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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민중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자 강인철 교수의 《민중의 개념사, 이론》 편
주체성과 저항성이란 열정적 단초에서 시작된 민중 개념의 깊이와 넓이에 대하여
주체성과 저항성이란 열정적 단초에서 시작된 민중 개념의 깊이와 넓이에 대하여
무릇 민중은 감정을 휘젓고 약동시키는 격정의 언어다. 대립적 진영의식을 추동해 뭇사람들을 저항운동과 정치적 쟁투 속으로 밀어 넣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게 강렬하고 또렷한 이미지와 정동(情動)이 이 두 음절에 박혀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과는 대조적으로, 사실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아시아 역사에서 민중은 ‘다수의 민(民)’을 가리키는 지극히 평범한 말로 지내왔었다. 조선 말기 개항과 국망(國亡)을 겪는 와중에도, 그 무렵 유사 개념들이 대대적인 변화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와중에도, 민중 개념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우리네 역사에서 민중이 범상치 않은 그 무엇으로 돌변하기 시작한 건 3ㆍ1운동이라는 대사건을 치르면서부터다. 언어가 시대의 거울이듯, 이 어휘가 품고 있던 전통적 의미에도 새로운 의미들이 섞여 들어와 충돌하면서 복잡하고 다의적인 개념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수성’과 ‘종속성’이라는 전통적 기표(記標)에 ‘정치 주체성’과 ‘저항성’이라는 새로운 기의(記意)가 부착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 열정적 단초들에서 출발한 결과가 여기에 담겼다.
이 책은 민중 개념의 구성요소들과 이론적 측면을 밝히는 데 주력한 연구서다. 민중 개념을 다양한 차원에서 (재)정의/정립하고, 이를 둘러싼 합의와 불일치를 판별하며, 피지배ㆍ다수ㆍ주체ㆍ저항ㆍ다계층성 등 그의 구성요소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해나갔다. 아울러 개념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민중을 적절히 자리매김하기 위해 다각도의 모색을 시도했다.
『민중, 시대와 역사 속에서: 민중의 개념사, 통사』와 함께 ‘민중의 개념사’ 2부작을 구성하는, 성균관대학교 학술기획총서 ‘知의회랑’의 서른여섯 번째 책이다.
🏫 저자 소개
강인철
1994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1997년부터 한신대학교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민종교, 전사자 숭배, 한국의 종교정치, 군종제도, 종교와 전쟁, 양심적 병역거부, 종교사회운동, 종교권력, 개신교 보수주의, 한국 천주교, 북한 종교, 민중 개념사 등을 탐구해왔다. 현재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역사를 다루는 2부작을 집필 중이다.
이번에 나온 『민중』 2부작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모두 18권의 단독저서를 출간했다. 광주항쟁 40주년을 맞는 2020년 5월에 『5ㆍ18 광주 커뮤니타스』를, 그리고 2019년 초에는 ‘한국 시민종교 3부작’을 이루는 『시민종교의 탄생』,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전쟁과 희생』을 동시에 내놓았다.
2017년에는 『종교와 군대』를, 2012~2013년에는 ‘한국 종교정치 5부작’인 『한국의 종교, 정치, 국가』, 『종속과 자율』, 『저항과 투항』, 『민주화와 종교』, 『종교정치의 새로운 쟁점들』을 선보였다. 그 밖에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2008), 『한국의 개신교와 반공주의』(2007), 『한국 천주교회의 쇄신을 위한 사회학적 성찰』(2007), 『한국 천주교의 역사사회학』(2006), 『전쟁과 종교』(2003), 『한국 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1945~1960』(1996) 등이 있다.
📜 목차
머리말
제1장 서장
1. 개념사와 지성사|2. 허구인가 실체인가: 지성사적 접근|3. 민중 개념 연구|4. 문제의식
제2장 합의
1. 정의|2. 수렴|3. 다원적 접근|4. 민중의 이중성
제3장 불일치
1. 이견들|2. 개념의 시간성|3. 지식인, 중산층, 민중|4. 동질성과 이질성|5. 진보, 역사, 보편성
제4장 주체
1. 역사주체|2. 민중과 근대|3. 메시아적 주체
제5장 저항(1)
1. 권력과 민중|2. 저항으로의 전환
제6장 저항(2)
1. 지배의 틈새|2. 민중문화|3. 민중언어|4. 민중정동
제7장 저항(3)
1. 저항의 기술|2. 저항과 윤리
제8장 개념 네트워크 속의 민중
1. 고유어인가 번역어인가|2. 호환/대항 관계: 민중과 인민|3. 호환 관계|4. 대항 관계(1): 순응적 정치주체 계열|5. 대항 관계(2): 저항적 정치주체 계열|6. 결합 관계|7. 서발턴연구와 민중연구
맺음말
주ㆍ참고문헌ㆍ찾아보기
수록 도판 크레디트
총서 ‘知의회랑’을 기획하며
📖 책 속으로
ㆍ필자는 이 책의 주역이 아니다. 진정한 주역은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민중론자들’이다. 필자는 그들의 육성을 보다 많이 발굴하고 좀 더 충실히 소개하려 애썼을 따름이다. 그들의 목소리가 후속 세대와 새로운 독자들에게 좀 더 원활하게 이해되고 소통될 수 있도록 애썼을 따름이다.
-본문 9쪽, ‘머리말’ 중에서
ㆍ결론적으로 민중은 ‘잠재력과 가능성의 기표’이자, ‘텅 빈 유동하는 기표’이자, 헤게모니적 쟁투가 벌어지는 ‘갈등의 장소인 기표’이기도 한 무엇이다.
-본문 68쪽, ‘제2장 합의’ 중에서
ㆍ민중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계층ㆍ계급들로 구성된다는 데 대해서는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필자는 이를 ‘다계층성’이라는 용어로 집약하여 민중 정의 안에 포괄한 바 있다(필자가 사용하는 다계층성 용어는 좁은 의미의 계층뿐 아니라 젠더, 세대, 종족, 지역, 종교도 포함한다). 민중의 내적 다양성을 대부분 연구자들이 인정하지만, 민중을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 사이의 이질성 혹은 동질성을 강조하는 정도 면에서 미묘한 견해차 또한 나타났다. 어떤 이들은 집단 간 연대를 통한 민중 형성을 보다 용이하게 만드는 공통의 이해관계나 문화를 보다 강조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연대와 민중 형성을 방해하는 집단 간 대립의 측면을 강조한다.
-본문 139~140쪽, ‘제3장 불일치’ 중에서
ㆍ한국의 민중론은 ‘서구 근대적 주체’ 문제를 의식하면서 그것의 여러 한계들을 넘어서기 위해 씨름해왔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1세대와 2세대 민중론에서는 이 문제가 진지하고도 충분하게 논의되지 못했다. 서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 민중론에서 ‘주체’ 문제는 이행/전환 담론이나 영웅ㆍ엘리트 사관 비판의 맥락에서 주로 논의되었다. 서구 근대적 주체 관념 비판의 맥락에서 타자를 창출하고 지배하는 위압적ㆍ능산적 주체, 그리고 권력 효과로 생산되는 탈중심화되고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주체가 자주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혹은 1990년대 이후부터였다. 다만 민중신학은 이런 큰 흐름에서 이례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본문 187쪽, ‘제4장 주체’ 중에서
ㆍ민중이 겪는 ‘고통’의 강도와 민중 ‘저항’의 강도 사이에 비례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라나지트 구하가 말하는 ‘헤게모니 없는 지배’에 해당하는 사회들에서 피지배층에 대한 강제ㆍ억압의 정도는 더욱 높아지고, 그에 따라 민중이 겪어야 할 고통의 정도 또한 높아질 것이다. 제임스 스콧이 말하듯이,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권력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권력이 보다 자의적으로 행사될수록”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사회심리적 거리도 증가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통에서 불만으로’의 경로는 자연스럽지만, ‘불만에서 저항으로’의 경로는 당연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현실이 불만이나 한(恨)과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낳게 마련이지만, 그것이 항상 저항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민중은 지배문화의 가치를 내면화하여 지배자들에 대해 ‘모방 욕망’을 품을 수도 있고, 숙명론적 체념의 문화에 침윤되면서 그에 적응할 수도 있다. 현영학이 말했듯이 고통의 현실에 직면한 민중의 반응은 다양하다. “무조건 복종하는 극히 보수적인 사람들, 숙명론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의식화되어 현실의 실상을 볼 줄 알게 된 사람들”도 있고, “의식화되고 눈치껏 조직하고 투쟁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본문 231쪽, ‘제5장 저항(1)’ 중에서
ㆍ기존 민중 이론들을 관찰해보면 저항의 윤리적 원천으로 세 가지 정도가 주장되어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민중도덕 혹은 민중윤리이고, 둘째는 (양심적) 지식인의 윤리이고, 세 번째는 민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서 ‘열사(烈士)의 윤리정치’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본문 358쪽, ‘제7장 저항(3)’ 중에서
ㆍ필자는 1960년대 말부터, 늦어도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민중 담론 형성과 민중 개념 연구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들, 곧 1세대 민중론자들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그들에 대한 보다 면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2세대 민중론이 풍미했던 시기에 그와는 ‘결이 다른’ 민중론을 펼쳤던 이들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견지에서 3세대 민중론이 1세대 민중론 및 2세대 ‘비주류’ 민중론과 유기적으로 결합할 때 민중론의 새 지평이 열리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본문 465~466쪽, ‘맺음말’ 중에서
🖋 출판사 서평
민중연구의 접근 경로
개념사ㆍ지성사ㆍ심성사 그리고 세대론과 지식인론
저자는 이 책의 성격을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민중 개념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강조하는 개념사적 연구다. 이에 따라 사회사와의 연관 속에서 민중 개념의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는 데 우선 집중했다. 둘째, 지성사적 연구다. 역사적 맥락 차이에 유념하면서 수많은 지식인들이 선행하여 제시한 민중이라는 관념(ideas)의 내용과 출현, 전파ㆍ확산 혹은 쇠퇴, 변용 과정 등에 주목했다.
이에 더해 이 책에서 특징적으로 활용된 민중 개념 접근 경로로서 ‘세대’라는 프레임도 꼽을 수 있다. 관습적인 세대론 방식은 대개 10년 단위로 나누어 1970년대ㆍ1980년대ㆍ1990년대 이후의 민중론으로 각각 분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책에서 민중론 혹은 민중 개념화를 새로운 세 개의 차별적인 세대로 구분해 정리한다. 즉,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가 ‘1세대’,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가 ‘2세대’, 1990년대 중반 이후가 ‘3세대’다. 물론 이때 이러한 세대론의 선명한 분기 요인은 ‘마르크스주의’다. 환언하자면 ‘마르크스주의 이전’ 시기(1세대), ‘마르크스주의’ 시기(2세대), ‘마르크스주의 이후’ 시기(3세대)다. 저자는 이렇게 재정립한 세대론의 프레임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서로 다른 세 가지 민중 담론 혹은 민중 패러다임이 계기적(繼起的)으로 중첩되었음을 입증하려 했다.
또한 저자는 민중 개념 연구가 프랑스 학계를 중심으로 발전한 ‘심성사’ 내지 ‘망탈리테사’와도 접합점을 형성할 수 있다고 본다. ‘심성(心性)’은 특정 시대에 개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 의식이나 무의식으로서, 논리적 사유와 정서적 감정을 포괄한다. 이 책에서는 민중의 구체성을 해명하는 데 유용한 방법론들을 제공했다. 아울러 저자는 개념사ㆍ지성사ㆍ심성사의 접근법뿐만 아니라, 민중 개념 연구에서 국내외의 선행하는 이론과 접근방법들로부터 유용한 통찰들을 끌어오기도 했다. 예컨대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below)’ 관점, ‘사회운동의 감정사회학’, ‘정동이론(affect theory)’, 서발턴연구(subaltern studies),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의 다중(multitude) 개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나 알랭 바디우의 인민(people) 개념 연구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책은 민중에 대해 논의한 ‘지식인들’에 초점을 맞춘다. 지식인들이 어떤 의도로 어떤 의미를 민중이라는 기표에 부여하고자 했는지, 나아가 이들이 민중 기표를 통해 어떤 정치적ㆍ사회적ㆍ문화적 목적을 추구했는지를 탐구한다. 요컨대 저자는 민중에 다가서기 위한 경로로 1차 연구대상을 그야말로 다양한 지식인들의 민중론으로 삼는 것이다.
이 책의 문제의식들
본격적인 민중론 전개에 앞서, 저자는 현재까지의 민중 개념 선행연구들을 일별한 뒤 이 책에서 주의를 기울이는 몇 가지 문제의식들을 밝힌다. 그중 각별히 눈여겨봐지는 지점들을 짚어둔다.
먼저 이 책은 민중 개념의 차별성과 한국적 독특성에 주목한다. 이와 관련해 ‘민중은 서구 개념의 근대적 번역어인가’라는 쟁점이 비중 있게 취급되고, 역시 다양한 분야들로 구성된 한국 학계의 주체적이고 창의적인 학문적 성과로서 ‘민중연구/민중학(minjung studies)’의 형성 과정과 발전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민중론의 시대적 다양성도 강조된다. 민중이라 하면 ‘1970년대’ 민중론과 ‘1980년대’ 민중론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보다 긴 안목에서 보면 ‘1970년대 이전’의 민중론도 존재했고, (비록 확연히 약화했을지언정) ‘1990년대 이후’의 민중론도 분명 존재했다. 따라서 1920년대에 저항적 민중 개념이 등장한 이후 한국에서 출현한 민중 개념의 ‘역사적 다양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 가운데 하나다.
또한 민중론의 시기 구분도 좀 더 세밀하고 정확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켜켜이 쌓인 저항적 정치주체의 계보학적 역사의 무게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그런 과정에서 특정 어휘가 지배자의 언어 혹은 저항자의 언어로 점차 굳어지는 과정을 ‘지식의 고고학’을 수행하듯 찬찬히 살피는 것, 이야말로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대목 중 하나다.
민중으로 수렴되는 구성요소들
엄밀하게 현재까지 민중에 대해 ‘합의된’ 정의는 없다. 더구나 민중 개념의 내용이 역사적으로 계속 변해왔기 때문에, 그 모두를 포괄하는 정의는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근현대로만 한정하더라도 민중의 의미 스펙트럼에는 다수자, 하층민, 피치자(被治者), 피억압자, 역사(발전)의 주역, 저항운동이나 변혁운동의 주체 등과 같은 다양하고도 중층적인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저항성’ 나아가 ‘변혁성’이라는 의미가 도입되면서 우리네 전통적 민중 개념에 대지진이 발생한 1920년대를 우선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 개념적 혁신을 통해 오랜 세월 ‘정치의 객체’이자 ‘통치의 대상’에 불과하던 민중이 ‘정치의 주체’ 지위로 올라서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정치주체를 호명하는 다른 개념들과도 명료히 구분되는, ‘저항적 정치주체’라는 민중만의 독특한 의미구조가 최종적으로 완성된다. 비로소 민중은 ‘저항적 정치주체’이자 ‘저항이념의 담지자ㆍ운반자’로서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저항성이 개념의 내부로 들어옴에 따라 ‘기술적(記述的) 개념’에 머물던 민중이 ‘추동적(推動的) 개념’으로 환골탈태한다.
정리하자면, 일반적으로 동아시아의 맥락에서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전통적 의미의 민중 개념은 ‘다수성’과 ‘종속성’이라는 두 요소를 축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로 사전적 용법들이 이러한 요소를 민중 개념으로 반영하곤 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여기에 새로운 의미와 특징들이 추가된다. 가장 주목해야 할 변화요소가 바로 ‘주체성’(역사의 공동 주체 혹은 진정한 주체), ‘저항성’(저항성의 도입과 그로 인한 개념적 긴장ㆍ역동성의 극대화), ‘다계층성’의 세 가지다. 저자는 민중 개념화에서 비교적 폭넓게 합의되어 수렴하는 이 다섯 가지 요소들-다수성, 종속성, 주체성, 저항성, 다계층성-로 민중 개념의 전체적 윤곽을 다시 그린다.
이 밖에도 저자는 민중의 실체성, 개념의 고대성(古代性), 민중의 긍정성 강조, 실천성과 당파성, 불의한 구조라는 상황 정의와 전복성, 역사적 낙관주의, 민족ㆍ민족주의와의 친화성, 민중의 이중성, 다원적 접근, 역사적 가변성, 형성적 존재 등도 민중 개념의 구성요소들임을 정리해낸다. 덧붙여 민중은 호환 관계에 있는 다른 정치주체 개념들과 비교할 때, 번역어가 아닌 고유어라는 토착성, 비지배/탈권력 지향과 연결된 비주권성, 신ㆍ구 개념의 병렬성, 비주류성, 저항성이라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민중에서 분기되는 지점들
이어서 저자는 민중에서 분기되어 이견이 도출되는 지점들을 통해 민중 개념의 다채로움도 탐색한다. 실상 민중 기표는 온갖 해석들이 제출되어 경합하는 백가쟁명의 장이었다. 민중 기표 자체가 치열한 정치적 각축의 대상이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민중을 둘러싼 주요 쟁점들은 민중의 역사적ㆍ사회적 실체성(객관적 실체 대 지적 구성물), 정의 방식(다원적 정의 대 단원적 정의), 민중 개념의 역사적 시효 내지 시간성(역사-보편 대 역사-특수), 민중 개념의 공간적 적용 범위 내지 공간성(세계 대 동양, 선진국 대 제3세계/식민지), (민중 개념의 공간성 문제와 연관된) 민중 개념의 한국적 특수성ㆍ독창성 정도(번역어 대 고유어/발명품), 민중의 구성 및 범위, 민중의 내적 이질성 및 차이에 대한 해석, 민중의 인식론적 특권 문제, 연대의 성격(동질화 연대 대 이질성들의 연대, 수직적 연대 대 수평적 연대, 연대의 중심세력 존재 여부 및 소재), 권력과의 관계(포섭 대 탈주), 저항의 다양성 및 다차원성 정도(공적-급진적 저항 대 일상적-미시적 저항), 저항으로의 전환을 이끄는 조건과 주도 세력, 변혁론(민중해방의 경로ㆍ성격ㆍ목표), 역사관(진보 관념)과 보편성 관념 등으로 정리된다. 저자는 이러한 이견의 목록은 앞으로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본다.
1970년대에 새로운 민중 개념이 본격 (재)등장한 이래,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연구자들이 민중연구에 참여하고 인문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로 민중연구가 확산해간다. 특히 1980년대 들어 민중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민중론도 더욱 다채로워진다. 결국 민중론의 다변화ㆍ복수화(複數化) 추세로, 민중 개념의 공통 기반 못지않게 차이들이 부각되는 것도 불가피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갈래와 유형의 민중론들과 민중 패러다임들이 제출되기 시작하고, 민중론 진영 내부의 차이들이 상이한 유형론들로 발전했던 셈이다.
주체성과 저항성
이제 저자는 네 개의 장에 걸쳐 1920년대에 등장한 민중 개념의 새로운 기의인 ‘주체성’과 ‘저항성’을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강조했듯이 이는 ‘20세기 민중 개념혁명’의 핵심을 이루는 두 요소다.
- 주체의 담론과 유형들
먼저 ‘주체(성)’의 문제다. 저자는 정치주체, 저항주체, 변혁주체, 역사주체, 서구 근대적 주체, 특권적 주체, 비지배적 주체, 윤리적 주체, 희생적ㆍ메시아적 주체, 연대적 주체 등 매우 다양한 의미ㆍ쟁점ㆍ담론들이 민중 개념을 휘감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담론을 크게 정치주체, 역사주체, 변혁주체, 메시아적 주체의 네 가지로 정돈해본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체 형성’과 ‘저항 실천’의 긴밀한 연관성이다. ‘반(反)권력 효과’로서의 주체화, ‘책임 떠안기’로서의 주체화, 그리고 ‘메시아적 주체’의 형성은 모두 주체화와 저항의 긴밀한 내적 연계를 보여준다. 이 경우 주체화 혹은 주체 형성은 ‘저항주체의 형성’에 다름 아니다.
저자는 민중 개념의 주체(성)에 관한 폭넓은 논의를 거친 뒤, 이를 토대로 다양한 민중 주체들에 관한 한 가지 유형화를 시도해본다. 즉, ‘기존질서에 대한 태도’와 ‘타자에 대한 태도’를 변수 삼아 교차시킨 결과다. ‘기존질서에 대한 태도’는 동조(혹은 순응)와 비동조(혹은 저항)로, ‘타자에 대한 태도’는 배제와 환대로 각각 구분해, 각각 네 가지 유형의 민중 주체를 가려낸다. 정리해보면, (1) 기존질서에 대해 동조적(순응적)이고 타자에 대해 배제적인 민중 주체는 ‘전체주의적 주체’로, (2) 기존질서에 대해 비동조적(저항적)이고 타자에 대해 배제적인 민중 주체는 ‘부족주의적(tribalist) 주체’로, (3) 기존질서에 대해 동조적이고 타자를 환대하는 민중 주체는 ‘조건부 환대 주체’로, (4) 기존질서에 대해 비동조적이고 타자를 환대하는 민중 주체는 ‘무조건적 환대 주체’가 된다.
- 민중 개념에 긴장ㆍ역동성을 불어넣는 저항
민중의 저항은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다채롭게 전개된다. 저자는 특히 민중의 일상생활이나 생활세계를 순응, 굴종, 무저항의 영역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한다. 구조적 불의와 그로 인한 고통이 만연한 민중의 일상은 평온함과 잠잠함의 이미지 못지않게 분노로 들끓는 이미지로도 묘사되어야 한다. 민중의 저항적 행동에는 일상적 저항이 있는가 하면 공적 저항도 있고, 일상의 상징적 봉기가 있는가 하면 폭력적 봉기도 있으며, 저강도 저항이 있는가 하면 고강도 저항도 있다. 최초의 저항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저항의 연속성과 지속성 여부도 흥미로운 문제다. 국지적인 저항이 어떻게 보다 광범위한 저항으로 확산되는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저항의 확산은 연대나 소통매체 같은 또 다른 중요한 문제 영역들에 맞닿아 있다.
저자는 이 저항이야말로 1세대부터 3세대 민중론까지 관통하는 공통 키워드라고 말한다.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의 명명이 1세대의 ‘인간해방ㆍ인간화ㆍ민주화’에서 2세대의 ‘혁명ㆍ변혁’을 거쳐 3세대의 ‘일상적 저항’으로 바뀌었고, 저항으로의 전환을 위한 최우선 실천과제가 1세대의 ‘의식 형성’(의식화)에서 2세대 이후 ‘연대 형성’으로 바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저자는 3세대 민중론자들이 민중이라는 용어 자체를 버리자는 일각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를 고수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본다.
- 저항의 원천
그렇다면 민중 저항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민중의 저항 잠재력과 에너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한편으로는 권력의 취약성과 틈새, 내적 균열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의 주체적 역량 때문에 저항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권력의 내부이자 민중의 외부이고, 후자는 권력의 외부이자 민중의 내부에 해당한다. 이렇게 보면 저항의 원천은 권력의 내부와 외부, 민중의 내부와 외부 모두에 산재해 있는 셈이다.
저항의 가능성이나 원천과 관련된 기존 논의들에 대해, 저자는 그간 ‘저항주체’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흐름과 ‘권력 자체’(그것의 빈틈과 한계)에 일차적 초점을 맞추는 흐름이 양분되어 진행되어왔다고 본다. 좀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비판적 성향의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1) 포스트구조주의나 해체주의 계열의 이론가들이 저항의 거점이나 자원으로 기능할 수도 있는 지배의 빈틈ㆍ균열을 찾아내는 작업에 열중하면서도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저항성을 인정하는 데는 다소 인색하여, 저항의 가능성을 체제ㆍ권력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찾아야 함을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면, (2) 호미 바바나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지배 테크놀로지에 압도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허점과 약점을 집요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일상적 삶 속에서 피지배층의 끈질기고 재치 있는 저항을 잘 조명했고, (3) 라나지트 구하, 제임스 스콧, 에릭 울프, 로버트 단턴 등은 처음부터 피지배층의 저항적 잠재력과 그 문화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피지배층의 일상적ㆍ비일상적 저항 쪽에 분석의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한국의 민중문화, 민중예술, 민중극(탈춤, 인형극)에 대한 연구들은 세 층위의 이론 중에서 (2)와 (3)의 층위 모두에 걸쳐 있으며, 민중운동이나 민중봉기에 관한 연구는 당연히 (3)의 층위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내린다.
개념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인접 개념들과 민중 개념의 관계
민중이라는 개념은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망 속에 존재한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개념 사이의 ‘관계’ 및 ‘대조/비교’라는 맥락에서 민중을 다각적으로 분석해본다. 환언하자면, ‘개념들의 위계ㆍ서열 구조’ 혹은 ‘개념들의 네트워크’ 속에서, 그리고 인접한 다른 정치주체의 개념들-〈인민〉, 〈국민〉, 〈대중〉, 〈시민〉, 〈다중〉, 〈민족〉, 〈서발턴〉 등-과의 상호관계 및 상호작용 속에서 민중 개념의 의미를 탐문해보는 것이다. 민중 개념에 대한 일종의 위상학적 접근인 셈이다.
유사 개념들의 관계는 호환적-수평적-포용적인 것일 수도, 대항적-갈등적-배제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전자를 ‘호환 관계’로, 후자를 ‘대항 관계’로 명명한다면, 결국 ‘호환 관계’는 민중과 유사성을 띠고 있어서 서로 대체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개념들과의 관계를, ‘대항 관계’는 민중과 경쟁하는 개념들과의 관계를 가리킨다. 저자는 ‘호환 관계’와 ‘대항 관계’에 ‘결합 관계’를 추가하여, 호환ㆍ대항ㆍ결합이라는 세 가지 관계 유형을 중심으로 민중 개념과 인접 개념들과의 관계를 논의해나간다. 이때 ‘결합 관계’는 민중과 서로 끌어당기면서 상호침투하는 경향이 있는 개념들과의 관계를 가리킨다. 이 개념적 결합 관계 자체는 다른 개념들에서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민중만의 특이한 현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예컨대 1920년대 이래 민중은 〈민족ㆍ민족주의〉 개념과 유난한 친화성을 보이면서 서로 결합 관계를 형성해왔다.
호환 관계의 개념들은 의미상으로도 유사할 뿐 아니라, 서로 간의 긴장이나 대립이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일상적으로 혼용되며, 이들 사이에 우열이나 지배-억압과 같은 현상도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반면에 대항 관계의 개념들은 의미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갈등하고 우열을 다투며, 종종 정치투쟁ㆍ담론투쟁이나 프레임 경쟁과 연결된다. 때로는 정치권력과 담론권력이 개입되어 특정 용어의 ‘개념적 헤게모니’를 촉진하거나, 특정 용어에 대한 ‘개념적 금기 설정’ 혹은 ‘개념적 억압’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 예컨대 민중과 〈인민〉은 시대에 따라 호환 관계 속에 놓이기도 하고, 대항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또한 저항적 정치주체의 ‘대표 기표’ 지위를 놓고 몇몇 개념들이 대항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 민중과 대항 관계를 형성하는 개념들은 ‘순응적 정치주체 계열’〈(대중〉, 〈국민〉, 〈신민〉 등)과 ‘저항적 정치주체 계열’(〈시민〉, 〈다중〉, 〈서발턴〉 등)의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는데, 민중은 ‘순응적 정치주체 계열’의 개념들과는 대체로 ‘적대적 대항 관계’를, ‘저항적 정치주체 계열’의 개념들과는 대체로 ‘비적대적 대항 관계’를 맺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