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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역(1호선) 에서 만남의 광장으로 가는 개울가에 시비(2012년9월 세움)가 있다.
시비에는 기생 매창과 그의 情人이였던 유희경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조선의 3대 명기(詩妓)로
부안에서 태여나 고향땅을 벗어난 일이 없던 매창의 시비가 이 곳에 선 것은 그가 사랑했던 촌은
유희경이 이곳 도봉산 일대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도봉서원을 지을때 유희경이 주도 했슴)
못다한 사랑을 암시하듯 갈라진 시비엔 좌측에 유희경, 우측에 매창의 시가 새겨져 있다.
매창을 생각하며 / 유희경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이 사무쳐도 서로 못보고
오동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이화우 흩뿌릴 제 / 이매창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1573~1610)은 부안현의 아전이였던 이탕종의 첩에게서 태여났다. 어려서 부터 거문고와
한학에 능했던 그의 본래 이름은 향금이었으나 기생이 되며 계생 또는 계랑으로 불렀다. 매창은
그의 호이다. 매창은 18세때인 1590년 부안을 찾아 온 40대의 유희경과 처음 만나 사랑을 한다.
유희경(1545~1636)과는 28세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둘은 정인이 됐다.
이별이 없다면 애타는 사랑은 없겠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는 바람에 둘은 헤여지게 된다.
천민 출신인 유희경은 의병 활동으로 공을 세워 정이품의 품계까지 받았으나 매창을 다시 만난건
15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러나 매창은 재회 3년후인 1610년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매창이 사랑한 사람은 유희경 뿐이라고 했지만 현감이던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1557~1633)와
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과도 교우 했다. 허균은 매창이 죽을때까지 정신적인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만 했다고 한다.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천재라고도 불렸던 그는 불행한 삶을 살다 2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허균은 그런 누이의 기억을 매창을 통해서 다시 떠 올렸을수도 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나 밤을 밝히던 날 매창은 허균의 침소에 조카를 들여 보냈다.
둘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리라.
유희경의 발자취를 따라 도봉서원으로 올라 간다.
400여년전 유희경은 도봉서원을 지으며 이길을 수시로 걸었을 것이다. 여기서 살기도 했다니.
입구에 있는 바위에 도봉동문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의 친필이다.
도봉서원으로 가는 길은 수시로 내리던 빗물이 매창의 눈물 인양 온통 길을 적셔 놓았다.
길 옆 개울도 심산유곡의 폭포수처럼 흐르고 있다. 매창이 죽었을때 허균의 마음이 이랬을까
허균은 매창의 죽음 앞에 시 한수를 올렸다. 아우성 치며 흐르는 물 같은 심정 이였으리라.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 허균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때 쯤이면
그 누구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설도는 중국 당나라때의 기생으로 원진,백거이,등과 교우한 시인이다.
그가 지은 춘망사(春望詞)
란 시는 우리나라에서 동심초로 번역되여 잘 알려져 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하략.... 허균은 시에서 매창을 설도로 칭 했다.
매창의 죽음 앞에 시를 바친 이는 그때의 사람만 있는것이 아니다. 국문학자이며 시조시인인
가람 이병기(1891~1968)님도 그의 무덤 앞에 시 한수를 올렸다.
매창뜸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아래 홀로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나삼상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래도 정은 살아 남았네
* 돌비(돌비석) *나삼상(적삼)
자유부인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정비석(1911~1991, 본명 정서죽) 님도 매창을 찾았었다.
매창묘를 찾아서
공동묘지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매창의 무덤 앞에서 나는 머리를 수구려 경건한 마음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무덤속의 매창의 백골은 이 사실을 아는가,모르는가.
그대가 가슴 가득히 설음을 품고 죽어간 지 3백 60여년 후인 이 날에 60 노부가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그대의 인품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에서 엄동설한에 천리길을 멀다 않고 찾아와
무덤 앞에 경건히 머리 수그리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
그대의 무덤 앞에서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나의 귀에는 그대의 아름다운 거문고 가락이 들려
오는 것만 같고, 눈을 감고 명복을 비는 나의 망막에는, 그대의 아리따운 자태가 아련히 떠올라
보이는 것만 같아서 애모의 정이 새삼스러이 솟아 오르는 이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모르는가.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운 것은 영원히 남는 법 인생은 짧아도 예술은 길고 길어서 설어움에
맡겨 한 수씩 갈긴 그대의 넋풀이 시들이 오늘 날에는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또 있다. 매창과 같은 부안 출신으로 시인이며 교육자인 김민성(1927~2003) 님의 시다.
매창 묘에서
봉두뫼 매창뜸에
흰점 구름 기쁜듯 머무르고
가던바람 도사리는 양지바른 유택
가랑잎 임자 없이 뒹구는 잔디 밭에
약주 한잔 붓고
지그시 눈감고 엎드리면
들릴듯 말듯한 거문고 소리 소리
아주 먼곳 사람인것 같고
아침 저녁으로 친해온 얼굴인것 같고
혹은 할머니 같고 누님 같은
달빛으로 살으신 님
한서린 사랑의 불씨를 묻고 간 이 강산에
지금은 이화우 대신 낙엽이 한창이오
얼마쯤 올라 왔을까?
계곡 옆 너른 터를 휀스(fence)가 가로 막았다. 이곳이 도봉서원 터란건 직감으로 알았다.
휀스 앞에 시비가 있다. 김수영(1921~1968)시인의 시비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자유와 저항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시비가 세워진 것은 1969년 1주기 때 였다. 원래 그의 집
뒤 무덤 앞에 있었는데 무덤은 없어지고 시비만 옮겨왔다. 비에 새긴 유작시 풀"의 전문 이다
풀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휀스안을 들여다 보니 그나마 일부 남아 있던 도봉서원은 자취도 없이 헐리고 고목 아래 碑만
하나 덩그라니 남아 있다 "성균관박사 노은 남궁업선생 기념비" 라고 써있는 검은 대리석의
비는 어떤 연유로 도봉서원에 서 있게 됐으며 어떤 연유로 이자리에 계속 서 있는지 궁굼하다
도봉서원은 1573년 조광조 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됐다. 1696년 송시열 선생을 추가로 배향
하였으나 고종의 서원 철폐령때 훼철됐다. 서울의 유일한 서원이였던 도봉서원을 조선시대의
모습으로 복원 한단다. 금년 하반기 중에 착공 한다니 머지않아 원래 모습을 볼수 있을 것이다
복원 조감도다. 몇년후 도봉산 입구의 도봉서원 모습이다.
평소에는 졸졸 흐르던 계곡물이 사납다.
불어난 물에 高자만 살짝 보이는 바위는 곡운 김수종(1624~1701) 이 쓴 고산앙지(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 한다는 뜻)라는 글이다. 정암 조광조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 한다는 의미로 새긴 것
으로 김수종은 병자호란시 청나라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주장 했던 김상헌의 손자이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며 남긴 김상헌(1570~1652)의 시다.
도봉서원을 지나면 천축사와 금강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매창이 세상을 뜬지 40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의 무덤 앞엔 헌시가 바쳐지고 있다.
매창시비 앞에서 / 지은이, 원정
사랑도 허망해라 거문고 비껴두고
상사에 아픈사연 꽃잎에 새기던 날
피맻혀 야윈 손가락 옥가락지 외로워라
원정은 최승렬 시인의 호다. 전주에서 태여 났으나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국어 선생으로 부임
하며 인천 사람이 됐다. 그는 인천 문화계의 유명인이다. 그가 즐겨 다니던 인천 신포시장의
다복집이란 술집 문엔 괴이하다 싶을 정도로 만든 그의 두상이 걸려 있으며
자유공원의 2층정자 석정루에는 그의 시가 걸려 있다.
이매창의 무덤 앞에서 / 송수권
이 세상 뜻있는 남자라면 변산에 와서
하룻밤 유숙하고 갈 만하다
허름한 민박집은 많지만
그러나 정작 들러야 할 민박집은 한 군데
지금도 가얏고 소리 끊이지 않고 큰머리 옥비녀를 쫓았는데
머리 풀기를 기다리는 여인
서해 뻘밭을 끓이는 아아 후끈 이는 갯내음
변산 해수욕장을 조금만 비껴 오르면
부안읍 서림공원 그 아랫마을 공동묘지
바다우렁이 속 같은 고둥껍질 속에
한숨 같은 그녀의 등불이 걸려 있다
온몸의 근질근질한 피는 서해 노을 속에 뿌리고
서너 물발 간드러진 물살에 창창하게 피는 낚싯줄
이 세상 남자라면 변산에 와서
하룻밤 그녀의 집에 들러 불끄고 갈 만하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하던 님"
뻘 속에 코를 처박고 싶은 여름날
아아.
이 후끈 이는 갯내음
시인 송수권님은 전남 고흥에서 1940년 태여남. 순천대 명예교수.
매창의 무덤엔 그가 죽은지 45년 만인 1655년 첫 비석이 섰다. 그후 300여년의 세월을 버텨
닳아 버린 비석을 다시 세운(1917년) 것은 부안 시민들이였다. 내노라 했던 정승 판서의 무덤도
세월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것이 부지기수 건만 후손도 없는 기생의 무덤이 지금까지 보존
되여 있다는 것은 매창이 예향의 고장 부안에서 태여 난 복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천민으로 태여나 그 잘난 양반들을 다 물리치고 천민을 사랑했던 매창을 사람들은 지금도
흠모한다. 매년 봄 부안에서는 매창문화제를 열어 매창의 얼을 기리고 있다.
매창의 시는 58수가 남아 전해지고 있다. 송도의 3절이 박연폭포,서경덕,황진이, 라면
부안의 3절은 직소폭포,유희경,이매창, 이라고 이곳 출신 시인 신석정님이 말했다.
그대를 찾아서
이 산천 떠돌다
바람이 되어서
구름이 되었소
만남도
헤임도
덧없어라
지우라
지우라
지워버려라......
허설 노래 --.
첫댓글 매창의 발차취 재미있게 접하고 갑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마중물님!~
머무르신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새해,원하고 바라시는 모든것들,
다 이루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지금부터 약 900년 전의 육유와 당완과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설도의 춘망사도 ...
또한 이매창과 비슷한 시기의 안동의 어느 묘에서 나온 사랑의 편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희랍 신화에서의 오르페우스의 사랑은 아무래도 서양이라서 그런지 너무 오래 전 얘기라 그런지 덜 다가오지만
이매창이나 당완의 슬픈 사랑 얘기는...
내일 새벽에 일 하러 나가야 하므로 잠시 가슴을 파고 들던 감상이 쫓기듯 희미해져 멀어져 갑니다.
심지어는 밥도 쫓기며 먹기가 일쑤입니다.
고요할 때 찾아오겠습니다.^^
안동의 묘에서 나온 편지,,저도 어디다가 올린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나질 않네요..
사공님께서는 신화이야기를 훤히 꿰시고 계시죠?..^^*
사는 것이 치열합니다.
이젠 좀 느긋하게 가도 되겠건만..
머무르심 감사드리며,새해 복 많이 누리세요~
안동의 묘에서 나온 구구절절 애닲은 사랑편지...
저도 읽어봤었는데 마음이 저려와 혼났죠..
육유와 당완의 슬픈 사랑얘기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런 슬픈 사랑이 또한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불멸의 한시를 남겨주었나봅니다.
자료 잘 읽고 갑니다~ 감사감사!!
이매창의 시에 젖어 -- 밤 깊은 줄 모르고 --- 이 얼마만의 여유로움인가 -- 고맙습니다!
새벽에 깨어서 아름다움에 흠뻑 도취되어 계시는
소암님을 뵈옵니다~
저역시 이글을 올리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이 올렸습니다.
이렇게 함께 해 주시니 더욱 고맙습니다.
소암님께서는 자연속에서 유유자적사시는 듯 하옵니다만..
감사드리며,늘 행운과 행복이 함께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