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BC 372?~BC 289?)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유교 사상가. 성명 맹가(孟軻).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라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금의 산둥성[山東省] 쪼우셴현[鄒縣]에 있었던 추(趨) 출생.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어릴 때 현모(賢母)의 손에서 자라났으며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는 유명한 고사이다. 제후가 유능한 인재들을 찾는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으로서 맹자도 BC 320년경부터 약 15년 동안 각국을 유세하고 돌아다녔으나, 자기의 주장이 채택되지 않자 고향에 은거하였다. 제후가 찾는 것은 부국강병(富國强兵)이나 외교적 책모(策謀)였으나, 맹자가 내세우는 것은 도덕정치인 왕도(王道)였으며, 따라서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치게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만년에는 제자 교육에 전념하였고, 저술도 하였다고 한다. 《맹자》 7편은 맹자의 말을 모은 후세의 편찬물이지만, 내용은 맹자의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주자학(朱子學) 이후로 《맹자》는 《논어》 《대학》 《중용》과 더불어 ‘사서(四書)’의 하나로서 유교의 주요한 경전이 되었다. 맹자의 사상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며, 또 전국시대의 양상을 전하는 흥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문장은 변론조이며, 예부터 명문으로 여겨진다. 【사상】 맹자의 사상은 인의설(仁義說)과 그 기초가 되는 성선설(性善說), 그리고 이에 입각한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으로 나누어진다. 공자의 인(仁)의 사상은 육친 사이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친애(親愛)의 정을 널리 사회에 미치게 하려는 것이며, 이 경우, 소원한 쪽보다 친근한 쪽으로 정이 더 간다는 것은 당연시되었다. 가족제에 입각한 차별애(差別愛)인 것이다. 맹자는 이를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인애(仁愛)의 덕(德)을 주장하고, 한편으로는 그 인애의 실천에 있어서 현실적 차별상(差別相)에 따라 그에 적합한 태도를 결정하는 의(義)의 덕을 주창하였다. ‘인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의 길’로서, 의는 인의 실천에서 준거할 덕이며, 유교사상은 이로부터 도덕사상으로서의 준엄성을 가지게 되었다. 성선설은 그러한 인심(仁心)이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음을 강조한 설이다. 인간의 본성으로서는 악(惡)에 이르는 욕망도 사실은 존재하지만, 맹자는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요청으로서 본성이 선(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도덕에 대한 의욕을 조장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람으로서의 수양은 ‘욕심을 적게’ 하여 본래의 그 선성(善性)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왕도정치는 그러한 인심에 입각한 정치이다.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불인(不仁)한 군주는 쫓아내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당시의 제후가 맹자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유교는 맹자에 의하여 비로소 도덕학(道德學)으로서 확립되고, 정치론으로서 정비되었다. 그 후 유교의 정통사상으로서 계승되어 유교를 ‘공맹지교(孔孟之敎)’라고 부를 정도로 중시되었다. 성선설(性善說) 맹자의 시대에 오면 인간 심성의 선악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 중 맹자는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 외에 일종의 사회의식-옳고 그른 것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맹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양지(사람이 생각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와 양능(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잘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의 일단이다. - 그 외의 것은 동물과 다를 바 없으므로 오직 이것(양지와 양능)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여야 한다. 한편 이것과 함께 사회생활을 통하여 형성된 도덕관념이 인격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맹자가 양지와 양능을 선의 전부라 본 것은 아니다. 이것은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본성에 내재한 이것을 확충시킬 때 선을 이룰 수 있다. 맹자가 성선을 주장하였던 것은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러한 것이 권선하여 선을 이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도우려는 마음(측은지심)과 불의를 보면 부끄러워 하는 마음(수오지심), 겸손하며 양보하는 마음(사양지심), 옳고 그런 것을 가리고자 하는 마음(시비지심)은 인의예지의 사단의 단서가 된다. 이러한 것은 불인지심에 해당하는데 인간에게 내재한 본성이 이 불인지심을 장황히 설명하면서 이러한 마음이 외재한 것이 아니라 내재한 것임을 밝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내면에 있는 선한 마음을 확충하기를 강조한다. 결코 자포자기하여서는 안 되고 자신을 소중히 여겨 사단을 잘 보존하여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욕망에 가려 선에 나아가는 것이 훼방되어서도 안 되니, 본성을 잃도록 조장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과욕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이야기라는 것은 욕망의 최저의 상태에 이르른 것이다. 그러한 상태에서 자신의 양심을 재발견하여 선에 나아가도록 힘쓰라고 말하고 있다. 순자가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한 것은 교육을 통하여 악한 면을 제거하고 선한 데로 나아가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면, 맹자는 선천적으로 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인간은 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고 전제하여 이를 잘 간직하고 발현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타스의 성선설 ( 性善說) 나타스의 성선설은 맹자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는 않지만 당신은 성선설을 읽으면서 성악설을 알게 될것 입니다.그것의 저의 목적이지요....당신이 가장 어려울때 가장 기쁜 모습이 떠올릴수 있게..... 성선설(性善說) : 孟子가 주장한 도덕설의 중심이념을 이루는 것. 性은 善한 것이며, 그러기 때문에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 등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각각 仁 義 禮 智의 4단(四端)인 것이며 사람은 4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단(端)이라 함은 善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진 시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이에 대하여 상세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으며 또 악(惡)의 기원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성선설 성악설은 宋나라 때의 朱子학파에 의하여 본연기질론(本然氣質論)으로 종합(해결)되었다. 동양 철학의 성선설 : 성선설은 "인간은 선하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집안이든 나라든 모든 사회는 '인간'이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본다(人治). 이들은 인간안에서 '선한 요소'를 찾는데, 그 요소는 '도덕적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성이 인간 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므로 성선설은 대략 '유심주의(관념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이성을 계발한 사람은 지식인이다. 지식인이란 그런 이성과 인격을 함양한 사람이다. 따라서 성선설은 지식인이 국가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지식인이 관료 정치가이어야 하며, 관료 정치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조선 시대의 사대부(士大夫)란 '지식인이며 관리이며 지주'인 사람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지식-권력-경제'의 삼위 일체를 뜻한다. 이런 점에서 성선설은 지식인과 관료를 옹호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맹자 시대에는 새로운 문제가 사상계에 대두되어 유행했는데, 人性의 선악 문제였다. 이른바, 人性이란 사람마다 본래 타고난 품질을 말한다. 그러한 논쟁 가운데에서 맹자는 性善을 주장했다. 『맹자는 性善을 말하였으며, 그것을 말함에 있어 반드시 堯 舜을 일컬었다.』(勝文公上) 맹자는 『무릇 도는 하나일 뿐이다.』, 『顔淵이 이르기를 '舜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노력하면 그와 같이 되는 것이다.' 했다』(同上)고 했다. 맹자가 性善을 특히 창시했지만 그러한 이치는 이미 「대학」「중용」과 공자의 性相近說과도 상통하고 있다. 性善이기에 相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능히 相近할 수 있겠는가? 맹자는 同類相似의 뜻에 의거해서 그 설을 증명하고 있다. 성인은 理와 義로 충만하기에 그 性이 반드시 선하다. 성인과 나는 동류이기에 나 또한 반드시 性善할 것이다. 同類相似와 마음이 같다 하는 것에 근거해서 사람은 모두 理 義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였으니, 性이 善한 것을 알겠다. 性善論은 실제로 유가 사상의 하나의 중심적인 주춧돌이며, 유가의 正論임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서양철학에서의 성선설의 개념 : 서양에서는 성선설이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고 다만 소수의 철학가와 교육가 사이에 유행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학설은 위로 스토아 학파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 스토아 학파는 人性, 物性의 자연에 근거하여 공동의 이성법칙을 찾았는데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이성법칙에 따라서 행하기만 하면 이것이 바로 至善한 行爲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시세로(Cicero : 106∼43 B.C.)와 시네카(4 B.C.∼65 A.D.)에서부터 루소(J.J.Rousseau : 1712∼1728)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는 서양의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民約論」(Contact Social)과 「에밀」(Emile)의 두 저서를 남겼는데 전자는 정치문제를 논하였고, 후자는 교육사상을 발휘하였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모두 극히 자연상태를 강조하였고 자연생활을 주장하였다. 루소는 두 저서에서 모두 극히 자연상태를 강조하였고 자연생활을 주장하였다. 인류의 자연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歷史文明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대개 자연으로부터 온 것은 반드시 참되고,참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선하다." 또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가 다 선하지만 일단 人爲를 거치면 惡으로 변한다."고 주장하였다.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 그밖에 서양에서 성선의 관점을 가진 이는 피히테(Fichte : 1762∼1814)와 프로벨(Froebel : 1782∼1852)등이 이 있다. 이렇게 조금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아주 쉽다.태어날때 부터 착하다는 말 ... 성악설과 결부시켜서 생각하라.. 당신은 이처럼 언제나 착할수도 있지만 언제나 악할수도 있다.그것역시 간단하다. 앞에서 말한 성악설 과 성선설을 잘이해하라...그래야 당신은 나타스를 이해 할수 있다.. 성선설과 성악설 중국의 학설 중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고등학교 시험문제에 자주 나오는 단골 메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마도 두 선인께서 말씀하신 뜻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우리 나름대로 두 학설의 참뜻과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 기본적으로 인간의 집단 즉 사회는 다양성을 근거로 하는 것이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다양성이란 세상에는 왼쪽으로의 의견, 오른쪽으로의 의견, 그 사이의 의견 등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속에 수없이 많은 공기 분자들이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에 어느 한 공기 분자를 붙잡아 속도를 측정해도 전체 속도를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신문지상에 혼수를 적게 해 왔다고 새색시를 학대한 의사가 있다. 그런, 그 의사가 전체 의사 집단을 대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의사들 중에는 훌륭한 뜻을 가지고 낙도에서 숱한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주는 훌륭한 분들도 있고 그저 평범하게 병원에서 근무하는 분들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집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소위 통계학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의 움직임을 기술하기 위해서 발전된 학문인 것이다. 통계학에서 우리는 평균값과 분산으로 집단의 성격을 기술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성직자의 집단에도 타락한 인간은 있는 법이요, 아무리 흉악한 범죄자의 집단에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있는 법이다. 일부 타락한 성직자가 있다고 해서 성직자의 집단을 타락했다고 볼 수 없듯이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마피아 조직을 미화시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집단의 논리와 개인의 논리를 혼동하고 있기에 집단의 개념인 평균값과 분산을 이해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성선설에서도 사람 전체를 선하다고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성선설은 선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끌어 보자는 PULL의 개념이요, 성악설은 나쁜 사람을 밀어 올리는 PUSH의 경우일 뿐이다. 실 사회는 우리 메디슨을 포함해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에 이로부터 규율, 관리 체계가 혼란을 빚게 되는 것이다. 성선설에 입각한 관리는 조직의 능력 있고 정열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장 합당할 것이다. 그 이면에는 자율을 빙자한 타락이 내재하고 있을 것이다. 성악설에 입각한 관리는 나태하고 무관심한 사람의 행위를 제한, 억제하는 과정에서 정열 있는 자들의 자율권이 제한 받게 된다. 메디슨 정신에서 회사의 경영 스타일은 기업환경과 구성원의 문화 의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씌여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의 다양성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율적 운영을 유지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문화의 파괴자에 대해서 개별적으로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면 자칫 잘못될 경우 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경직된 관리 체계가 도입될 우려가 있다. 프랑스의 지하철에는 표를 검사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이 무임승차를 했다가 큰 코를 다치곤 한다. 즉, 가끔 열차 안에서 표 검사를 실시하여 무임승차할 경우 수십 배의 벌금을 징수하게 된다. 이와 같이 문화의 평균수준이 높은 집단에도 이를 악용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성선설적인 기본 관리 체계하에 보완적으로 성악설의 관리 체계가 혼용되어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몇 안되는 얌체 승객을 중심으로 일일이 검사하는 관리 체계가 도입된다면 얼마나 많은 선량한 승객들에게 불편을 끼칠 것인가. 우리 메디슨에도 기업 규모의 증가에 따라 메디슨 스타일과 메디슨 문화를 악용하는 부류가 생길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에 프랑스의 지하철 차표 검사식으로 개별 검사가 필요한 것이며 이것은 우리 문화를 유지하기 위한 안전 장치인 것이다. 이 경우, 문제가 될 부분은 나 분 아니라 다른 사람도 무임 승차를 했는데 왜 나만이 희생양이 되어야 하느냐는 식의 항변은 잘못된 사고 방식일 것이다. 모두를 검사하는 체제는 과거의 전근대적인 체제로 성악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지켜야 하는 도덕성에 기초한 문화의 파괴자는 용납할 수 없으며 어느 경우에도 우리가 추구하는 국부 창출과 인간존중의 이념은 양보 될 수 없음을 명확히 한다. 왕도정치론(王道政治論)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실제 정치에 자신이 수양한 바를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맹자는 그 누구보다도 현실정치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인물이다. 그가 주장한 이론은 왕도정치론이다. 이것은 당시의 제후들이 무력을 통한 영토확장을 시도하고 있을 때 이에 반발하여 덕치를 통한 교화를 주장한 것이다. 그는 당시 민중이 부역과 전란으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황에 처해 있자 이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화평이 절대적이라는 인식 하에 이를 주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한 나라의 군주가 어진 정치를 행하여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다면 그들의 심복을 얻게 되고, 그것이 천하에 확대되어 그 군주가 바라는 천하통일과 민중의 화평이 이룩된다고 주장한다. 덕치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패도정치는 그러므로 그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패도정치에서 사용하던 공리주의 정치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공리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것은 수단에 불과할 뿐이고, 정치의 원칙은 도덕성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법가 등에서 제시한 현실정치안이 원리원칙을 무시한 채 말류로 흐르자 맹자는 이에 대하여 반발하면서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그는 '민위귀,사직차지,군위경(民爲貴,社稷次之,君爲輕)'(진심하 참조)을 제창하였다. 나라에서는 민이 가장 귀중하며, 토지는 그 다음 가고, 군왕은 그보다 귀중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얻는 데 있어서도 도가 있으니 민심을 얻어야만 한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당시 유행한 패도정치 하에서는 군주를 귀하게 여기게 되고 민은 상대적으로 천시하게 된다. 그러나 고통받는 백성의 존재로 바로 그러한 것에서 말미암았기에 맹자가 이러한 당시의 기풍을 배척하며 민의 존재를 강조하게 되는 것은, 현대 민주정치의 이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 '군왕이 신하보기를 자기의 수족(手足)처럼 한다면 신하는 군왕을 복심(腹心)처럼 보며, 역으로 신하보기를 견마(犬馬)처럼 한다면 신하는 그를 군왕으로 보지 않고 일반 백성을 보듯하며, 심지어 티끌처럼 본다면 신하도 군왕을 원수로 여기게 된다.' 는 것과 함께 군왕이 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면 물리쳐야 한다는 식의 사고는 민주주의적 사고가 깊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비록 현실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으나 맹자의 의식의 진보성을 엿볼 수 있고 후대 정치에 끼친 영향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왕도 정치 왕도 정치란 맹자의 정치사상을 핵심으로 이상적인 정치 형태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집단인 국가 사회나 더 나아가 인류 사회에 있어서 민생의 안정과 인간다운 삶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고, 그 목적을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힘과 무력에 의한 강제적 해결이 아닌 통치자의 인격과 덕의 감화력에 의한 평화적이고 순리적인 해결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정치 사상이다. 왕도라는 말은 《서경》'홍범편'에 "치우침이 없고 공평하면 왕도가 광대하고,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고, 뒤집힘이 없고 기울어짐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이다."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왕도는 공평 무사한 중용의 정치를 의미한다. 맹자는 인(仁)을 바탕으로 하여 군주의 어진 마음이 구체적인 정치 현실로 표현될 때 바람직한 정치가, 즉 왕도 정치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그 실천 방법으로 민생의 안정을 역설하였다. 항산(恒産)을 가지지 못하고서 항심(恒心)을 가지기 어렵다는 맹자의 말은 바로 이를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민생의 안정은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기초일 뿐 완성은 아니었다. 인간다운 삶의 길을 제시하고 인도하는 것이 또한 왕도 정치의 중요한 목표 중의 하나였다. 여기에서 효제(孝悌)로 대표되는 인간다운 삼의 이상이 제시되고, 그 실현을 위한 교육적 여건이 마련될 필요가 있었다. 성균관과 향교 등의 학교를 설치하고, 가례, 소학,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을 간행, 반포한 것은 모두 이러한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왕도(王道) 정치 인(仁)과 덕(德)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로, 중국의 유가(儒家)들이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정치사상. 덕을 정치의 원리로 삼는 사상은 이미 《서경(書經)》이나 《논어》 등에서도 보이지만, 왕도를 패도(覇道)와 대비시켜 명확하게 말한 것은 전국시대의 맹자(孟子)이다. 인의(仁義)라는 덕에 의하여 난세를 통일하고 사회에 질서와 안정을 가져오려 하였던 왕도사상은 맹자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맹자는 왕도와 패도를 엄격히 구별하여 “힘으로써 인을 가식하는 자는 패(覇)이다. 패는 반드시 대국(大國)을 가진다.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자는 왕이다. 왕자는 대(大)를 기대하지 않는다. 힘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심복(心服)시키는 것이 아니며, 덕으로써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자는 마음 속에서 참되게 복종시키는 것이다”(公孫丑篇)라고 말하였다. 이에 따르면 인의의 덕이 안으로 충실하여 그것이 선정(善政)으로 나타나는 것이 왕도이며, 인정(仁政)을 가장하고 권력정치를 행하는 것은 패도라 하였다. 맹자는 왕도를 이루는 전제로서 경제적 조건에 주목하고, 그 조건의 한계와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여 “항산(恒産)이 있는 자는 항심(恒心)이 있으며, 항산이 없는 자는 항심도 없다”고 말하면서 인민에게 일정한 재산, 즉 경제적 안정이 없으면 그들에게 도덕적 생활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토지를 인민에게 공평히 분배하는 정전법(井田法)을 주장하는 한편, 교육제도도 언급하여 모든 국민이 안정된 생활과 풍부한 교양을 지니고 도덕적 질서를 지켜 나간다면 그것이 곧 왕도정치의 이상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맹자의 왕패론이 관념적인 것이라면, 전국시대 말기에 나타난 순자(荀子)의 왕패론은 보다 현실적이다. 그는 왕도의 요인으로 인에다가 위(威)를 더함으로써 패도정치의 존재의의를 시인하였다. ‘의(義)가 정립되면 왕, 신(信)이 정립되면 패, 권모(權謀)가 정립되면 망(亡)’이라 하였고, 또 ‘법을 존중하고 백성을 사랑하면 패’라고 하여 패도를 왕도에 버금가는 차선책으로 내세웠다. 한대(漢代)에 이르러 왕도의 이론구성의 새로운 요소로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 등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별다른 이론이 없이 상술한 제설(諸說)이 계승되어 때로는 재해석되기도 하였다 맹자의 일화 맹모삼천 (孟母三遷)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사 맹자 어머니의 교육 일화이다. 맹자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맹자의 어머니가 묘지 근처에 살 때 어린 맹자는 묘지 파는 흉내만 내며 놀았다. 그래서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사꾼 흉내만 내는 것이었다. 역시 시장도 교육상 좋지 않다고 생각한 맹자의 어머니는 서당 근처로 이사했다. 그러자 맹자는 제구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 서당에서는 유교에서 가장 중히 여기는 예절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여기야말로 자식을 기르기에 좋은 곳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맹모단기( 孟母斷機 ). [ 맹자의 어머니가 유학(遊學) 도중에 돌아온 맹자를 훈계하기 위해 베틀에 건 날실을 끊었다는 뜻으로, 학문을 중도에 그만두는 것은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리는 것과 같다는 말. 단기지계( 斷機之戒 ). 단기계( 斷機戒 ). ] 전국 시대를 살다 간 맹자의 어머니의 훈육 일화이다. 집을 떠나 타향에서 공부하던 어린 맹자가 어느 날 느닷없이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은 채 맹자에게 물었다. "그래, 글은 얼마나 배웠느냐?" "별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님." 맹자가 대답하자 어머니는 짜고 있던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리고 이렇게 타일렀다. "네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온 것은 지금 내가 짜고 있던 이 베의 날실을 끊어 버린 것과 다를 게 없다." 크게 깨달은 맹자는 다시 스승에게로 돌아가 전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공자(孔子)에 버금가는 명유(名儒)가 되었다고 한다. 공자와 맹자 공자 나오면 그 다음엔 꼭 맹자! 대개 중국 사상을 거론하는 경우는 공자를 이야기하고 나선 꼭 그 다음엔 맹자를 들먹거린다. 공자와 맹자는 이렇듯 바늘 가는데 바늘가듯 따라 다닌다. 예를 들어보자면 공자를 일컬어 '대성지성선사'.... 이러면,.... 곧이어 맹자를 일컬어 '아성' 하는 식이다. * 대성지선선사 (大成至聖先師) : 과거에 공자를 지칭하던 말. 학문을 이루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여 모든 스승의 스승이란 뜻. 얼마전에는 <공자가 죽어야... > 이런 책도 나왔던데, 공자는 이미 죽었지요.. 굳이 또 죽일 필요가... * 아성 (亞聖) : 성인보다 한단계 아래. 공자를 최상위에 두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성인이란 뜻으로 이렇게 부름.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 이름이《논어》인데.... 논어 이야기를 하다보면 꼭 그 다음에는 《맹자》란 책 이름이 나온다. 주로 이런 식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자의 주장 중에 한 구절 '인(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십중팔구 이어서 맹자는 '의(義)를 위해 목숨을 던진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공자의 이야기를 꺼내면 맹자의 주장이나 종지(宗旨)가 꼭 나오게 되는데, 이는 맹자가 공자의 주장을 대폭 수용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와 맹자는 북 치면 장구 치는 식으로 줄곧 장단이 잘 맞아왔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가 보통 고리타분한 소리다.. 이러면 늘상 하는 이야기.... 공자왈 맹자왈.. 이 역시 공자와 맹자를 거의 같이 거론하는 예가 되겠다.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 사마천(司馬遷). 일반인에게 그저 궁형 당한 사람.. 아주 쉽게 이야기해서 불알 떨어진 사람.. 이렇게 알고 있는데, 그가 쓴 역사책이 《사기(史記)》가 워낙에 재미있게 썼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꽤 익숙한 이름이 되었다. [사마천과 사기1 / 사마천과 사기2]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맹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리고 있다.. 「맹자는 《시(詩)》와 《서(書)》에 근거하여 공자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켰다」 이렇게 본다면 중국 역사학의 아버지도 맹자를 이야기를 하며 공자를 거론하지 않았는가? 중국 근대의 학자 풍우란(馮友蘭)은 공자를 소크라테스에, 맹자를 플라톤에 비교하기도 했다. 여하튼 공자와 맹자는 바늘과 실의 관계라 해도 그리 큰 잘못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 이야기를 하며 웬 공자왈 맹자왈? 공자와 맹자의 비교 역사란 것이 꼭 연대를 밝히고 기원전 몇 년... 서기 몇 년... 이런 식으로 나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대표적인 사건이나 인물을 통해 시대의 큰 특징을 잡아내는 것도 매우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문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양수준에서 약간 높은 경지, 혹은 역사를 거시적으로 보는 안목을 키우는데는 이런 방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와 맹자를 통해 중국의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공자는 춘추시대 사람이었고, 맹자는 전국시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공자와 맹자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이 두 사람의 스타일에는 다른 점이 매우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다를까... 이 두사람 사이에는? 공자나 맹자나.. 지금부터 2천년 전의 사람들인데.. 우리가 이 두 사람을 아는 것은 오로지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서다. 남아있는 기록이 이런 저런 것이 있지만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논어>란 책과 <맹자>란 책이겠다. 옆에서 수발들며 호흡을 같이 했던 학생들이 기록한 글이 아무래도 제일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그럼.. 지금부터 논어와 맹자에 보이는 공자와 맹자의 모습을 비교해 보도록 한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모습은 일종의 뭐랄까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이랄까 하여간에 여유가 있고 한적한 느낌이 든다. 이에 비해 《맹자》란 책에 보이는 맹자의 모습은 매사에 긴장감이 넘치고 심지어는 잔뜩 독이 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공자는 「군자(君子)는 무릇 으젓하고 떳떳하나 소인(小人)은 항상 걱정스러워 하고 조바심을 낸다...」 이러며 자신은 항상 으젓하고 떳떳한 유유자적한 스타일을 유지하곤 했다. 다음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공자는 어느날 제자들과 함께 한담하는 자리에서 각기 소원 하나씩을 말해보라고 했다. 제자들이 각기 의미있는 그런 소원을 이야기했으나 공자는 의외로 증석(曾晳)이 말한 소원을 가장 맘에 들어 했다. 증석은 어떤 소원을 말했길래? 증석의 소원은 이러했다 : 「날씨 좋은 봄날, 새옷을 지어 입고 어른들 대여섯과 어린이 예닐곱이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우(雩) 가락의 춤을 추고는 흥얼거리며 돌아오고 싶습니다...」 이걸 우리식으로 이야기하면 이 정도 되지 않을는지.. 「완연히 봄기운이 돌 무렵 가벼운 몸옷 차림에 맘에 맞는 친구 네댓이서 각자 아이들을 데리고 나서니 아이들은 모두 예닐곱이더라. 이렇게 하여 야외로 나가 따뜻한 봄볕을 쬐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자연의 맑은 공기를 마셨다. 그러다 배가 고프니 고기를 굽고 술까지 한잔 곁들었다. 아이들은 그간 먹고 싶었던 과자며 초코렛을 맘껏 먹었으며 서로 장난치며 시간가는 줄 몰랐다. 이윽고 해가 뉘엇뉘엇 서산마루에 걸릴 무렵 모두들 주위를 정돈하고는 차에 몸을 실었겠다. 차안에서 어린이들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합창하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콧노래를 흥얼대며 집으로 돌아왔다.」 대단히 유쾌하고 한적한 그런 이미지다. 이것과는 대조적인 분위기가 바로 맹자이다. 맹자가 했던 유명한 말 : 「우환(憂患) 속에 살아나고, 안락(安樂) 속에 죽는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매사에 걱정하고 고생 고생하는 과정에서 살길이 열리지만, 그러나 안일하고 준비성 없이 하다가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뜻이다. 즉 유비무환(有備無患)을 강조하는 약간은 비장(悲壯)한 어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죠. <논어>를 보게 되면.. 공자의 경우 약간은 철없이 투정부리는 듯한 인상도 드는 것입니다. 왜냐면 음식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하여 이것도 안 먹겠다 저것도 안 먹겠다 하질 않나, 심지어는 옷도 색채와 스타일이 반드시 어떤 규정이나 법식에 맞지 않으면 입지 않는다고도 했거든요.. 까탈스런 어르신네.. 그런데 이에 반해 맹자는 퍼득하면 이런 식의 열변을 토하곤 했습니다 : 「고관대작(高官大爵)의 주방에는 살진 고기가 즐비하고 마구간의 말들은 살이 디룩디룩 쪘다. 그런데 백성들은 얼굴에 주린 기색이 역력하며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다.」 심지어 <맹자>란 책에는.. 「노약자들이 산골짜기에 처박혀 죽어있고 젊은이들은 가족과 헤어져 천지 사방으로 흩어졌다.」 위와 같은 대목이 수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한편 살벌하기도 하고 겁나기도 한 맹자의 이런 분위기는 공자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바늘 가는데 실 간다는 이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공자는 직접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착하냐 악하냐 하는 문제를 언급한 적이 없습니다. 《논어》에는 오히려 「인(仁)」자가 무려 66번이나 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仁)」자가 출현한 문장에서 그 인(仁)이란 글자의 해석이 거의 대부분 틀립니다. 그러나 공자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비록 성현(聖賢)이라 하더라도 항상 근신하고 조심하고 노력하여 불인(不仁)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발언을 종종 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추론컨대,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惡)하다고 공자는 생각했던 것 같군여. [참.. 내가 일부로 이런 사진을 고른 것은 아니지만 골라놓고 보니까 공자는 비교적 온화한 동네 할아버지 모습인데... 맹자는 눈꼬리 올라간 것 하며 조금 사납운 모습이군여..] 공자는 또 「잘못한 다음의 행동을 보면 그가 인(仁)한지 어떤지를 안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노력하여 스스로 인(仁)해지려고 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비록 주동적인 자아의지의 발로라고는 하겠지만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맹자 손으로 넘어가면 공자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맹자는 단호하게 주장해요... 다음과 같이! 「인간의 본성이 착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인간으로서 착하지 않은 사람 없다. 물이 아래로 흐르지 않는 것이 없듯이 말이다.」 이건 뭐 단호하군여. 똑 부러지게 못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공자는 스스로 고백하길 나이 70이 되기까지 계속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비로소 마음에 내키는 대로해도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이보다 훨씬 과격하고 과감하고 저돌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키운다.... 」 호연지기란 일종의 도덕적 용기를 말하는데, 어떠한 권력이나 폭력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그러한 도덕적 용기를 일컫습니다. 이러한 도덕적 용기는 맹자의 해석에 따르면 외적인 시선을 의식하거나 외적인 감시 혹은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주동적인 의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했기 때문에 맹자는 다음과 같이 호언장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건, 「그렇게 위대하다는 순(舜) 임금이 별거야? 나도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즉 누구나 인간이면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위대한 도덕적 역량을 갖춘 성인(聖人)이 될 수 있노라 주장했던 것입니다. 한편 공자는 예(禮)라는 것에 대해 무척 신경을 썼어요. 신경을 썼다가 보다고 뭐랄까 최고의 가치를 두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관중(管仲)이란 명재상이 제(齊)나라에 막대한 공헌을 했던 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신하(臣下)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호화생활을 했던 것은 예(禮)에 어긋난다고 비판했습니다. 안연(顔淵)은 공자의 수제자. 공자가 현실에서 실패하여 광야를 헤맬 때 오로지 안연만은 공자를 굳게 믿고 정신적인 존경과 지지를 변함없이 보냈던 것 기억합니까? 이에 감동한 공자는 안연의 집안이 돈만 많다면 그 밑에 기꺼이 들어가 머슴이라도 살겠노라 넋두리를 했습니다. 이러한 안연이 요절했을 때 공자는 당연히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안연의 아버지가 안연을 약간은 후하게 장사(葬事) 지내려고 하자 공자는 이때 예(禮)의 원칙에 벗어난다 하여 안연의 후장(厚葬)을 반대했습니다. 이밖에도 양화(陽貨)란 자가 공자를 방문했는데, 공자는 평소 양화란 사람의 인간성을 업신여겼음에도 바로 그 예(禮)라는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양화가 집에 없는 틈을 타서 그집을 답례로서 방문하였습니다. 이런 공자에 비하면 맹자는 오히려 화끈했어요. 제선왕(齊宣王)이 병을 핑계삼아 면담을 기피하자 맹자 역시 병을 핑계삼아 만나자는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양혜왕(梁惠王)을 만나고 나서며 별 임금같지도 않은 사람이라며 콧방구를 뀌었습니다. 노평공(魯平公)이 맹자를 만나려 하지 않자 맹자도 배짱을 튕기며 노평공을 아는 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당시 각국 임금의 선물을 마음에 들면 받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받지 않았다. 예의같은 것을 따지며 의례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비록 공자의 뒤를 이어 유가(儒家)의 학설을 계승 및 발전시켰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행동에는 너무도 현격한 차이점이 보입니다. 왜 왜... 왜 이리 다른가? 두 사람 사이의 개성이란 것도 물론 우리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혹은 우리가 공자나 맹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것이 아니므로 단지 공자나 맹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에 의거해서 판단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논어》란 책과 《맹자》란 책의 소재(素材)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바꿔 말하면 논어란 책과 맹자란 책을 편찬한 제자들이 공자의 경우는 유유자적하는 모습을 기록한 자료를 채택하고, 맹자의 경우는 저돌적이고 단호한 모습을 기록한 자료를 채택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는 약 200년 정도의 시간차가 있다. 그 20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국의 정치상황이 격변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즉 시대적 변화가 공자와 맹자의 언동(言動)에 지울 수 없는 각인(刻印)을 남긴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시대적 격변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일까?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죽었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에 해당한다. 맹자는? 맹자의 생졸(生卒)년대는 확실치가 않다. 그러나 맹자가 가장 왕성하게 활약할 당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전반기였다. 맹자란 책의 첫머리에 그가 양혜왕(梁惠王)을 만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그건 기원전 336년 때의 일이다. 즉 전국시대가 시작된지 이미 67년이 흐른 뒤였다. 그 뒤 115년이 흐른 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다. 춘추시대(春秋時代)로 접어들면서 주왕조의 봉건제도는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붕괴된 상태는 아니었다. 그 이전에는 제후들이 각자 독립적으로 정치를 하였으며 그 제후국 내에 국정을 관리했던 경대부(卿大夫) 및 말단 관리와 군관(軍官) 계급인 사(士)는 전부 세습하면서 모든 것이 정해진 예법(禮法)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예법이니 예니.. 하는 용어는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예절의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어와 장자의 세계> 관련 부분을 통해 개념을 정립하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여기서 말하는 예법이니 예는 불성문 법조문으로 보아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예가 공자 시대에는 이미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예법(禮法)의 구속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더라도 공자 시대에는 그 예법(禮法)을 벗어나는 정도가 그리 심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상류 계층이 서로 정벌하고 공격할 경우 그래도 명의상으로는 도덕(道德)을 기치로 내걸었다. 실제 내막이야 설령 다른데 있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격한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 하극상을 극치인 왕위를 찬탈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이익과 맞아 떨어지는 각국 세력의 지지를 얻은 다음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와 함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자 시대의 전쟁은 전국민에게 파급될 정도로 처참하고 치열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쟁으로 인해 자식이 부모를 잃거나 형제자매가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인간비극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춘추시대의 전쟁 중 자주 등장하는 거전(車戰)이란 것은 일종의 귀족식 전쟁이라고 할만 하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전쟁 당사국 내지는 전쟁 당사자들은 피차간에 모두 서로 체육경기의 방식으로 전쟁을 진행했다. 말하자면 진(陣)을 치는 것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고 서로 맞붙어 백병전이 붙었을 때도 모두가 공인하는 원칙이란 것이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전쟁을 하면서도 일종의 예의(禮義)라는 것을 지켰다. 너무 몰인정하게 인정 사정없이 몰아 부치지 않는다는 것이 당시 전쟁의 불문율이었다고 보면 된다. 이런 관계로 패배하여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지 않았으며 적군의 장수를 직접 겨누어 화살을 쏘는 예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각종 술수를 사용하여 적을 속게 하여 승리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미 적군에게 어느 정도의 상처를 입혔다면 더 이상 찌르거나 베려고 하지 않았다. 머리칼이 허연 군사는 설사 붙잡아도 포로로 삼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이라고 하기보단 일종의 체육경기같다고 한 것이다. 이런 춘추시대의 전쟁 모습은 유럽 중세기 기사도(騎士道) 정신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송양공(宋襄公) 이야기 [송양공의 이야기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상징적인데 기원전 638년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그해 겨울 11월 초하루에 송(宋)나라와 초(楚)나라가 홍(泓:강 이름)에서 전쟁이 붙었다. 송나라 군사들은 이미 전열을 정비하여 작전 태세를 갖추었으나 초(楚)나라 군대는 홍(泓)수를 건너는 중이었다. 송나라 장군이 송양공(宋襄公)에게 건의하길:「우리에 비해 초나라 군사가 압도적으로 많아 중과부적(衆寡不敵)입니다. 지금 강을 건너고 있을 때 공격하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송양공(宋襄公) :「아직은 안되!」 초나라 군대가 모두 강을 건너왔다. 그러나 아직 전열을 정비하지 않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송나라 장군이 다급하게 건의하길:「지금이라도 공격하면 됩니다.」송양공(宋襄公):「아직도 안되!」이윽고 초나라 군대가 전열을 가다듬고 임전태세를 갖추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송양공(宋襄公)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결과는? 송나라는 대패(大敗)하였고 송양공(宋襄公) 본인도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다. 송나라 백성들이 송양공(宋襄公)을 원망했다. 그러자 송양공(宋襄公)은 :「군자(君子)란 이미 부상당한 군사는 더 이상 공격하지 않는다. 또한 머리칼이 허연 사람은 생포하지 않는다. 옛날에 전쟁할 때는 으슥한 곳에 숨어서 기습하지 않았다. 과인(寡人)이 비록 주(周)나라에 멸망당한 은(殷)나라의 후예지만 임전태세를 갖추지 않은 군대를 향해 공격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22년8월)] 위에서 열거한 이러한 원칙들이 춘추시대에 반드시 지켜졌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참전 인원수도 그리 많지 않았고 전쟁을 치루는 기간도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춘추시대의 전쟁이란 단지 당시 사회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음을 표시하는 것일 뿐 전쟁 자체가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의 위력을 갖지는 않았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공자로서는 당시 정세에 대해 완전히 실망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무언가 잘 하면 잘 될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논어>에 보이는 공자의 한적한 태도는 바로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맹자 시대의 난폭한 분위기와 비교해 보면 공자 당시는 상당히 평온한 편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를 외쳤던 것이다. 자신의 탐욕, 개인적인 욕심...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예법(禮法)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사회가 잘만 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고 공자는 믿었음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주장대로 잘 되지 않자 공자로서도 넋두리를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들을 듣지 않으니 아예 뗏목이나 타고 저 멀리 바다로나 나갈까 보다.」 혹은 「봉황새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황하(黃河)에서 상서로운 계시가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나는 안되나 보다.」 비록 이렇게 탄식도 하고 넋두리도 하지만 그러나 일단 극기복례(克己復禮)의 구체적인 방침을 이야기할 때면 이른바 '정명(正名)'이란 것을 당당하게 내놓기도 했다. 정명(正名)이란 명칭을 바르게 한다. 즉 삼라만상의 원래 이름 값으로 돌린다는 뜻. 무릇 임금은 임금으로서의 응당 해야 할 일을 하고, 신하는 신하의, 부모는 부모의, 자식은 자식으로서 응당 해야할 일만 하면, 그리하여 극기복례(克己復禮)가 되면 세상은 더 이상 혼란스러워지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만일 나를 국정에 참여시킨다면 나는 동주(東周)의 태평성대를 만들지 않을까?」이러며 옛적의 평화로운 시절을 회고하기도 했다. [공자의 당시 주장이 허무맹랑하다고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제발 시대적 배경이나 좀 살펴보고 그런 소리를... 공자 당시는 이렇게 느긋한 주장을 충분히 할 정도로 막가는 세상은 아니었다는 점.. 알아두시길..] 맹자 당시는 혁명적! 이에 비해 맹자의 주장은 혁명적(革命的)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맹자를 혁명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맹자의 주장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도를 달리 해서 말하면 맹자 시대의 상황이 단지 공자의 주장처럼 그저 자신을 극복하고 과거의 예법(禮法)으로 돌아가려고 해서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못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무언가 확실하게 바꾸지 않으면 당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제를 보면 맹자의 그런 주장이나 행동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가령 제(齊)나라가 연(燕)나라를 공격하려 하자 맹자는 서슴없이 연(燕)나라를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자 당시라면 공자는 아마도 점잖게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을걸... 제선왕(齊宣王)은 귀족 고관이 해야 할 일을 무엇이냐고 묻자, 맹자는 거침없이 「임금이 크게 잘못하면 목숨 걸고 충고하고, 그렇게 여러 번 충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변화가 없으면 임금을 바꾸는 게 귀족 고관의 일」이라 답변했다. 양양왕(梁襄王)이 다음과 같이 묻자..「천하는 어떻게 결정될 것 같소?」 맹자는..「하나로 통일될 겁니다.」 다시 물길.. 「누가 통일시킬 것 같소?」 다시 답변하길..「사람 죽이기 싫어하는 자가 통일시킬 것이요.」 이 말은 곧 당신같이 사람 죽이는 것, 즉 전쟁 좋아하는 인간은 천하를 통일시킬 수 없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뱉은 것이다. 맹자는 양혜왕(梁惠王)과 만난 자리에서도 「사방 1백리면 족히 천하의 맹주(盟主)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맹자의 이런 주장들은 이미 공자가 노상 입에 달고 다니던 엄격한 규정, 즉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말라」는 그러한 예법(禮法) 지상주의의 엄격한 규범이 아니었다. 맹자가 유세(遊說)하러 다니던 무렵은 상앙(商[革+央])이 진(秦)나라에서 제거되고 소진(蘇秦)과 장의(張儀)가 합종연횡(合縱連橫)을 떠들고 다닐 때였다. 전국시대의 7대 강대국--소위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이미 장기간에 걸친 혈전에 돌입할 무렵이다. 비록 맹자 시절의 전쟁이 전국시대 말기처럼 무릇 15세 이상의 남자는 일률적으로 변방에 투입되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처참하고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항복한 군대 4-5십만 명을 일거에 땅 속에 매장시켜 버리기도 했기 때문에 이미 춘추시대(春秋時代) 귀족식 전쟁처럼 예의를 따지는 그런 신사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상앙이 진(秦)나라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첫 번째 단행했던 일은 진(秦)나라 전국민의 군사조직화였다. 전쟁터에 기병(騎兵)이 등장하게 되었고 보병(步兵)의 숫자도 크게 증가했다. 적군의 머리를 6만을 베었느니 7만을 베었느니 하는 기록이 당시 각국의 정식 역사서적에 기록되던 시기였다. 맹자가 「현재 백성들의 지도자란 작자들 치고 사람 죽이는데 재미 붙이지 않은 놈 없다」고 목청을 높인 것도 당시 각국의 전쟁준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자 당시 지도자들의 전쟁 놀음에 대한 일종의 고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 맹자가 비꼰 다음 말:「고관대작(高官大爵)의 주방에는 살진 고기가 즐비하고 마구간의 말들은 살이 디룩디룩 쪘다. 그런데 백성들은 얼굴에 주린 기색이 역력하며 들판에는 굶어죽은 시체들이 뒹굴고 있다」고 했던 것도 결코 이유없이 던진 말은 아닌 것이다. 맹자란 책에 대해 송대(宋代) 이후로 《맹자》란 책은 사서(四書)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사서(四書)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한다. 그런데 말이 사서(四書)지 실제로는 사서(四書)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맹자》이다. 그후로 역대 황제를 위한 특강이라 할 경연(經筵)의 교재로 채택되었고 또한 과거(科擧) 시험의 표준 교과서로 굳어졌다. 이로써 <맹자>란 책은 중국 사상사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구사했다.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은 일종의 강제적인 추론(推論)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착하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이러한 본성을 계속 유지토록 전심전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맹자의 논리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추론과정이자 결론이었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므로 이러한 자유를 계속 누리기 위해서는 전심전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루소의 자유론과 같은 추론 과정이다. 맹자의 소박한 평등사상---「풍년이면 먹을 것 걱정에서 해방되고 흉년이더라도 죽을 지경에 빠지지 않는다」거나 혹은 「형벌을 약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둔다」는 식의 소박한 평등주의는 사회조직이 비교적 간단한 농업사회에서는 진리로서 적용될 수도 있었고 또한 그런 상황에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맹자》를 포함한 사서(四書)를 읽으며 무조건적으로 그 내용들을 정치철학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사서(四書)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따져봐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서(四書)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논어나 맹자의 정치적 주장이 곧바로 만세(萬世) 불변(不變)의 진리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곧 당시의 역사적 배경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면 결코 그대로 적용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가 다른 까닭 그렇다면 다시 묻건대, 공자가 살던 시대와 맹자가 살던 시대 사이에 어떻게 이처럼 시대적 상황이 판이하게 변해버렸을까? 중국은 왜 이처럼 기원전(紀元前)에 조숙(早熟)한 경지에 접어들었을까? 여기서 조숙(早熟)한 경지라고 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종이가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고 글이란 그저 대나무 쪼가리나 나무 조각에 새겨 열람하던 그런 시절에 이미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聖人)급의 인물이 나오게 되었으며, 맹자와 거의 동일 세기에 진시황(秦始皇)과 같은 인물이 나와 그 이후 중국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까? 이상 여러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미 여러 학자들이 언급한 바 있다. 화북(華北)의 황토지대는(즉, 황하 유역) 경작이 용이하여 일찍이 농업이 성행하였고, 농업이 성행하자 인구가 따라 증가하고 교통 역시 편리하게 되자 상업이 발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회적인 유동성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다. 게다가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갈 무렵 주철(鑄鐵) 기술이 개발되면서 농기구와 무기 발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이상 여러 원인으로 인해 위에서 제기한 그러한 문제들이 생기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의 해답은 나름대로 국부적인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문제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답변은 되지 못한다. 특히 중국의 역사 지리적 문제를 확실하게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 춘추전국(春秋戰國) 전환기에 일어났던 극심한 변화며, 백가쟁명(百家爭鳴)이며 마침내 무력으로 전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며... 이러한 일련의 역사적 사실은 전세계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도 없었던 현상이었다. [출처] 맹자(孟子/BC 372?~BC 289?)|작성자 풀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