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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데뷔 이후 박용택은 LG의 희망과 절망을 대변했다. 올시즌부터는 진정한 ''LG의 박용택''이 되려 한다. 그가 변한다면 LG의 운명은 절망을 딛고 희망으로 전진할 것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2월 19일 일본 오키나와 기노완 구장. 연습경기에 임하는 LG트윈스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선수들의 표정이 남달랐다. 그들의 눈빛은 정규시즌 못지않게 날카로웠고, 연습경기라고 느슨하게 플레이하는 법이 없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난해 두 팀은 양국 리그에서 나란히 꼴찌를 경험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다. 이날 1번 지명타자로 출전한 LG 박용택(31)이었다. 타석에서 박용택은 ‘一’자로 굳게 입을 다문 채 타격에 집중했고 타석에서 벗어났을 때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동료들을 독려하기에 바빴다. 무엇보다 타격감이 좋았다.
이날 박용택은 4명의 투수를 상대로 4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2안타 모두 배트 중심에 제대로 맞은 2루타들이었다. 안타를 내준 투수들도 A급 투수들이었다. 3회 박용택에게 2루타를 맞은 고바야시 후토시는 2008년 드래프트 1순위로 입단해 지난시즌 6승5패 평균자책 4.41를 기록한 요코하마의 차세대 에이스다.
5회 박용택에게 2루타를 맞은 요시미 유지 역시 지난시즌 3승 4패 평균자책 4.27를 기록한 주전 왼손투수였다. 요코하마가 아니었으면 10승, 평균자책 3점대가 가능했을 선수로 꼽히는 요시미의 공을 박용택은 어렵지 않게 우익수 키를 넘기는 2루타로 연결했다. 박용택의 선전은 LG에겐 희망의 메시지였다.
2002년 고려대를 졸업하고 LG에 입단한 박용택은 데뷔 전부터 ‘제 2의 이병규’라는 소릴 들었다. 공, 수, 주 3박자를 갖춘 대형신인이라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프로 첫 출전타석에서 결승타를 때리며 박용택은 자신에 대한 평가가 허황된 기대가 아님을 증명했다.
특히나 그해 포스트시즌에서 신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활약을 펼쳤다. 포스트시즌 최다루타(10개)와 포스트시즌 14번째 1경기 2홈런을 기록하며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비록 삼성에게 패하며 프로 데뷔시즌 우승컵을 안는데 실패했지만 박용택의 등장은 대형신인에 목말라했던 LG에겐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한 것처럼 큰 수확이었다.
2003년 2년차 징크스로 고생한 해를 제외하고 2007년까지 박용택은 제몫을 충실히 했다. 해마다 15개 안팎의 홈런과 20~40개 사이의 도루를 꾸준히 기록하며 파워와 스피드를 겸비한 대표적인 선수로 각광받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팀에서는 유일하게 3년 연속 전 경기에 출전하며 성실함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LG와 팬들이 박용택에게 거는 기대는 항상 그 이상이었다. 해마다 타율 3할, 20홈런, 30도루 이상을 기록하길 원했고 화려한 다이빙캐치와 정확한 송구를 갖춘 1급 외야수이길 기대했다. 팀을 이끄는 리더이길 원했으며 동시에 팀의 간판이 되길 요구했다.
박용택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게 일치된 의견이었다. 박용택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게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어째서 박용택이냐’는 질문에는 누구도 객관적인 답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것이 기대의 한계이자 함정인지 모른다.
매해 스프링캠프만 되면 박용택과 관계된 기사들이 발렌타인데이 때 출시되는 초콜릿 종류만큼이나 많이 쏟아져 나왔다. 대개가 긍정적이었고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문제는 박용택 자신이 직접 의지를 밝힌 적이 없다는데 있다. 올시즌은 다르다. 변명보다 침묵, 과장보단 땀의 진실을 믿는 박용택은 "올시즌은 자신있다"며 무겁게 입을 뗐다(사진=LG)
지난해 박용택은 데뷔 이후 최악의 해를 보냈다. 4월 25일 잠실 히어로즈전에서 단타를 치고 2루까지 진루하려다 부상을 입은 게 치명적이었다. 그 경기 전까지 타율 3할, 12타점으로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결국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며 96경기에만 출전한 박용택은 팀이 꼴찌를 하며 책임의 중심에 섰다.
새로운 시즌을 준비하는 박용택은 팀의 꼴찌 탈출과 실추된 명예회복을 동시에 추구할 생각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지난시즌이 끝나고 LG는 FA(자유계약선수)이진영을 영입했다. 붙박이 주전이었던 박용택은 이제 안치용, 이대형, 이진영과 함께 주전경쟁을 벌여야 한다. 만약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2010시즌을 끝으로 그에게 주어지는 FA자격은 운전면허증 정도로 그칠 것이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가장 기대치가 높으나 연봉에서 가장 저평가받는 박용택을 <스포츠춘추>가 일본 오키나와 LG 스프링캠프에서 만났다.
당신의 연봉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묘한 미소를 지으며)다들 그런다.
LG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알려진 당신의 연봉이 1억5천만 원이라니,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다.
정말 연봉은 억울한 부분이 많다. 그간 타율 3할을 쳐도 연봉은 2천만 원 정도 오르는 게 고작이었다. 타율 2할9푼4리, 16홈런, 64타점, 25도루를 기록했던 2006시즌이 끝나고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지 아나?
얼마나 올랐나. 5천만 원이나 혹은 1억 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아니다. 천만 원 올랐다.
천만 원이라, 무슨 이유로 그렇게 소폭인상 됐나. LG가 짠돌이 구단은 아닌데.
우리팀이 원래 신인선수 계약금하고 FA영입에만 후하다(웃음). 농담이다. 최근 팀 성적이 계속 좋지 않다보니까 선수들 연봉도 생각보다 많이 오르지 않은 것 같다.
2002년부터 올시즌까지 연봉인상폭은 작고 삭감폭은 컸다. 올시즌 연봉이 3천만 원 삭감됐으니까. 연봉에 불만이 많을 법도 한데 당신의 연봉협상을 보면 잡음 없이 끝난다는 인상이다.
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협상을 아무리 끌어봐야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다는 것이고(웃음). 어차피 질질 끌어봤자 몇 백만 원 차이다. 그 돈 받겠다고 싸우는 게 되레 내 이미지를 고려할 때 손해라는 생각이다. 나중에 선수생활 끝나고도 LG와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싶기에 양보할 건 내쪽에서 먼저 양보하자는 입장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선수? 되레 너무 많이 변화를 시도했다.”
올시즌 잠실구장 LG홈경기 때는 펜스거리가 축소된다. 당신의 장타가 늘어날 것으로 보이는데.
2002년 입단 이래 두 시즌을 제외하고 모두 20도루 이상을 기록했다. 홈런은 15개 남짓이었고. 만약 잠실이 아니라 다른 구장이었고 그런 까닭에 홈런을 4, 5개 더 쳤다면 몇 년 연속 ‘20(홈런)-20(도루)’가 가능했을 거다. 생각해보라. ‘15-40’과 ‘20-20’은 질적으로 다르지 않나.
2002년 프로 데뷔 때부터 ‘제 2의 이병규’로 큰 기대를 모았다. 2004년 타율 3할, 16홈런, 58타점을 기록했을 때만 해도 기대는 현실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타율 3할 이상은 한 번도 기록하지 못했고 2007년부터는 내리막이다. 어느 야구전문가는 당신을 가리켜 “한참 전에 피웠어야 할 꽃이 아직도 만개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했는데. 어째서 당신은 기대만큼 만개하지 못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거다. 내 능력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팀 성적이 줄곧 좋지 않다보니까 코칭스태프가 자주 바뀌었다. 데뷔 이후 2년 연속 타격코치를 맡은 분이 김용달 타격코치님을 제외하고 한분도 없었다. 그 부분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일본 오키나와 기노완 구장에서 벌어진 LG와 요코하마의 경기를 보기 위해 500여명의 관중이 입장했다. 한국과 일본의 야구환경은 두 나라의 외환보유고 만큼이나 차이가 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잦은 코칭스태프의 교체는 선수에겐 재앙이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대부분의 타격코치님들은 욕심이 많다.
어떤?
코치님들 다 그렇지 않나.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지 않는가. 내가 타격코치가 돼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문제는 2년 연속 같은 타격폼으로 시즌을 치러본 적이 없다는 거다. 과거 비시즌 때 내 기사들을 찾아보라. ‘박용택, 타격변신’ ‘박용택, 타격스타일 변화 선언’ 이란 식의 기사가 수도 없이 많았다.
지난해는 ‘거포변신’선언을 하지 않았나.
아, 그건 재작년이고(웃음).
맞다. 지난해엔 교타자 선언을 했다.
2007년 김용달 타격코치님이 부임하셨을 때 하루는 내게 “넌 목표가 뭐야”하고 물으셨다. “뭐, 안 다치고 한시즌 보내면 좋겠습니다”했더니 “그런 거 말고. 다시 이야기해봐”하셨다. 그래 “이종범 선배처럼 한방 치고 도루도 잘 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코치님이 대뜸 “넌 무조건 홈런 30개는 쳐야 돼”하셨다.
그게 ‘거포선언’의 전말인가.
원래 다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는 거 모르나(웃음).
지난해 교타자 선언 역시 같나.
지난해는 김 코치님이 그러셨다. “잠실구장의 크기를 고려할 때 여기선 용병도 홈런은 안 돼. 무조건 타율로 가야 돼.”(웃음)
일부에선 당신을 가리켜 “변화를 두려워하는 선수”라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과정을 보면 오히려 그 반대 같은데.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정말 그 반대였다. 이것저것 셀 수 없이 많은 변화를 시도했고 심지어는 시즌 중에도 변화하려 노력했다. 아니 매타석마다 변화를 시도한 적도 있다.
잦은 코칭스태프의 교체와 그에 따른 빈번한 변화요구를 정중히 사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실제 그러기도 했다.
코칭스태프가 수긍하던가.
그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코치들이 선수 의사를 존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무조건 결과가 나와야 한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으면 기다렸다는 듯 주문과 요구가 쏟아진다.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그런 게 가장 힘들었다.
선수들과 코치들의 갈등은 어떤 식인가.
대개 긍정적인 갈등이다. 이런 식이다. 오늘 연습이 끝나면 코치들은 ‘내일은 얘한테 이렇게 해봐야지’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코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게 갈등의 출발이다. 선수도 똑같은 고민을 한다. 막상 내일 둘이 만나면 코치는 “정말 너한테 이걸 가르치려고 어젯밤 내내 고민을 했는데, 너 이거 하나 못 따라 주냐”하고 선수는 “어제 이렇게 해보려고 준비를 다 했는데, 코치님은 그냥 한번 봐주지 그걸 못 봐주나”하며 부딪히는 식이다.
코치의 요구도 있었을 테지만 당신의 성향도 끊임없는 변화 시도에 어느 정도 작용했지 싶다.
내가 조금만 욕심이 적었던지, 귀가 두꺼웠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웃음). 어쩌면 난 심정수, 송지만 선배와 비슷한 유형인지 모르겠다. 그 선배들 보면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지 않나.
김용달 타격코치는 어떤가.
김 코치님과 함께 한지 이제 3년째다. 지금이나 되니까 ‘아, 이분이 어떤 분이구나’하고 감이 오지 그전까지 속으로 욕도 많이 하고 코치님이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김 코치님은 무척 정열적인 지도자라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연구하는 스타일이다.
“소녀 어깨? 고통을 참고 던졌을 뿐”
2007년 LG 사령탑에 오른 김재박 감독은 그간 "선수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포지션별로 주전경쟁 벌일 선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주전경쟁을 통해 선수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김재박식 야구가 올시즌 비로소 가동될 전망이다(사진=LG)
당신의 수비력에 대해 악평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음, 포구에 관해선 아직까지 비난을 들은 적이 없다.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역시 송구가 문제 아니겠나.
그렇다. 당신의 어깨를 가리켜 ‘소녀 어깨’라고 하는 이들도 있다. 2002년 프로 데뷔 때만 해도 우익수를 볼 정도로 어깨가 괜찮았는데.
2003시즌 기록을 찾으면 알겠지만 당시 내가 외야 보살 1위였다. 오죽 괜찮았으면 이순철 전 감독이 2004시즌에 날 우익수로 배치했겠는가.
그즈음부터 어깨가 좋지 않았다.
사실 그전부터 어깨가 조금씩 아팠다. 그런데 우익수로 전향한 뒤 확실히 어깨에 부담이 많이 갔다. 어느 때부터인가 어깨 상태가 계속 악화됐고. 2005시즌에는 개막전부터 아예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왜냐? 캐치볼을 거의 못할 지경이었으니까. (한숨을 내쉬며)15m 이상 공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플 정도면 보통 부상이 아닌데. 병원에선 뭐라고 하던가.
슬랩병변(어깨관절와순)이라고 했다. 수술은 하지 않아도 되지만 꾸준한 재활을 요구하는 슬랩이었다.
지명타자는 할만 했나.
(손을 가로저으며)최악이었다. 2005시즌 개막하고 4월 한 달 동안 엄청나게 못 쳤다. 너무 못 치니까 하루는 이순철 전 감독이 “너, 수비하면 방망이 잘 치겠냐”하고 물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더니 뭐라고 하신 줄 아나?
글쎄.
“네가 그렇다면 유격수한테 공을 굴리든, 뛰어가서 전달하든 무조건 외야수로 나가라”고 하셨다. 외야수로 복귀하자마자 5월에 20경기 연속안타 치고 9경기 연속 타점을 기록했다. 그 뒤부터는 돌아볼 것도 없이 붙박이 외야수로 출전했다.
계속 재활을 했을 텐데. 어깨는 좋아졌나.
2005시즌이 끝나고 본격적인 어깨재활을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나아지지 않았다. 몸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송구에 대한 부담이 컸다. 2006년에는 공만 잡으면 다시 부상이 재발할까봐 힘껏 던지지 못했다. 2007년엔 2년 가까이 재활해서 그런지 캐치볼이 가능할 정도의 몸을 만들었다. 지난해는 무척 좋아진 상태였다. 외야에서 홈으로 노바운드로 던져 보살을 기록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그런데 지난해 4월 25일 잠실 히어로즈전에서 부상을 입었다.
안타치고 1루로 가는데 중견수 이택근의 수비에 허점이 보였다. 그래, ‘에라 모르겠다’하고 2루로 뛰었는데 수비수랑 부딪히면서 코뼈 골절에 엄지손가락이 뒤로 젖혀지는 부상을 입었다. 그때 어깨근육도 찢어지는 바람에, 또 그것 때문에 송구에 지장을 받게 됐다.
지금은 어떤가. 혹여 어깨부상이 타격에 지장을 주진 않나.
다시 많이 좋아졌다. 만약 타격에 지장을 줬다면 수술을 받았을 거다. 하지만 타격할 땐 크게 지장을 주진 않는다.
“반드시 살아 남는다”
스프링캠프에서 만난 안치용(사진 오른쪽)의 컨디션은 절정이었다. 박용택은 안치용뿐만 아니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표로 차출된 이진영, 이대형과 외야 주전경쟁을 펼쳐야 할 입장이다. 그러나 박용택은 오히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능동적으로 이용하려 한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진영의 영입으로 LG 외야자원이 풍부해졌다. 이진영 뿐만 아니라 이대형, 안치용 등과 외야 주전경쟁을 벌이게 됐다. 특히나 안치용과의 주전경쟁을 두고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런 말하면 ‘재수 없다’고 할지 몰라도 난 한번도 (안)치용이하고 경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우리 둘 다 잘했으면 좋겠다. (이)진영이, (이)대형이도 마찬가지다. “만약 4명 모두 잘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그땐 외국인 타자가 나가고 외국인 투수가 들어오면 된다. 그렇게 된다면 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4명 가운데 당신만 부진하다면 어떻게 될까.
결과가 그렇다면 그건 전적으로 구단이 판단할 문제다. 나를 좋은 트레이드 카드로 쓸 수도 있을 것이고. 하지만 난 LG를 사랑하고 앞으로도 LG 유니폼을 입고 계속 뛰고 싶다. (담담한 표정으로)내가 잘하는 수밖에 없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이나 LG선수단 전체가 야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때론 결연한 느낌까지 받는다.
그럴 거다. (잠시 생각하다가) 서커스 외줄타기에 비유를 하면 어떨까 싶다. 난 지금까지 항상 외줄타기에서 성공만 해왔다. 설령 밑으로 떨어져도 그물망이 있어 안전했다. 그러나 올시즌 그물망은 사라졌고 떨어지면 죽음뿐이다. 나만 아니라 팀 전체가 절박해지고 결연해졌다고 보면 된다.
당신에 대한 기대가 미움으로 변한 LG팬들이 많다.
안티팬이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올시즌 정말 잘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분들께 성적으로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됐고. (혼잣말로)아니 때가 지났는지 모르고. 개인적으로 FA도 있기 때문에 처자식을 생각해서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성적을 꼭 낼 생각이다. 요즘 정말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떻게 야구하느냐에 따라 아이의 인생이 바뀐다는….
"영원한 LG맨으로 남고 싶다"
올시즌 LG 투수진은 다소 의문이다. 그러나 타선은 확실히 강해졌다. 당신이 판단하기엔 어떤가.
8개 구단 가운데 타력은 그래도 중간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린 선수들이야 가능성이 반반이지만 이진영, 정성훈 등 이미 검증된 선수들이 2명이나 영입되면서 타선이 강화됐다. 거기다 치용이 컨디션도 무척 좋은 것 같고.
당신은 어떤가.
지난해보다 더 떨어지겠나. 프로 데뷔 이후 올시즌 스프링캠프처럼 감이 좋았던 적이 없다. 개인적으로 이 컨디션을 시즌 때까지 잇는 게 목표다.
박용택은 2007시즌부터 시도한 오른발이 왼발과 오른발이 일자가 되는 스퀘어 스탠스를 스프링캠프에서 만족스럽게 구현하고 있다. 끊임없이 실험과 변화를 추구하는 박용택의 부단한 노력이 올시즌 꽃을 피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사진=LG)
타격폼도 조금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지난시즌 끝나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내가 좋은 타구를 쳤던 동영상을 찾아 DVD로 제작했다. 그걸 매일 하루에 2번씩 보면서 좋았을 때의 감을 찾고 있다.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2004시즌을 보고 있다. 되레 그때보다 타격폼이 안정된 느낌이다.
팀에서 당신에게 요구하는 건 성적 그 이상이다. 팀의 리더로서 진정한 ‘LG의 박용택’이 되길 원하고 있다.
(이)병규형이 팀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리더에 관해 생각하지 않았다. 병규형이 일본으로 진출하고, 나도 연차가 쌓이면서 팀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떤 의미에서든 후배들을 잘 이끌어야 하는 위치가 된 것 같다. 책임이 주어지면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야구를 잘하는 게 급선무다.
FA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 아직 FA자격이 주어지려면 2시즌을 더 치러야 한다. 그런데 당신을 볼 때마다 이미
FA가 되고도 남았을 베테랑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변에서도 그렇게들 많이 보신다. 언제였더라. 한번은 은행에 갔는데 거기 지점장님이 “아니 이게 누굽니까. 박용택 선수 아닙니까”하면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기뻤겠다.
다 들어봐라. 내가 “고맙습니다”했더니 지점장님 다음 말이 뭐였는지 아나. “이야! 1994년 서용빈, 유지현, 김재현, 박용택 선수 뛸 때 진짜 야구 많이 봤습니다. 요즘은 어느 팀에서 뛰십니까.” 깜짝 놀라서 “아, 네. 뭐하고 있어요”하면서 서둘러 나왔다(웃음).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LG선수 이전에 LG를 정말 사랑하는 이처럼 느껴진다.
현역에서 은퇴하면 LG에서 지도자가 되고 싶고 LG를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싶다. LG가 내겐 지금도 꿈같은 존재다. 올시즌 목표도 마찬가지다. 다른 팬들은 제쳐두고 LG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정말 사랑받고 인정받는 선수가 되고 싶다. 그게 내겐 어떤 기록과 연봉보다 소중하다.
(2월 21일 LG선수단은 모처럼만의 휴식일을 즐겼다. 그러나 이날 저녁 유이하게 호텔 테니스장에 나타나 스윙연습을 한 이들이 있었다. 박용택과 박병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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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지막 멘트가 소름끼치도록 멋있네요... 그둘이 박용택과 박병호...두선수를 비롯 모든선수들이 잘됐으면 좋겠네요!!
감동 그 자체네요.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 내가 기억하는 최고의 그 박용택으로 다시 돌아와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