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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이야기◈ 스크랩 사진여행 [양주/율정] 3대화상(지공, 나옹, 무학)을 수호하는 절집, 양주‘회암사(檜巖寺)’
길손旅客 추천 2 조회 193 13.08.05 11:1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옛 영화로움을 꿈꾸는 작은 도량,

칠봉산 회암사(七峰山 檜巖寺)’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4 / 031-866-0355

http://www.hoeamsa.com

 

최대의 왕실사찰이

잿더미가 되자,

폐허가 된 옛 절터는 수탈의

수난을 겪게 됩니다.

이에 3대화상의 부도와 탑비를

수호하기 위해 법당을 세우니,

지금의 회암사입니다.

 

 

 

 

여행자의 집 근처에는 사적 128회암사지(檜巖寺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까운 곳이라서 미루어 두었던 탓인지 생각만 머물다가 어느 볕 좋은 날, 이제야 기어이 찾았습니다.

 

 

 

 

조선 최대의 왕실 사찰, 회암사(檜巖寺),

회암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만 들어도 회암사의 사격(寺格)을 알 수가 있지요.

고려시대 승려 지공화상(指空和尙)’의 창건과 그의 제자인 나옹선사(懶翁禪師)’가 왕실의 후원을 받아 대대적 불사를 이루면서 고려 말 전국 사찰 총본산의 대가람이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서는 왕실사찰로 이어졌습니다. 태조가 아들 이방원(태종, 조선3대왕)에게 왕위를 내어주고 상심하여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머물게 하여 자신의 마음을 추스렸던 곳이며,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중창과 명종의 친모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승려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가 이끌며 왕실사찰로 거듭하였으나 왕후가 죽고 보우마저 제주 유배에서 죽음을 당하자 절은 황폐해지며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선조28(1595), 조선왕조실록에 회암사 옛터라고 표현 된 것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화재로 소실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의 회암사지는 옛 절터의 발굴로 한창입니다.

회암사지박물관을 지나 회암사지의 발굴 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모습만으로 장관입니다. 세워져 있는 가람 하나 없으나 상당한 규모의 절터입니다. 상상으로 그려지는 왕실사찰의 풍경과 단정하게 그려진 가람의 배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옛 절터를 지나 산길을 올라서면 19세기에 세워진 지금의 회암사입니다.

 

 

 

 

양주 칠봉산 회암사(七峯山 檜巖寺)’,

절집의 뒤로 일곱 봉우리의 암봉이 뚜렷하면서 비단처럼 병풍의 모습으로 펼쳐져 금병산(錦屛山)’으로 불렸습니다.

조선에 들어서는 세조가 왕위를 받는 과정에서 수 많은 신하들과 선비들을 죽인것에 참회를 하고자 전국의 사찰을 찾아다니다가 현재의 자리에 이르러서 금병산의 상봉(上峰)을 국사봉(國射峰)이라 하고, 그 앞의 마을을 보고 안말이라고 부르면서 임금이 올랐던 산이라는 뜻으로 어등산(御登山)’으로 불렸습니다.

한 때는 난을 당한 임금이 피난하여 머물다가 난이 끝나자 산에 보답을 하고자 산에 금은보화를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여 천보산(天寶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 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안말은 '내촌(內村)'으로 불렸고, 어등산은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게 됩니다. 일곱 봉우리 모두 임금이 머물며 지낸 각각의 이름을 가지게 됩니다.

왕이 처음 발을 디딘 곳을 발리봉(發離峰)’이라 하였고, 수렵에 필요한 매를 날렸던 곳을 응봉(鷹峰)’, 왕이 수렵을 하는 곳에 깃발로 표시하니 깃대봉(旗臺峰)’, 왕이 쉬며 투구와 갑옷을 벗어 놓은 곳이라 하여 투구봉(鬪具峰)’, 수렵을 마치고 왕이 떠날 준비를 하던 곳을 솔리봉(率離峰)’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왕이 궁으로 향하면서 돌이 많다하니 석봉(石峰), 그 길에 튀어나온 모난 돌을 조심하라 당부하니 돌봉(突峰)이라 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이로서 칠봉산은 임금이 오르거나 머무른 산으로 어등산’, ‘천보산이라는 이름으로도 함께 불리게 됩니다. 

 

 

 

 

회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9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봉선사본말사지’ ‘회암사의 기록에 순조21(1821)에 이응준(李應竣)이라는 사람이 옛 회암사 터의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를 쓰기 위해 지공과 무학의 부도와 탑비를 훼손하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는 그를 섬으로 유배시키고, 선조28(1828) 부도와 탑비를 다시 세우면서 부도와 탑비를 보호 할 전각을 건립하면서 옛 회암사의 명맥을 잇는다는 의미로 회암사라는 사찰명을 그대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러던 1922, 봉선사 월초스님이 대웅전을 건립하여 불상을 봉안하고, ‘삼화상(三和尙)’을 모셨습니다. 이후 1976년 호선스님이 대웅전을 새로 지으며 도량을 정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왕실사찰의 면모는 사라져 회암사의 가람은 단촐 합니다.

그러나 절터의 주위로는 많은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꼭 절집의 답사만이 아닌, 귀한 문화재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여도 좋은 공간입니다.

 

2층 규모의 설법전의 뒤로 조사전이 서고 서북방향으로 근래 지어진 대웅전이 자리합니다. 서편에 바짝 붙어 관음전이 동향하고 섭니다. 그 사이 북편으로 칠봉산의 능선을 배경으로 두고 삼성각이 자리를 하고 섭니다.

 

절터의 서쪽능선에는 보물 제387회암사지 선각왕사비(檜巖寺址 禪覺王師碑)’가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능선으로 도유형문화재 제51무학대사 비(無學大師碑)’와 그 위로 보물 제388, 389무학대사 홍융탑(無學大師 洪融塔)’무학대사 쌍사자석등(武學大事 雙獅子石登)’이 자리합니다. 능선 위 한단 위에 도문화재자료 제 135지공선사 부도비(指空禪師 浮屠碑)’도 유향문화재 제49지공선사 부도, 석등(指空禪師 浮屠, 石燈)'이 자리합니다. 계단을 따라 능선을 오르면 도 유형문화재 제50나옹선사 부도, 석등(懶翁禪師 浮屠, 石燈)‘이 연이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회암사에는 옛 왕실사찰의 영화로운 역사가 회암사와 함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지로 남은 옛 절터의 흔적,

그 위 칠봉산자락에 3대화상의 승탑과 탑비를 수호하고자 세워진 회암사입니다. 옛 영화로움의 장대함은 없으나 산자락과 어울린 풍경과 면면히 전해지는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입니다.

 

회암사를 들러 역사를 만나보고, ‘회암사지에서 옛 영화로움을 만나보고, ‘회암사지박물관에서 역사의 숨결을 만나보는 여행입니다.

 

 

 

 

 

 

 

 

회암사지 선각왕사비(檜巖寺祉 禪閣王師碑, 보물 제387)’

고려말의 승려 선각왕사 나옹(懶翁, 1320~1376)’을 추모하기 위하여 왕명으로 세운 비입니다.

나옹은 공민왕19년 이후 회암사 주지로 머문 곳이기도 합니다. ‘()’란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돌등에 내용을 새겨 세운 것으로 귀부, 비몸, 이수로 구성 됩니다.

그러나 1997330, 성묘객의 부주의로 화재가 발생하여 비각과 함께 선각왕사비가 전소되고 초석과 기단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에 19998월에 원형을 복원한 모조비를 건립하여 놓았습니다.

    

 

무학대사 비(無學大師 碑, 도유형문화재 제51)’

조선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비입니다. 조선 3대화상의 한 사람으로서 회암사의 터의 비는 태종10(1410) 왕명에 의해 춘정 변계량(春亭 卞季良, 1369~1430)’이 글을 짓고 수선 공부(修仙 孔俯, ? ~1416)’가 글씨를 써서 세웠습니다.

그러나 순조21년에 가문의 묘택으로 쓰려던 이에 의해 파괴되었고, 순조28년에 다시 세워졌습니다.

 

 

 

 

무학대사홍융탑, 쌍사자석등(無學大師洪融塔, 雙獅子石燈, 보물 제388, 389)’

홍융탑(洪融塔)’은 무학대사의 부도로 태종7(1407)에 건립되었습니다.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탑무덤으로 일명 묘탑(墓塔)’으로 부릅니다.

그 앞에는 석등은 사각의 형태에 간주석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쌍사자 석등이라 부릅니다.

    

지공선사 부도비(指空禪師 浮屠碑, 도 문화재자료 제135)’

지공선사의 부도 앞에 자리한 부도비로 지공의 유래를 기록한 비입니다. 원래의 부도비는 우왕4(1378)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이 찬하고, ‘유항 한수(柳巷 韓脩, 1333~1384)’가 글을 써서 새겨 건립 되어 있었으나, 순조21년에 무학대사 비와 함께 파괴되어 순조28년에 중건한 것입니다.

 

 

 

 

  지공선사 부도비, 석등(指空禪師 浮屠碑, 石燈, 도 유형문화재 제49)’

고려 우왕21(1372)에 건립 된 부도와 석등입니다. ‘부도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묘탑으로, 부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과 달리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석등은 불전 앞에 세우는 것을 보통으로 하고 있으나 불교에서는 불을 밝히는 것을 으뜸의 공양으로 여기고 있어 죽은 이를 위하여 묘탑 앞에 등불을 밝히면 다시 태어나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세우게 됩니다.

    

 

 

나옹선사 부도, 석등(懶翁禪師 浮屠, 石燈, 도 유형문화재 제50)’

고려 말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부도와 석등입니다.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禪宗)의 맥을 형성한 3대화상이 머물며 수행하던 곳으로 그 중 나옹선사의 부도석등은 절의 동쪽 능선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글, 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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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8.05 14:45

    첫댓글 몇번 가본곳이군요 그럼에도 발굴중이라 초창기에는 풀밭이더니 이제는 너른구역을 발굴하여 많은유적돠 계단등이 정비되였고
    인근에 유적유물도 보고왔지요 최근에는 가보지 못하였으나 이리 잘 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더운날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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