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금수조치를 취한 이후인 41년 8월 일본의 주요 전략물자의 재고량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켈 및 니켈광 - 약 2개월 망간광 - 약 4개월
비치코크스 - 약 4개월 마닐라 삼 - 약 1개월
제1종 원유 - 약 4개월 제2종 원유 - 약 6개월
항공유 - 약 15개월 보통 휘발유 - 약 2개월 반
중유 - 약 1개월 반 보통 기계유 - 약 2개월 반
경유 - 약 10일 등유 - 약 1개월
반고체 기계유 - 약 3개월 피마자유 - 약 6개월
이와 같은 물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최단기간에 석권하여 그 자원을 개발함으로써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지나친 전선확대로 인해 각지의 일본군은 고립된채 보급이 단절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중 사망한 일본군 230만명 중 과반수가 광의의 아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일본군 중에는 늑막염과 폐결핵 환자가 대단히 많았고 이는 영양부족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또 식량도 운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생수나 정수장치를 충분히 수송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병사들은 흙탕물을 마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고 이는 많은 병사자를 낸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 군의관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일전쟁 2년째인 1938년 봄 서주 작전에서 이미 영양실조증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중국전선에 종군한 어느 장교는 '내가 중대장 시절에 연대와 대대로부터 보급을 받은 것은 2년간 전투에서 1인당 쌀 1되를 2회 받은 것에 불과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보급단절은 중국전선에서는 민간에 대한 대규모 약탈을 초래했습니다. 식량도 보급할 수 없는 판국에 연료보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기 때문에 민가의 대문이나 기둥을 뜯어 태우지 않으면 취사도 할 수 없었습니다. 대본영 자체가 대미전에 주로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 중국 파견군에는 현지 자활을 지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대규모 약탈을 공인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중국에서는 일본군의 별명이 황군(蝗軍:곡식을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대규모 약탈을 할 대상이 있었지만 태평양 전선에서는 약탈을 할 대상이 없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수송선이 연합군에 의해 침몰하게 되면 태평양 각지의 섬에 고립된 일본군은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동부 뉴기니에 파견된 일본군은 총 15만 7646명이엇는데 전쟁후에는 단지 만 72명만 살아남아 94%의 사망률을 보입니다. 이들 사망자의 대부분은 기아와 열대성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일본군 사망자중 해몰사(海沒死)한 수는 해군 18만 2천명, 육군 17만 6천명에 달했습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참전국중 가장 많은 해몰사 규모인데 상당수는 물론 해전에서 전사한 것이지만 많은 수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침몰한 수송선에 타고 있던 인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해몰사는 연합군의 일본군 보급로 봉쇄가 철저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보급단절로 인해 태평양 각지의 일본군에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가 바로 식인이었습니다.
2. 같은 일본군에 대한 식인
일본 퇴역군인들의 수기에는 식인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중 와가와 쇼지는 43년 12월과 44년 3월 일본군이 북부 중앙 뉴기니에 있는 피니스테르 산맥을 넘어 후퇴할 때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정말 끔찍한 것을 보았습니다. 길에 한 군인의 시체가 있었는데 허벅지가 크게 잘려 나가 있었어요. 조금 있다가 다른 부대의 군인 4,5명이 우리를 불렀을 때, 나는 Y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어요. 그들은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가까이에 음식 깡통이 있었어요. 그들은 뱀고기 덩어리가 큰게 있다면서 같이 먹자고 했어요.
그렇게 말할 때 웃는 태도가 왠지 싫었어요. 우리는 그들이 뭔가 숨기고 잇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가 그들과 공범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어요. 우리 반응을 살피듯이 쳐다보는 태도에 뭔가 꿍꿍이가 있었어요. Y도 그 상황에 대해 똑같이 느꼈는지 '아니 괜찮습니다. 다음에...'라고 말했어요. 매우 긴장되는 상황이었지요.
우리는 서둘러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 곳을 떠났고 그들이 우리를 쏠까봐 겁이 났어요. 한참 걸은 후 Y가 내게 말했어요. '너무 이상해. 그들이 뭘 하고 이었던 것 같아? 만약 그게 뱀고기였다면 그들은 조금도 나눠주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분명히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우리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 같지 않아?'라고 말이죠."
암본에 주둔한 일본 해군 헌병 대장이었던 노기 하루미치는 그의 회고록에 필리핀에서 발생했던 사건을 언급했는데 그것은 종전 직후 한 일본군 중위가 그에게 보고한 내용이었습니다.
"산에서 산으로 퇴각하는 일본군의 대부분은 약탈자였습니다. 이건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먹을게 전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제비뽑기를 하기로 했어요. 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기로 한 거죠. 그러나 진 사람이 도망치기 시작해서 우리는 그를 쏘았어요. 그는 결국 잡아먹혔어요.
당신은 아마도 우리들 중 다수가 현지 여자들을 강간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여자들이 성적인 욕구의 대상으로 생각되지 않았어요. 그들은 우리들의 굶주림을 채워줄 대상으로 생각되었어요. 우리는 성욕이 없었어요. 강간을 하는데는 힘이 너무 많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원하지 원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꿈꾼 것은 먹을 것 뿐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가져가는 군인들을 산에서 만났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게릴라가 아니라 우리의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처참한 상황이었습니다."
다음은 미군 제8기갑부대 F부대원 에스피노자 2세가 제줄한 보고서 중의 하나입니다.
"나는 제8기갑부대 F부대의 순찰병으로서, 아이엘로 하사의 지휘하에 작전을 수행하던 중 도살된 일본군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우리 순찰대는 전날 밤에 들은 총성에 대해 조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마누스 섬에 잇는 보후아이의 동남쪽 300야드 정도까지 진행했습니다. 우리는 조그만 개울을 건너 몇채의 초가집과 한채의 오두막이 있는 개활지로 들어갔습니다. 일본군 오두막에서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오두막에 일본군이 있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는 일본군 1명이 오두막 바로 밖의 덤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집 안에 있는 다른 3명을 쏘았습니다. 첫번째 일본군은 덤불 아래 누워 있는 시체에서 나온 피를 손에 묻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덤불을 걷어올리고 잔인하게 도살당한 일본군 시체를 찾아 냈습니다. 두 다리의 종아리 살은 말끔하게 잘려 나가 있었습니다. 그 일본군 시체는 손이 묶여 있고 허리에 줄이 묶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두막 안을 검사해서 피 묻은 칼과 주방 기구, 그리고 도살에 쓰인 조잡한 기구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수용소에 돌아와 보고했습니다. 상부에서는 더 조사하기 위해 밀러 중위 지휘하에 작은 규모의 순찰대를 보냈습니다."
3. 연합군 포로에 대한 식인
같은 일본군도 잡아먹는 상황에서 연합군 포로가 무사했을 리 없습니다. 호주 전쟁범죄부의 많은 보고서와 호주군의 전쟁범죄 재판 기록에서는 뉴기니 등지에서 벌어진 일본군의 식인행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미국 서류보관소의 기록도 있는데 호주군 기록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는 당시 그 지역에서 작전하던 연합군의 대다수가 호주군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45년 5월 20일 기록된 호주인 희생자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00대대의 SX 8064 WO 2 HUGO C는 정히 서약하고 진술한다.
0월 0월 아침 09:00시에 NX 79420 GRIFFIN.J. 상병, 고인 SWELL 병장 그리고 나는 00에서 적에게 살해당한 00의 시체를 찾아냈다.
우리는 그 시체가 다음과 같은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a) 옷은 모두 벗겨졌음
(b) 두 팔은 어깨에서 잘려 나갔음
(c) 위가 잘려 나가고 심장,간,내장이 모두 없어졌음
(d) 시체의 살 부분은 모두 잘려 나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았음
(e) 두 팔, 심장, 간 그리고 내장은 발견할 수 없음
(f) 손대지 않은 시체 부위는 머리와 발 뿐임
사람 살덩어리가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일본군 음식 깡통이, 죽은 일본군 두 명 사이에 있는 00의 시체로부터 4-5 야드 거리에 있었음.
(서명) C.HUGO WO 2
SX 8064
다음은 미군 보고서 중 하나입니다.
"(1) 1943년 1월 24일 E.H. 일병이 일단의 일본군을 포획하는 작전 도중 살해되었다. 다음날 그의 시체는 163보병연대 G 중대 윌리엄 C. 벤슨 중위에게 발견되었는데 시체는 다음과 같은 상태였다.
(a) 배는 2개의 십자형으로 개복되었고 허벅지와 엉덩이 살은 제거되었다. 그 시체는 해병 163보병 연대 차석 군의관 헨리 C. 스미스 대위가 검시하고 다음과 같은 절단 증거를 확인했다.
(b) 하부 갈비뼈 외곽에서 치골까지 복부 중심선 절개, 이 절개는 잘 드는 칼로 직선으로 깨끗하게 잘렸음.
(c) 복부 내용은 검사하지 않았음. 허벅지 옆부분에서 약 가로 4 세로 12 깊이 2인치의 피부와 살덩어리가 예리하게 잘려 나갔음.
(2) 163 보병 연대 M.W. 일병은 일단의 일본군을 포획하려고 1943년 1월 24일 작전중 사망했다. 1943년 1월 25일 163 보병연대 G 중대 윌리엄 C. 벤슨 중위와 동료들이 그의 시체를 발견햇을 때 양쪽 허벅지에서 살덩어리가 잘려나간 것을 확인했다.
(3) 1943년 1월 19일 작전중 실종된 것으로 보이는 H.B. 병장은 1943년 1월 23일 몸이 절단된 상태로 발견되었음. 그의 시체는 확인되었고 E. 딕슨 일병이 검사하여 다음과 같은 발견된 것을 서약했다.
'허벅지와 양족 다리의 살 부분은 잘려 나갔다. 복강은 갈비뼈 아래에서 피부와 살을 절개해서 열려 있었다. 얼굴을 잘리지 않아 확인이 가능했다.'"
딕슨은 가까운 일본 벙커에 있는 스튜 그릇에 사람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심장과 간이 들어 있었다고 부연했습니다. 다른 많은 사례도 일본군 식인행위가 희생자의 내장과 생식기까지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뇌를 가져가 버려 얼굴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사람의 창자를 요리했다는 것이 1945년 5월 22일 보고서에서 확인되었는데 그 보고서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보고서는 6명의 호주 희생자를 포함하는 서로 다른 4건의 사건에 관한 것입니다.
"NX14764 A.B.카슨 중위는 정히 서약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00,00 및 00은 00일 오후 적 진지를 공격하다가 사망했다. 우리 부대는 그날 오후 시체를 빼내오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저격수의 정확한 조준 사격으로 그들이 사망했다는 지점에 이르지 못하고 철수해야 했다. 00월 00일 나는 같은 목적으로 다시 순찰을 나갔는데 적의 저항으로 시체를 가져올 수 없었다. 우리는 희생자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3세트의 호주군 웹장비,부츠 두 켤레, 옷 두 벌, 그리고 다른 잡동사니를 발견했다. 추가 수색으로 00에 의해 00의 것으로 쉽게 인지되는 두피를 찾아냈다. 창자는 통나무에 걸쳐져 있고 부분적으로 불에 탄 살 조각이 근처에 있었으며 탄약갑 하나에는 간으로 보이는 조각들이 있었다. 혈흔과 날카로운 도구로 잘라낸 살 조각 같은 증거로 봐서 그 시체가 도살당해 먹히고 두피를 벗기고 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 위치에서 300야드 정도 떨어진 오두막 밖에서 불에 탄 뼈가 발견되었다. 그 오두막 안에서 요리해서 골수를 내먹으려고 부러뜨린 것으로 보이는 오른쪽 허벅지 뼈를 발견했다. 이 뼈의 크기로 보아 키가 00피트인 아마도 00의 시체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100야드쯤 떨어진 다른 오두막 밖에서 다리,허벅지,어깨뼈 등이 사람의 살덩어리와 함께 발견되었다. 또 다른 오두막 밖에는 00의 머리가 있었다. 두피를 벗긴 머리와 등뼈로만 구성된 그 시체는 바닥에 놓여 있었다. 이 잔해 옆에는 타서 숯이 된 손목과 손이 놓여 있었다. 첫번째 오두막 안에서 AAB 83과 아테브링(atebring,상표명) 명부가 발견되었다. 모든 시체 상태가 그와 같았으므로 시체는 해체되고 살 부분은 요리된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에게 난 상처는 우리의 포화로 인한 고폭발성 때문이 아니라 소총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부대 군의관은 위에 언급한 시체의 어떤 부분을 검사했는데 나의 진술과 충분히 부합되었다. 발견된 시체는 00,00, 그리고 00이고 다음의 목격자들이 이 증거를 실증하며 시체를 장례 지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A.B. 카슨 서명
나의 앞에서 서명됨, 소령 니스벳 서명 "
다음 미군 보고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입니다.
"H.F. 중위는 1943년 1월 8일 작전중 사망했다. 163보병연대 C 중대 20929231, 로이 G. 미켈슨 병장과 163 보병연대 C 중대 20220220, 고든 F. 미거 병장은 F중위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죽을 때 각각 10야드, 2야드 이내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들 목격자들이 진술하기를 부대가 철수할 때, F중위의 시체는 절단되지 않았다. 그때는 적의 사격이 아주 심해서 시체를 꺼내올 수 없었다고 했다.
1943년 1월 11일 시체를 찾았는데 왼쪽 팔이 잘려 나가고 없었다. 장딴지의 살덩어리들이 잘려 나갔고 내장이 꺼내져 있었으며 심장과 간도 없어졌다. 같은 날 팔뚝 뼈가 무군 근처 북동 쪽 일본군 주변 400야드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일본군은 격렬한 전투중인 그 지역에서 연합군이 그 시체를 찾지 못하게 다른 군인들이 막는 동안 안전한 곳으로 요리해 먹은 것 같다."
4. 아시아인 포로에 대한 식인
전쟁중 일본이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연합군 포로 6만명 이상과 27만여명의 아시아 노동자들이 착취당한 미얀마-태국 철도 공사와 같은 대형 거설 사업에 많은 인원이 강제노동에 동원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인도,중국,말레이시아의 많은 포로들과 민간인들이 뉴기니와 이웃의 섬들로 보내졌습니다.
호주 전쟁범죄부 보고서 서류들을 보면 그런 강제노동자들의 다수가 일본군 식인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다음 증언은 1942년 2월 15일 포로가 된 파키스탄 지방 출신 군인 하탐 알리가 한 것입니다. 그의 회사는 말레이시아 내 여러 곳에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는데, 인도군의 반영감정을 이용하여 친일본계 세력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알리는 군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1943년 말엽에 뉴기니의 마노콰리로 보내져 약 천명의 포로로 구성된 노동자 집단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비행장 건설 사업에 투입되엇고 1944년 4월에는 그중 206명이 건설부대의 하나인 S부대의 감독하에 마노콸에서 300마일 떨어진 새로운 작업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알리도 이들 가운데 포함되었습니다.
"나는 이 무리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우리는 300마일 덜어진 곳으로 끌려가 하루 12시간 작업을 했죠. 무척 힘들었고 먹을게 거의 없었어요. 일본군은 포로가 병들면 치료를 해주지 않고 바로 죽였어요. 나중에 연합군 공격으로 일본군들도 급식이 없어졌어요. 우리 포로들은 풀과 나뭇잎을 먹게 되엇는데 뱀,개구리, 그리고 다른 곤충들까지 먹었어요.
이 단계에서 일본군은 매일 포로 1명을 데려가서 잡아먹었어요. 나는 이 사건을 직접 보았어요. 약 100명의 포로가 이 곳에서 일본군에게 잡아먹혔어요. 나머지는 거기서 약 50마일 떨어진 곳으로 갔는데, 거기서 10명이 병으로 죽었어요. 이 곳에서 일본군은 또 잡아먹을 포로를 고르기 시작했어요.
선택된 포로는 오두막으로 데려가서 산채로 살을 잘라내고는 그대로 도랑에 버렸어요. 선택된 포로에게서 살이 잘려 나갈 때 그리고 버려진 뒤 도랑에서 고통에 못이겨 내지르는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려 왔어요. 울음소리는 그 불행한 포로가 죽어감에 따라 점점 희미해졌어요. 우리는 그 도랑에 가가이 갈 수 없었지만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했어요."
결국 알리의 차례가 되었고 군인 2명이 오두막으로 데려갔는데, 기회를 엿보다가 죽을 힘을 다해 도망쳤습니다. 알리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았고 그 와중에 왼쪽 발목을 다쳤지만 다행히 추격을 뿌리치고 살아 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알리는 15일간 정글을 돌아다니며 지내다가 호주군에게 구조되었습니다.
많은 대만인 노동자들도 태평양 지역의 여러 곳에서 군사시설 건설을 위해 일본군에게 동원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대만인이 뉴기니로 보내졌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군이 만든 두 보고서는 일부 대만인들도 이 지역에서 일본군의 식인에 희생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보고서는 뉴기니 북서부의 비아크 섬 사건을 다루고 있고, 다른 한 건은 뉴기니 북동쪽 비스마르크 해의 마누스 섬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음 대만인 포로에게 행한 심문 결과의 요약은 비아크 보고서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107비행장 측량 및 건설부대 2중대, 대만인 노동자 PW, JA는 1944년 8월 28일 비아크 섬 보로키에서 미군에 투항했다.
1944년 8월 28일 비아크 섬에서 PW가 식량을 구하는 동안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총소리를 들었다. 그는 2명의 일본군이 108 비행장 측량 건설부대 출신으로 생각되는 죽은 대만인에게 접근하는 것을 숨어서 보았다. 일본군은 시체의 옷을 벗기고 칼로 다리를 잘라냈다. PW는 겁이 났고 그 사건을 바로 자기 부대 다른 대만인에게 알렸다. 그들은 생명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미군부대로 도망쳤다.
1944년 7월 PW는 C.Z.R로부터 그가 일본군들이 고기로 먹기 위해 죽은 대만인 시체를 수집하는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1944년 8월 4일 PW는 C가 같은 목적으로 와르도 근처에서 일본군에게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44년 8월 14일-15일 와르도에서 소리도로 약 6시간 행군한 후 PW는 그의 고향 친구 R.H.K의 시체를 보았고 남쪽 밭에서 다른 두 구의 시체를 보았다. 단지 머리와 뼈만 남은 시체였지만 모두 목을 가로질러 벤 흔적이 보였다. 그는 15명의 다른 대만인 시체에서 살이 잘려져 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군과 대만인은 각자 따로 식사를 준비했다. 일본군은 언제나 고기를 먹는 것 같았지만 대만인들은 그들이 기른 채소와 그들에게 할당된 약간의 쌀 뿐이었다. 일본군은 언제나 그것이 개고기라고 주장했지만 PW는 그것이 사람고기라고 의심했으므로 서로 바꿔 먹지 않았다. 그는 비아크 섬에서 개를 본 적이 거의 없던 때에 매일같이 개고기를 공급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W가 본 고기는 껍질이나 털이 거의 없었지만 그가 아는 개고기는 껍질이 두텁고 털 자국이 빽빽하게 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람고기는 튀기면 너무 짜서 먹을 수 없기 때문에 구워야 한다는 말을 들어 알고 있었다.
1944년 6월 비아크 섬에서 PW와 다른 13명의 대만인은 연합군의 선전책자를 읽고 연합군에 투항하기로 마음먹었다. 가는 도중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약 100명의 일본군이 이들을 가로막았다. 대만인 8명이 죽었고 PW는 칼을 맞고 쓰러졌다. 죽은 체하고 있는 동안 PW는 한 일본군이 죽은 대만인에게서 빼낸 창자를 가져가 자기 음식 그릇에 넣는 것을 보았다. 일본군이 곧 떠났기 때문에 더 보지 못했다.
1944년 8월 15일 JA는 몇시간 동안 숨이 붙어 있었던 대만인 셋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들은 정글에서 약 15피트 떨어진 곳에 잇는 피로 물든 웅덩이에 누워 있었다. 각각 가슴에 칼을 맞았고 허벅지는 살이 잘려 나갔다."
5. 뉴기니 토착민에 대한 식인
식인 희생자는 호주인과 영연방 군인들만큼 뉴기니 원주민도 많았습니다. 많은 현지인들의 증언에 근거한 그러한 사건 보고서는 호주군 장교에게 제출되었습니다.
다음 사건은 그러한 사건의 전형적인 경우입니다.
1945년 4월 12일 일단의 일본군이 뉴기니의 T마을을 습격하여 집을 샅샅이 뒤져서 요리기구는 물론, 얌(마 종류), 코프러(말린 코코야자의 배젖), 그리고 다른 식량들을 훔쳐 갔습니다. 주민들은 대부분 정글에 숨었지만 2명은 도망치지 못하고 군인들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이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마을 주민 3명이 일본군을 따라 갔습니다. 그러나 일본군들의 재집결 장소인 X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경기관총을 가진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수류탄(호주군이 제공한)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면서 후퇴했습니다. 붙잡혀 갔던 주민 2명은 도망을 쳤지만 결국 1명은 경기관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일본군들은 X에서 3일 동안 머물다가 이동했습니다.
주민 A는 며칠후 X로 되돌아 갔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살이 잘려 나간 시체 2구를 보았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은 후 일본군을 따라 갔던 주민 3명 중 1명이 1945년 5월 10일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습니다.
"나는 W의 시체를 발견했어요. 가슴,허벅지,장딴지,엉덩이,그리고 등에서 살이 잘려 나갔어요. 어깨가 잘려서 양팔도 없었죠. 그런데 내장은 손대지 않았더라고요. 머리 끝부분이 잘려 나가 뇌가 없었고, 살은 날카로운 도구로 잘린 것 같았어요. 일본군이 요리하려고 피워놓은 불에서 사람의 팔뼈를 발견했는데, 익은 살덩어리가 아직도 뼈에 붙어 있었어요. 그 불 주위에는 타로와 얌 부스러기들이 있었어요."
참조문헌 : 일본의 군대(논형), 일본 군국주의를 벗긴다(화산문화), 히든호러(어문각) 등
첫댓글 이런.... 결국 보급이 없으면 식인종의 후예들도 잡아먹는 식인종이되는군요;;;; 아무래도 전쟁에서 제일 중요한것중 하나가 바로 보급인듯 합니다 보급이 없으면 전쟁에서는 완전 죽은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죠..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군요.
뉴기니 전선에는 조선인 출신 병사들도 많았다고 하던데... 끔찍한 일이네요... 예전에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뉴기니 원주민들의 마지막 식인이 태평양전쟁때 일본군 시체였다고 하는것 같던데... 끔찍한 살육이었네요...
웨이크 뜸부기는 약과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