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게 그림보기]
⑥신선 혹은 정신질환자 :
네 편의 영화를 통해 본 예술가의 시선
“제 아버지는 화공학자였습니다. 아버지가 40년 동안 그 분야에서 일하는 동안, 그 누구도 화공학자로 일하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고 묻는 것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화공학자의 슬럼프가 좀 어떠십니까?’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작가의 슬럼프라는 말은 있어도 화공학자의 슬럼프라는 말은 없지 않나요? 하긴 뭐, 지난 수 세기동안 화공학자들이 알코올중독자 겸 조울증 환자들이라는 명성을 갖지는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작가들은 그런 평판을 가지고 있죠. 사실은(소설을 쓰는) 작가들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의 예술가들도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것은 베스트셀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명강의들로 유명한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강연회에서 한 말이다.
지난 2009년에 공개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강연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었다. 단 18분의 짧은 시간 안에, 그녀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적 배경에서부터 개인의 체험까지 다루면서, 창의성과 예술가에 대한 고민과 해결책을 강렬하게 전달하였다.(http://on.ted.com/gg4W#TED)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예술가에 대한 어떠한 편견이 있다. 뛰어난 천재성을 타고났고,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며, 충동적이고 불안정하며 이로 인해 불행할 수 밖에 없는 삶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하는, ‘ 자유로운영혼’ 을 가진 사람들로 생각하는 편이다. 정말 예술가들이란 화공학자들처럼 ‘정상적인(?)’ 업무과정과 근무태도를 가지고는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없는 것일까?
실제로 가족 중에 예술 분야에서 창작 혼을 불태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미대나 음대를 다니는 친구 한둘쯤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은 이러한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어떤 특별한 삶의 경험이 있다거나, 혹은 유달리 예술적 감성이 풍부해서 예술전문서적을 밤낮으로 읽는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한 예술가의 모습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예술가들의 스트레스가 된‘지니어스’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강연을 통해 사람들이 이러한 편견을 가지게 된 책임은 ‘르네상스’ 시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르네상스 이전까지 서구인들은 예술가들에 대해 나름 “건강한” 잣대가 있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회에서는 창의성은 인간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의 어떤 영적인 존재가 불어 넣어 주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영감은 친절한 영적 존재인 ‘디먼(Demon)’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당시의 디먼은 지금의 악령이라는 뜻이 아닌 신과 인간을 연결시켜 주는 신성한 혼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천재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지니어스(Genius)’ 의 어원인 ‘지니(Genie)’ 는 로마 신화 ‘게니우스(Genius)’라는 반신(半神)에서 유래하였다.
로마인들의 지니어스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매우 특별히 똑똑하고 특출한 천재’ 의 의미가 아니었다.
알라딘 요술램프에서 튀어 나온다는 요정 “지니” 가 이 지니어스에서 온 말이다. 즉, 지니어스는 예술가들에게 천상의 작품을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요정과 같은 ‘뮤즈(Muse)’ 가 바로 그러한 존재이며, 뮤즈라는 말은 현재도 예술가들의 창작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다가 르네상스 시대가 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인간은 이때부터 신이라든가 신비 따위를 제쳐 놓고 각 개인을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는 거창한 아이디어를 가지게 되었고 신성한 혼 같은 것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시작이며, 사람들은 창의성이라는 것은 각 개인으로부터 직접 나온다고 믿기 시작하였다. 예술가 자신이 “지니어스” 라고 말하기 시작하였다.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저는 이 생각이 아주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인간에 불과한 한 예술가가 모든 신성함, 창의성, 그리고 영구한 신비성의 원천이며 또 그러한 정수를 보관하고 있는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은 하나의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그 예술가에게 태양을 삼켜 먹으라고 요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지니어스’에 대한 현대 개념은 자아를 완전히 왜곡시키고 예술가들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불가능한 기대를 가지게 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와 같은 무리한 기대로 인해 발생하는 스트레스가 지난 500년간 우리 예술가들을 죽여 왔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예술가가 만든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를 만나게 된다. 과거에는 이것을 연주회, 공연, 독서 등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훨씬 복합하고 다양한 루트로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 20세기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한 각종 미디어 매체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터이다. 그 중 매우 직설적이고도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진 것이 영화다.
이전 글에서 앞서 밝혔듯이, 나 또한 중학교 시절에 접한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예술가를 꿈꾸기 시작했었고,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영화라는 매체와 매우가까이 지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지난 호에 이어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우리가 쉽게 접하는 미디어 매체에 묻어 있는 예술가에 대한 인식을 더듬어보고자 한다.
신선이 된 예술가
“야! 이 눔아! 쌀이 나오고 밥이 나와야 소리를 하냐?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 좋고 황금보다 좋은 것이 소리 속판이여. 이 눔아!”
지독하다. 조실부모하고 떠돌며 한 움큼 주먹밥만 먹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그리움에 사무쳐 마음의 병을 얻고 눈까지 멀어버린 여인의 한을 쏟아내라 스승은 말한다. 그리고 고단한 삶을 벗어 던지고 득도하여 희열 속에 하나의 불꽃이 되라 한다. 1993년에 개봉된 영화 <서편제>는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초로 100만 명 관람객수의 흥행 기록을 세웠으며, 판소리 및 국악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아마도 90년대에 의무교육을 받았던 이들은‘의무적(?)’으로 이 영화를 단체 관람했을 것이다. 예술인의 삶을 다룬 국내 영화들 중에서 이만한 흥행 성적을 거둔 영화는 아직까지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한국인의 역사적, 문화적 DNA를 활용한다면 남녀노소 불문하고 ‘천년학’ 의 선율에 고즈넉이 젖어들게 마련이다.
임권택 감독은 10년 후에 다시 예술가를 모티브로한 <취화선>을 그려내었다. 흥행에 있어서는 <서편제>에 미치지 못했지만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아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조선 3대 거장 중 마지막인 오원 장승업(吾園張承業, 1843~1897)은 자신도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과 같은 화가라는 의미에서 호를 “오원(吾園)”이라 스스로 칭하고, 음주와 기행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개화기 시대에 어울릴법한 낭만적 자의식이 있는 화가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취화선>에서의 장승업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사뭇 다른 각색과 과장으로 이러저러한 질타도 받았다. 가까이 지내던 기생의 속옷에 그림 한 수 그렸다는 일화도 장승업의 것이 아닌데다, 영화 내용 대부분이 사실보다는 상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비판도 많았다. 전해져 내려온 작품 수가 그나마 있는 인물이었기에 감독이 욕심을 부린 것은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서편제>와는 음악과 미술의 차이가 있을 뿐, 임감독의 예술가에 대한 시선은 <취화선>에도 올곧게 드러나 있다.
고주망태가 되어“이 놈아! 아무 때나 그리냐? 꼴려야 그리지?” 일갈하고, 잘했다
칭찬 받아도 벌컥 화내며 그림을 갈기갈기 찢고, 천둥번개 치는 날 술병을 들고 미친놈처럼 기와지붕에 앉아 “야, 이 개자식들아!”라고 외치는 장승업.
그리고 그런 장승업을 보면서 한 양반은 “지붕에 올라가서 그림되면, 나도 올라가겄다”하고 투덜댄다. 이 대목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못된 신의 축복을 받은 ‘천재’ 라고 인정하는 모습과 얼핏 닮아 있다. 자기 에너지를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괴상한 천재.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 눈에는 “하여간 이상한 놈”이다. 그러나 “뭘 좀 아는 분들” 은 이 이상한 자의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하고 칭송한다.
<서편제>와 <취화선>의 예술가들은 영화 말미에 모두 신선이 되었다. <서편제>의 송화는 눈이 먼 이후 득음하여 한(恨)을 소리로 내뱉고, <취화선>의 장승업은 불가마니에 들어갈 백자 항아리에 신선의 모습을 그려 넣더니 직접 불가마니로 기어들어가 백자를 굽는 땔감이 된다.
공자(孔子)가 나이 70세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는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던, 그 성인(聖人)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고행과 수행을 거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는 과정이 예술가의 숙명과 닮아 있다고 제시한다.
Amadeus
정신질환자가 된 예술가
이쯤에서 과거 유럽의 예술가들의 모습을 담은 영화 두 편을 끼워본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궁정 작곡가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를 등장시킨 <아마데우스>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와 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예술가의 심리적 장치에 대해 기술한다.
그러나 이 영화 역시 <취화선>의 장승업과 마찬가지로 실제 역사적 사실 위에 온갖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였다. 영화에서는 모차르트가 매우 쉽게 작곡을 하는 천재로 그려져 있으나, 실제로 새벽 한시에 자고 다섯 시면 일어나서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음악에 몰두한 노력가였고, 학구파이자 도서관 마니아였다고 사학자들은 말한다. 모차르트의 사망 원인에 대한 추측만 해도 무려 1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암시된 살리에리의 독살설은 그의 사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실제로 레퀴엠을 작곡 의뢰한 발제크 시투파하라는 귀족이 죽은 아내를 위해 의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만큼 예술가를 다룬 영화들은 예술가라는 존재를 모티브로 한 창작 작품이지, 그들을 사실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역사적 사실들의 빈틈 사이로 불어넣는 작가적 상상력을 섭취하면 되는 것이다.
또 한 편의 영화로는, 로댕의 연인으로 유명한 까미유 끌로델의 광기를 담은 <까미유 끌로델>을 예로 들어 본다. 타고난 재주를 가진 까미유라는 여인이 연인 로댕에게서 느끼는 좌절과 여성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장벽을 해결하지 못하고 차츰 미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끌로델의 모습 또한 <서편제>의 송화와 마찬가지로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참담한 현실에 오히려 침묵하며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아버리는 모습은 그 소란스러움만 다를 뿐,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영화 <아마데우스>와 <끌로델>에 등장하는 예술가들은 신선이 되지 못한다. 비록 송화와 장승업도 불행한 삶을 살았으나, 영화 말미에 보여주는 그들의 담담한 무표정 안에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깨달음” 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는 반면, 모차르트와 끌로델의 일대기 영화들에서는 주인공들의 “깨달음” 을 짐작하게 하는 영상은 거의 없다. 오히려 모차르트와 끌로델의 타고난 천재성, 그것을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거나 보편적인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을 개연적으로 설명하는 느낌이다. 객관적인 것을 선호하는 서구문화의 터울 안에서 이들 예술가들의 일상과 감정의 기복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와 <끌로델>에서는 예술가가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갖는 아픔과 상처를 그려내고, 그러한 인간적인 면모를 담아 걸작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묘하게도 두 영화 모두 예술가들의 마지막 모습은 ‘정신병원’ 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Isabelle Adjani Camille Claudel Poster. Movie Poster [2000s]
‘지니’찾기 = 신선되기
송화나 장승업, 모차르트, 살리에리, 그리고 끌로델은(로댕을 제외하고) 모두 힘들고 고단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부귀영화라든가, 일상의 행복이라든가,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행복한 말년을 보낸다든가, 흔히 사람들이 ‘건강한 삶’ 이라고 여기는 잣대로 보자면 상당히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 여정을 보낸 인물들로 영화에서는 그려져 있다. 다만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동서양의 차이가 있다면, 검은머리 동양인 예술가는 ‘신선’ 이 되어 나비처럼 날아갔고, 하얀 피부의 천재 서양인 예술가는 정신이상자가 되었으나 당대보다는 후대에 박수 받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지 영화 몇 편으로 동서양의 예술가의 의미를 함부로 추정하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냉정하게 보더라도 양 지역간에는 결코 동일하지 않는 차이가 있다. 현재 우리는 서구문화와 그 역사에 대해 익숙하지만, 한국인이라면 수천 년 동안 유전을 통해 계승된 한국의 문화적 DNA도 몸 어딘가에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현재에도 양 지역이 시각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구인들이 이성과 감성을 큰 줄기로 하여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정리해 둘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동양의 철학과 사상은 한두 가지의 잣대로 일목요연하게 그 역사적 맥락을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동양 전체의 사상적 터전이 되었던 유교와 불교는 엄밀히 보자면 신의 세계가 크지 않다. 유교는 ‘덕이 있는 인간‘ 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사후세계의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불교는 인간으로 시작해서 우주로 승화하려는 철학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 을 바탕으로 하는 도가적 사상은 유교와 합쳐지면서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즐겼던 ‘풍류(風流)’ 와 이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 중국, 일본은 모두 이러한 유교와 불교, 좀 더 보태자면 도교와 샤머니즘이 그 문화 속에 고루 버무려져 있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의 영화 두 편을 빌어, 나는 우리에게는 서구인들과는 다른 예술가에 대한 시선이 있다고 짐작해본다. 그리고 이것이 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조금은 건강한 것으로 이끌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다시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강연으로 돌아가 보자. 그녀는 창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미치지 않고 제 정신을 유지하려면 자기 자신이 남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즉 자기 자신이 ‘지니어스’ 가 되려 하지 말고, 자기 안의 ‘지니’ 요정과 자신을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따금씩 예술가를 직업으로 하는 이에게 이러한 “영감” 이 찾아올 때에는 반가이 맞이하고, 혹여 그것이 나를 찾아오지 않더라도 그저 묵묵히 나의 직업적 의무를 다하면 된다고 말한다.
길버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보면 그녀가 주장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우리의 ‘무당’ 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날 갑자기 신내림을 받고 아프지 않기 위해서, 미치지 않기 위해서, 무당이 되어, 모시는 신을 힘을 통해 사람들의 신수를 풀이하고 그 대가로 일상의 삶을 유지하는 사람. 길버트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샤머니즘이나 무속에 대한 전통이 없는 문화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귀에는 상당히 신선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매년 새해가 되면 으레 올해의 신수를 보고, 괴로운 일이 생기면 복채를 들고 점집을 들락거리거나, 대학입학을 위한 교회의 기도회나 절의 백팔 배 기도회 등 구복신앙에 매달리는 우리들로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다. 한 술 더 떠서, “원래는 무당이 될 팔자인데, 이렇게 영화배우로 살고 있어요.”라는 말도 우리는 종종 듣게 된다. 검은 머리의 우리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지니어스를, 뮤즈를, 광기를, ‘신내림’이란 말로 다가오는 이것들이 낯설지만은 않다. 그래서 예술가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 이라기보다는, 특별한 사람들만이 받는 신내림을 받고 일상의 무당이 되거나, 좀 더 나아가 신선이 될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이 신선이 한 분야의 최고에 이른 ‘고수’ 의 위치와 같다는 것에도 수긍할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화공학자나 물리학자, 또는 대기업을 다니는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직업적 스트레스를 가지고 살아간다. 우리들의 오래된 편견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화공학자들이나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자유로운 일상과 고통스러운 내면으로 살고 있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천재’ 를 바라보는 인간의 열등감이 상호적으로 만들어낸 시선이 많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들은 창의력을 가지고 일을 하고, 화공학자들은 실험 데이터와 연구 결과들을 가지고 일을 할 뿐이다. 특정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 불행은 그저 각자의 역량과 운명의 몫이다. 주어진 연구과제에 매진하여 새로운 학설을 입증하는 과학자가 그 분야에서 박수 받는 ‘고수’ 라 할 수 있듯이, 창의적이고 새로운 감동을 주는 작품을 발표하는 예술가 역시 그 분야의 전문가인 것이다.
예술가란 예술을 직업으로 사는 사람들일 뿐이다.
리뷰:: 송주영님
천년학 -'서편제'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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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날씨가 일교차가 심합니다.독감주사 꼭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