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디 크레딧
황은주
발랄한 취미
애인은 그래
들 바람 꽃 필 때면 그런 구두를 선물하지
맞지 않는 구두를 신은 나는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듯
중력을 씻어버리듯
달그락달그락 지구는 달을 돌고
달은 구두를 씻고
애인은 그래
들 바람 꽃이 질 때면 그런 모자를 선물하지
중심을 얹듯
모자를 눌러쓰듯
지구는 달을 쓰고
샤랄랄라 달은 지구에서 날아가고
그렇게 구두와 모자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며
달그락달그락
설거지하는 소리를
샤랄랄라
애인의 발소리로 믿으며
반달이 뜨려나 봐
애인이 달아났다
애인이 숨어든 곳은
자정이 지난 휴게소
휴게소가 눌러쓴 검은 공중
세상은 미완이었고 그렇게 세상의 처음과 끝은 탄생했다
나는 달아난 애인의 발을 어루만진다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니 따듯해진다
반달의 존재 이유를 이곳에서 물을 것이다
어둠 한 모퉁이
달아난 애인의 발은 노랗게 빛나고
세상은 언제나처럼
반달의 세계
비가 와 해바라기야
밀물처럼 머리칼을 잘라줘요
별들이 떨어져요 후두두둑
여름이 지나는 계절에 이 골목에 비가 오고
미아네 미장원에 수증기가 피네
푸른 장화를 신고 해를 잡으러 떠났다는
늙은 미용사의 우산 속에 늙은 거미가 사네
썰물처럼 머리칼을 잘라줘요
별들이 태어나요 후두두둑
그림자가 머리칼처럼 헝클어진 누군가 걸어가네
푸른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골목
미아, 네가 없는데 네가 지나가네
머리에 돌을 얹고
옛날옛날 윤달의 아이처럼
걸어가는 미아야
너를 따라 돌을 주울게
모자처럼 머리에 돌을 얹고
윤달에는 미아야
희디힌 잠옷을 빨고 희디흰 장갑을 말릴게
머리에 돌을 얹고 기울게
멀리멀리 돌아갈게
한 달이 지나면
한 번 더 너를 지나갈게
마주할게
빛나는 빛나는
미아야
느리고 우울해
너는 내가 되고 싶었니 플라톤의 향연에서처럼 너와 나 한쌍이었다가 둘로 나뉘었다는 전설이 있었다 백야와 극야처럼 지겨워하며 두근거리며 서로를 비껴갔다 나는 찾느라 바짝 약이 오른 너는 조각나고 우울하고 아파서 찡그리다가
다시 나를 찾아 수많은 궤도를 돌고
대합실이었는데
똑똑 지팡이 소리가 들렸어
밤새 비는 오고
비보다 느린 지팡이 소리가 똑똑
오지 않는 마지막 버스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아닐까 봐 낯설까 봐 흐느낄까 봐 달아날까 봐 나는 돌고 돌고
너의 빛에 맹세할게
미아야
포즈
너의 뺨을 만진다
두 팔로 살며시 공중을 껴안는다
새들이 시간에 닿았다가 돌아오는 중이다
그런 메아리라며 소금밭을 지나 무지개를 지나 사과나무를 돌아오는
마지막 포즈를 취할 게 뺨과 뺨을 맞대는
메아리와 메아리를 맞대는
그런 이별이라며
기억해
이삭
소다가 빠져버린 새들에겐 하늘이 없어요 처음부터 그랬어요 처음부터 콜라 색깔 하늘이었고 처음부터 전선이었고 처음부터 발가락이었어요 나는 여섯 개의 발가락으로 전선을 움켜쥐고 지상을 내려다보는 존재였어요 하늘은 가까웠고 하늘은 언제나 콜라 색깔 가끔 비가 내려서 물이 빠져도 싱겁지 않아요 콜라를 부어 줘요 그렇게 전선 위에서 발가락으로만 살다가 아스팔트 길에 발가락 여섯 개로 나란히나란히 앉은 겁니다 때마침 나보다 느린 바퀴들이 지나간 겁니다 그때 하늘이 아주 먼 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전선조차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알았죠 발가락은발가락은 곪으며 이삭처럼 자랄 겁니다 이삭처럼 줍고 이삭처럼 배부를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생겼죠 할머니가 이삭처럼 나를 주웠죠 친구들은 애타게 울었죠 하늘에서 사라진 새 한 마리 전선에서 떨어진 새 한 마리 전선을 올려다보는 새 한 마리 할머니는 내게 물었죠 저 하늘이 그리우냐 그리고 할머니가 내게 소다수를 부어 주었어요 소다수처럼 푸른 하늘을
― 황은주 시집, 『새에게 소다수 하늘을』 (시인의일요일 / 2025)
황은주
2012년 《중앙일보》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그 애가 울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