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아는 이는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걸어갈 수 없습니다. 앎이 있어야 뜻을 생각하고 뜻을 따를 수 있고, 그 뜻을 이룰 길을 나설 수 있고, 더 나아가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앎은 무엇이고 그리고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인가? 왜 나는,'왜'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냐? 나는 무엇이냐?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왜'가 중요합니다. 그 '왜'에서 나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일상적인 나. 무엇인 '나' 가 소중합니다. 더 나아가서 나의 '왜'를 찾고, '왜' 그것을 찾는 나는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선과 진리, 거룩함과 평화에서 '왜'는 더욱 보배롭습니다.
'안다'는 것은 그 앎의 본질에 도달함을 말합니다. 겉만 아는 것은 부분만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는 것은 상대, 대상의 본질까지 아는 것입니다. 깊은 속을 보는 것입니다. '나'도 겉의 '나'만을 앎은, 그 앎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나'를 알때는 그 본질, 그 실체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의 '나'를 살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을 참으로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참된 앎은 그분을 향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그 목적, 목적의 실체를 이룹니다. 그 앎에서 나도 너도, 우리도 끝에는 그분을 찬미합니다.
하느님 나라, 그분의 의로움은 무엇보다고 주님의 앎에서 시작합니다. 그분을 알지 못하면 그분의 길을 벗어나고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소위 말하는 삼천포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나는 주님을 알고 있는가? 그분의 앎이 무엇이지? 왜 그분을 알아야 하지?하고. 꼭 물어야 합니다.
물음의 '왜'의 뜻을 규명할 때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지속해서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다가 멈추거나, 중지하는 이유는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실체를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단지 복이라던가, 그 나라가 단지 나의 위로과 격려라는 것만을 알고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표면적 하느님 나라. 그 천국만을 생각하면, 어쩌면 허공을 바라보고 희망하다가 힘을 다해 풀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에 '왜'라는 뜻을 아십시오. 그 하느님 나라의 '왜'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용기를 갖고 실제의 길로 나아가십니오. 그것에 중단하지 않고 생명을 위해 나아감에서 하느님 나라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성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얻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 그 의로움은 우선, 하느님을 경외를 아는 지혜에서 얻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 하느님의 경외함을 놓지 않는다면, 그에게 하느님의 나라의 열매가 열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경외함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경외함에서 자신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느님을 진정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온갖 어려움에도 항구하게 주님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고 복된 날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토요일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로움의 날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의미를 압니다. 그 나라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그 무엇을 넘어 나는 그 나라에서 '왜' 그렇게, 그렇게 사는가?을 알아채기 바랍니다. 그 나라와 의로움에 용기를 갖고 도전하고, 함께 어울리고 함께 나아가 선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경외하고 찬양하게 하소서. 하느님 나라의 길의 빛과 광채를 보게 하소서. 그 길에서 당신의 구원과 생명을 보게 하소서.
이재을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