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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꽃이 된 글씨체 / 김순호
글씨란 씨앗들이 응어리를 풀고 있다
가슴에 묻어 둔 말 쭉정이가 다 됐어도
갈증 난 어둠 속에서
물이 올라 눈 뜬 시간
문해교실 화분 속 오래 묵은 뿌리들
깜냥껏 밀어 올려 뻗어가는 흘림체
불거진 손끝 마디마디
환한 길 피고 있다
남은 숨 불어넣는 꽃주름 버는 소리
굴곡진 삶의 줄기 향기로 감아올린
활짝 핀 칠곡 할매체 부푸는 꽃잎활자
● 당선소감 -천년 흘러온 문학의 강줄기에 물 한 방울 되도록 노력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말입니다.
꿈에 그리던 신춘문예 당선, 제게는 왕관만큼이나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벅찬 기쁨보다 왕관의 무게와 이름에 값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짓누르는 것만 같습니다. 이제 시조라는 밧줄에 영원히 묶여 버렸습니다. 시상을 떠올리고 그 얼개를 짜는 일에 한순간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시조는 천년을 굽이쳐 흘러온 우리 문학의 큰 강이라고 했습니다. 그 도저한 강줄기에 저도 한 방울의 물이 될 수 있도록 시의 혼을 부지런히 갈고 또 닦겠습니다. 시조 3장의 아름다운 정형 위에 시조만이 드러낼 수 있는 정갈하면서도 활달한 언어 미학을 얹고 싶습니다.
오래전 경주문예대학을 수료하고 동리목월문학관에서 시 합평을 할 때, 손진은 교수님이 제 시가 시조의 호흡과 가깝다고 방향을 틀어 주셨습니다. 교수님이 주신 좋은 자료와 응원, 그리고 유튜브와 독서 등을 통해 시조의 정석을 배우며 간결함 속에 큰 울림을 거느리는 시조의 매력에 빠져 오늘 이 벅찬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촘촘하게 채우지 못한 성근 행간의 여백에 덜컥, 과분한 상을 안겨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두 분 심사위원님의 결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드립니다. 저에게 꿈같은 기회의 장을 열어 주신 동아일보사에도 마음 담아 감사드립니다.
“점심은 알아서”, “못 가요”, “나중에”, 이런 말 다 받아준 그런 사람이 옆에 있어서 참 고맙고 행복합니다.
김순호1965년 안동 출생 △경주문예대 수료, 동리목월 문예창작반 수료
● 심사평 -수틀에 앉힌 내간체의 그림 같은 작품
올해 투고 작품에는 시조 형식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한 원고가 많았다. 열망에 상응하는 수준 높은 교육이 제공되지 못하고 있는 시조 현실이 가슴 아프다. 초등과 중등 과정에 시조 창작에 관한 교육과 학습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아가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여러 평생교육기관에서도 현대 시조 창작에 관한 과정을 다루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응모작 중 최종까지 우열을 다툰 작품은 ‘점묘의 사계’, ‘양파의 기원’, ‘아버지의 등’, ‘시리우스의 밤’, ‘꽃이 된 글씨체’ 5편이었다. ‘점묘의 사계’는 단시조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은 응모자의 다른 작품 ‘그림시’에서의 시도 또한 주목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다만 사유의 깊이 면에서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다. ‘양파의 기원’은 적절한 발상과 시조 형식을 원용해서 만들어내는 결구의 매무새가 믿음직스러웠지만 신춘에 펼쳐 놓기에는 조금 어색하고 부족함을 느꼈다. ‘아버지의 등’은 가정을 이끌어 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힘 있고 건강한 메시지로 그려냈지만 새로움을 발견하기 어려웠다.
‘시리우스의 밤’은 적절한 서정성과 재치 있는 문장으로 개성적인 매력을 보여 주었다. ‘꽃이 된 글씨체’는 노년의 서사를 잘 표현해낸 시조였다. 이 두 작품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하다가 수틀에 앉힌 내간체의 그림 같은 김순호 씨의 ‘꽃이 된 글씨체’에 영광을 돌리기로 최종 결정했다. 아울러 그의 다른 작품들 또한 이 결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며 시조시인으로서 대성하길 기대하고 또 빈다.
심사:이근배, 이우걸 시조시인
[2026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프랙털 / 이수빈
빈 종이에 선을 그어 달력을 만들었다
허술한 약속을 칸에 넣기 위해서
직선은 고집이 세서 눈 맞춤이 어렵다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야
글씨든 사람이든 전선이든 심전도든
타래가 끊기지 않도록 미로를 걷는 일
연속이 미분을 보장하진 않는다
끊어진 도함수로 숨 쉬어도 삶이라면
숫자를 훌쩍훌쩍 세자 하나둘셋 다섯여덟
사람들은 나에게 눈을 보라 다그친다
종이에는 달마다 이름이 적히고
끝없이 자신을 반복하는 눈송이가 쌓인다
● 당선소감 -"아직 써야 할 문장이 있다" 그 외침이 여기로 이끌어
작년 이맘때, 인왕산에서 “나는 아직 써야 할 문장이 있어”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발밑으로 훤히 보이는 서울 풍경에 잔뜩 겁을 먹고 외친 말이었지만, 항상 그런 마음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여태 저는 써야 할 문장이 무엇인지 몰라 단어를 추리고 있습니다.
살아감에 있어 몇 없을 커다란 감동을 너무 이르게 맞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듭니다. 저의 서툶을 실감합니다. 그럼에도 제가 그어나갈 선이 긴 만큼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은 경험을 하겠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맛있는 게 생기면 누나부터 찾는 동생과 저의 자랑인 부모님, 사랑합니다. 타지에서 저를 보살펴주신 김옥성 할머니, 한결같은 응원 보내주신 김옥희 할머니와 고모 사랑합니다. 가장 먼저 제 글을 믿어주신 김상규 선생님, 당선 소감에 성함 적어달라고 하신 말씀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백승이 선생님, 양상욱 선생님과 이곳에 다 적지 못한 저를 만들어주신 모든 선생님,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깊은 고민을 함께해준 윤나, 채윤이, 민송이, 주연이, 예은이, 예진이, 윤아, 서연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친애하는 문예 동아리 ‘달을 쏘다’가 앞으로도 문학을 잃지 않는 이름이 되길 바랍니다.
이 설익은 마음이 누군가에게 다정한 눈 맞춤으로 전해진다면 기쁘겠습니다.
이수빈 –2006년 출생, -동탄국제고등학교 졸업
● 심사평 -간명한 언어들로 밀도 높은 정형 구축… 발랄한 개성 돋보여
형식은 내용으로 새로워진다. 틀에 묶인 말들은 낡기 마련. 시조가 현대의 정형시임을 간과하지 않아야 답습을 타넘는다. 오래된 정형과의 밀당 속에서도 지금-여기의 인식과 감각을 지속적으로 찾아야 새로운 시조를 만난다.
늘어난 응모작에서 형식 미달부터 내리니 심사 대상이 좁혀졌다. 최종 남은 ‘반납예정일’, ‘토스터 연습’, ‘벽의 탁본’, ‘빠가사리’, ‘프랙털’ 등을 거듭 읽으며 숙고에 들어갔다. ‘반납예정일’은 책에 감정을 엮어 기한과 반납이라는 나날의 성찰을 찬찬히 짚어냈고, ‘토스터 연습’은 토스터에 출근 전후의 표정을 이입하는 일상의 형상화가 산뜻했다. 벽에서 땜질과 묵은 때로 생의 단면을 톺아본 ‘벽의 탁본’과, 노가다 판에서 뻣센 뼈의 시간과 노역을 건져낸 ‘빠가사리’도 피상적 언술을 넘어서는 구체성이 돋보였다. 이들을 훌쩍 제친 등장은 ‘프랙털’(이수빈)이라는 발랄한 개성이었다.
이수빈 씨는 장식적 수사를 배제한 간명한 언어들로 밀도 높은 정형을 구축한다. 삶의 이면을 꿰는 사유의 감각적인 압축과 형식의 단단한 구조화는 모든 작품(8편)에서 고르게 나타난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구(句)와 율(律)의 자연스러운 조율도 참신한 문장으로 이어진다. 간혹 어색한 구가 있지만, 각 수의 완결 속에서 시상을 한 편의 시조로 완성하는 정형 속의 고행을 잘 다져온 듯하다. ‘사는 건 계속해서 선을 긋는 일’이라는 자신의 통찰을 밀고 나가 ‘선에 갇히지 않는’ 시조로 새뜻을 세우길 기대한다.
심사:정수자 시조시인
[2026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1인칭의 저녁 / 이복렬
땅거미가 내려오면 등줄기가 더 시리다
등 기댈 곳 하나 없는 앞뒤가 허방이라
가로등 불을 밝히는
저문 거리로 나선다
차디찬 바닥 짚고 맨몸으로 버틴 나날
퇴근족 틈에 서서 올려다본 하늘에는
아득한 허공을 뚫고
별 하나가 떠 온다
눈꽃 핀 나뭇가지 뼈가 시린 엄동에도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는 있어
쇼윈도 마네킹들의
옷차림이 가볍다
꽉 막힌 네거리를 활짝 여는 초록 신호
자동차 불빛 따라 발걸음이 빨라질 때
언 강이 용틀임하듯
닫힌 문이 열린다
● 당선소감 -포기 안 한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
돌아보면 참으로 길고도 지난한 여정이었습니다. ‘이제, 그만!’이라는 마음이 들 때마다 ‘갈 데까지 가 보자’라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싸워야 했습니다. ‘포기는 배추 셀 때나 하는 말’이란 소리를 믿고 싶었습니다. 늘 빙판 위에 선 듯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도 아귀가 맞물려 돌아가는 정형의 말맛에 빠져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가야 할 길은 먼데 해는 벌써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할 수 있다는 신념 하나로 버틴 날들이었습니다.
더딘 걸음을 다그치고, 부족함을 담금질하며 언어와 시간을 엮고 또 엮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변하고도 남았을 열병의 시간이 마침내 평온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목마르게 갈고닦은 제 애착의 텃밭에도 환한 꽃이 피었습니다. 오늘의 영광은 그 포기하지 않은 집념의 시간에 대한 하늘의 감응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따뜻이 언 손을 잡아 주신 서울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두 손 모아 감사의 큰절을 올립니다. 우리 고유의 숨결이 담긴 정형시의 바른길로 이끌어 주신 민족시사관학교 윤금초 교수님과 ‘지금_여기’의 시 정신을 일깨워 주신 임채성 시인님께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랫동안 얼굴을 맞댄 다정다감한 글벗이자 멘토이신 선배 문우님들께서 느긋이 기다려 주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삶의 윤활유처럼 위로와 공감이 되는 가슴 따뜻한 시조를 쓰고 싶습니다. 고집스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먼 길을 휘돌아올 때 후줄근히 지친 마음을 다독거려 주는 가족이 있어 이제껏 버틸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맙고 느꺼울 따름입니다. 기쁨보다는 시인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복렬:1944년 전남 장흥 출생 ▲한국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심사평 -긴 호흡 속에 서사 구성하는 능력 보여줘
202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는 예년보다 훨씬 많은 응모작이 투고되었다. 심사위원들은 한 편씩 천천히 읽어 가면서 이들 시편이 저마다 개성적인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가운데 구체적 생활 경험과 상상력에 심의를 쏟은 시편들을 호의적으로 읽었고, 결국 시상의 구체성과 작품의 완결성 그리고 앞으로 시인으로 사는 삶을 이끌어갈 지속가능성 등을 두루 참작하여 이복렬의 ‘1인칭의 저녁’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1인칭의 저녁’은 땅거미 내려오는 저문 거리에 하루의 지친 삶을 내려놓는 이들의 구체적 내면을 형상화한 명편이다. 퇴근하는 이들 사이로 떠오르는 별 하나가 삶의 피로와 역방향에서 아름다운 대안 심상으로 찾아온다. 먼 봄을 채근하는 깃 고운 새의 심상도 마찬가지로 희망의 역동성을 파생시키면서 이들을 규율해 온 시간과 화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언 강의 용틀임 속에서 닫힌 문이 열리는 이미지야말로 그것이 남겼을 희망의 잔상을 상상하게끔 해준다. 당선작은 비교적 긴 호흡 속에 이러한 서사를 구성하는 만만찮은 능력을 보여준 사례로서,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것을 예감하게 해 주었다.
이 밖에도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다. 감각적 수사의 한 정점을 보여 준 ‘봄을 수식하다’, 기억의 한 자락을 산뜻한 감각으로 쓴 ‘시간 밖을 걷다’, 노동의 가치와 삶의 소중함을 노래한 ‘아비’ 등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음을 부기한다. 당선작은 언어 구사의 구체성과 완성도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선자에게 크나큰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이근배 시조시인, 유성호 문학평론가
2026년 매일2026,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개펄 여자/김경덕
파도 소리 기울여 미세기를 읽지요
한창때엔 난바다의 깊이까지 가늠했지요
해감내 찌든 가슴에 펄을 펼친 지 오래
망둥이가 뛰어오르고 바지락이 숨 쉬어요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해요
꽃게가 하도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
차라리 메마르지 넘쳐흐르지 않을 거면
배를 밀던 사내들은 죄 어디로 내뺐나
갓바다 물비늘 조으는목, 한참 맑습니다
<당선소감>"골방에서, 오늘도, 나는, 쓴다."
밥은 집에서 먹어야 맛있고 술은 밖에서 마셔야 맛있다. 시는 뒤통수 톡톡 두들기며 연필로 써야 잘 써진다. 방바닥에 흐지부지 눌어붙어 쓱쓱 배 문지르며, 쓰다가 지우고 썼다가 고치는 오만가지 재미가 시다. 그래서 뒷맛이 남는 게다. 볼펜은 영판 아니라고 본다. 속도가 너무 빨라 질린다. 흐릿하지만 연필처럼 부루퉁한 여유로움이 나는 좋다. 연필이 없으면 만년필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 하얀 종이에 실실 스며드는 잉크맛이 먹을 만하다.
"꿈으로 가득 찬 설레는 내 가슴에 사랑을 쓰려거든 연필로 쓰세요", 라디오에서 유행가가 흘러나온다. 사랑도 연필맛? 소금처럼, 시처럼, 맵고, 짤까?? 시금치보다, 시보다, 상큼하고, 맛있을까??
무작정 썼다. 아무 목적 없이 그냥, 쓴 것 같다. 어떤 '주의'나 '주장'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나 자신, '줏대 없다'라는 말이 참 잘 어울리겠다. 간신히 한 편 퇴고해놓고 할 말을 다 하지 못해 불평한 적도 있다. 극도의 자기모순이며 소모적인 행위에 지레 겁먹고 낙담하여 자책이나 자학에 빠지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자학보다 자책이 훨씬 나았다.
한 발짝 다가서면 서너 발짝씩 달아나버리는 시. 한 가닥, 간절히 붙들고 내가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미 숱했던 질문들처럼 회의와 절망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으리라. 종착지가 어디이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무런 해답도 적혀 있지 않을 이정표(?)만을 찾아 헤매지나 않을지…… 그러나 미칠 만큼 좋아졌다. 그러니 계속 써야겠다. 누군가 말했다. 천천히 가는 것보다 멈추는 게 이제 더 두렵다고.
미욱한 작품을 끌어올려주신 심사위원님, 매일신문사, 저를 아는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경덕:1963년 경북 예천 출생. 대구 거주
<심사평>인구 소멸 지역의 한 상징으로 개펄을 바라보는 신선한 시각.
이번 심사에 임하면서 먼저 "우리 시대에 시조의 존재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하는 작품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정형의 틀 속에서 시심의 확장을 위한 본원적 의지를 잘 표현한 작품을 찾는 일이 현대시조의 오늘과 내일을 담보하는 명제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시가 난해하고 산문화되는 이때 형식 미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응모한 400여 편의 작품은 대체로 그런 기준 위에서 내면 의식을 치열히 투영하고 있었다.
심사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네 편이었다. 이지영의 '블랙홀'은 저마다 손전화를 보면서 식사하는 한 가족의 풍경을, 박하영의 '아크릴 수세미는 얼룩을 응시하잖아'는 삶의 얼룩을 지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현대인의 세태를 그려낸다. 두 작품은 공이 우리 시대의 우울한 풍경화에 주목하였는데 아쉬운 점은 현실에 치중한 나머지 또 다른 한 축인 서정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었다.
그에 비해 유귀덕의 '비와 세레나데'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면서 감각적으로 구와 구, 장과 장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비를 동반한 환경 묘사에는 성공하였으나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지 않은 아쉬움이 있었다.
마지막 남은 김경덕의 '개펄 여자'는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서정성을 잘 조화시킨 작품으로 눈길을 끈다. 시인은 개펄을 지방 인구 소멸 지역의 한 상징으로 바라본다. "꽃게가 하도 깨물어 못쓰게 된 젖꽃판"은 분주한 생명 활동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뱀장어 따개비 저어새를 수태'하는 개펄은 살아나지만, 정작 이곳을 의지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은 점점 사라진다. 이렇듯 대비되는 두 상황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공존을 생각하게 한 능력은 공감의 폭을 넓혀주기에 충분하다.
현대시조 창작에 있어 이런 시각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미덕이다. 함께 보내온 다른 작품에서도 그런 자세를 견지하고 있어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의 영예를 안은 시인에겐 축하를 보내고, 선에 들지 못한 분들에게는 가열한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이달균 시조시인
[2026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방아쇠 수지 / 최애경
검지를 올려놓은 방아쇠를 당긴다
돋보기 쓴 총알이 과녁을 찾는 동안
불거진 힘줄 사이로
낯선 이름 박힌다
수선실 조명 아래 물 빠진 상표들
손가락 딸깍딸깍 맞접힌 한 평 햇살
깡마른 실 꾸러미가 땀을 따라 같이 뛴다
실밥 푼 얇은 오후 입에 문 졸음 한 올
주름을 당길 때마다 굽어지는 손가락
약속을 놓을 수 없어
펼 수 없는 순간들
*방아쇠 수지:손가락을 펼 때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저항감을 느끼는 질환
● 당선 소감 -"경이로운 순간 더 자주 만나게 정진“
동네 야산을 자주 오릅니다. 어떤 날은 평소와는 다르게 내려오던 길로 산을 오를 때가 있습니다. 마지막은 내리막이라 기분 좋게 산행이 끝내던 길을 초입에서 가파른 경사로 만납니다. 그럴 때면 껍질이 반지르르하고 늠름한 소나무의 옆구리에 보이지 않던 깊은 옹이가 보입니다. 익숙한 풍경인가 싶었는데 찬찬히 보면 낯설기도 하고, 거기 서 있는 나무며 이름 모를 풀들에 스쳐간 상처들도 보입니다. 산을 내려올 때면 시의 길이 이러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학창 시절에 배운 고시조의 가락과 편안한 호흡이 참 좋았습니다. 시어는 간결했지만 사유는 깊었습니다. 현대시조를 배우면서 시조라는 단정하고 품격 있는 형식 속에 흩어진 생각들을 어떻게 다듬어 넣을까를 무척 고민했습니다. 참 많이 더듬거렸고 넘어졌지만 언젠가는 시조가 제게 손을 내미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처럼 말입니다.
눈치 빠른 아이에서 배려하는 어른으로 살아오는 동안 오래 눌린 말들이 하나씩 올라와서 미리 자리 만들어 비워 놓은 듯이 꼭 맞는 시어가 되는 환희의 순간도 있었습니다. 시조가 나에게 주는 경이로운 순간과 더 자주 만나도록 더 많은 시간을 헤매고 내 안의 부끄러움과 마주하겠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아직 덜 여문 제 작품을 뽑아주신 <부산일보>와 심사위원님께 마음 담아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언제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응원이 되어준 문우님들 감사합니다. 엄마로서 온전하게 있어 주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에 도전하느라 허둥댔지만 꿈을 잃지 않으면 결국에는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 기쁩니다. 언젠가는 딸의 시집을 읽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와, 혼자가 아니도록 곁에서 따스하게 다독여준 소중한 가족들과 이 기쁨을 함께하겠습니다.
최애경: 대구 출생, 2025 중앙일보 신춘 시조 대상, 2023 노산시조문학 입상, 2023 청풍명월 입상.
● 심사평-소시민이 지켜낸 ‘약속’의 무게 '확장’
신춘문예에 작품을 투고한 예비 작가들의 설렘과 떨림은 고스란히 심사위원에게도 전달된다. 거기에 기대를 더하여 시조를 읽었다.
신산한 삶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담은 작품이 많이 보였고 신세대나 청소년의 미래를 염려하는 작품, 급변하는 현실을 다룬 작품 또한 눈에 뜨여 시조의 확장을 가져온 점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다양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도식화된 주제에 머무르는 작품과 형상화가 덜 된 작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 작품, 시조의 틀 안에 생각을 가둔 작품 등은 아쉬웠다.
‘가자미 이불’ ‘뚫다, 겨울 고립’ ‘불개미의 날개’ ‘바람이 번지점프 할 때’ ‘낙타, 갈래 말에 대한 고찰’ 등은 활달한 생각을 자신만의 체험으로 녹여 감동과 깊이를 더한 작품이다. 신선한 비유와 세밀한 묘사, 현 세태에 대한 비판의식, 형상화의 미학적 완성도, 개성적인 말의 부림에서 각각 좋은 점수를 받았지만, 함께 투고한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고 시조가 가진 운문으로서의 성격을 잘 소화하지 못한 점,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주제를 성급히 드러낸 점 등에서 내려놓았다.
당선작 ‘방아쇠 수지’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방아쇠 수지’의 이미지가 수선인의 삶에 잘 투영된 수작이다. 장과 장을 긴장감 있게 이끌어 가며 첫수에서 셋째 수까지 독립성을 유지하되 유기적인 관계를 끝까지 놓지 않은 작품이다. ‘검지’에서부터 ‘낯선 이름’ ‘물 빠진 상표’ ‘땀’ ‘약속’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어휘의 선택은 진실성을 담보하고 오랜 시간 작품을 갈고 닦은 흔적이다. ‘약속’을 지키는 것은 ‘방아쇠 수지’로 대변되는 소시민이라는 것을 우리 사회를 향해 잔잔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말하고 있어 감동이 깊다. 개인적인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약속’의 무게를 그려내 사회성까지 확장한 점을 높이 샀고 같이 응모한 작품 또한 당선작과 어금버금했다.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의 다짐은 곧 시조와의 약속이다. 부디 평생 시조와 함께하는 훌륭한 시조시인이길 희망한다. 심사:정희경 시조시인
[2026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직장은 백 그램 / 오시내
봉합해야 열리는
그 속은 통제구역
불안한 내 눈동자
문 앞에 꽂혀있고
막다른 한 남자의 길
누운 채 잇고 있다
직장이 잘리기 전
곪아가던 깊은 그 속
뒤축이 무너질 때
흔들리는 두 어깨
아무도 눈치채지 못해
말단은 짧아졌다
애 터진 날이 모여
아파오는 시간에
떼어낸 백 그램만큼
내일이 길어지면
차갑게 식었던 몸은
온기로 돌아올까
● 당선 소감 -약자가 짊어질 사물의 걸음 풀 것
하루를 반으로 접고 또 접고 해가 기울 때, 낯선 번호가 떴습니다. 기자님의 당선이란 말만 또렷하게 들렸습니다.
책상 위, 수북한 책들 속에 한 권의 책처럼 앉아 있던 수많은 날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그중에 눈에 띄는 유일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늘 모서리가 많은 글을 버릇처럼 응모했습니다. 안쪽에 남아있던 기대감마저 간데없고 자신감은 바닥을 써 내려갔습니다. 계절보다 떨어지는 잎들만 보였습니다. 눈을 감았습니다.
떨어지지 마. ‘죽음 앞에 시를 놓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숨어있던 객기가 올라왔습니다. 연초에 중한 수술을 했습니다. 수술 날짜 예약하러 가는 날, 대학병원 로비에서 시조, 월 장원이란 소식을 마주했습니다. 순간 중한 병을 잊었습니다. 시조를 앞에 놓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 행운이었는데 연말에 또 행운을 맞이합니다. 치열하게 글을 쓰라는 의미로, 들리지 않는 신의 언어를 해석합니다. 가슴에 품은 종교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참 많이 돌아왔습니다. 때가 있다는 이치로 받아들입니다. 앞으로 약자가 짊어질 사물들의 걸음을 풀어놓겠습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과 국제신문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독하게 공부하는 것에 솔선수범하시는 조경선 선생님,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더불어 서로에게 응원을 아끼지 않은 시란 문우님들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당신의 벼랑이 우리의 꽃으로 필 줄이야, 김수희 씨, 이제 괜찮습니다. 나의 정체성인 미주, 민철, 미소와 기쁨을 함께합니다. 지금부터는 정체성이 시인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시내(본명 안영미) 1964년생. 2024년1월, 2025년2월 중앙시조백일장 장원. 시란 동인. 경기도 안성.
● 심사평-해석 다의성·어휘 참신성 돋보여
시조 정형의 이해를 기반으로 하되 주제나 표현상 낡음을 탈피하면서 시적 미감이 고루 구현된 참신성을 상상하며 원고를 건네받았다. 응모는 모두 158명 626편이었다.
응모작의 전반적 특징을 보면 첫째 현실적 감성의 제재가 많으나 이를 율감에 담은 시적 표현이 생경했다. 둘째 유행하는 조어로 제목을 만든 것은 생뚱맞지만 시적인 면에서 긍정적 접근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받쳐줄 주제의 심화·확장이 부족했다. 셋째 시적 미감 즉, 독자가 오감을 통해 체험할 구체적 장면과 감각적 언어 운용도 미숙했다.
종심은 6명의 작품에 주목했고 시조 미학의 필요충분 요소(율격 주제 제재 구성 표현)에 구현된 섬세한 심미적 기량을 바탕으로 3명의 작품, ‘CPR’ ‘희망에도 꽝은 존재한다’ ‘직장은 백 그램’을 올렸다.
‘CPR’과 ‘희망에도 꽝은 존재한다’는 시조 리듬과 보법, 감성은 무난했으나 주제의 폭과 깊이가 아쉬웠다. 당선작 ‘직장은 백 그램’은 시조 미학의 필요충분 요소 모든 부문을 충족하면서도 제재인 직장이 지니는 중의적 구조로 시적 완결성을 잘 구현하였다. 즉, 시적 해석의 다의성을 잘 유도했다. 동시에 현대 감성을 지닌 어휘를 잘 구사한 참신성이 돋보였다. 좋은 작품으로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당선자와 더불어 시조의 지평을 더 넓혀 나가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서태수, 최성아 시조시인
202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바닥 신호등/이영미
고개 숙인 자존심을 세워주고 싶었어요
섬이 된 스몸비족 헤엄쳐 나오는 길
바닥에 푸른빛 등대 무자맥질 도와요
불통과 무관심에 푹 빠진 회색 도시
저 아래 해저에는 삼각파도 들끓는지
몸에 밴 심해의 습성
느닷없이 나타나요
꽉 들어찬 별들로 하늘은 이미 만원
차도와 인도 사이 공제선에 빛을 심어
지상에 더 머물라고 수호신을 내보냈죠
멀리서도 알아보고 바퀴마저 숨 고르는
목숨줄 길잡이로 끌어주고 싶었어요
뭍으로 진입한 섬들
그제서야 안심하는,
<당선 소감>메모해두던 습관, 한수가 되고 작품이 되다
금방 다가올 것 같아도 어느새 달아나고 잠시 얼굴 내밀어 소곤대다 밀어내는, 제게 시조란 물음표 같은 밀당의 연구대상이었습니다. 단아하고 멋스러운 그 성품 안에는 놀랍게도 당차면서도 범접하지 못할 위엄까지 갖추고 있어 여러 해 동안 저는 주위만 도는 히키코모리가 되곤 했지요. 그런데 그런 모습이 측은했는지 황송하게도 그 높은 문이 이렇게 활짝 열려 시조를 향한 저의 종천지모는 계속 이어져도 될 것 같습니다.
잠들기 전 한 구절 떠오르면 기록하고 걷다가도 문득 돌부리에서 캐낸 사유들이 부서질까 멈춰 서서 메모해 두던 습관이 한 수가 되고 작품으로 완성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초심을 발판 삼아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로 글쓰기에 정진하겠습니다. 글의 맛을 버무릴 줄 아는 감각도 잊지 말아야겠지요. 더불어 당선작인 ‘바닥 신호등’의 의미 따라 빛과 지표가 되는 시인으로 거듭나겠습니다.
제게 이토록 영광스러운 길로 이끌어주신 경상일보 신춘문예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제 시조를 맑은 눈으로 읽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엎드려 절 올립니다. 나태하지 않도록 더 달금질해 나가겠습니다. 힘 실어준 가족들과 특히 방방곡곡 기도처를 찾아다니며 애쓴 남편의 간절한 서원도 여기에 추가합니다.
이영미:충남 연기 출생, 2022년 지용신인문학상, 2024년 백수문학신인상
<심사평>손바닥만한 시조 한편에 내장된 거대한 풍경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열 분의 서른여섯 편이었다. 어렵게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인 만큼 대부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지만, 군계일학의 돌올한 수작은 선뜻 눈에 띄지 않았다. 심사숙고를 거듭한 끝에, ‘살구꽃은 피었건만’, ‘AI시대-포노사피엔스의 여름’, ‘바닥 신호등’ 등 3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당선작인 ‘바닥 신호등’은 소재에 대한 꼼꼼한 성찰과 남다른 비유, 입체적 구성이 돋보이는 가작이다. 스몸비족을 느닷없이 ‘섬’에다 비유하는 순간, ‘헤엄’, ‘푸른 빛 등대’, ‘무자맥질’, ‘해저’, ‘삼각파도’, ‘심해’ 등 바다 관련 시어들이 연쇄적으로 등장하면서, 바닥 신호등이 설치된 대도시의 횡단보도 일대가 난데없이 온통 바다 이미지로 출렁거린다. 손바닥만 한 시조 한 편 속에 바다는 말할 것도 없고, ‘별’과 ‘하늘’과 ‘뭍’까지 포괄하는 거대 풍경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에도 방점을 찍었다.
당선을 뜨겁게 축하드리며, 앞으로 우리 시조단에 지각변동을 크게 일으킬 주역으로 당당하게 성장하시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울러 아쉽게도 좋은 기회를 놓치신 분들에게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가락과 현실 인식과 표현의 삼박자를 제대로 갖춘 빼어난 작품으로 다시 한번 도전해 주셨으면 한다.
심사위원 : 이종문 시조시인
[2026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부부 리모델링- 허은주
노후된 풍경들이 해 넘어 기울 동안
금이 간 석양 끝이 조금씩 갈라지고
틈새로 메우지 못한 말들이 흩어진다
햇살이 조심스레 당신을 훑을수록
침묵의 그림자는 구석으로 밀려나고
굳어져 긁어낸 자리 마디마디 아리다
나란히 걷던 줄눈 지평선은 어긋나도
드릴로 뚫린 산은 부드럽게 스러지며
우리가 지어질 자리 꽃대가 솟고 있다
[당선소감] -독자와 소통하고 아픔 어루만질 것
감기에 걸릴 때면 슬픈 바이러스에 중독이 된 것처럼 글을 쓰곤 했습니다. 아프다는 생색을 온 열감으로 보여주고 싶었나 봅니다. 어릴 적 엄마의 손길이 이마에 닿으면 차갑고 싱그러운 위안처럼 제가 가진 세계가 보호받는 느낌이었어요. 저에게 글은 투정이고 용기 있는 고백이며 상처를 멋지게 다듬는 의사이자 엄마의 손길, 그 따뜻함인 것 같습니다.
회색빛 하늘이 무거운 날 버스 안에서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필 이때? 탄식으로 내쉬는 기쁨을 틀어막기 바쁜 중에도 “저 신춘문예 됐어요”라고 외치고 싶었죠. 주책없이 눈물은 왜 나는지 뿌옇게 보이는 풍경들까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어요. 더욱이 올해는 기대를 안 했던지라 이 놀라움조차 비현실 같다는 느낌뿐이었습니다.
사실 시조를 쓰면서 많이 흔들렸습니다. 제가 생각한 시조의 방향이 맞는 건지 늘 불안해하며 글을 써온 저에게 신춘문예 당선은 황금빛 이정표 하나를 굳세게 박아 준 결실이었습니다. 앞으론 글자 하나하나에 깊이와 무게를 책임지는 길을 걸으며 독자와 소통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시조시인이 되겠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소명 또한 시조와 함께 서로를 밝히는 친구처럼 성장하려 합니다.
저에게 첫 시조의 길을 열어주신 김성숙 선생님과 시조의 아름다움을 큰 그림으로 보여주신 신웅순 교수님, 젊은 감각의 현대 시조를 심어주신 고완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금강 시조 문우들과 조용히 조력자가 되어준 남편 상호, 사랑하는 소하, 준의, 기도하고 계실 엄마와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과 경남신문에 감사드리며 문을 열어주신 미지의 세계로 두려움 없이 발을 떼려 합니다. △허은주:1968년생 △대전 거주 △한국화 화가
[심사평] -시조가 가진 시간·공간성 돋보여
문학 활동의 출발점이자 작가로서 인정받는 한 해 첫 등용문이 신춘문예다. 참신한 작가를 만날 기대감으로 심사에 임했다. 지켜보는 응모자들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고 강한 설렘도 있었다.
시조는 밀려오는 신문학의 거센 기류에도 불구하고 자기 언어와 전통을 지키려는 문학적인 실천이 있었다. 시조는 단순한 3장 형식이 아니라 모국어의 질서와 음악성을 존중하는 자존의 우리 문학이다. 더불어 시조는 더하거나 모자람 없는 함축과 긴장감을 지닌 가락을 생명으로 한다.
예년에 비해 응모가 많았던 총 344편의 시조를 숙독하였다. 올해 시조 부문 응모작은 대체로 정형률에 대한 이해가 깊은 노련한 작품과 행간의 불균형, 음수율이 느슨하고 의욕만 앞서는 설익은 작품으로 나눠졌다.
투고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 ‘채비’와 ‘부부 리모델링’으로 압축되었다. 두 작품을 놓고 숙의한 끝에 심사위원들은 ‘부부 리모델링’을 당선작으로 합의했다. 신인의 패기로 소재와 주제를 부리는 능력을 먼저 살폈다.
그런 측면에서 당선작 ‘부부 리모델링’은 종장이 돋보이는 반전이 있거나 긴장감은 다소 아쉬웠지만, 시조가 가진 시간성과 공간성을 잘 보여주었다. 노후화 현상으로 증축하거나 개축하는 것이 건축물에만 해당되겠는가. 줄눈처럼 간격과 높이를 고려하며 줄 맞춰 살던 부부도 낡은 벽지나 오래된 창문처럼 헐거워지면 그 틈새를 바르거나 채워가야 한다. 하수구처럼 막혔다고 소통하지 않는 침묵의 자리에 햇살이 비추고 소통하니 꽃대가 솟는다. 감정이 과장되지 않게 여운을 남겨둔 채 형식미와 균형미를 모범적으로 보여주었다.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동봉한 작품 ‘기억의 빨랫줄’과 ‘캣 타워’에서도 오랜 습작의 튼튼함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시조를 오래 쓸 것 같은 믿음이 간다. 당선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전하며 치열하게 정진하여 아름다운 작품으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김연동 옥영숙
2026한라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윈드 댐퍼/최광복
바람을 읽어내야 꼿꼿이 설 수 있다
수백 톤 무게 추를 허공에 매달고서
희미한 박동소리에 주파수를 맞춘다
찢어질 듯 팽팽한 장력을 거스르며
밀려드는 욕망을 가까스로 잠재워도
마음은 순간을 흔들며 균열을 일으킨다
태풍도 지진도 한 눈금씩 받아적듯
파동을 되새기며 다시 서는 몸의 경계
아득한 떨림을 안고 낮과 밤에 귀를 댄다
*초고층 건물의 중심을 잡는 장치
<당선 소감>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늘 고민해 왔었습니다.
어떤 날은 도무지 각이 나오지 않는 꼭짓점에서 갈등하기도 했고
때로는 가던 길을 되돌아와 제자리걸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제 안의 댐퍼가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심지가 굳지 못해 늘 경계에 끌려다니고,
가녀린 실바람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은 아닌지…
밀려드는 욕망을 잠재울 때도 마음은 늘 순간을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점점 더 타협하고 안주하는 스스로를 측은하게 바라보기도 합니다.
이제 시조 안에서 세상의 말을 한 눈금씩 받아적고
제 안의 울림에도 더욱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먼저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 주신 한라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열어 주신 길을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묵묵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웃의 말 못 할 아픔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기꺼이 연대하여 작은 목소리들이 외면받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구부렁길의 선한 걸음이 되고 싶습니다.
시절가조(時節歌調)라 말씀하시며 시대정신을 담아내셨던 시조인들을 본받고 싶습니다. 앞서 잘 닦아놓으신 그 길에 부끄럽지 않도록 저만의 뿌리, 역시 잘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서툴고 어눌한 제자를 따뜻한 사랑으로 이끌어주신 정경화 지도교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경주불교학생회 47대, 경주문예대학 38기, 초림, 들풀시조, 가족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참, 지월스님, 지만스님도 기뻐해 주실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광복
<심사평>물리적 언어들의 결합이 더해준 깊이
우리 심사위원 3명은 형식, 주제와 소재, 형상화와 시어 사용 등을 기준으로 접수된 500여 편의 작품을 3등분하고 각각 10편을 골라냈다. 이어 골라진 30여 편을 윤독하며 2편씩 추려냈다.
'코바늘뜨기 테라피', '와이파이존', '봄, 숲은 용접 중이다', 'AS를 부르면 AI가 나온다', '투명한 벽-키오스크', '윈드 댐퍼'가 이에 해당한다. 이 6편은 일정 수준에 올라 있어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숙독과 논의 끝에 '투명한 벽-키오스크'와 '윈드 댐퍼'로 압축했다.
'투명한 벽-키오스크'는 호흡이 길고 기술 진보의 속도에 못 따라가는 세대의 아픔을 절절히 표현했지만, 설명적인 부분이 더러 있고, '무심타'와 같은 시어나 기시감을 주는 시구가 거슬렸다.
결국 '윈드 댐퍼'를 일치된 의견으로 선정했다. '윈드 댐퍼'의 언어들은 다소 공학적이고 금속성이라 차갑고 딱딱하다. 하지만 "바람을 읽어내야 꼿꼿이 설 수 있다"에서 그 주체를 초고층 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치환했을 때, 물리적 언어들의 결합은 작품의 깊이를 더해주고 의미망을 확장했다. '윈드 댐퍼'가 건물의 흔들림을 줄여주듯이 우리도 흔들리는 누군가의 "희미한 박동 소리에 주파수를 맞춘다"면, "낮과 밤에 귀를 댄다"면 이 작품은 따뜻하다.
최광복 당선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시조 윈드 댐퍼로 우뚝 설 것을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 문순자 시조시인, 이재창 평론가, 홍성운 시조시인
2026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김순호
가면을 앞세우고 표정을 갈아 끼워요
고객님 만족도 조사 무겁게 깔린 하루
한 끼의 오늘 앞에선
웃음이 최선책이죠
가짜로 살다 보면 진짜도 가짜 같아
눈웃음 속에는 씁쓸함도 피고 지죠
실적을 향해 달리는
무리의 무리수들
뾰족한 갑의 말도, 을을을 받아주고
반색은 여기까지 웃거나 삼키고 난
모래알 굵게 씹히는
하루치 감정의 바닥
<당선 소감>“좌절·절망의 반복 작업…영혼의 피와 땀 바칠 터”
12월도 중순이 지나고 이쯤이면 모든 게 다 끝났겠구나 싶었습니다. 초조함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꿈과 현실은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오래전 경주문예대학을 수료하고 동리목월문학관에서 시 강의를 듣던 중 접한, 시조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맞춤한 시어들을 찾고 골라서 시조 3장에 가지런히 앉히는 작업은 수없는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걸려 온 전화에 당선작이 뭔지도 물어보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습니다.종재기만 한 가슴이 뛰는 것도 잠시, 기쁨보다 두려움과 책임감이 온몸을 짓눌렀습니다. 지금부터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될지 겁부터 났습니다. 하지만 봄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출발선에서 기꺼이 앞으로 달려가려고 합니다. 비유와 상징의 압축미를 정형의 틀에 담아 생명을 불어넣는 따뜻한 시를 쓰고 싶습니다. 여기에 기꺼이 제 영혼의 피와 땀을 바치고 싶습니다.
많이 부족한 작품에 큰 영광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두분께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제게 꿈같은 기회의 장을 마련해 주신 농민신문사에도 마음 담아 감사드립니다.
외롭고 힘든 시조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따뜻한 응원을 해주신 소중한 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그리고 말수는 적어도 끝까지 해보라고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등댓불 삼부자, 우리 가족들 감사하고 앞으로 더 믿고 사랑하면서 글쓰기에 매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경주문예대학·동리목월문예창작대학 수료
<심사평>감정노동의 실체, 감각적 비유로 보편적 공감 이끌어
현대시조의 본질은 현대성이 기법적으로 구현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의 현실을 얼마나 깊이 있게 의미화하느냐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은 언어의 운용과 의미의 형상화·구조화에 달려 있다. 형식을 앞세워 내용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용을 통해 형식을 빚어내는 작업이 시조를 현대적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중요한 요청이다. 이번 응모작들 가운데는 시조의 형식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고정되고 상투적인 어조와 표현에 머문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시조가 ‘지금 여기’의 언어로 새롭게 발화하기 위해서는 언어 구사와 의미의 형상화에 대한 쇄신이 요구된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은 늘 웃음을 요구받는 노동의 현장을 배경으로, 감정을 감춘 채 하루를 버텨내는 화자의 내면을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서비스 노동과 성과 중심 사회의 압박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며, 웃음이 생존 전략이자 강요된 의무가 되는 현실을 핍진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일상적인 노동 언어를 시적 이미지로 전환해 감정노동의 실체를 선명하게 포착한 점에서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감각적 비유와 절제된 감정의 전개를 통해 보편적 공감의 자리로 확장하는 힘은 함께 응모한 ‘구두, 나가다’ ‘탁상달력의 좌표’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종심에서 함께 논의된 ‘눈사람 DNA’ ‘플라스틱 빨대는 싱싱하다’ ‘접속사의 운행 기법’ 역시 주제를 형상화하는 감각과 표현의 탁월함이 돋보였으나, 다소 익숙한 비유와 상징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았다. 언어의 밀도와 여백에 대한 고민이 더욱 요청된다. 등단의 기쁨을 안은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아쉽게 이번 문턱을 넘지 못한 분들께도 격려의 마음을 보낸다. 앞으로의 창작 여정에서 반갑게 만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서숙희 시조시인, 이송희 시조시인
2026 문화앤피플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금산사 미륵전의 조형 미학/김부배
울림의 목소리는
오늘날도 여전하여
모악산 따순 체온
골짜기로 내려와서
놀라운 백제의 혼불
고스란히 담아 놨네
볼수록 경이롭고
나눌수록 크는 공덕
층마다 들어 올린
저 우아한 균형미여
미륵전 거대한 숨결에
찾는 발길 넋을 잃다
곡선미 조상 손길
용마루에 흘러가고
지붕 무게 떠받치는
네 기둥도 의젓하니
귀공포 용의 형상이
살아나서 꿈틀한다
천궁인가 극락인가
천하 일품 걸작일세
자연미와 인공미가
거룩하게 조화 이룬
조상님 영혼의 미학에
두 손 모아 합장했네.
당선 소감
정적 속에서 길어 올린 가락,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서 문화앤피플의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소식을 전해 들으며 창밖의 계절은 바뀌어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문장의 갈증이 있었습니다. 그 갈증 끝에 마주한 당선 소식은 제게 마치 해가 지지 않는 오후의 햇볕처럼 따뜻하고도 강렬한 떨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시조라는 정형의 틀은 제게 구속이 아닌, 오히려 삶의 무질서를 정제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그릇이었습니다, 초장, 중장, 종장으로 이어지는 그 짧고도 깊은 호흡 속에서 세상의 사소한 풍경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찰나의 감정을 운율에 얹어보는 일은 제 삶의 가장 큰 위안이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문장에 기꺼이 손을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문화앤피플 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더 낮게 살피라"라는 격려로 알겠습니다.
낡은 문법에 안주하지 않고, 시조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이 시대의 호흡을 담아낼 수 있는 시어를 끊임없이 길어 올리겠습니다. 곁에서 묵묵히 저의 문학적 방황을 지켜봐 준 가족들, 그리고 이광녕 스승님 문우님들에게 이 기쁨을 함께 나눔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이제 막 문턱을 넘었을 뿐입니다. 처음 시조를 마주했을 때의 그 순수한 설렘 잊지 않겠습니다. 정제된 언어로 세상과 소통하며, 누군가의 마음 한편에 작은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시인이 되도록 정진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부족한 글을 선택해주신 모든 분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김부배
문화앤피플 2026 신춘문예 시조 부문 당선 김부배
문화앤피플 2026 신춘문예 시조 부문은 우리 전통의 격조와 현대적 감각이 조화를 이룬 김부배 씨의 작품을 선정했다. 당선작 ‘금산사 미륵전의 조형 미학’은 시조 특유의 운율미를 살리면서도 금산사 미륵전이라는 주제를 함축적이고 유려하게 표현한 수작이다. 심사평에 따르면 구조적 균형미가 돋보이며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 시조의 미학을 훌륭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댓글 조회수가 놀랍습니다.
벗님들이 언제 이렇게 많이 다녀가셨나 싶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