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웅이 되어라! 대학회⑤~72p
ㅡ오키나와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희망이 되어라!
오키나와는 흔들리고 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이케다 회장은 빛처럼 청년에게 희망을 타오르게 만들었다.
실력을 쌓아라! 내가 있지 않은가!
1969년 '건설의 해'는 시와 함께 밝았다.
'건설의 노래', 1월 1일 세이쿄신문 1면에 실린 이케다 회장이 쓴 시다.
"오오 찬란하게
태양은 떠오른다
새로운 생명의
고동에 맞춰……"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인쇄된 세이쿄신문(4일자) 1면에는 '무관(無冠)의 벗이여'
라는 시가 실렸다.
"나는 여러분이 참으로 마음 든든하다
우리 기둥이다
광포를 추진하는 엔진이다……"
시는 마음을 흔든다. 마음이 전달된다. 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철학이
결의가 되고 지침이 되었다. "'건설의 해'를 대승리하는 인(因)은 바로
신이치가 연초에 쓴 이 시에 있었다." (소설《신·인간혁명》)
'건설의 노래'는 노래한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초석을
지금 바로 구축하지 않겠는가!"
"초석은 깊고 깊이
그리고 바위 속까지
파야 한다"
그러면 구축해야 할 미문의 역사를 여는 '초석'은 무엇인가.
'무관의 벗이여'는 이렇게 노래한다.
"역사를 움직이고
창조하는 것은
한 영웅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걸고 투쟁하는 사람이다."
회장은 '뒤에서 노고하는 사람'에게 초점을 두었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주위에 상관없이 자진해서 꿋꿋이 투쟁하고 '뒤에서 노고하는 사람'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역사를 건설하는 주체다.
1969년, 당시 오키나와는 동요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반강제적으로 기지와 시설을 건설했다. 미군병사들의 흉악한 사건이나 사고도
자주 일어났다. 주민들은 미국의 통치에 낙담하며 본토 복귀(일본 복귀)를 열망했다.
1967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처음으로 일본 총리가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그리고 "오키나와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전후(戰後)가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라고 언급해서 오키나와현의 주민들은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이
격렬해지면서 폭격기의 출격기지와 후방 지원기지로서 미국에서는 오키나와의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1968년 2월, 주민들이 '검은 암살자'라고 혐오한 전략폭격기
B52가 상주하기 시작했다. B52는 바로 얼마 전인 1월에 그린란드에서 방사능오염을
동반하는 사고를 일으켰다(핵폭탄을 실은 채 해빙 위에 추락함). 또 11월에는 가데나
기지에서도 추락, 폭발로 불타버린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주민들의 거센 분노가
불타올랐다.
1969년 새해 첫날, 세이쿄신문 1면에 이케다 선생님이 '건설의 노래'를 실어주셨습니다.
시(詩)가 이리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것인가, 감동으로 몸이 떨리는 듯했습니다.
특히 "파괴는 순간 / 건설은 사투(死鬪)"라는 구절은 우리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당시 오키나와의 본토 복귀가 어떻게 될지 몰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소용돌이 치고,
일본 지도자에 대한 불신과 실망, 분노가, 많은 학생의 마음속에 널리 퍼졌습니다.
선생님은 '건설의 노래'에서 '청정낙토의 새 사회'를 건설하자고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를 말씀하시는 듯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모두 / 몇 세기의 유전(流轉)과 / 변모의 발자취를 남기고 사라졌다"고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의 고대문명이 역사의 탁류에 사라졌음을 시는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설할 '새 사회'는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구축할 수 있을까.
오키나와 동지들이 그 해답을 마음속으로 찾고 있었습니다. 1969년 2월 15일
오전 10시 반, 이케다 회장은 흔들리는 오키나와 땅에 내려섰다. 전날부터 하늘을
뒤덮은 비구름은 사라지고 활짝 갠 남국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힘들 때'에 '힘든 곳' 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위대한 역사가 열린다.
진정한 역사가 시작된다."가, 회장의 일관된 행동이다.
1969년 2월 16일, 류큐대학교, 오키나와대학교, 고쿠사이대학교(당시) 졸업생과
재학생 대표가 나하 시내에 있는 행사장으로 모였다. 세 대학교를 모두 합쳐 96명.
그때까지 결성된 대학회와 비교하면 이례적인 큰 조직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키나와창가학회의 책임자(총장)던 고(故) 미쓰모리 구니히로 씨는 이렇게 말했다.
"1968년 8월, 대학부 하계강습회 때였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키나와 방면
대학부서기장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된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년에
오키나와에 갑니다. 그때 대학회를 결성합시다. 미쓰모리 씨, 100명을 결집할 수
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말씀이라 깜짝 놀랐지만 저는 결의를 담아 '예, 결집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오키나와에 대학회를 결성한다는 구상은
전년(前年)부터 시작되었다.
"도바루 씨, 일이 커져버렸어요. 내년에 이케다 선생님이 오키나와에 오십니다!
그때 대학회를 결성해주시기로 했습니다." 미쓰모리 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렇게 말한 모습을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그 무렵 미쓰모리 씨는 대학부
제1부의 부장을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3부의 부장이었습니다. 하계강습회
에서 돌아와 곧장 활동을 시작했지요. 활동 대상은 류큐대학교, 오키나와대학교,
고쿠사이대학교 멤버였습니다. '100명', 이것이 선생님의 구상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실현하자!' 열심히 기원하고 말하며 꿋꿋이 투쟁해서 당일에는
세 대학교 멤버 96명이 모였습니다. 그때 모인 세 대학회 멤버들은 훗날 오키나와
각계에서 활약했습니다. 실로 모든 분야에서 오키나와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이 '100명'은 오키나와의 다음 세대를 맡길 대열이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오후 5시 15분, 이케다 회장이 대학회를 결성하는 장소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회장은 오전 10시부터 오키나와 고등부의 봉추회, 봉추그룹 결성식에 참석했다가
오후 2시부터는 오키나와에서 열린 제1회 예술제(류큐신보홀)를 관람했다.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피날레에서는 출연자와 관객들과 함께 '오키나와 건아의
노래'를 합창했다. 끝으로 "오키나와를 평화로운 행복섬으로 만드는 그날까지,
함께 힘껏 전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약 1,000명의 참석자에게 역설했다.
거의 2시간 반에 걸친 예술제가 끝나자 그 길로 나하 시내에서 열리는 세 대학회
결성식에 달려왔다. 회장은 잠시도 쉬지 못했다. 회합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회장은
이렇게 말을 꺼냈다. "여러분이 희망한다면 류큐대학회, 오키나와대학회, 고쿠사이
대학회를 결성하고자 하는데 어떻습니까?" 참석자들이 박수로 호응했다.
"그러면 정식으로 각 대학회를 발족하겠습니다!" 참석자들은 허리를 죽 펴고
큰 박수로 찬동을 표시했다. 회장은 그 진지한 결의에 응답하듯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대성할 때까지 나는 가능한 모든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대학회의 목적이자 의의입니다. 자질구레한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회장은 그렇게 전제하고 핵심을 정통으로 짚었다. "지금부터 10년 동안 신심을
투철하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독에 빠지는 사람도 있겠지요.
또 이성문제나 집안문제로 고민하다 학회에서 멀어지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심만큼은 잊으면 안 됩니다! 불법(佛法)을 멀리 하면 안 됩니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생명을 분기시키는 듯한 기백이 행사장을 감쌌다.
"지금은 아무리 가난하고 힘들어도, 또 어려움이 있어도 신심을 관철한 사람이
최후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무엇을 위해 신심을 관철하는가.
이케다 회장은 명확한 지표를 제시했다. 회장은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했다. "21세기 지도자는 오키나와 출신 학생들입니다! 비약적으로 말하자면
아시아, 더 나아가 세계 지도자가 되고, 적어도 그 전에 일본의 리더가 되리라는
사실은 역사의 추세(사물의 경향)이자 힘이고 운명이며 리듬이 되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가장 고투하는 오키나와 출신 학생과
오키나와 건아가 21세기 리더가 됩니다! 각계 리더가 오키나와에서 나올 것이며,
나오지 못한다면 큰일입니다.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람입니다. 나머지는 가만히
인내하며 때가 오기를 기다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오키나와 현민 모두
가엾지 않습니까."
"오키나와 건아가 21세기 리더가 됩니다!" 라는 말씀에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대학회를 결성하기 5년 전인 1964년 12월 2일이었습니다. 오키나와 대학부가
오키나와 본부에서 회합을 하고 있을 때, 뒤편에서 "이야, 오키나와 대학부가 하고
있군요!" 라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지 하고 돌아보니 세상에, 거기 이케다
선생님이 계셨어요. 선생님은 "오키나와에서 세계 지도자가 나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앞날을 축복하며 오늘은 악수를 합시다." 하고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를 하셨습니다. 당시 입회한 지 불과 3년째던 저는 이
오키나와 땅에서 세계 지도자가 나온다는 지도를 들었지만 '대체 누구를 말할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대학회 결성 때 선생님은 "21세기 지도자가 됩니다."
라고 확언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를 지칭하셨습니다. 저희에게 새 시대의
지도자가 되라고 기대를 보내신 것이지요. 전율이 흐르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모든 참석자의 마음에 '동집생의(動執生疑, 낮은 가르침에 집착하던 마음을
동요시켜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것)'가 일어났습니다. 대학회 결성 5년 전에
지침을 받았지만,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한 우리 눈을 번쩍 뜨게 만드는 지침이었
습니다. 그 순간부터 '지금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라고 고민했고, 그때부터 선생님 지도를 '한 마디도 흘려듣지 말자.'고
결심하고 귀를 쫑긋 세웠습니다.
"21세기 리더로 성장하라!" 이케다 회장은 그렇게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누군가가 분발하겠지……'하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의존심이나 체념을 털어내는 듯한 목소리가 행사장에 울려
퍼졌다. "메이지유신에서도 조슈(야마구치), 도사(고치), 사쓰마(가고시마)의
지사(志士)들은 가난했습니다. 그것이 메이지유신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오키나와는 경제적으로 힘겨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변혁하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지금 일본은 무책임과 허영, 타성에 빠져 있습니다.
진정으로 민중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정통성을 지닌 모임은 창가학회뿐입니다.
온갖 세력이 아무리 인민을 언급해도, 그저 인기를 얻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단체도 아니다. 학회가 바로 진정으로 민중의 행복을
실현하는 단체가 아닌가!' "타락과 허상(虛像) 속에서 가장 고생한 오키나와의
투사가, 일본의 리더가 되어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전쟁의 비참함을
가장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나라의 시정권 아래에서 사는 쓰라림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고생한 사람만이 민중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묘법(妙法)이고 인간혁명의 원리입니다. 묘법의 원리인 이상, 그렇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반드시 분기시키고 말겠다!' 회장의 열띤 마음이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을 두드렸다. "본토가 위라고 생각해서 비굴해지면
안 됩니다. 그런 근성이 있는 여러분이라면 나는 경멸합니다. 최후의 총마무리를
여러분이 하십시오. 그 실력을 쌓는 때가 바로 지금입니다. 함께 싸웁시다!"
"예!" 멤버가 마음을 하나로 모아 대답했다. 자신을 다른 어떤 사람의
아래로 여기는 일은, 언뜻 겸허하게 비춰도 그것은 만심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 사람만이 완수할 수 있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회장은 그 나약함을
무너뜨렸다.
당시 오키나와 사람들은 '우리는 본토에 이길 수 없다. 오키나와는 본토와 비교
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열등하다.'라는 체념이 뿌리 깊게 박혀 있었습니다.
또 심지어 그것을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랬던 만큼 "비굴해지면 안 됩니다.
그런 근성이 있는 여러분이라면 나는 경멸합니다."라는 이케다 선생님 말씀에
우리는 깊이 감명받았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마음에 깃든 '일흉(一凶)'이라고도
할 비굴함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뇌리를 스치는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64년, 소설
《인간혁명》을 오키나와 본부에서 집필하기 시작하신 역사적인 12월 2일에
이케다 선생님이 서른명 정도가 모인 대학부부원회에 갑자기 참석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오키나와 역사는 비참했습니다.
숙명의 폭풍과 같은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여기부터 행복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평화의 파도가 일어나야 합니다. 또 여러분 중에서 오키나와 출신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일본을, 그리고 세계를 짊어질 대인재가 나와야 합니다."
"여러분은 광선유포의 사자(師子)로서 일어서기 바랍니다. 불법은 절대로 틀림이
없습니다. 우선 10년간 나를 따라 오십시오." 선생님은, 계속 학대를 받아온
오키나와에 한결같이 "긍지를 지녀라"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계속 불을 내뿜듯 지도했다. "오키나와 현민을 위해
여러분이 기수가 되어 돌파구를 여십시오! 그것이 당연한 권리이자 역할입니다.
나도 온 힘을 다해 응원하겠습니다. 그 어느 곳보다 몇천배, 몇만배나 응원
하겠습니다. 때를 기다리십시오. 때는 반드시 옵니다."
"여러분이 기수가 되어라!"
이케다 선생님이 그렇게 지도하신 반년 뒤에 열린 하계강습회 때 일입니다.
류큐대학교, 오키나와대학교, 고쿠사이대학교 대학부 멤버들이 각 대학 깃발을
들고 회합이 열리는 도노하라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저는 5미터 이상의
대나무 장대에 가로 1.5미터, 세로 1미터 정도의 천으로 꾸민 류큐대학교 깃발을
펄럭이며 앞장서서 달렸습니다. 그런데 깃발이 너무 무거워 도중에 몇번이나
땅에 내려놓고 쉬어야 했습니다. 우리 오키나와 대학부가, 운영 본부가 있는
셋센보(雪山坊)에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케다 선생님이 눈앞에 나타나
"오키나와가 왔군요. 좋아요, 내가 깃발을 들겠습니다!"라고 제가 든 류큐대학교
깃발을 손에 쥐고 함께 행진하셨습니다. 깃발이 묵직했지만 선생님은 한 번도
내려놓지 않으셨습니다. 또 우리 쪽을 보면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셨습니다.
마치 뒤에도 눈이 달린 듯했습니다. 선생님 뺨과 목덜미에는 굵은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습니다. 도노하라 운동장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은 제 눈을
엄숙하게 바라보고 "내가 오키나와 깃발을 들고 행진한 일을 평생 잊으면
안 됩니다!" 라고 힘차게 외치고, 손에 든 깃발을 건네주셨습니다.
'여러분 오키나와 사람들이 투쟁하는 선두에는 언제나 늘 내가 있다!
언제나 늘 여러분과 함께 전진한다!' 선생님은 몸소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다음 세대의 리더가 될 수 있을까. 이케다 회장은 그 초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뿌리가 단단하고 땅 속 깊이 그 뿌리를 온전히 내리고 있으면, 설령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봄이 되면 벚꽃이 만발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부쩍부쩍 성장하는 모습은, 줄기가 굵어지고 가지가 무성해지는 모습과
같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회장은 '뿌리'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뿌리'는
기초다. 젊은 세대에게는 지력(知力)이나 정신력, 체력, 경제력, 그리고 신앙이나
우정도… 이렇듯 모든 분야의 힘이 된다. 인생의 토대가 그렇게 반석 같아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러기 위해 '지금은 실력을 쌓으십시오!' 라는 회장의
당부는 흡사 기원과 같았다. "10년, 20년, 30년, 50년 앞을 목표로 때를 기다리
십시오. 훌륭하고 훨씬 훌륭해지세요. 꾹 참고 때를 기다리십시오. 조급하면
안 됩니다." "예!" "오늘 2월 16일은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 탄신일입니다.
이런 의의 깊은 날을 영광스럽게 출범하는 날로 하고 싶군요. 함께 합시다!"
"예." "부탁합니다!" "예!" 그야말로 호흡을 맞춰 대답이 되돌아왔다.
"몇년이 걸리든 나는 진지하게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꼭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설령 여러분이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 하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알아갈 것입니다. 미래를 열기 위함입니다. 인재육성이라는
큰 예술로 완성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내 남은 반생에 할 일입니다.
본문(本門) 중의 본문에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회장은 모든 멤버를 곁으로 불렀다.
이케다 회장과 간담을 시작했다. 일제히 질문하려고 손을 들었다. 모두 진지했다.
제일 처음 지명된 사람은 야간(2부)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방금 선생님께서 '21세기의 리더가 되어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우리 야간대학교
학생은 일과 학업과 학회활동을 어떻게 병행하면 좋을까요?" 회장은 전심전력을
다하듯 이렇게 대답했다. "지금이 때입니다. 실력을 쌓으십시오. 사투입니다.
세가지 모두 온 힘을 다해 해내십시오. 지금은 마음껏 고민하십시오.
고뇌하는 곳에 성장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고뇌하는 곳에 인간이 형성됩니다.
그것이 지도자의 피와 살이 됩니다. 그것이 그대가 평생 지닐 재산입니다.
나는 서른을 넘기기 힘든 병약한 몸이었습니다……." 회장은 젊은 시절
자신의 고투를 말하며 이렇게 역설했다. "아무런 아쉬움이 없는 가정환경에서
하는 공부보다 화장실 안에서, 전차 안에서 등, 어려움 속에서 배우는 쪽이 진짜
피와 살이 되는 공부가 아닐까요? 열심히 하십시오." "예!"
질문한 학생의 눈빛이 반짝였다.
간담할 때 저는 무의식 중에 이케다 선생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저도 대학원에 가고 싶지만 어학에 문외한입니다." 선생님은 제 질문의 배경에
숨은 생각을 순식간에 알아채고 이렇게 지적하고 지도하셨습니다.
"반드시 대학원에 가야 '21세기 리더'가 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입니다.
당신에게는 신심이 있지 않습니까. 본존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또 몇백만의 동지가
당신을 응원하고 있지 않습니까. 상급 학교에 진학하면, 또 학력이 있으면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런 선입견이 있으면 안 됩니다. 오키나와의 여러분은, 민중을 비예
(睥睨,노려보며 위압하는 행동)하는 듯한 리더가 되면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고개를 들고 가슴을 펴고 당당히 일본을 리드하십시오. 이 오키나와에서 박사,
대작가, 대예술가, 광포의 대인재를 배출하고, '어떠냐!' 하며 안팎에 본보기를 보이고서
내 생애를 마치고자 합니다. 그때까지 오래 삽시다!" 이 순간 학력에 사로잡혔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일생을 정했습니다. '내게는 선생님이 계시다.
선생님과 함께 투쟁하고, 살고 살아 끝까지 살자! 스승이 계시다. 이보다 더 큰 긍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저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우리가 구축해야 할 오키나와의 구체적인 미래상(未來像)
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런데 이케다 선생님이 해주신 답변에 '찌릿' 하고 온몸에
전기가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그것은 여러분이 만드십시오. 만들어야 합니다."
라고 잘라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름대로 21세기 미래상이 있습니다."라며,
"그러나 나는 청년의 독창성에 기대를 겁니다." 하고 철저하게 우리를 믿고 기대를
보내셨습니다.
말을 더듬는 멤버 두명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케다 회장은 힘주어 지도했다.
"'나는 이렇다!' 하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도
호감을 사는 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앞으로 불러 탁상에 있던 주스를 권했다.
"절복을 하십시오. 반드시 낫습니다. 절복하다 남에게 비웃음을 사면, 그만큼 죄장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성훈에 '사람이 땅에 의해 쓰러진 자가 도리어 땅을 짚고
일어나는 것과 같다.' (어서 552쪽)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의미는 알겠지요?"
"예." 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의 얼굴은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한 남자부 멤버가 일어나서 결의를 피력했다. "저는 부대장이 된 지 반년이 되었
습니다. 앞으로 1,000명의 조직을 건설하겠습니다." 그러자 이케다 회장은 그 말에
몸을 내밀듯이 이렇게 지도하기 시작했다. 조직을 지키고 확대하는 데에는
가장 중요한 초점이 있다. "제목입니다. 제목을 올리세요. 지금 남을 지키는 행동이
나중에는 남이 나를 지켜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가령 일본의 모든 사람을 절복하면
내세(來世)는 그만큼의 사람들이 내 편이 되어 나를 지지해줍니다.
불법을 실천하면 반드시 결과가 나옵니다. 증거지요. 그 증거는 반드시 금세에
나타납니다. 가짜는 반드시 사람이 떠납니다. 그러나 신심으로 고생한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내편이 됩니다."
당시 저는 여자대학부 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절복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어딘지 사무적이 되고, 형식적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민을
이케다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상하게 "절복이 잘 되지 않는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여자부원이 있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나도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투쟁만 했습니다. 그러나 제목을 부르면 반드시 해결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속으로 뜨끔 했습니다. 회원을 움직이기 위한 대책이나 방법을
배우려고 한 자신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계속 제목이 근본이라는 점을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오늘 제목을 부른다고 내일 바로 좋아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한테 아침에 야단맞아도 저녁이 되면 잊어버리고 말지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한번 결심했다고 금방 이루어진다면 본존님은 필요 없지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하겠다고 정하면 철저하게 끝까지 기원하십시오."
그리고는 제가 단 꽃 장식을 발견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기뻐서 "선생님께 받았
습니다." 하고 말씀드렸지요. 전년에 열린 하계강습회(시즈오카)에서 부기(部旗)
를 받은 멤버 전원에게 주신 꽃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아직도 갖고 있었나요?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것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여자부원
한사람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이후 제목 근본으로 부원들과 함께 절복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한달 동안
14세대 홍교를 이뤘습니다.
'선생님 지도대로 투쟁하면 열린다.' 생애 지침을 받았습니다.
이케다 회장의 제안으로 기념촬영을 시작했다. 몇몇이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미 2시간 반 이상이나 지났다. 촬영하는 짬짬이 회장은 여자 대학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을 누이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습니다. 나를 따라 오십시오. 모두 따라올 수 있습니까?"
"예." 하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회장은 다시 물었다. "따라오겠습니까?"
"예." "지금 아무리 화려하게 차려 입었어도 신심을 하지 않는 사람은……"
회장은 그렇게 말하고 손바닥으로 자신의 가슴을 탁탁 치면서
"여기가 틀림없이 좀먹어버리고 마침내 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세번에 걸쳐
강조했다. "착실하게 따라오십시오." "예!"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는 대답을 했다.
"따라오십시오!" 라는 이케다 선생님 말씀에 몹시 기뻤습니다. 전년에 참석한
하계강습회에서 선생님이 하신 지도의 의미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계강습회 둘째 날에 선생님이 대학부 대표 10여명을 운영 본부로 부르셨습니다.
오키나와에서는 3명이 참석했습니다. 간담회 때 저는 선생님께 그해 3월에
아버지를 여읜 일,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에 다닌다는 것과, 여비를
마련해서 하계강습회에 참석했다는 등의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고생하고 또 고생한 사람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법입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평생 학회에서 멀어지면 안 됩니다."라고 지도하셨습니다.
"학회에서 멀어지지 마라."는 뜻은, 선생님이라는 광선유포의 스승을 따라가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을 선생님은 세번 강조하며 가르치셨습니다. 이것만
생명에 새기면 온갖 불안이 있어도 절대로 지지 않는다고 직감했습니다.
기념촬영이 끝난 뒤 그 기쁨을 어떻게 표하면 좋을지 몰라 "작년에 선생님을
뵈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어요. 키가 많이 커서 깜짝 놀랐습니다."라고 선생님 키와 견주는 듯한 몸짓을
하셨습니다. 딸의 성장을 기뻐하는 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스승이자 자상한 아버지셨습니다.
시곗바늘은 오후 8시를 가리키려 했다. 이케다 회장은 멤버 한사람 한사람과
악수했다. 또 진행요원에게 말을 건네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 모습도 또한
멤버들에게는 말없는 지도가 되었다. 회장이 퇴장하던 그때였다. 노래가 시작되었다.
정법 유포의 먼동이 트니
무너진 우루마섬
악몽에서 깨어나 용감히 일어선다
전통을 자랑하는 힘찬 주먹은
오키나와 건아의 긍지니라
'오키나와 건아의 노래'였다. 용맹한 가사고 곡이다.
"나는 '오키나와 건아의 노래'를 아주 좋아합니다. '애창곡'을 꼽으라면 아마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입니다."라고 회장이 말하는 노래다.
멤버들이 이때 왜 이 노래를 불렀는가. 그 이유는 전년(19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계강습회 둘째 날, 캠프파이어를 에워싸고 전국의 대학부가 모였다.
회장은 "오키나와 힘내라! 오키나와의 영광을 기원합니다." 라고 만감을 담아
격려하고 또 "모두 오키나와를 응원합시다."라고 제안했다. 전국 대학부원의
뜨거운 성원 속에서 오키나와 대학부 124명이 '오키나와 건아의 노래'를 부르면서
운동장을 두 바퀴 돌았다. 전국의 동지가 빨강, 파랑, 노랑색 셀로판을 붙인
손전등을 흔들었다. 흰 모자를 사정없이 흔드는 벗도 있었다.
"잘한다, 잘한다 오키나와!" "오키나와 힘내라!"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회장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대와 격려를 강하게 느꼈다.
오키나와 멤버는 눈물로 뒤범벅된 얼굴로 계속 노래했다. 그 모습에 전국의 벗도
눈시울을 적셨다. 감동의 눈물이 다시 감동의 눈물을 부른다. 아름다운 창가의
청춘이 그곳에 있었다. 그 감격스러운 캠프파이어에 참석한 멤버들이 오키나와
대학회 결성식장에 있었다.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회장에 대한 최소한의 감사를, 결의를 노래로 표현하고 싶었다.
사회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든, 우리가 열심히 하면 된다. 힘을 기르자.
환경이 어떻든,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내가 오키나와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모두 그런 결심을 노랫소리에 담았습니다. 놀랍게도 대학회 결성 며칠 뒤,
이케다 선생님께 책을 받았습니다. 책 속지에는 대학회 결성 날짜와 함께
"함께 평생을"이라는 글이 씌어 있었습니다. 스승과 함께!……
희망을 용솟음치게 하는 근원입니다. 광원(光源)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건설의 주체로서 불이(不二)의 생애를 관철하라, 하는
의미로 휘호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흔들리는 오키나와에 희망의 불꽃을
혁혁하게 타오르게 하셨습니다.
2월 17일은 '음력설'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키나와는 새롭게 출발했다.
현지 보도관계자가 이케다 회장의 오키나와 방문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이케다 회장이 와서 무언가 오키나와 전체가 열광하는 느낌입니다."
2012년도 시와 함께 새로운 건설의 막이 올랐다.
'희망은 인생의 보배다' 시는 노래한다.
"아무리 깊은 난세의 혼미함도
결연히 부수고
스스로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이 벗에게도
저 벗에게도
절대 승리의 희망을 보내며
우리는 승리해 나아가야 한다!
……
지금 나는 소리 높이 선언하고 싶다.
'미래의 가장 크고 힘찬 희망은
창가 청년들에게 있다' "
스승은 전혼을 담아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타오르게 만들었다.
(1969년 2월 16일, 나하시<市>)
"목숨을 걸고 / 일편단심으로" 오키나와 광포를 짊어진 벗을 격려.
(1964년 12월, 오키나와 본부)
"가득 차게 / 사제의 공전(共戰) / 오늘도 승리하라" (1969년)
첫댓글 '오키나와' 대신 자신의 '지역'이나 '지부' 이름을 넣어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