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無學:
132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405년 10월 3일
(음력 9월 11일)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승려이다.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 천도를 도왔다.
생애
생애 초반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군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몽골 원 제국 간섭기 고려 시대,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 출신인데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무학 선사의 어린 시절 기록 등은
남아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그가 또래에 비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등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출가와 승려 생활
1344년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
(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역성혁명에 동참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고 한다.
연려실기술에는
무학의 해몽과 한양 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능히 알 수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의 기사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어떠냐?”자초가 대답하였다.“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성쌓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수도 이전
두 번째
새 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왕사 무학대사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무학은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서울 남산)에 올랐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생애 후반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
그 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년)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
사망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
전설
무학은
여러 야사와 민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왕십리의 유래:
무학이
조선의 새 수도를 정하러 돌아다니다가 왕십리에 이르러
이 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꼭 무학처럼 정도(正道)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꾸짖어
서방으로
십 리를 더 가 경복궁의 터를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선바위 :
서울의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1748년(영조 24년)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조선 태조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조선 환조(이성계의 아버지)의 장지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1360년(공민왕 9년)에
부친이 죽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을 두고 대화한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하듯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교정해 주었다.
가동(家僮)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전설이다.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호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전설이 더 자세히 기록됐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이라는 전설이다.
부친 장지를 다룬
이런 일화는 이성계가 만 25세 때부터 반역을
꿈꾸었다는 전설이다.
이성계와
무학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이성계의 꿈을
풀어 주면서 왕이 될 운명이라고 한 이야기가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듯하다.
이성계가 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중 어느 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친구인 무학을 찾아가
꿈을 이야기했더니
무학이 큰 절을 하면서
이제 왕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이유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인데
이 세 마디 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왕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성계는
이 꿈을 이용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세웠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무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라서인지 1328년(충숙왕 15년)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 규모 사찰로 중창하였던 회암사(檜巖寺)는 지공과
나옹과 무학까지 여말선초 최고 선승으로 다루는데,
이런 무학은
선승으로서 풍수지리에도 해박해 서울 도성 위치를
설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출처] 무학(無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