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 김용준은 '근원수필'로 유명할 뿐더라 한국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김용준을 대구의 미술가로 다루는 사람도 있고 ---
그러나 그의 행적을 보면 향토회 등에 이름이 비치기도 하나
대구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선산 출생이다.
‘노시산방’의 주인 근원 김용준
‘댁에 매화가 구름같이 피었더군요. 가난한 살림도 때로는 운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수묵(水墨) 빛깔로 퇴색해 버린 장지 도배에 스며드는 묵흔처럼 어렴풋이 한두 개씩 살이 나타나는 완자창 위로 어쩌면 그렇게도 소담스런 희멀건 꽃송이들이 소복한 부인네처럼 그렇게도 고요하게 필 수가 있습니까. ’
-근원수필에서-
전시회에 출품된 ‘매화 한 점’은 원로 한국화가인 송영방(81) 동국대 명예교수가 학생 때인 1950년대에 서울 인사동 통인가게에서 발견해 간직해 온 소장품이다. “길을 걸어가는데 뭔가 시커먼 것이 지나가 뒷걸음쳐서 다시 보니 보통 솜씨가 아니야. 고학생 주제에 선금만 걸고 품에 안았지.” 화제(畵題)는 겸손하기 그지없다. ‘매화와 더불어 벗이 되고 싶어 매화가지 몇 개를 그려 (…) 속된 화사(畵師)의 화법을 면치 못했구나.’
근원 김용준은 성북동에 살았다. 그 무렵의 성복동은 서울이 아니고 고양군이었다. 꿩이 내려와 모이를 찾고, 늑대도 가끔 내려왔다. 집 옆으로 개울물이 흐르고, 아름드리 소나무와 전나무가 집 담에 그늘을 드리웠다. 아내도 너무 시골이라고 투덜거렸고, 어머님이 오셔서 서울에 와서도 왜 시골에서 사느냐며 불편해 하여 근원은 십여년을 살던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팔고 의정부로 이사했다. . 그 집을 물려받은 김환기는 김향안과 신접살림을 꾸렸다.
근원이 살던 성북동 집에는 매화만이 아니고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아내는 이곳에 이사 오기를 싫어했다.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근원은 자기의 집에 ‘노시산방’이라는 현판을 달고 그림도 그리고 글도 썼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여 문전에 구루마 한 채도 들어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 뒤에는 꿩이랑 늑대랑 가끔 내려오곤 하는 것이어서 아내는 그런 무주 구천동 같은 데를 무얼 하자고 가느냐고 맹렬히 반대하는 것이었으나, 그럴 때마다 암말 말구 따라만 와 보우 하고 끌다시피 데리고 온 것인데, 기실은 진실로 진실로 내가 이 늙은 감나무 몇 그루를 사랑한 때문이었다.
— «근원수필»(열화당) 116면
노시산방에서 김환기와 신방을 차렸던 김향안이 기록을 남겼다. 김향안과 신혼살림을 차리고 “수향산방”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니까 노시산방은 곧 수향산방이기도 한데, 이 집에 관하여 김향안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1944년결혼, 성북동 32-2, 근원 선생이 선생의 취미를 살려서 손수 운치있게 꾸미신 한옥, 안방, 대청, 건넌방, 안방으로 붙은 부엌, 아랫방, 광으로 된 단순한 기억자집. 다만 건넌방에 누마루를 달아서 사랑채의 구실을 했고 방마다 옛날 창문짝들을 구해서 맞춘 정도로 집은 빈약했으나 200평 남짓되는 양지바른 산마루에 집에 붙은 개울이 있고, 여러 그루의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있는 후원과 앞마당엔 괴석을 배치해서 풍란을 꽃피게 하며 여름엔 파초가 잎을 펴게 온실도 만들어졌고 운치있게 쌓아 올린 돌담장에는 앵두와 개나리를 피웠다. 앞마당 층계를 내려가면 우물가엔 목련이 피었었다.
1948년성북동 집이 가족이 살기에 협소하기도 했지만 서울에 오면 도시에 살 줄 알았는데 왜 시골에 사느냐고 어머님이 불평하셔서 시내에 집을 찾은 것이 원서동 골목 조금 들어서면 비원이 내려다 보이는 이층 양옥에 이사오다. 그러나 그해 여름 온 가족이 열병으로 신음하고 다시 시외로 나가자는 제의에 어머니도 찬성하셔서 아래 성북동 274-1로 이사하다. 이 집은 어느 분이 제법 격식 찾아 정성들여 지은 전형적 입구(口) 형의 한옥. 시원스럽게 석가래가 건너간 육간대청 뒷문을 열면 뒷산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랑채와 격리해서 쬐끄만 안마당도 있었으나 사랑채를 허물어서 화실을 만들자고 했다.
— 김향안,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 157면, 158면
1944년 5월 1일
우리는 결혼식을 올렸다. 고희동 선생 주례로 정지용, 길진섭의 사회로. 성북동 274-1. 근원 선생이 손수 지으신 노시산방을 물려받아 보금자리를 꾸미다. 섬에 내려가서 가족을 데려오다. 홀어머님과 아이들을.
— 김향안, «월하의 마음» 16면
노시산방은 수향산방과 겹치면서 화가들이 그곳을 찾으려 나섰다. 서울 미대 교수인 김병종이 노시산방을 찾았으나 지금은 어느 곳인지 흔적조차 알 길이 없었다. 스승인 서세옥이 김용준의 제자이었으므로 근원의 고제(高第)이다. 말하자면 김용준은 우리에게서 잊어진 수필가이고, 흔적도 찾기 어려운 화가가 되었다. 그가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구 미술사를 서술하면서 근원을 대구의 화가라고 하였다. 경북 선산에서 태어났다. 형이 황간에서 한의원을 하였으므로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는 경성부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대구와는 인연이 없는데도 대구 화가라고 하는 것은 대구가 자랑하고 싶어할 만큼 인정받는 화가라는 뜻이리라.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조선으로 돌아와서 근대 미술을 개척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조선 향토색론을 주장하여 미술평론가로서 이름을 내기 시작했으며, 사실적인 자연주의 수법의 유화를 창작한다. 하지만 1938년 무렵부터는 화풍을 바꾸어 전통 수묵화를 그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프로레타리아 미술 진영이 소재 면에서 당대의 시대상과 식민지적 현실을 표현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민족 미술에 관해서 기존의 전통 미술 범주에 머물렀다. 이에 대해 김용준은 민족 미술을 지향한다고 해서 현대 미술을 배격하는 경향에 반대하여, 주체적인 미술 세계의 구축에 힘을 기울였다. 식민 잔재를 걸러내고 민족정신을 바탕으로 한 미술사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광복 후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48년 그의 호를 딴 수필집인 《근원수필》을 출간하기도 했다. 근원수필이 나오자 항간에서는 수필은 이제 마지막이다.라는말이 돌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1950년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의 임시 학장을 맡았다. 그 해 가을 후퇴하는 조선인민군을 따라 월북했다.
전통적인 모더니즘 계열에서 정지용, 이태준과 궤를 같이 하면서 광복 전·후로 좌익 예술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김용준의 월북 동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생으로 국대안 파동 때 미 군정과 충돌해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김진항의 추대로 한국 전쟁 중 얼떨결에 학장이 되었다가 월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설과, 공산주의자였던 부인의 권유로 함께 북으로 갔다는 설이 있다. 월북한 후에는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건축가동맹에 참가했으며 평양미술대학의 강좌장이 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성혜랑이 2000년에 출간한 《등나무집》에서 자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혜랑과 김용준은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1967년 김용준이 김일성의 사진이 들어 있는 신문을 그대로 밖에 버린 사실이 드러나 큰 처벌을 받을 위기에 놓이자 자결했다는 것이다. 성혜랑의 증언 외에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다른 근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용준의 개인사를 보면 역사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한국미를 찾으려는 방법으로 향토미를 주장했다. 서양화를 배웠지만 우리의 전통미에서 미감을 찾아 조선화로 돌아왔다. 그가 남긴 작품은 대부분이 한국화이다. 그리고 수필 ‘매화’와 ‘노시산방’을 남겼다. 그런 그가 월북화가가 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우리에게 외면까지 당했다. 더군다나 자살로 일생을 마감했다니.
서울미대 교수인 김병종이 성북동 274-1로 추정되는 노시산방을 답사하고 글을 남겼다.(2008년 7월 30일) 그곳은 이태준의 고택인 수연산방에서 조금 올라간 길에 있으며 심우장 건너편에 있는 집으로, 근래에 지은 수월암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온통 수목에 가려 있어서 밖에서는 그 집의 존재조차 확인하기 힘들 정도였다. <노시산방기>를 보면 “감나무 몇 그루”가 있다고 했는데, 내 눈으로는 두 그루의 감나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김용준이 노시산방을 김환기에게 넘기고 그려준 <수향산방 전경>에는 그가 사랑했던 늙은 감나무가 그려져 있는데, 바로 그 위치에 감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감나무 몇 그루” 중 가장 늙어 반이나마 고목이 되었던 감나무는 김향안이 땔나무로 쓰기 위하여 베어내었으며, 괴석은 서세옥이 스승을 추억하기 위한 증표로 자신의 집에 옮겨놓았다는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노시산방(성북동 274-1) 건너편에는 심우장이 있고 아래쪽으로는 이태준 고택이 있다. 노시산방을 방문했던 김병종은 때마침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남겨놓고 있다: “노시산방 옛 서재 앞 가장 오래된 감나무의 한 가지는 그 끝이 길 건너 만해 한용운의 고거인 ‘심우장’ 쪽으로 향해 있고, 다른 한 가지는 생전에 지척에 살다가 함께 북으로 갔던 상허 이태준의 고가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내 머리 속에서는 청룡암, 미륵당, 심우장, 노시산방을 아우르는 정신적 공간이 마침내 복원될 수 있었다. 그 일단은 “붉게 타오르는 성곽 아래 연꽃이 피어나 — 심우장 배관기“에서 소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