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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에 선포한 말씀
신 1:1-8
1 이는 모세가 요단 저쪽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
2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3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 다 알렸으니
4 그 때는 모세가 헤스본에 거주하는 아모리 왕 시혼을 쳐죽이고 에드레이에서 아스다롯에 거주하는 바산 왕 옥을 쳐죽인 후라
5 모세가 요단 저쪽 모압 땅에서 이 율법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더라 일렀으되
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7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8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신 1:1-8 / [모세가 훈계한 때와 장소] 이 책은 모세가 요단강 동쪽의 광야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훈계한 것을 기록한 말씀이다. 이곳은 모압 땅의 느보산 기슭에 있는 숩 마을의 맞은편 광야로서,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의 중간 지점에 있다. 2)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바네아까지 열하룻 길이다. 3)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해 11월 1일에 모세가 여호와께서 주신 명령을 그들에게 모두 전하였다. 4) 그 이전에 모세는 요단강 동쪽의 두 왕, 곧 헤스본 도성에서 통치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과 아스다롯과 에드레이에서 통치하던 비옥한 바산 지역의 왕 옥을 이미 쳐죽였다. 5) 마침내 모세가 요단강 동쪽의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설명하며 권고하기 시작하였다. 6) [호렙산을 출발하라는 명령] 우리가 호렙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산에 머무른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7) 이제는 여기서 떠나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거라. 가나안 땅의 원주민인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들어가고, 그 이웃 족속들이 사는 초원과 산지와 저지대와 남쪽의 메마른 지대와 해변 등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사는 땅과 이어서 레바논과 북쪽으로 멀리 큰 강 유브라데까지 들어가서 살아라. 8) 이 모든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리니 너희가 이제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여라! 그 땅은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물로 주겠다.고 서약한 곳이다.'
신명기는 가나안을 눈앞에 둔 모세가 요단 동편의 모압 평지에서 선포한 세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2) 본 단락의 “요단 저쪽”은 요단 강 동쪽의 모압 평지입니다. 민수기 1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불신앙의 대가로 40년을 광야에서 유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나안이 눈앞에 보이는 모압 평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민 22:1). 여기서 이스라엘 무리는 가데스 바네아 불신앙 사건시 20세 이하였던 출애굽 2세대입니다(민 14:29-35). 모세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민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규범인 율법을 다시 가르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 지난 40년의 여정과 율법을 정리하고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오아시스 지역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오래 머물기에 적합했고 가나안과도 인접한 곳이었습니다. 호렙 산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거리는 264km로서 11일 만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신과 불순종의 대가는 컸습니다.
마흔째 해 열한째 달 그 달 첫째 날에(3-4) 40년 11월 1일은 모세의 설교 시점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생활이 종료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던 말씀을 듣지 못했던 새로운 세대에게 가나안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설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요단 동편 왕들의 패망을 보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신실성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은 이스라엘의 진군을 방해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더 강한 바산 왕 옥은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다가 전멸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을 체험한 출애굽 2세대들에 율법의 형식으로 이스라엘과 이후 이스라엘의 삶에 대해서 권위 있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방향을 돌려 행진(5-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호렙 산으로 올 때는 동남쪽으로 진행하여 왔지만, 호렙 산을 떠날 때는 북동쪽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서 차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모리 족속은 함의 후손으로 가나안 족속 중 가장 강력하였기 까닭에 이들을 정복하는 것은 가나안 전체를 정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적용: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말씀을 들었다고 믿음이 아닙니다. 순종이 참 믿음입니다. 당신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처음 구원을 받고 그 기쁨에 “제가 하겠습니다”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와주고 구원 받기 전과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수가 오래되면 처음 “제가 하겠습니다”의 마음은 사라지고 권위와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자랑은 연수와 힘이 아닌 예수님을 닮아가는 모습입니다.
< 설 교 >
열 하루만에 들어가는 길
신 1:1-4 / 박기완 목사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에는 두 가지의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①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할렐루야!"(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는 습관이 붙어 있어야 하고, ②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는 말이 입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즘 얼굴이 많이 좋아 졌습니다!"하고 인사하면 "보약을 먹어서 그래요!"하고 대답을 한다면, 사람들은 얼굴이 좋아 질 때마다 생각하기를 "저 사람은 또 무슨 좋은 보약을 먹나...." 하면서 얼굴만 보면 보약이 생각이 날 것입니다.
설령, 보약을 먹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린다면, 사람들은 여러분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인가 봐!"하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박정주 집사님! 요즘 얼굴이 아주 훤해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제 병원에서 퇴원하신 임영숙 성도님! 얼굴이 무지 무지 좋아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신앙의 거인 사도 바울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습니다.
고전15:10절에 보면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의 고백처럼 바울은 다른 사도들 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고후11:23-27절에 보면 바울의 고난과 역경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돌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할렐루야!"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고백하는 두 가지의 습관이 언제나 우리들의 입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창41장에는 애굽의 바로 왕이 두 가지 꿈을 꾼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이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꾸어서 깜짝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잠을 잤는데, 또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기이한 꿈을 두 가지나 꾸었지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도무지 그 뜻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꿈을 잘 해석하는 사람들이며, 술객들을 불러다가 물어보아도 아무도 그 꿈을 해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그때 술맡은 관원이 2년 전에 감옥에 있을 때, 자기의 꿈을 잘 해석 해준 요셉이 생각나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바로는 요셉을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왕 앞에 불려 갑니다.
왕이 요셉에게 말하기를, "내가 꿈을 꾸었는데, 그것을 능히 해석하는 사람이 없노라 그런데 듣자하니 너는 꿈을 들으면 그 꿈을 잘 푼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자신의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창41:16절에 보면,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제가 꿈을 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평안한 대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꿈을 해석하고, 요셉이 말은 하지만... 사람들은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창41:38절에는 이런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말합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는 좋은 일을 만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전도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서는 축복과 관계된 말씀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지... 온통 하나님의 복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참 좋은 것입니다. 주님의 복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품은 복이기 때문에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는 복입니다.
세상의 복, 땅의 복은 현재는 좋다가도 조금만 지나면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변하고, 여건에 따라서 변하고, 시절에 따라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백성들이요, 복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1. 열 하루냐? 사십년이냐?
본문 신1:2절에 보면,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제 사십 년 십일월 그 달 초 일일에....."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데 열 하루면 들어가는 길을 자그마치 40년 10개월이 걸렸다는 말씀입니다. 가나안은 영적으로 천국을 상징하는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하고 원망하므로... 열 하루면 가는 길을 40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선택한 이 신명기서는 요단강을 통하여 건너는 지경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증거한 말씀입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가고 싶어도 못 갔습니다(신3:23-26). 그래서 그 땅에 들어가는 백성들을 향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명을 쏟는 심정으로 말씀을 전한 것이 신명기 입니다.
신1:21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증거했습니다.
즉, 모세는 백성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올라가서 그 땅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모세의 말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어느 길로 가면 좋을지 정탐을 하자고 제안을 합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셨는데, "이것이 진품인지 아니면 가짜인지 면밀히 살펴보고 받을만한 것인가 알아보자!" 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이요, 불순종의 소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 하룻길이면 갈 수 있는 가나안을 사십 년이 걸리게 한 원인이었습니다(신1:22).
이는 영적으로 해석하면 무슨 뜻입니까?....
오늘날, 주의 종을 통해 말씀한 것을 "아멘"으로 순종하면 열 하루길이면 가지만... 그러나 불순종하고 원망하면 40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모세는 백성들이 하도 졸라대므로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을 뽑아서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들을 조직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가 어떤 말씀을 전하든지 "당신의 말씀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해야 할텐데, 모세의 말을 안 들었기에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서 12명의 정탐꾼을 뽑은 것입니다. 그리고는 가나안 땅에 가서 40일 동안 정탐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40일..... 참, 자세히도 살펴봤습니다.
열 두명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하고 나니까, 두 파로 나뉘어져서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 둘로 갈라졌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가나안에 살고있는 아낙자손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크고 장대한지 스스로 생각하기를 "우리는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 같은 존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포도 한 송이가 얼마나 큰지 장정 두 사람이 막대기로 어깨에 메고 들어야 할 정도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백성들에게 부정적으로 전하니... 모든 백성들이 소리를 높여 밤새도록 울부짖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민14:1F).
"차라리 우리가 애굽에서 그냥 죽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여 저들에게 죽게 하는고.... 우리의 처자들이 사로잡혀 가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면서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회는 언제나 믿음의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부정적인 열 명의 정탐꾼의 말만 듣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두 명의 정탐꾼,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문제'를 '밥'으로 봅니다.
민14:9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증거합니까?.... 그들은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고 고백했습니다.
부정적인 사람들은 말하기를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메뚜기'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입니다. ① '약하다, 작다'라는 의미이고 ② '밥'이라는 뜻입니다.
문제에게 밥이 된 사람은 ①울고 ②원망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탓합니다. 그리고 ③그때가 좋았을 것을... 하면서(민14:2) 후회합니다. ④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옛 생활로 다시 돌아 갈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의 밥이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밥이 되었습니다.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은 어떤 사람이 들어갔습니까?... 가나안 땅은 '문제가 밥'이라고 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밥이 왔구나!" 하고 먹어 버려야 합니다.
밥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요... 죽 같은 것은 후루루 마시면 될테고, 보통 밥은 보통으로 먹으면 됩니다. 또, 밥이 좀 단단하면 오래 씹어서 먹듯이.... 좀더 어려운 문제가 오면 기도로, 찬송으로 오래 오래 씹어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축복의 가나안은 문제를 밥으로 알고 그 밥을 잘 먹어야 들어갑니다. 할렐루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똑같은 문제를 만났고, 똑같은 것을 보았는데... 열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눈으로 문제의 밥이 되고, 두명의 정탐꾼은 긍정적인 눈으로 문제를 밥으로 보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긍정적인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를 하나님과의 문제로 본 것이고, 부정적인 열 명은 문제를 바라볼 때 사람들과의 문제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의 장대한 키, 최신예 무기, 엄청나게 큰 열매들을 보니까... 즉, 사람들과의 문제로 보니까... 겁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문제로 보니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하 20:15절에 보면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니 두려워 말라! 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출14:13절 이하에도 보면,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하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문제보다 크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마귀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환경보다 크십니다. 하나님은 환란이나 어려움보다 크시고, 이 세상보다 크십니다.
그러므로, 요10:29절에서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신1:25-32절을 보면, 모세가 백성들을 향하여 가나안으로 올라가자고 했을 때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마치 아비가 아들을 안음같이 안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신1:25-32).
2. 불신앙의 단계
불신앙적인 열 명의 보고를 듣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정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합니다. 맞선 볼때도 그 사람의 첫 인상이 중요하지요....
첫 인상이 중요하고, 처음 느낀 선입견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의 느낌이나 감정이 오래도록 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부정적인 보고를 들으니까, 그것이 나의 것이 되고, 그것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성격이 되고, 그것이 삶의 스타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의 메트로폴리탄 다이어리(Metropolitan Diary)에 이런 글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어떤 아내가 출근하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보 우리 집에 우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나가시면 우산 좀 사오세요! 당신 것, 내 것, 큰아이 것, 작은 아이 것..., 여러 개 사와야 하겠어요!" 하고 말합니다. 이 남편은 전철를 타고 출근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을 합니다. 오늘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려보고, 아내가 부탁한 우산 사는 일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짧은 시간 안에 볼일을 다 보고, 우산도 살 것인가?"하고 골똘히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벌써 내릴 때가 됐습니다. 그래서 전철 문밖으로 나가는데,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던 우산을 집어들고 내리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우산 임자에게 들켜서 톡톡히 사과를 하였습니다. 아, 이거 아침부터 창피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이 남편은 퇴근 후에.... 볼일을 다 마치고, 아내가 부탁한대로 우산을 여러 개 사서 한아름 안고 전철을 탔습니다. 운 좋게도 빈자리가 있어서 얼른 앉았습니다. 그런데 앞을 보니까, 공교롭게도 아침에 만났던 그 우산 주인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오늘 수지가 단단히 좋은 것 보니 당신 솜씨가 여간 아니시구먼!" 하더라는 것입니다. 한 번 도둑놈으로 찍히고 나니까, 우산을 내 돈주고 다 샀는데도, 솜씨 좋은 도둑으로 몰린 것입니다.
이처럼 첫 인상, 그 사람에게 박혀있는 기억이란 참 중요하면서도 무서운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좋은 사람으로 기억하면 다행인데, 만약 도둑으로 기억하고 있다면 이거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정직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죄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인정하며 자랑하셨습니다(욥1:8).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는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고 했습니다(행10:4).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되고, 기억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체로 불신앙은 세가지의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행하셨던 하나님의 그 크신 능력과 베푸신 은혜들을 잊었습니다.
바로왕과 그 백성들에게 내렸던 열가지 재앙이며, 홍해를 건널 때 바다를 갈라 길을 열으시며 행하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신앙의 사람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은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입니다.
찬송가에도 보면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와 복을 자꾸만 세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하고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들을 잊었다면... 불신앙의 첫번째 단계에 접어 든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광야를 지나면서 먹을 물을 구해도 없고.... 어떻게 구하긴 구했지만 먹어보니 '쓴 물'이었습니다.
바로, 은혜를 잊어버리고 원망하는 사람의 삶에는 마라의 쓴 물밖에 없는 것입니다(출15:23).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신 은혜에 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불신앙의 두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려운 상황이나 불리한 여건만 보입니다. 문제만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왕하6:15절 이하에 보면, 엘리사의 사환은 문제만 보였습니다. 아람나라의 군사들이 성을 포위한 모습들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보았고, 천군과 천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불신앙의 세 번째 단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나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이나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신앙이 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가데스바네아에서 "뒤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열 하루면 가는 길을 자그마치 40년이 넘게 걸린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신1:40절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너희는 회정하여... 뒤로 돌아 홍해 길로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다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제서야 가나안으로 올라가겠다고 했습니다. 또다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모습입니다. 불순종의 사람들은 이처럼 계속해서 말씀을 거스립니다.
불신앙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뿐만아니라 지옥까지 가서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며 "아니라!"고 했습니다.
눅16:30절에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가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하면서 아니라고 고집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쉽게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고생 고생하다가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주시고 감동 주실 때, 즉시 믿고 순종하며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열 하룻길과 사십 년의 차이입니다. 엄청난 차이인 것입니다.
순종할 때는 열 하루면 가나안을 가지만, 불순종하면 사십 년입니다. 그것도 믿음에 합격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끝까지 불순종하고 원망하고 자기 고집을 피운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는.. 말씀을 비추어 보면서.... 그 동안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와 복을 잊어버린 일들, 불순종했던 일들, 원망했던 일들, 머뭇거리고 나태하고 뒤로 미뤘던 일들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가나안을 열 하루에 들어갈 것입니까?, 아니면 사십 년만에 들어갈 것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순종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열 하루만에 들어가는 순종의 반열에 서서.... 축복의 땅 가나안... 저 천성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 다 가는.... 복된 자녀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이 산지에 머문지 오래나
신 1:1-8 / 피영민 목사
서 론
신명기(Deuteronomy)는 문자 그대로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모세가 ‘새로운 율법을 두 번째로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을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설명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의 근본적인 내용은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더라’는 말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십계명에 대한 교육입니다. 십계명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이 바로 신명기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모두 잘 기억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돌비에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 마음 심비에 새겨야 할 하나님의 법이 바로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기에 기록된 십계명과 신명기에 기록된 십계명은 두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네 번째 계명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네 번째 계명에 대해 출애굽기 20장 11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제 7일에 쉬셨기 때문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 창조가 동기가 되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출애굽기는 창조동기를 강조하는 반면 신명기에는 조금 다르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즉,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이 동기가 되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창조동기가 구원동기로 바뀌어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열 번째 계명에서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보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그리고 이어서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5장 21절에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그리고 네 이웃의 집도 탐내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신명기에 서는 재산보다도 아내를 더 보호하는 방향으로 내용이 바뀐 것입니다. 어쩌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남의 재산을 도둑질하기 보다는 남의 아내를 탐하는 일이 더 많았다고 판단했는지 모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언약이기 때문에 ‘시내산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신명기에서는 모세가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치고 가나안에 입성하기 전에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새롭게 해설하고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모압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니라 장소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과 한 번만 언약을 체결하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언약을 보존하고 재독하며, 언약에 대한 개념이 약화되면 그 언약을 새롭게 갱신하십니다. 보존(保存)과 재독(再讀)과 갱신(更新)이 언약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120세가 되어 죽기 직전에 행한 세 가지 설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1장부터 4장까지 첫 번째 설교는 광야 40년 동안의 죄악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5장부터 28장까지 두 번째 설교는 시내산에서 받은 두 돌비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즉 모세는 십계명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9장부터 30장까지는 세 번째 설교로서 하나님은 우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을 두셨는데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을 택하여 가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1장부터 34장까지는 모세의 마지막 축복과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대력으로 1월 14일 유월절에 애굽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3개월만에 시내광야에 도착해서, 출애굽한지 2년 되던 해 2월 20일까지 시내광야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이라고도 부르고 호렙산이라고도 부르는 그 시내광야에서 대략 10개월 조금 더 되는 시간을 머물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아 율법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행군을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 1차 인구조사를 마쳤습니다. 그러자 이제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너희가 이 산에 머무른 지가 오래 되었으니 이제는 방향을 돌려 진행하라. 약속하신 땅에 앞에 있으니까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해라.”(1:6-8) 하나님께서는 10개월 만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화를 요구하셨습니다. “시내산에 더 이상 머물지 말라. 그 곳도 좋은 곳이지만 이제 너에게 더 큰 축복을 예비하였으니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가라. 변화해라.”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1. 교회의 적은 변화가 없는 것이다
미국 성결교단의 유명한 설교자인 A.W.토저(Aiden Wilson Tozer)는 Southside Gospel Tabernacle에서 30년 동안 목회하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킨 분입니다. 그 분의 설교가운데 ‘rut, rot, or revival?’이란 제목을 가진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의 내용은 ‘판에 박혀서 정체된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정체가 심해서 부패된 교회가 될 것인가? 아니면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인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토저목사님은 교회의 가장 큰 적은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은 성경도 부인하고, 예수님의 속죄도 부인합니다만 이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의 참된 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설령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배웠더라도 목회현장에서 그런 설교를 하는 목사가 어디 있겠으며, 그런 것을 믿는 성도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논지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교회의 적이 뭐냐고 물었을 때, “자유주의 신학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사실은 참된 적을 알지 못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내세워서 그 뒤에 숨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저 목사님이 말하는 교회의 참된 원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조직과 프로그램에 의해서 일상화에 빠지는 것입니다. 매주일 새로운 것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기대감도 없으며, 똑같은 일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 되는 것이 교회의 적입니다.
교회가 일상화에 빠지면 정체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는 일상화(routine)는 시간이 지나면 판에 박힌 상습, 관례(rut)가 되고, 이것이 더 지나면 부패(rot)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일상성을 타파하고 변화를 추구해야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삶에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일상성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합니다. 일상성을 타파하고 변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머리 스타일이나, 옷, 넥타이 같은 작은 부분이라도 변화를 주면 기분이 달라지는데 하물며 신앙은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신앙도 정체되면 좋지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늘 변화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4월 24일 월요일부터 본당을 리모델링합니다. 리모델링으로 교회가 변화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포항과 경주 등지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지방 교회라고 할지라도 예배당이 오래되면 우리 교회처럼 예배당을 그저 두지 않습니다. 다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변화를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욱 아름다운 방향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2. 변화가 요구되는 세 가지 이유
우리 인간 사회에는 반드시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변화가 요구됩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오늘 본문을 가지고 ‘나아가라(advance)’는 제목으로 설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변화는 세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치도 변하고, 대통령도 변하고, 국회의원도 변하고, 경제도 변하고, 문화도 변하고, 날씨도 변하고, 국가도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 이 세 가지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변합니다.
둘째로 사람도 계속해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유아기에서 소년기로,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청년기에서 장년기로, 장년기에서 노년기로, 노년기에서 내세로 변합니다. ‘나는 영원히 청년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꿈을 깨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꾸 늙어가며 변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어느 한 시기에 계속해서 머무를 수 없는것입니다.
세 번째로 변화하는 것은 많은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가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는 가구를 바꿔보고, 부부 사이에 분위기를 바꾸고 싶을 때는 머리에 염색을 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화장해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무엇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면 재미가 있습니다. 변화는 재미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세계 어디에 가도 자생력이 강한 이유를 저는 뚜렷한 사계절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아마 우리 한국처럼 춘하추동(春夏秋冬)이 명확하게 바뀌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도 드물 것입니다. 어떤 나라는 일 년 내내 덥거나 추운데 우리나라는 석 달 추우면 석 달은 봄을 맞고, 또 석 달 더우면 석 달은 시원하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적응력이 좋아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은 어디에 가서도 제 밥벌이는 합니다. 자생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국제결혼 한 여자들을 하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미국에 가보면 인식이 바뀝니다. 미국에 가서 국제결혼fmg 한 한국 여자들은 일 년 정도는 영어를 못하니까 쥐죽은 듯 지냅니다. 그러나 일 년만 지나면 남편을 확 휘어잡고 삽니다. 제가 미국에서 5년 동안 목회하는 중에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는 성도님 집에 심방을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여자분은 한국인이
었지만 남편은 나이 많은 미국 사람이었습니다. 심방을 갔을 때, 마침 남편 되시는 분이 햄버거 가게를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청소하는 남편에게 욕을 섞어서 말하는데도 남편이 꼼짝을 못하고 청소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믿는 분이 왜 그렇게 남편에게 욕을 하느냐고 했더니 그 부인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저 사람이 나하고 처음 결혼했을 때 내가 영어 못한다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한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제가 지금 이런 욕을 해도 저 사람은 꼼짝을 못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제가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고 저 사람이 가게 쓸고 닦아서 먹고 살기 때문에, 경제권을 제가 장악했기 때문에 저 사람은 내 덕에 살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 사람은 욕 한 두 개쯤 먹어도 상관없습니다.”
변화가 없다면 사람이나 사회에 진보가 없습니다. 바뀌어야 삶에 활력도 생기고 바뀌어야 성장이 있습니다. 국가 정치에서도 정당이 바뀌든, 사람이 바뀌든 자꾸 바뀌어야 뭔가 좋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변화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변화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바람직한 변화가 있는 반면에 바람직하지 않은 변화도 있습니다. 미국 속담에 보면 ‘프라이팬에서 뛰어나와 불 속으로 뛰어든다(Out of the frying pan into the fire)’라는 말이 있습니다. 변화를 했더니 더나빠졌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이 어렵다고 해서 좀 쉬운 산이 있는가 했더니 더 높은 태산이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변화를 해도 잘못된 동기로 변화하면 잘못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변덕이나 하나님께 대한 반항심, 혹은 세속적인 동기를 가지고 변화하는 것은 잘못된 변화이며 바람직한 변화가 아닙니다.
한 중년 부인이 갑작스럽게 심근경색을 일으켜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위기상황에 닥치니까 얼마나 기도가 간절하겠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고쳐주시옵소서. 아니면 이제 하나님 나라에 갈 때가 되었습니까?’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아니다. 너는 앞으로 40년을 더 살 것이다.” 그러자 이 부인이 신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응답대로 심근경색이 금방 회복되자, 심장치료를 다 마친 후에 퇴원도 미루고 성형외과에 찾아가서 앞으로 40년을 더 살 것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기 위해 얼굴을 전부 고쳤습니다. 얼굴 리모델링을 마치고 이제 퇴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퇴원하는 날 그만 병원 앞 길을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숨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황당한 이 부인은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항변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하나님. 제게 응답해 주시기를 앞으로 4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이쿠. 얘야. 네가 하도 바뀌는 바람에 내가 너를 몰라봤다”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기도 할 때 ‘40년 더 살 것이다’는 응답을 받으면 절대 얼굴 고치지 마시고 원본 그대로 놔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헷갈리시지 않도록 말입니다.
3. 바람직한 변화는 어떤 것인가?
그러면 어떤 변화가 바람직한 변화일까요? 두 가지 변화가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인준(認准)이 있는 변화가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을 떠난 이유는 단순히 그 곳에서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섭리의 인도가 있어야 합
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앞서 진행하고, 성막도 완성이 되었습니다. 율법도 모두 받았고, 행군을 위한 인구조사도 모두 마쳤으며 행군을 위한 진형도 갖추게 되었으므로 시내산이 은혜스러운 곳이기는 하지만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슨 변화를 추구하든지 먼저 기도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고, 환경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변화를 원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변화를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4. 떠날 곳과 향할 곳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변화하라고 말씀하실 때, 떠날 곳과 향할 곳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떠날 곳은 호렙산이요, 향할 곳은 가나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호렙산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서 그 곳을 차지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호렙산이 나쁘기 때문에 떠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호렙산은 목적지가 아니기 때문에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떠나라, 혹은 변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과거가 잘못됐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거를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과거도 물론 좋지만 그 곳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므로, 최종 목적지를 향해 가라는 것입니다.
떠나야 하는 호렙산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호렙산은 은혜 받은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고, 율법도 받았으며, 거대한 법을 갖춘 국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호렙산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다른 은혜를 주십니다. “모세여! 나는 호렙산에서 은혜를 받았으니 이곳을 절대 떠나지 않겠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의 고집을 향해 똥고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집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았더라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 떠나야합니다. 왜일까요? 새로운 은혜의 세계, 새로운 도전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받은 은혜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향해 목표를 세우고 도전하며 앞으로 전진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 내가 20년 전에 이런 은혜를 받았다, 30년 전에 이런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합니다. 물론 과거에 은혜를 받은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은혜를 잊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나쁜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도 중요하지만 지금 받고 있는 은혜가 더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나는 어떤 더 좋은 은혜를 받을 것인가 하는 기대감과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런 도전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호렙산은 훈련의 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해서 ‘광야에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 광야에서 어떻게 행군할 것인가? 광야에서 어떤 법을 따라야 될 것인가? 또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에 대한 모든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훈련만 받고 전쟁이 일어났을때 전쟁에 안 나가는 군인이 있다면 그런 군인은 쓸모없는 군인일 것입니다. 훈련받고 전쟁에 나가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여러 가지 영적 훈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도 훈련, 전도 훈련, 예배훈련 등 많은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훈련에서 그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행동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우리가 선교에 대해 배우고 말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펜윅선교학교에서 선교에 대해 많이 배웠다고 할지라도 배우고 말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행동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의 세계를 열어주십니다. 우리는 은혜 받은 산, 호렙산을 떠나야 합니다. 비록 좋은 산이요, 은혜의 산이지만 이제는 떠납시다. 왜입니까? 가나안 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한편 가야할 땅인 가나안 땅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입니다. 둘째로 아름다운 땅입니다. 모세는 “나는 이 땅에서 죽고 요단을 건너지 못하려니와 너희는 건너가서 그 아름다운 땅을 얻으리니”(신 4:22)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땅이라고 말씀하신 가나안땅을 돌아보는 성지순례를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대한민국도 아름다운 땅이지만, 성지도 매우 아름다운 땅인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셋째로 가나안 땅은 부요의 땅입니다. 신명기 6장 11절을 보면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신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나안 땅은 승리의 땅입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신 6:18-19)고 말씀하셨습니다.
결 론
이스라엘 백성들은 호렙산에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호렙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예비하시고 더 큰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호렙산에서 더 머물지 말고 이제는 변화하라, 이제는 떠나가라, 더 큰 은혜의 목표를 세우고 향하고 전진해 나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전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자꾸 변화해야 됩니다. 기독교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정체되고 있으면 썩고 부패합니다. 신명기 1장 21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변화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이 바뀐다고 두려워하지 마시고, 주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예비하신 줄로 믿고 협력하여 앞으로 전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의 장벽을 깨라
신 1:1-8 / 서정호 목사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늘 가게에서 매일 아침 제일 먼저 온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거저 준다고 했더니 매일 아침 열심을 다하여서 제일 먼저 나타나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어떤 때는 조금 늦으면 새 치기를 해서라도 제일 앞자리에 섭니다. 조금 더 늦으면 울며불며 읍소를 하면서도 반드시 제일 앞자리에 서서 자기의 원하는 것을 받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금고를 가져가기도 했고 출세의 상자를 가져가기도 했고 성공의 상자를 가져가기도 했고 쾌락의 상자도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어느 날 아침에 검은 테를 두른 상자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검은 테를 두른 상자를 가져간 뒤에는 다시는 그 가게에 나타나지 않자 상점의 점원이 가게의 주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개걸스런 소유자가 이제는 왜 오지 않습니까? 어제 가져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렇게 물어 보았더니 상점 주인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엇이나 가져가겠다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죽음의 상자를 주었더니 그것도 넙쭉 받아가더구나"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 붙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오늘 만 있지 내일이 없었던 사람이야”. 여기에서 우리들은 내일을 잊어버리고 오늘 눈에 보이는 것에게 집착하고 살아가고 있는 현실의 노예로 전락된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아온 어제도 존재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현재도 존재하는 것이고 그리고 살아야 할 내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사람은 내일을 향하여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 어제를 허락하여 주셨고 은혜로 오늘도 허락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내일도 은혜로 허락하여 주실 것 이라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인생이야말로 지나간 어제와 살고 있는 오늘과 돌아올 내일을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인간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시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40년 동안 계속 되었던 광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가나안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인데 첫 번째 말씀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서 하시는 말씀이고 본문에 말씀에서 시작되는 신명기는 40년을 결산하고 점검하면서 다가올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그곳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이 신명기의 중심 내용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어제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이 아니고, 어떤 측면에서 오늘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내일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일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오늘 말씀으로 들려주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 신명기입니다.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를 통해 배우되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를 포용하는 것은 중요하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떻게 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에 이미 끝난 일임을 잊지 말라. 그래서 나는 '옛날에 좋았는 데'라는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과거의 영웅이었다는 것으로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갉아 먹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은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면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 옛날이 더 좋았노라고 하면서 퍼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좀 더 나은 현실을 창조할 시간이 없다.”-조지 포먼이 들려주는 인생교훈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현재를 살고 있지만 과거의 기억에 묶여, 혹은 미래에 닥쳐올 일들에 대한 두려움에 발을 담근 채로 현재 삶에서는 온전히 서 있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오늘을 산다면 어떨까요? 아마 우리는 현재 앞에 놓여진 가장 중요한 일들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마지막인 것처럼 주님 앞에 온전히 서길 원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를 어느 곳에 둘 수 있나?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고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으며 앞으로 어디를 향해 가야 할 것인가를 살펴볼 때에 우리는 과거의 중요성과 그것이 현재에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까지 어디를 통과했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생각해 볼 때 무엇이 그 힘과 생각을 움직여 왔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참 자아의 능력으로부터 나온 삶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존재로부터 나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조종하려고 하는 이러한 ‘또 하나의 다른 존재’를 일컬어 ‘과거에 속한 내적 어린아이’ 라고 부릅니다. 이 내적 어린아이는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부담이나 어려움들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자신의 심리적 세계의 일부분을 반영합니다. 어떻게 오늘날의 내가 형성되었나? 내 존재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한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숨은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 되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고아처럼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해 매일매일 감사드리면서, 오늘 그분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인지를 항상 물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행을 할 때 가져가야 할 짐을 잘 선택해서 챙기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짐 보따리를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짐 가운데서 꼭 필요치 않은 것들을 선별해야 하는데 아무리 세심하게 골라내어도 짐이 여전히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여행에 거추장스러운 짐을 너무 많이 가져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도 거추장스러운 짐 보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출생에서 시작하여 유년기와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되기까지 짐 보따리를 주워 모으게 됩니다. 이 보따리들은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받은 영향과 압력인데 우리의 성년기 삶 속에 중대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우리는 유년기의 구습에서 벗어나 성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자기 마음에 있는 장벽
자기 마음에 있는 장벽은 누구도 깨뜨리지 못합니다. 어떤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적은 마음에 있는 셈입니다. 마음속에서 패한 사람은 현실에서도 여지없이 패합니다. 마음으로 믿지 않으면 꿈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충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평을 여는 일은 헛된 꿈이 되어 버립니다. 장벽은 바로 마음에 있습니다. 성경은 이 장벽을 ‘견고한 진’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패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그릇된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희망과 믿음, 승리 같은 긍정적인 것들을 마음에 품는 일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자신감을 꺾으려 할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하랴? 마음속에서 과거의 장벽을 뚫고 믿음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장벽을 부수는 순간, 우리 삶이 변하고 나아가 우리 자손의 삶이 밝아집니다. 과거의 장벽을 깨지 못한 결과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을 떠났던 히브리 백성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수백 년 동안 노예로 살던 애굽에서 풀려나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났는데 약속의 땅까지 11마일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가 히브리 백성에겐 40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왜 히브리 백성은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똑같은 산 주위를 맴돌면서 광야를 헤맬 수밖에 없었나요?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예비해 놓으셨는데 그 땅은 엄청난 풍요와 완벽한 자유가 있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너무 오랫동안 압제자의 그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평생 이용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고 살아온 히브리 백성은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새로운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연약하고 소극적인 마음가짐에 머물렀습니다. 항상 문제만 바라보고 불평하며, 자신들과 목표 사이에 있는 장애물에 질려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마침내 노예근성에서 빠져나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너희가 이 산에 거한지 오래니”(신1:6)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현재에 머문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나 고통, 실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떠날 때입니다. 더 큰 복을 믿고 나아갈 때입니다. 눈앞에 성장과 초자연적인 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굴레에서 맴돌며 매년 똑같은 일만 되풀이 한다면 그런 놀라운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비전을 얻기 위한 세 번째 열쇠는 ‘과거의 장벽을 부수는 것’ 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날이다
과거에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때문에 번번이 앞길이 가로막혔어도 상관없습니다. 과거야 어쨌든 오늘은 새로운 날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로운 일을 행하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 계획을 세워놓고 계시니 과거의 잣대로 미래를 판단하지 마십시오. 어렸을 적 누군가에게 학대받았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적 있습니까? 누군가에게 크게 당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경우든 과거의 상처에 연연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미래가 펼쳐지는 데 큰 걸림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고통과 상처, 온갖 학대와 슬픔을 빠짐없이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면 두 배나 큰 기쁨과 평화와 행복으로 갚아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좋은 일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나침반을 올바른 방향에 맞추십시오. 패배자의 마음을 갖고 승리자의 삶을 기대하는 어불성설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으면서 왜 인생이 풀리지 않느냐고 의아해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똑바로 사는데도 계속해서 나쁜 일만 생길 때, 하나님은 모두 알고 계십니다. 누군가 진실로 대하는 우리를 속이고 우리의 것을 빼앗아갈 때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용당할 때도, 우리가 왼편 뺨을 대면서 모욕을 참아 넘길 때도, 하나님은 곁에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상대를 용서하고 관계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모든 현장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눈을 피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록 장치는 쉼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악을 복으로 바꿔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겠는가?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인정하겠는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겠는가?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 된다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바꿔주십니다. 가난과 무력함만 생각하는 인생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들어갈 틈은 없습니다. 비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그마한 생각과 믿음, 기대를 품고서도 왜 자신에게는 큰 일이 일어나지 않는지 의아해 합니다. 패배의 원인이 자신의 생각에 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기대 수준을 너무 낮게 잡습니다.“결혼 생활이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해. 얼마나 더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바라겠어?”“건강이 그리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주머니가 두둑하지는 않지만 뭐, 그래도 그럭저럭 먹고 살 만해” 이것은 하나님이 뜻하시는 인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멋진 승리의 삶을 살기 바라시지 근근이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알아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믿음에 따라 역사하십니다. 먼저 믿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까지 기다려왔다면 헛수고를 한 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먼저 믿음의 크기를 더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마음에 충분한 그릇을 마련한 후에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복이 찾아옵니다. 항상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시리라 기대하십시오. 혹시 스스로는 부족한 게 없더라도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나만 잘 사는 게 아니라 남까지 도울 수 있으려면 더 큰 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과거의 그늘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면, 과거의 산에 거한 지 너무 오래 되었다면, 이제는 길을 떠날 때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그저 그런 삶에 만족하는 소극적인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앞장서서 우리 가문의 어두운 마음 자세를 말끔히 씻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패는 실패를 낳는다
학대당한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을 학대합니다. 부모가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결혼 생활에 실패할 확률이 꽤 높습니다. 실패는 실패를 낳습니다. 때로 두세 세대 이상 문제가 곪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그 문제는 알코올 중독일 수도 약물중독이나 가난, 우울증, 분노, 자존감 결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든 우리에겐 악의 뿌리를 뽑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선포하십시오. “하나님의 도움만 있으면 악의 흐름을 끊을 수 있어. 나는 하나님을 믿고 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거야. 새로운 지평을 열거라고.”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하나님의 크신 일을 기대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우리가 과거에 어떤 시련을 겪었는지는 상관없어. 우리는 빌려줄지언정 꾸는 가정이 되지 않겠어. 장애물이 아무리 커도 겁나지 않아.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강하시니까.’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라
과거를 통해 배우되 과거의 노예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를 포용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디서 출발하여 어떻게 해서 현재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과거는 말 그대로 과거에 이미 끝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옛날에 좋았는데'라는 말을 잘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내가 과거의 영웅이었다는 걸로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갉아 먹는 그런 사람이 되지도 않아야 합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향수병은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면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합니다. 옛날이 더 좋았노라고 하면서 퍼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좀 더 나은 현실을 창조할 시간이 없습니다.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과거비판의 시각이 아닌 미래창조의 시각으로 보자
우리가 육체적 수술을 병원에 가서 받는 것처럼 교회에 와서는 자신의 영적 수술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수술을 할 때 제일 먼저 하는 수술은 개안수술입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으로부터 눈 수술을 받았습니다. 모든 문제가 어디서 오느냐 하면 눈이 어두워져서 오는 것은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보면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보는 방식만 바르게 보고, 원칙적으로 보고, 은혜롭게 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고, 하늘의 지혜로 보면 문제는 없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는데 어찌하여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유의 색맹들. 눈이 있어도 자유를 찾지 못하는 이 자유의 색맹들이 오늘 현대인들이 걸린 질병입니다. 짧은 인생, 남만 비판하다가 짧은 인생, 남의 비판만 귀하게 여기고 물고 늘어지다가 더 짧게 만들고 말지요. 비판과 판단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싶은 어리석은 욕망으로부터라도 오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자유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비판의 시각이 아니라 창조의 시각으로 늘 우리에게 힘을 줍니다. 하나님은 과거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 창조적 시각으로 보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도 과거비판의 시각에서 미래창조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 내 안의 내적인 능력만 회복되면 인생은 그렇게 살기 힘든 것이 아니고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예배를 은혜롭게 드립니까? 그 은혜를 받으면 내적인 은혜의 힘이 나를 강권하시고 넉넉히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은 여러분이 과거의 산에 거한 지 오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새로운 비전을 품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때입니다. 과거의 장벽을 뛰어넘고 마음속의‘견고한 진’을 부수십시오. 과거에 살지 않기 위해서는 바꿀 수 없는 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의 행동에 대해 자신을 탓하는 것은 파괴적인 행위입니다. 고통스런 경험은 가능한 한 빨리 잊어야 하고 과거의 성공 사례에 정신을 집중하며, 과거의 실수로 부터 배워서 미래에는 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가문의 누가 무슨 일을 했든지 간에 여러분이 그것 때문에 포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가문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자손 대대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편안함에 안주하는 삶을 살기에 빠르게 변화하는 생활에 발맞춰 내 자신이 변화하기가 숨이 찹니다. 현대를 함께 살아가려면 발을 묶어둘 수도 없는 노릇, 미리미리 미래를 향해 열심히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
성경 : 신 1:5-8 / 이삼규 목사
사람이 진정으로 변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진정한 내적 변화가 없이는 외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근본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간디는 ‘우리를 파멸시키는 일곱 가지’를 “원칙 없는 정치, 근로 없는 축재,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지식, 도의 없는 기업, 인간성 없는 과학, 희생 없는 신앙”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일곱 가지 때문에 개인적으로 더 나아가 국가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고가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격이 바뀌고, 성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한 우리 자신도, 나라도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습관이란 무엇입니까?” 스승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스승은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올라가 두 종류의 풀과 두 종류의 나무를 보여주었습니다. 첫째는 막 돋아난 어린 풀이었습니다. 둘째는 조금 자랐으나 뿌리를 내린 풀이었습니다. 셋째는 키 작은 어린 나무였으며 넷째는 다 자라 키가 큰 나무였습니다. “첫째와 둘째 풀을 뽑아보아라.” 스승의 말에 제자들은 풀을 뽑았습니다. “쉽게 뽑히는데요.” “세 번째 작은 나무를 뽑아보아라.” 제자들은 그것도 쉽게 뽑았습니다. “네 번째 나무를 뽑아보아라.” 제자들이 힘을 다했으나 뽑히지 않았습니다. “안 뽑히는데요.” 제자들의 말에 스승이 말했습니다. “그것이 습관의 모습이다. 습관이란 처음에는 마음에 따라 조절할 수 있다. 그러나 뿌리를 깊이 내리고 크게 자라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쁜 습관은 아예 처음부터 뿌리 뽑고 좋은 습관은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도록 키워라.”
이스라엘의 가장 큰 원수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큰 적은 습관의 지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에 도착하였습니다. 광야 생활은 처음에는 매우 힘들고 고달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광야 방랑 생활에 곧 익숙해졌습니다. 한동안 안전한 산기슭에 머물다 보니 그것 또한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들이 힘들게 땀 흘리지 않아도 날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니 일단 먹을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잘 지어진 집이 아닌 텐트에서 살아야 하니 불편했겠지만 금방 그 생활에 익숙해졌고 그런 삶에 안주해 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신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신 1:7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 1:8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할지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신 목적은 그들이 호렙산 기슭에서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빈둥 지내며 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이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 민족의 경험은 우리의 거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땅에 언젠가 들어가게 될 거라는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떠돌다 평안한 장소에서 야영하는 데 만족을 느낀 것입니다. 틀에 박힌 일상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일상에 젖어 이스라엘은 같은 장소에 계속 머물렀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셨던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에돔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왔다면, 이스라엘은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투지를 잃지 않고 끝까지 싸워 에돔 사람들을 격퇴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계속 전진했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은 빈둥빈둥 하루를 지내며 그 상태가 계속되기만을 바랐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적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우리의 교회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자유주의입니까? 이단입니까? 아니면 이슬람입니까? 동성애입니까? 물론 이런 것들이 교회의 적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분명히 교회의 적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이고 가장 큰 적은 바로 틀에 박힌 교회 생활입니다. 우리가 모든 일들을 미리 예측하고 아무도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역사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틀에 박힌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빠지는 것입니다.
종교가 부패해 가는 과정
종교가 어떻게 부패하여 갈까요? 그 과정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기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영혼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이 잘못될 때 거치는 몇 가지 점진적인 단계가 있습니다.
1단계 : 기계적인 상태입니다.
기계적인 상태는 아무런 느낌도 없이 종교적인 활동을 반복하는 상태입니다. 얼마 전에 모 국회의원이 공항에서 빠져 나오면서 가방을 끌고 나오다 보좌관을 쳐다보지 않고 밀어 주는 일이 있어 지금까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노 룩(no look)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많이 해본 솜씨 같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계적이었습니다.
누군가 어느 순간 성경을 읽고 믿고 싶어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부르는 찬송들을 믿고 싶어 한다면, 복된 영적 개혁이 빠르게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인 상태에 사로잡혀서 아무런 느낌도 없이, 의미도 없이, 감탄도 없이, 어떠한 행복한 놀라움이나 기대감도 전혀 없이 그저 종교적 활동을 반복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는 하나님이 개입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의 철저하게 준비된 이벤트처럼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부디 우리의 계획에 복을 내려 주옵소서!”
우리는 아무런 느낌 없이, 아무런 의미 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우리는 아무 감격도 느끼지 않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지만, 그 사실에 대해 어떤 놀라움도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계적인 상태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단계 : 습관적인 상태입니다.
기계적인 상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습관적인 상태라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기계적인 상태의 노예가 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가 기계적인 상태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다면 습관적인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육체의 질병을 예로 들어봅시다. 자신이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의사가 그 사람의 아내를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남편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 남편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남편의 병은 아주 심각한 상태입니다. 그러니 마음 준비를 하십시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자기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자기 사업에 매달려 부지런히 일을 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은 골프를 치러 가기도 하고 심지어 힘든 사냥 여행을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병을 앓고 있지만 자신이 병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실제로 그의 죽음을 앞당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태를 모른다니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영적으로 말하자면, 습관적인 상태는 기계적인 상태에 속박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습관적인 상태의 가장 큰 위험은 이런 상태에 자신이 속박되었다는 사실을 감지하거나 느낄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있습니다. 하루는 업무를 마치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 꾸벅 꾸벅 졸다가 집 앞에 도착하였습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하자 아내가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이 나서 눈을 뜨고 보니까 아내가 아니라 주막의 주모였습니다. 매일 집에 퇴근하기 전에 주막에 들렸기 때문에 그날도 말은 당연히 주막으로 발길을 옮긴 것입니다. 김유신은 그 자리에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발견하고 사랑하는 애마의 목을 배고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장군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습관적인 상태가 되는 것은 매우 쉬운 것입니다.
3단계 : 부패한 상태입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부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부패가 절정에 달했을 때 루터가 95개조 항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이고 개혁을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가 부패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패한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하자면, 더 좋은 것을 예견하는 능력이나 성장을 향한 소망을 잃어버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기대하지 않는 심리 상태를 지나 영적인 경직이 시작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예배에 역사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 가운데서 회개하는 사람이 전혀 없으며,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고, 자신의 길을 바로 잡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 놓고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경건하게 보내는 사람도 전혀 없습니다. 아무도 그런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단지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고 싶어 할 뿐입니다.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아 도대체 어쩌자는 것입니까? 우리와 함께 기계적인 상태, 습관적인 상태의 노예가 되도록 더 많은 사람을 끌어 모으겠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가 부패하는 과정을 삼 단계로 생각해보았습니다. 기계적인 단계, 습관적인 단계, 부패의 단계입니다. 지금 현대교회는 기계적 단계, 습관적 단계를 넘어서 부패의 극치를 달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때 촛대를 옮길지 모르는 상황에 도달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패하였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부류인지 상관없이 사람들로 구성되면 곧 교회입니다. 더 나쁘거나 더 나은 교회, 더 지혜로운 교회, 더 거룩한 교회, 더 열정적인 교회, 더 경건한 교회 같은 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새롭게 하거나 변화시키는 일은 먼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다른 이들이 변화되어야 교회가 발전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이것은 그 교회가 내면적 부패에 접어들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세 가지 죄의 증거가 있습니다.
1)자기 의(義)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하셨을 때, 감사하게도 열두 제자들은 뛰어난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주여! 저 사람이니까?”라고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 모두 한결같이 “주여! 내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오순절은 도래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지목할 만큼 충분히 겸손했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만 의롭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손가락질하면서 ‘당신은 못되었어!’ 라고 하십니까? 그러나 두 개의 손가락이 상대방을 향한다면 세 개의 손가락은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2) 판단(判斷)입니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 7: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자기 의를 믿는 사람이 범하는 잘못이 바로 ‘판단’입니다. 자기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판단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잣대로 삼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는 교회를 파괴하는 죄입니다.
3) 자만(自滿)입니다.
자기 의는 자만으로 발전합니다. 자만은 아주 큰 죄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기계적인 상태와 습관적인 상태의 거의 모두를 다 포함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여! 저는 제 자신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아주 만족합니다. 저는 가까운 시일 내에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저는 하늘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 뵈옵고 다섯 고을 다스릴 것입니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합니다. 자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집과 가정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주제에 다섯 고을 다스릴 것을 기대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패의 증거가 없습니까? 자기 의, 판단, 자만에 빠져 있다면 바로 부패했다는 증거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방향을 돌려 산지로 나아가라!
신 1:6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호렙 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산에 거주한 지 오래니
신 1:7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우리는 더 이상 기계적인 상태, 습관적인 상태, 부패한 상태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방향을 돌려 산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산지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그 후손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합니다.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우리가 어떻게 감히 계속해서 기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앞으로 진행해 나가라고 요구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계적인 상태, 습관적인 상태, 부패한 상태에 머물러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면 가브리엘 천사라도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인조로 만든 다리와 건강한 다리의 차이점은 인조 다리는 침으로 찔러도 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 부패한 교회와 살아 있는 교회의 차이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쿡 찌르면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내적으로 부패에 빠진 교회는 아무리 찔러도, 이미 죽어 있기 때문에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나무에는 싱싱하고 푸른 나뭇잎이 달려 있습니다. 칼로 나무껍질 깊이 상처를 내보십시오. 수액이 흘러내립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늙어 죽은 나무는 늙은 파수 까마귀의 망대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입니다. 칼을 꺼내어 파고 싶은 만큼 깊이 파 보십시오. 죽은 나무는 아무리 파도 수액이 흐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적이 무엇입니까? 기계적 상태, 습관적 상태, 부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향을 돌려 산지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적들을 물리치고 앞으로 전지하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