란 누구인가’‘교회란 누구인가’에 대한 사도 자신의 이야기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사도는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 동역자라고 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해요, 그러면서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왜 사도는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이야기할까요?
성경은 어느 한 단어나 한 구절만으로 그 진의를 알려고 해서 안 됩니다. 전체 문맥을 통해서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를 아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전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나무 하나만 보지 말고 숲 전체를 보라는 뜻이에요.
우리가 고린도후서를 반년 가까이 나누고 있는데요, 이 고린도후서가 쓰인 목적부터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1장부터 지금까지 사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그 흐름을 잃지 않게 됩니다.
고린도후서를 처음 시작할 때 말씀드린 대로 이 편지는 사도가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디도로부터 전해 듣고 아주 기쁜 마음으로 쓰게 된 편지입니다. 그러나 한편 고린도 교회에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하고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거짓 교사가 나타나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사도는 자신의 사도 직분에 대해서 변호할 필요가 있어서 이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왜 자신을 변호해야 합니까? ‘나 사도 맞아. 나 하나님의 사도야.’.. 이것 때문이 아니고 바울의 사도직이 부정되면 그가 전한 복음이 부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후서는 우리 성도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돌보심이 어떠하며 그로 인한 바울 자신의 고난, 환난과 같은 자신의 삶과 직분과 사명에 대한 자서전적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 보면 사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새롭게 된 성도의 신분, 정체성이 어떠한지를 4장과 5장에 걸쳐서 먼저 설명한 후에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너희에게 권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게 할 그런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사도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성도의 정체성과 성도라는 직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왜? 그게 잘못되면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고 헛되이 받을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으로 14절부터 18절 말씀이 이어지게 됩니다. 한 마디로 성도, 즉 교회는 진리가 아닌 것, 부정한 것들로부터 구별되어야 하고, 이게 너희들의 정체성이며, 그것들과 함께할 수가 없다는 것을 지금 사도가 한 번 더 강조하는 거예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는 안 되는 자들이며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또 하나님의 일꾼으로서의 직분이 성도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그 엄청한 사실, 그 귀한 직분에 대해 사도 자신의 삶을 간증하면서 고린도 교회가 ‘성도란 누구인가’‘하나님의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3절에서 10절의 말씀이에요.
복음에는 커다란 함정이 있어요. 복음을 듣게 되면 어떤 사람들처럼 복음을 아니까 ‘막살아도 되겠구나’ 또는 그래도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의 율법이 있으니까 윤리 도덕적인 건 어느 정도 지켜야 해.’.. 이런 건 초대교회부터 쭉 있어 왔던 문제들이에요. 할례라든지 안식일 문제 같은.. 세상 교회들이 지금도 십일조 하라고 하고 주일 성수 가르치는 게 다 그것입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이 있지요. 오늘날도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십자가 마을처럼 막 살기가 복음이라는 사람들.. 복음의 지식으로 자기합리화를 하는 자들입니다. 그뿐 아니라 복음 안다는 목사들도 교회 하기에 정신 팔려서 목회 오래 하다 보면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사도가 전한 복음에는 우리가 오해할 만한 것들이 들어있어서,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사도가 그 부분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자 이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면서 본문을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합니다. 이미 고린도 교회는 거짓 선생이 들어와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있다고 했죠? 그들이 전한 다른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오해가 고린도 교회에 있다는 것을 사도가 전해 듣고 이 편지를 다시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들에게 권한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 말씀은 그들뿐만 아니라 앞서 본문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린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들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더럽혀지고 무시되고 있는가..
우리가 앞서 5장 10절에서 말한 것처럼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너희에게 권면하는 말씀인 것을 미리 못 박아 놓고 사도는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오해가 있다는 사실을 다시 부연해서 꾸짖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라는 말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기 위한 말씀이라는 뜻이에요. 그게 무엇인지를 한번 보고 가겠습니다.
세상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미 초대 교회부터 오늘날까지 세상 모든 교회에 발생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
(고후 4장)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세상에는 세상 신이 있단 말입니다. 사단, 악마, 마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 마귀는 우리 인간들을 괴롭히고 내일을 방해하는 존재잖아요.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세상 신은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심과 그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는 일을 해요. 그게 그들의 본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단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일을 방해하는 게 아니라 아주 인간 친화적인 존재입니다.
오늘날 세상 교회들이 새벽부터 모여서 빌고 철야 기도하고 하는 게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복 받으려는 거죠. 복에 환장한 기독교입니다. 기복주의, 신비주의, 다원주의 이 모든 게 인간을 위한 기독교,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잖아요. 그렇게 인간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게 세상 신이라니까요.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가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 네가 나에게 무릎만 꿇으면 이 세상 영광을 다 너에게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게 모든 인간이 원하는 복음이에요. 오죽했으면 바울이 자기가 복음을 전한 교회에 편지를 보내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했겠어요. 이 세상 속 교회는 언제라도 그런 유혹에 빠질 수 있어요. 그리고 이 세상 신 마귀, 귀신들은 동화사나 해인사에 없어요. 그런 곳은 가만히 내어버려 둬도 되니까. 그래서 그나마 예수 이야기를 하는 교회에 전부 있어요.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 십자가 영광이 전해지지 않도록 그것만 가리고 막는 거예요. 교회도 키워주고 선교도 도와주고 수천억짜리 예배당도 짓게 해주고 사람들도 모아주고 다 한다니까요. 단 십자가 복음의 광채 그 영광만 가리는 거예요.
그래서 바울이 말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뜻은 이미 고린도 교회에도 거짓 교사가 들어와서 사람들이 좋아할 다른 복음을 퍼뜨려 놓은 거예요. 인간 중심의 복음, 인간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있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 그 십자가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려는 세상 신의 역사가 언제나 있을 수 있기에 그런 역사로 인해서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말씀에 의해 갈라지게 됩니다. 이게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복음이 전파되면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그런데 교회 목사들 늘 강조하는 말이 있죠? 하나 되자. 교회에 분쟁이 없게 하자. 그런데 그게 아니란 말에요. 교회는 치열한 영적 전투가 있는 곳이에요. 단, 올바른 복음이 선포되면 말입니다.
그런데 아까 고린도후서 4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에게 가리운 거라고 하죠.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망하는 자들은 당연히 복음을 알아듣지 못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믿지 않는 자,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 예수의 피 뿌림이 없는 자,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는 반드시 세상 신의 미혹을 받아 다른 복음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모든 사람이 알아듣는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의 본성은 십자가 복음보다 다른 복음을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본성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요. 선악과는 ‘하나님처럼’ 이잖아요.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게 선악과의 독성이란 말이에요. 그냥 선악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선악, 나에게 좋은 것은 선이고 나쁜 것은 악으로 규정하는 선악 체계가 우리 안에 장착된 채로 태어난다니까요. 그래서 아담에게서 난 모든 자는 자기가 부정되는 십자가 복음을 싫어하고 다른 복음을 좇게 돼요.
사도는 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게 아니다.. 그럼 세상 신의 사주를 받아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은 무엇을 전한다는 거예요? 자기를 전하는 거죠. 예수의 주되심을 전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에요. 그리스도 예수가 주 되신 것을 전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내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하는데 거짓 선생들은 너희를 종 삼기 위해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 것을 전하는 거예요. 이 차이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인정받은 자처럼 추천서를 들고 다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장악해서 교인들을 지배하려는 목적, 자신을 좇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원인과 결과가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음을 가르치는 거예요. 아주 무서운 일이죠. 이런 자들은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전한 모든 교회에 나타나서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훼방한 것을 우리는 사도의 서신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는데요 복음에는 반드시 앞에 붙는 게 있어요. ‘은혜의’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잖아요. 이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가 누구신지를 설명하는 게 복음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다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끼워 넣는 게 다른 복음이란 말입니다. 오죽하면 바울이 이런 말을 했겠어요.
(갈 1장)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같이 속히 떠나..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니까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우리 인간의 본성이 은혜의 복음을 극도로 싫어하는 겁니다. 내어버려 두면 다른 복음을 좇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갈 3장)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그리스도의 은혜를 떠나서 사람을 좇고 땅의 일을 생각하게 만드는 게 모든 이들이 좋아하는 다른 복음이에요. 사단의 일, 거짓 교사들이 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세상 교회가 이런 다른 복음에 오염되어 있어요. 은혜의 복음을 전해야할 목사가 강단에서 전하는 설교가 전부 다 인간을 위한 인간 중심의 설교예요. 인본주의에 오염된 기독교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 더하기 인간의 선행이나 종교 행위로 구원이 완성된다고 하는 알미니안 주의,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에서 출발한 다른 복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욕보이고 헛되이 한다고 바울이 지금 심각한 얼굴로 이것을 지적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온전한 은혜로 받지 못하고 그 은혜에 인간의 행위를 끼워 넣으려고 하고, 또 인간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 이름을 팔거나 아니면 자아실현을 위한 예수 섬기기 인격 도양을 위한 성경공부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복음을 훼방하는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이 그들을 향해서 아주 날카롭게 질타합니다. 너희 신은 너희의 배다.. 한 마디로 너희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믿음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는 육체가 되어버린 인간입니다.
오늘날도 그들과 달라진 게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은 그리고 세상 교회는 달라지면 안 된단 말이에요. 세상 끝날까지 달라지면 안 돼요. 왜? 그들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성도의 거룩을 위해서입니다. 거룩은 그렇게 갈라짐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이고, 세상은 그들의 역할을 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과 위의 것을 찾는 자들의 갈라내심이 지금도 교회라고 이름하는 세상 속에서 발생하고 있고, 그 일은 세상 끝날까지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바울의 모든 서신에는 은혜의 복음과 은혜의 복음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골 3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지금 사도가 우리더러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죽었고’ 하나님이 보시는 시각은 아담에게서 난 우리 이 몸은 생명 아니다, 너희가 숨 쉬고 밥 먹고 움직이고 하는 이것은 목숨이지 생명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이 전체 세상을 죽은 세상으로 보십니다. 죽은 세상 속에 산 성도들이 있는 거에요. 그리고 그 산 성도들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렇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만 있어요, 성도와 성도 아닌 자, 산자와 죽은 자.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가리켜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길이라는 말이 참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탈출해야 할 세상이라는 뜻이거든요. 내가 너희를 탈출시켜 줄 유일한 길이라는 거예요. 모든 종교인들 찾는 게 무엇입니까? 진리, 길이지요. 흔히 득도했다고 하잖아요. 도를 깨달았다는 이게 모두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 길은 세상에 없어요. 그 길은 하늘로부터 우리를 직접 찾아오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 의해서 찾아진 자들만 진리를 알게되고 그들만 구원이 있어요.
또 나는 진리라는 말씀은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진리는 영원해야 해요. 변함이 없어야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것들은 다 변하고 쇠하여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종교인들이 진리를 찾아보겠다고 하죠. 누가 그랬습니까? 내가 아침에 진리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그런데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에겐 진리를 찾을 능력이 없어요. 예수만 진리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나는 생명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만 생명이란 말에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너는 죽는다고 하셨어요.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다 죽었다니까요. 그렇게 죽은 세상에 진짜 생명이신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런데 그분이 오시자, 이 죽은 세상이 저 인간 때문에 우리가 죽은 세상으로 드러나니까 저 인간만 없으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생명이신 그분을 죽여버렸잖아요. 그때로부터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 종말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그 십자가를 사도가 고린도전서에서 뭐라고 합니까? 그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해요. 그 죽음 안에서 새 생명들이 태어나는 거예요. 우리의 죄로 인한 그 죽음을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이게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이 성경 말씀, 사도의 서신들 역시 그들 산 자에게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세상 종교인들은 성경을 백독을 해도 못 알아듣고 반드시 오해 해야 합니다. 자기를 위한 말씀으로만 알아들을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죄인들의 한계란 말입니다. 진리로 알아듣지 못해야 정상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가 되느냐고 합니다. 조화될 수 없는 거예요. 산 자와 죽은 자가 어찌 함께할 수 있겠습니까? 안 된단 말입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될 수 있는가... 불신자와 사귀지 말고 같이 사업도 하지 말고 결혼도 해서 안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근원적 본질적으로 너희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있기도 전인 창세전 아들의 피로. 그렇게 운명적으로 세상과 분리된 것을 우리의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자들, 산 자들에게 입혀주시는 그리스도라는 의와 거룩을 지켜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증거가 오늘 본문에서 읽은 내용이에요. 바울 사도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의와 거룩을 지켜주기 위한 사건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가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사건화 된 은혜받을 만한 때고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폭력적 개입, 말씀의 사건들이 아니면 우리는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만 사랑하며 세상을 좇아 사는 육을 가졌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돌보심의 사건들이 성도의 삶에 반드시 발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부득불 이 세상과 다른 시간과 다른 날을 살게 됩니다. 그것을 두고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 사십 년을 살면서 그들에게 세상과 다른 시간이 흐른 것과 같은 거예요. 그들이 광야 사십 년 동안 겪은 모든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는 사건이며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달력을 아예 바꾸셨어요. 출애굽한 그날을 한 해의 첫달이 되게 하셨다니까요. 이스라엘에게 주신 시간이 다르단 말이에요. 이스라엘이 사는 시간은 이 세상 시간과 달라요.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영원 전 하나님의 언약이신 어린양의 피로부터 그들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 그 밤에 어린양을 잡고 그들은 광야 사십 년 동안 세상과 다른 시간과 날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게 출애굽기 12장에 쭉 나옵니다. 너희들이 출애굽한 그달을 한해의 첫달로 삼아라.. 너희는 그렇게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똑같은 달력을 사용하고 똑같이 24시간을 살지만, 우리 성도에게는 세상과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어요. 좀 어렵게 말하면 이 세상 역사와 묵시를 겹쳐서 살기 때문에 우리 인생이 고달픈 겁니다. 내 계획과 내 목적대로 내가 노력한 만큼 그 결과물도 내가 챙길수 있는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은데, 그런 우리 인생에 계속 공격해 들어오는 묵시로 인해서 우리가 원하는 인생을 살 수 없게 하시는 이게 하나님이 우리의 의와 거룩을 지켜주시는 보살피심이에요. 이게 없으면 사생아 버려진 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 받을 때와 구원의 날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자기 시간과 자기 날을 사는 자들을 성경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늘에서 오신 예수와 이 세상을 완전히 선을 그어 버립니다. 나는 하늘에서 왔고 너희는 땅에서 났다. 그래서 너희가 나 예수를 모르면 너희는 죄 가운데 죽는다.. 문제는 세상이 그 예수를 알 방법이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택은 예수님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 살리는 것”
그렇게 이 땅에서 난 자들이 예수를 알아볼 방법이 없었는데 심지어는 제자들도 몰랐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고 죽으신 후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아버지께로 가서 성령이 오셔야 해요.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때야 비로소 우리 눈이 열립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이 주와 그리스도셨구나.. 그분이 하나님이셨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주님의 다 이루심이 나의 현실이 된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보세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은혜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동일한 시간과 날들을 사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똑같은 달력, 똑같은 시계를 사용하고, 똑같은 해와 달과 별 아래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성도는 그 시간과 날에 대한 인식, 감각이 달라요. 동일한 시공간에 갇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시간과 공간, 그 우주가 그들을 가두어 놓을 수 없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래서 그들만 세상과 역사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해석이 달라요. 바꾸어 말하면 이 모든 우주 만물이 그들 성도에게 해석 당하기 위해서 있다는 게 성경의 기록이에요. 이게 성도의 신분이며 정체성이란 말이에요. 바꾸어 말하면 이 모든 우주 만물이 그들을 위해서 있고 그들로부터 이름이 불려지기 위해서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피조물이 지금도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 아들들로 인해서 자기들이 지음받은 원상태로 불려지기를 원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배치해 두신 모든 것의 참된 의미가 성도에 의해서만 읽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 8편)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성도는 세상 모든 것을 볼 때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들만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게 달라요. 봄이 되면 팔공산에 벚꽃이 필 텐데, 그걸 보면서 그냥 ‘와 이쁘다, 아름답다’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만물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광, 그 하나님의 이름을 다윗이 찬송했다니까요. 시편 19편에도 같은 말씀이 나와요. 그냥 단순히 날과 달과 해와 시간의 흐름이 아니라 다윗이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를 봅시다.
(시 19편)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이것이 성도가 보고 읽는 때와 날이에요. 같은 날을 살고 같은 태양 아래에 있어도 보고 듣는 게 달라요. 만물을 진리로 보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이 우주 안에서 세상과 같은 날들을 사는 게 아닌 겁니다.
그렇게 성도는 세상 밖으로 옮겨진 자들이에요. 바울이 삼층천에 갔다 왔다고 했듯이 지금도 빛의 속도록 확장하는 이 우주 밖에서 이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들이에요. 그래서 그들이 보고 듣는 것은 세상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자들이고,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세상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지금도 말씀의 사건들 속에서 배워가고 있는 자들이에요. 그들은 잠시 세상을 살면서 그들 안에 새겨져 있는 구원의 날에 대한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기는 자들이고 이 세상에 증언하는 자들입니다. 모든 원인과 결과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그들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과 마침인 줄 아는 자들에게 주어진 은혜의 때요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이며 그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성도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든지 자녀를 양육하든지 밖에 나가서 일을 하든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이에요. 그리고 그들의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세상 교회들처럼 일요일에 교회 나오는 걸 주일 성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성도에게는 매일 매일이 주의 날이에요.(성경에는 주일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주의 날만 있어요) 그러므로 그들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습니다 (롬14:7-8) 내가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을 알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에 이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오늘 본문 4절부터 10절까지 하나님이 그분의 약속이 원인이 된 일들이 사도 바울에게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고생이 아니에요.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게 바울의 삶이에요. 그런데 이 삶은 바울이 원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에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 속에서 부득불 이러한 삶을 살았다는 거예요. 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배우기 위해서 주어진 삶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체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일들이 다 이루어지고 우리 계획대로 다 되면 우리가 하나님 찾겠습니까? 안 찾죠. 그래서 성도는 4절부터에 나오는 이런 고난과 환난 속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우리 주님,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우리 주님의 손길과 체온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그것을 다른 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끝까지의 사랑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날과 달과 해라고 하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건을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이 세상 시간과 다른 시간이 흐른다고 했잖아요.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부터 영원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수평적 시간이 아니라 수직적 시간, 완료된 미래로부터 오는 시간을 살고 있어요. 영원한 현재라는 그 시간을 매 순간 살고 있어요.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느끼게 하려고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사건들이 우리 성도의 삶에 수시로 발생합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은혜받을 만한 때, 구원의 날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내가 하나님과 함게 일하는 자로 너희를 권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다시 말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이미 하나님 은혜를 헛되게 하는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게 되는 다른 복음에 대해서 한 번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강론 들어가기 전에 말씀드린 게 그것 때문이에요. 오늘날 모든 세상 교회, 한국 기독교를 덮고 있는 다른 복음을 우리가 수시로 확인할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사도가 이렇게 반복해서 말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가리려는 세상 신의 역사가 이 세상 끝 날까지 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역할을 다 해야 하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도 얼마든지 다른 은혜, 다른 복음에 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16세기 로마 교회의 다른 복음에 대해서 종교 개혁자들이 외쳤던 다섯 개의 신앙고백이 있죠? 그 다섯 개가 뭡니까? Sola Scriptura, Sola Christus, Sola Gratia, Sola Fide, Sola Gloria.. 그들이 왜 로마 교회를 향해서 이것을 외쳤을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어요.
Sola Scriptura는 ‘오직 성경’이라는 뜻이거든요. 그럼, 당시 로마 교회는 성경만이 진리가 아니라 다른 것도 진리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게 뭡니까? 교회지요. 그들이 성경보다 더 진리로 알았던 건 교회입니다. 우리가 이천 년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계속된 싸움이 있어요. 십자가라는 진리냐 아니면 교회냐 입니다. 십자가와 교회의 싸움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죠? 그 둘이 서로 반대편에 서서 싸워온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인간들이 원하는 게 예수 십자가라는 진리보다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투사되고 확장된 대상으로 교회, 땅의 가시적 교회입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으니까 종교인들은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들 교회의 머리가 교황이죠. 천주교는 지금도 복음으로의 구원, 십자가로 구원이 아니에요. 가톨릭이라고 하는 자기 교회에 소속되어야 구원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의 교회가 진리란 말이에요. 교회가 진리요 교회 역사가 진리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변개한 거예요. 오늘날도 세상 교회가 지금 그 짓을 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Sola Christus,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것 역시 그리스도가 전부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만 구원이 아니란 뜻입니다. 십자가 더하기 인간들의 열심, 인간들의 종교 행위, 인간들의 공로 이런 게 더해져서 구원이 완성된다는 이 알미니안 주의가 가톨릭, 감리교 등등인데, 지금은 장로교, 침례교 할 것 없이 다 퍼져있습니다. 이만큼 인간들은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해요. 아담의 자존심입니다. 왜 우리가 은혜로만 구원받고 십자가로만 구원받아? 부족하긴 해도 우리도 할 수 있는 게 있잖아.. 그래서 교회 목사들이 교인들의 열심에 펌프질하려고 온갖 것을 다 동원한단 말이에요. 동기부여지요. 지금도 천주교는 성인들의 공로가 교회를 섬기는 자들에게도 나누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열심히 성인들을 본받고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하면 앞서 죽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해요. 종교 행위의 가능성이죠. 그렇게 인간의 가치와 가능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인본주의에 바탕한 종교 집단이 로마 가톨릭이에요.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외치면서 사실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교회의 역사가 진행되어 온 것을 우리는 교회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 교회 역사를 보면 세상 권력과 교회 권력의 결탁과 갈등, 중세에 이게 아주 치열했어요.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왜 그렇게 돈을 밝히고 부동산을 밝힙니까? 힘을 축적하기 위해서죠.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이 힘이라고 여기는 것, 세상이 가치라고 여기는 것을 똑같이 좋아하고 또 교회가 그것들을 쌓아놓고 있어요. 결국은 자기 영광입니다.계시록에선 그것을 ‘자기를 영화롭게 하고 사치한 여왕, 음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 민주당에서 입법을 하나 했어요. 지금 상임위에 올라가 있고 조금 있으면 본회의에서 통과될 겁니다. 그게 뭔가 하면 정부가 교회를 마음대로 조사하고 교회를 해산할 수 있는 법이에요. 결국 세상 권력, 국가 권력이 교회 권력과 한판 붙는 거지요. 그들에게 교회가 만만하게 보인 겁니다. 너희들도 우리처럼 돈 좋아하고 부동산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교회가 세상과의 구별이 없으니까 세상 권력이 그것을 알고 교회도 우리가 관리하겠다는 거예요. 이게 결국은 세상과 구별이 없어진 교회의 처참한 말로입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이란의 하메네이가 공습으로 죽었다고 하던데, 그들도 결국 종교전쟁이거든요. 하메네이가 60년간 이슬람 교리로 이란을 다스려왔는데, 트럼프는 그런 이란 국민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두들겨 패는 겁니다. 그럼 트럼프는 진리입니까? 이 세상 역사가 참 재미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세상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반드시 종말이 있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보면 교회를 바벨론이라고 해요. 귀신의 처소라고도 하죠. 그리고 그곳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사람의 영혼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서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미 교회,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는 거예요. 음녀의 섞은 술에 취한 종교인들의 모임, 그들에 대한 경고가 계시록 18장에 나옵니다. 이미 세상 교회에 대한 심판이 실행되었다는 것입니다.
(계 18장)
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이게 세상 교회의 심판입니다. 이미 그 심판은 시작된 거예요. 주께서 그들을 내어버려 두심입니다.
다음은 Sola Gratia, ‘오직 은혜’입니다. 앞에 말씀드린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고 대적하기 위한 사단의 작업인 것처럼 종교 개혁자들이 선언한 5개 조항들이 전부 거짓 은혜, 값싼 은혜, 다른 은혜로 사람들을 교회 안에 가두어 두려는 세상 신에 맞서서 영적 전투를 벌인 자들이 바로 종교 개혁자들입니다.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그 전투예요. 그만큼 ‘오직 은혜’는 성경의 핵심 사상입니다.
그러나 ‘오직 은혜’를 새삼 주장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몸, 선악과를 입에 물고 태어난 우리 육신이, 이 아담의 자존심이 오직 은혜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은혜를 은혜로 받을 수 없는 몸이 우리의 몸이고 우리의 한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거지가 지하도에 엎드려 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동전이라도 던지면 달그랑 소리가 나잖아요 한 번은 누가 뭘 집어넣었는데도 소리가 안 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상해서 봤더니 누가 백만 원짜리 수표를 한 장 던지고 갔어요. 그래서 거지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고민하다가 집에 가서 밤새 고민한 결론이 아침에 자기가 그릇을 깨끗이 닦고 나가서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한계예요.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한다니까요. 꼭 무언가 은혜에 인간의 것을 개입시켜야 해요. 이게 값싼 은혜, 다른 은혜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게 뭐예요? 없음인 우리를 존재케 하는 생명을 주신 거죠. 고린도전서에 나오잖아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무언가 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데, 그 반대가 그 은혜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의 노력과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다른 복음이고 은혜를 헛되이 받는 겁니다. 돈을 수천억, 수조를 줘도 우리 생명은 못 얻잖아요. 그래서 생명은, 진짜 귀한 것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단 말이에요. 공기 햇빛 물 ...은혜는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은혜는 갚을 수 없어야 은혜로 남아요.
그런데 우리 인간의 죄성은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해요. 선악과를 따먹은 모든 아담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는 우리의 처음 자리를 박차고 나온 죄인들이에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했는데 먹어버렸잖아요. 우리가 있어야 할 그 처음 자리,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는 그 처음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아담이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원초적인 반감을 가진 게 우리 죄인이란 말입니다. 죄인이라니까 괜히 죄인이 아니에요. 그냥 거짓말 좀 하고 나쁜 짓 좀 한다고 죄인이 아니에요. 태어나면서부터 구원 불가능한 죄의 몸이에요. 죄를 짓겠다고 짓는 게 아니라 죄인에게선 죄만 나옵니다. 다윗이 그랬잖아요. 내가 모친의 태중에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나님을 극도로 싫어하는 죄인, 하나님의 본성상 은혜를 싫어하는 죄인이에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존재하는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은데..
오늘날 한번 보세요. 하나님 대신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뭡니까? 돈, 과학, 정치 경제.. 한번 보세요. 지금 AI가 못하는 게 없잖아요. 로봇이 전부 다 합니다. 생명과학은 인간을 복제합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과학이 차지하고 있다니까요. 그리고 모든 세상을 경제라는 그물망으로 촘촘하게 가두어놨어요.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너희가 하나님과 제물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고. 제물이 맘몬 신이거든요. 이미 오늘날 사회는 맘몬 신의 그물 안에 다 가둬져 있어요. 돈을 섬기지 않으면 죽는단 말이에요. 아무도 돈을 이길 사람은 없어요 자크엘룰이 그랬지요 돈을 이기는 방법은 한가지 돈을 그냥 내다 버리는 것이라고
그런 가운데서 돈을 섬기지 않는 자들, 하나님 외에는, 그 생명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자들을 하나님이 아직도 이 땅에 남겨두셨다니까요.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오늘 아침에도 해가 떴기 때문이죠. 마지막 성도 한 사람의 목이 베어져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완성되면 그때는 해도 달도 이 세상도 다 불살라지고 없어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그 마지막을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돈 좋아하죠. 돈이 없으면 못 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돈이 생명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우리 성도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들이 있어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을 체험케 하시는 사건입니다. 쉽게 말해 힘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털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은혜의 주님이 보이니까요
오늘날 로마 교회에서 개혁해 나왔다는 개신교조차 은혜는 입에 달고 살면서 ‘오직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요. 다들 은혜를 헛되이 받고 있단 말입니다. 한번 보세요. 부흥회 강사들을 보면 아주 대놓고 떠들죠. 하나님의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도둑놈들이라고.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영생이라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돈으로 갚을 수 있습니까? 너희는 좋은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집을 봐라 비가 샌다고 하면서 건축헌금 강요 하는 그 따위 짓이 은혜를 헛되게 하는 것이란 걸 그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갚을 수 없어야 은혜로 남아요. 그래서 오직 은혜란 말입니다. 은혜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신 은혜이기에 오직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는 갚을 수 없는 은혜이기에 그 은혜만 영원토록 찬송하게 되는 게 우리를 지으신 목적으로서 은혜의 영광이에요. (엡1:6,12)
그런데 그 은혜를 무엇으로 갚겠다고 그렇게 교회에 돈 바치라고 패악질을 하느냐고요. 그렇게 교회가 은혜를 갚겠다고 하는 짓이 기껏 부동산 사들이고 동네 하나 다 사들이고 비자금 만들고 수천억짜리 예배당 짓고 해외 나가서 다른 예수, 다른 복음으로 배나 지옥 자식 만드는 그것밖에 하는 게 없어요.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그들 세상 교회들을 향해서 전해야 하는 겁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큰 성 길가에 선 두 증인이 바로 그들이란 말이에요. 왜 두 증인인지 아세요? 예수님과 함께하기 때문에 두 증인이에요. 그 두 증인이 왜 길가에 섰습니까? 큰 성 바벨론에서 쫓겨났다니까요. 그러니까 성도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쫓겨난 것처럼 그 큰 성으로부터 쫓겨난 자들이에요. 그러니까 옛날에 같이 다니던 교회 사람들 설득할 생각하지 마세요. 설득 안 됩니다. 그들한테 십자가 얘기 꺼내보세요 좋아하는지. 같이 어울릴 수 없다니까요. 어떻게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할 수 있습니까? 안 돼요.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할 수는 있는데 복음은 같이 나눌 수가 없어요. 바벨론이라는 세상 교회에서 쫓겨나서 주님과 함께 큰 성 길가에 선 성도가 그 큰 성을 향해서 외치는 거예요.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 그가 받을 재앙을 받지 말라, 하나님의 원수 된 교회를 위해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는 게 성도가 할 일이에요. 그리고 그 소리는 사라지는 소리예요. 반응 없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사라지는 게 소리의 미학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자들의 모임이 바로 오늘날 세상 교회들, 대한 예수교입니다.
다음으로 Sola Fide, ‘오직 믿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뭔지를 모르는 자들이 믿음 대신 내어놓는 게 있어서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믿음’을 이야기한 겁니다. 성경에서 믿음이 등장할 때는 너희의 행위는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믿음이에요. 로마서에 나오잖아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 우리에게는 믿음 자체가 없기에 하나님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하신다. 너희의 어떤 행위, 어떤 열심, 어떤 종교 행위, 어떤 율법 행위를 다 내어놓아도 너희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게 십자가 복음이예요.
그런데 인간들이 규정한 선한 행위 있잖아요. 선행 체계. 그 어떤 윤리 도덕적 선한 행위도 하나님은 인정하시지 않겠다는 말이 오직 믿음이에요. 다시 말하면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와요.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악하다니까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의 선한 행위 안에는 ‘자기 의’가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로마서에서 바울이 질책했던 ‘자기 의’예요.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율법 행위로 흠이 없었던 바울이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고 나자 그 착한 행위, 의로운 일들이 다 배설물이더라고 했어요. 그 안에 결국은 나를 위한, 내 구원을 위한 자기 의, 탐심만 가득 차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와요. 로마서 3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하나님을 찾는 자도 깨닫는 자도 없더라.. 그런데도 이 인본에 찌든 죄인들은 인간의 행위 가능성, 선행 가능성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야 할 신학교에서조차 구약의 율법 중에서 제사법이나 정결 규례 같은 것은 십자가 다 이루심으로 폐기되었지만 아직도 지켜야 할 법이 있는데 그게 도덕법 윤리법이라는 거예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도덕 윤리는 세대마다 다르고 지역마다 달라요. 절대적인 게 아니에요. 옛날 고려시대 때는 부모 나이가 칠십이면 고려장을 시킵니다. 산에다가 버리는 게 당시 윤리요 도덕이에요. 문화였다니까요. 아프리카에 가면 지금도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자기 마누라를 내줘요. 그게 그 사람들의 윤리고 도덕이란 말이에요. 그런 세상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너희들 율법 하나도 지키지 못한다는 게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율법은 그런 인간들의 죄, 불가능을 깨닫게 하기 위해 주신 율법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율법의 도덕 윤리 규정은 살아있어서 교인들이 율법의 일정 부분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는 게 오늘날 신학교에요. 이런 게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 구원이 됩니다. 착하게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이면 인간답게 착하게 사는 게 맞아요 그러나 그게 성경이 말하는 의가 아니고 선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 더하기 율법행위로 구원이 완성된다는 행위 구원론에서 나온 게 상급론이에요. 얼마나 열심을 내고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하늘 상급이 다르다는 겁니다. 기가 막히죠. 그런데 이런 차등 상급론이 이제는 거의 보편적 교리가 되었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구원은 받는데 상급은 다르다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와 죽을 고생을 하면서 복음을 전한 바울이 천국에서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느냐는 거예요.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이죠? 이런 개소리를 하는 게 오늘날 대부분 세상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된 교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은 자들. 은혜가 어떤 불가능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은혜인지를 모르니까, 그런 은혜를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 이따위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들에게 내어주신 그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상급인데 무슨 다른 상급을 받겠다고 그 짓들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들 말대로 천국에서도 누구는 백 평짜리 맨션에 살고 누구는 합숙소에 살면 거기가 천국입니까? 만약 그런 천국이라면 거기서 또 계급투쟁 일어나고 공산주의 생겨요. 그런 천국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오늘날 종교인들은 믿음이 뭔지 모르면서 예수를 믿어보겠다고 교회로 모인 거예요. 그들에겐 오직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내어버려 두심이에요. 믿음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로서만 믿음이에요. 그분께 찾아짐의 관계란 말이에요. 그분에게 찾아지고 난 뒤에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보인단 말이에요. 믿음은 그렇게 그분과 관계를 맺는 거예요.
그런데 그 관계를 우리가 만들 수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의 선물로서의 믿음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 2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은혜와 믿음이 같은 뜻이에요.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와 믿음은 하나예요. 그런데 예수 믿었다고 상을 받는다? 그런 소리를 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은 적이 없는 자들이에요. 진리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는 자들이에요. 성경이 말하는 상은 딱 하나예요.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그게 상이에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그랬잖아요. 내가 너의 상급이라고. 그런데도 무슨 상을 또 받겠다는 겁니까? 하나님을 받으면 다 받은 건데 자꾸 다른 것을 찾는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란 뜻이에요. 믿음 없음, 하나님과 화해한 적이 없음.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교회를 보고 오직 믿음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자 이렇게 은혜 아닌 것, 믿음 아닌 것, 진리 아닌 것을 통해서 은혜가 무엇이고 믿음이 무엇이며 진리이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자기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 모든 역사를 지금도 진행하고 계십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잖아요. 세상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그리고 너희는 누구의 것이다? 그리스도의 것이다.
자 그렇게 성도에게 주어진 것들, 그리고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게 하는 사건들이에요. 우리에게 왜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알게 하는 사건들이란 말이에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는 말씀이 지금 성취되고 있음을 우리에게 삶의 현실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실 때도 그랬어요. 사람들에게 항상 비유로 말씀하시고, 그 후 제자들만 따로 모아서 그 비유를 풀어 설명해 주신 거예요. ‘너희들은 저들과 같지 아니하니’
그래서 오늘날도 바울이 전한 이 말씀들을 진리로 알아듣는 건 하나님의 사람들만 알아들어요.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이 말씀을 전한 게 아니라 오고 오는 세대의 피로 사신 교회에 전한 말씀이인 것입니다.
그렇게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인 것을 사도가 우리에게 주신 말씀들을 통해서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의 복음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왜 십자가인가? 왜 십자가 은혜인가? 그 은혜의 필연성에 대해서 우리는 날마다 확인당하는 삶을 오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주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또 우리가 그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성령이 저희와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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