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만주, 중국과 동남아와 남태평양 군도와 남태평양 필리핀까지 점령한
일본은 미국이 일본으로 원유 수출을 금지하자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진주만 공격을 주도한 일본해군제독 야마모도 이시로꾸는 미국에 유학 했을때
미국의 잠재력이 어느정도인지를 어떤 일본인 보다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진주만 공격이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으로 애초부터 승산이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군사 전략가는 이시로꾸 야마모토 일본 제독이 진주만에 2차공격을 감행해
미군의 유류저장 시설을 공격했다면 미군이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 전열을 정비
하는 기간이 일년이상 걸렸을 것이라고 했다.그런 사실을 잘아는 야마모토
제독이 2차공격을 감행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2차공격 해도 승산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가 때문에 그는 이차공격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었다.
일본의 공격을 받은 미국은 산업시설을 전시 체재로 전환해 각종
함정과 군수물자를 생산하기 시각했다. 미동부에 위차한 몇개의 조선소에
상륙용 함정 LST를 건조하면서 조함회사 끼리 경쟁이 붙어 한척 건조에
몇달을 소요했든 기간이 가속도가 붙여 한달에 한정씩 건조해 진수 했다.
일본이 일년간 생산할수 있는 보병영 병기는 미국군수 산업체에서 하루 생산량에
불과 했다. 진주만 기습으로 잠시 승전에 도취했든 일본제국은 남태평양 부터
미군에 패하기 시작하면서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남태양에서 필리핀을 탈환인 미군이 태평양상에 있는 섬을 건너 뛰며 일본의 수송로
를 차단하면서 목을 죄어 오자 일본 군부는 궁여지책으로 몇개의 자살용 전투기종을
개발했다. 위사진은 자살용 항공기 몇개의 기종 중의 일종인 Nakajima K1 115. 일본의
젊은 전투기 조종사들이 자살용 전투기를 몰고 미군함정 25척을 공격해 부분적인
성공을 했을 뿐, 그와 자살용 항공기는 미해군 함정의 대공포에 격추되여 일본은
실전 경험이 있는 조종사를 거의 잃어 일본 열도와 한국에서 자살특공대를 모집해
조종사 훈련을 시켰다.
미군은 그당시 미군함정으로 돌진해 오는 카마카제 공격기의 격추 실황을 터키 사냥이라고
비유할 정도로 카미카제 자살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자살용 공격기 모델 G4M "Betty" 일본군이 사꾸라로 명명한 이카미카제
공격기는 공격이 실패 했을때 아예 지상에 착륙할 수 없도록 착륙 장치가 없게
제작되였다.
폭격기 하체에 장착해 공격목표 지점인 미해군 함정 근처 상공에서 모체인
폭격기에서 분리되여 지상으로 하강하는 순간 3개의 로캣엔진이 점화하면서
목표함정으로 돌진 할때 이 모델의 속도는 그당시 상상 할수 없는 시속650
마일에 도달해 미해군 함정에 장착한 대공포로 대응해 격추 하기가 거의 불가능
한 속도로 미군 함정을 공격해 자폭 했다.
800대를 생산한 이자살용 공격기는 미군이 일본열도에 가깝게 접군했을때
사용하기 위해 비장의 무기로 일본군이 애지중지 하며 사용을 자제해 불과
몇대만 실전에 투입해 일본이 항복한후 전량 미군이 접수했다.
지폭용 항공기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자폭용 미니 잠수함 4종을 84척이나
건조했다. 1945년 10월, 드라이 독에 안에 나열한 미니 잠수함.
미군이 일본열도에 가까이 진격하면 사용할 비장의 자폭용 항공기와 미니 잠수함을 애지중지
하는 사이 미국은 일본 열도 상륙작전시 피할수 없는 인명손실을 막기 위해 원폭을 사용했다.
히로시마 원폭후 미항공기에서 본 페허로 변한 히로시마 시가지 사진.
원폭으로 검게 타죽은 일본인들의 시신. 1988년 서울 올림픽 미국중계 방송은
미NBC방송에서 했다. 올림픽 중계 방송중 한국을 취재하는 NBC방송 기자가
빨래를 하고 있는 한 한국 주부에게, 미국이 2차 대전중 일본에 사용한 원폭에
대해서 묻자 빨래 하는 손길을 놓지 않으며, 그주부는 나보다 더 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한 댓개 정도 일본에 원폭을 사용했으면 좋았을 텐데, 겨우 두개만
사용했냐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한국인이면 모두가 다 그주부의 생각과 같을
것이다.
미국이 더많은 원폭을 사용해 일본이 이차대전후 적어도 몇십년간 재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일본열도 초토화와 함께 더 많은 일본인이 죽었어도 시원치 않은게 한국인이
일본과 일본인들에게 가진 감정이다.
원폭으로 화상을 입은 일본인 생존자. 동경과 같은 일본의 대도시에도 원폭을 사용했어야 했다.
미군의 소이탄 공습으로 철저하게 잿더미로 변한 동경근교 요꼬하마에서 한 일본인이 잿더미로
변한 자신의 집터에서 타다 남은 재목을 세워놓고 처량하게 앉아 있다. 그가
격는 고통은 한국인이 격은 36년간의 고통에 비하면 아마 만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할것이다.
잿더미로 변한 동경근처 공터에서 용도 페기된 버스를 주차하고 집으로 개조해 살고 있는
일본인 가족.
원폭두발에 1945년 8월 15일 일본왕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전국민
옥쇄(자살을)외치며, 죽음으로 천황을 위해 미국에 항거하자는 독려에 남태평양에 있는
싸이판섬 자살의 절벽에서 수백명의 일본인 민간인들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자살을 택했다.
일반 일본 시민이 미군에 포로로 잡히는 굴욕을 피해 대신 자살을 선택 했다면 옥쇄를 독려
하든 일본제국 지도층과 왜왕인 천황부터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직후 질서 정연하게 활복
자살을 했어야 일본 지도부가 2차 대전중 독려한 옥쇄 논리에 부합한다.
그러나 실제 자실을 택한 일본 지도부는 불과 손꼽을 정도로 많지 않았다. 패전후 일본이
보이기 시작한 야비한 미족성의 단면이 서시히 부상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항복한 일본
열도에 정복자(일본은 점령군으로 순화했다)인 연합군인 미군과 호주군이 상륙할것이라는
현실앞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 못한 비굴한 일본 지도층은 밀려들어오는 정복군으로 부터
자신들의 부녀자를 어떻게 하면 보호 할 수 있는가를 놓고 비굴한 지도부가 모여서 궁리한
끝에 그들이 생각해낸 해결책은 정복군에게 일본천황에게 목숨을 바친 전사한 일본군의
미망인들을 위안부로 제공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불과 2-3일전 까지만 해도 죽음으로 천황을 위해 한목숨 바치라고 침튀기며 악쓰던 일본
지도부가 내놓은 일본열도에 상륙하기 시작한 대정복군의 욕정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그야말로 인간이 생각해 낼수 있는 어떤 비하의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더롭고 치사한
결정이었다.
일본인들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어느정도까지 비굴해 질수 있는 지, 막장 같은 그끝이
어디까지 인지를 보여주는 일본인들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차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점령지에서 미군과 현지인의 결혼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점령지에서 미군과 결혼한 외국인이 미국으로 미군과 함께 입국할 수 있는 법을
제정했다.
그법에 의해서 미국으로 입국할 수 있는 비자를 받는 신부는 War Bride(직역하면 전쟁
신부. 번역에는 재주가 없어서 더 부드러운 단어를 찾을 재주가 없다)로 불렀다. 한국
전후 미군과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온 한국인 신부들도 모두 이법에 의해 비자를 받았다.
미군과 결혼한 일본인 신부를 주제로 제작한 영화 포스터
미군과 결혼한 일본인 신부
미군과 결혼한 여인들이 자식과 함께 포즈를 취한 사진
1952년, 호주군과 결혼한 일본인 신부들이 호주군 부사관으로 부터 강의를 듣고 있다.
미군과 결혼한 일본인 신부들이 배를 타고 19일의 길고긴 항해 끝에 미국 쌘프란스크 항에
도착해 걸어 나오는 모습. 이사진과 윗 사진에서 보이는 일본인 신부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인다. 2차대전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미망인이 섞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전쟁신부로 미국
으로 입국한 일본인 신부의 숫자는 5만-10만명 정도로 알려졌다.
이포스트에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쓸때, 1971년 월남으로 출발전 한국으로 1개월 휴가를 갔다
미국으로 돌아올때 일본에서 격은 일이 떠오른다. 미군은 미공군 수송기나 미군이 대절한
여객기에 좌석이 있을때 1불만 내면 탑승이 가능했다.
휴가가 끝나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 김포에서 미수송기를 타고 일본 요꼬다 미군 전용
비행장까지는 왔으나 그비행장에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 휴가가 끝났다.
휴가 기일이 끝나면 공짜 비행기를 탈수가 없다. 근처에 있는 미육군 부대로 가서 신고를
했다. 그때 내가 신고한 미육군 부대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육군 사관학교
생도가 교육을 받고 생활하든 곳이었다.
일본육사 건물은 일본이 패전 하면서 미군이 사무용과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휴가를 연장하고 가불을 해서 민간 여객기를 타기 위해 일주일간을 대기 했다. 휴가를
연장해주고 가불을 해주는 업무를 보는 사무실에는 일본 민간인 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일본 남자가 내일을 친절하게 도와 주면서, 사무실에 들를때 마다 같은 사무
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20대 초반의 혼혈 아가씨를 소개 하면서, 데이트 해보고 서로 좋으
면 결혼하라고 몇번이나 나를 중매 하려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 군발이는 돈이 별로 없다. 그때 한달에 100불 받았든 이 미육군 일등병은
미국으로 돌아가면 곧 월남으로 떠나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데이트나 결혼에는
관심이 없었고 또 없는게 정상이다.
일본을 떠나는날, 서류와 여객기 탑승권을 받으러 갔을때 그는 집요하게
나에게 그혼혈 아가씨와 편지라도 주고 받으라고 권했다.
별 미친놈 다있네, 속으로 생각 하면서 몇십년 세월이지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아가씨는 미군과 정식 결혼하지 않은 일본여인에게서 태어난 사생아가 틀림없었다,
미군과 정식으로 결혼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 났다면 그녀는 그당시 공부할 나이에
미국아닌 일본에서 거주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중년 남자가 그때 나에게 집요하게 중매를 하려고 했든 이유가, 이 아가씨가
혼혈이니 일본에서 살기 힘들것 같다. 그러니 미군복 입은 네가 결혼해서 미국으로
데려가라는 뜻으로 나에게 그녀와의 데이트를 권했었든게 틀림없다.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생각을 했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꽤씸한 일본넘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