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박정희 1965년 6월22일 박정희는 단절됐던 한일간의 국교를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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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박정희
1965년 6월22일 박정희는 단절됐던 한일간의 국교를 텄다.
1951년 10월 부터
15년에 걸쳐 1,500여회의 크고 작은 회의를 통해 지루한 밀땅으로 일관해오던 한일회담 에 종지부를 찍고 ’한일기본 조약‘ 을 체결한 것이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그리고상업차관 3억달러,
계 8억 달러의 돈을 받아 경제건설의 씨를 마련했다.
여기에서 더러의 사람들은 일본으로부터 받아낸 것은 겨우 무상 3억달러 뿐이라고 말한다. 윤석열 정부 역시 일본과의 관계개선의 정당성을 설명할 때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받았다고 했다.
당시 박정희는 하고싶은 것이 많았다. 경부고속도로도 뚫어 야 했다. ’산업의 핵‘이라는 제철공장도 꼭 가지고 싶었다. 소양강 댐도 건설해야했다.
미국에
매달려보고, 세계은행
(IBRD)에 돈좀 빌려 달라고 애걸했지만 차디찬 비웃음만 받았다.
쥐를 잡아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수출하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수출해도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돈을 빌려주는 나라는 그야말로 하느님이었다. 유상 2억달러와 상업차관 3억달러가 무상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하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8억 달러 모두가 사막의 오아시스 였던 것이다.
이 8억달러도 일본에서 받아낸 돈의 전부가 아니다. 한일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일본이 36년동안 한국에 건설 한 사회간접자본과 오늘날 한국 대기업의 모체인 기업들 의 자산을 합친 23억달러 상당을 일본에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이 23억달러는 얼마나 큰 돈이었나?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을 한 1948년 당시 조선왕조가 물려준 자산 이 불과 4억5천만 달러. 일본이 물려준자산이 23억달러였다. 일본이 남기고 간 자산이 총 국가자산의 80%이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 엄청난 23억 달러를 일본은 한일협정에서 더 이상 소유권 주장을 하지 않기로 포기한 것이다.
국교가 트였으니 대사가 교환 됐다. 1966년 제2대 주한일본 대사 가나야마가부임했다. 그는 굉장한 지한파였고, 그의 소원에 따라 그의 유골 절반이 지금도 파주에 묻혀있다.
하루는 박 대통령이 가나야마 대사를 불러 술상을 마주했다. 한잔씩을 나누고 나서 박정희 가 가나야마를 물끄러미 바라 보았다. 눈길에는 따뜻한 정감이 흘렀다. 가나야마의 마음이 흔들렸다. 깐깐한 줄로만 알았던 대통령의 정감어린 눈매가 감당이 안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나~‘ 긴장도 되었다.
“임자, 당신 누구요?”
다정다감했던 눈길과는 어울 리지 않게 입에서는 마치 판사 의 인정신문과 같은 딱딱한 말이 나왔다.
“아, 예예 각하. 저는 일본국 수상각하의 전권을 부여받고 대한민국에 부임한 주한일본 대사 가나야마 올습니다.”
이 긴장한 대사에게 대통령은 술 한잔을 더 권했다.
“임자, 당신은 일본 수상이 주는 임무만 수행하지 말고, 나를 위한 대사가 될 수 없겠소?”
“아 네네 각하. 분부해 주십 시오”
대통령은 준비한 봉투를 내밀 었다.
“각하, 제가 열어봐도 되겠습 니까?”
“물론이요”
일본수상에게 포항에 제철 공장을 지어달라는 단순 명쾌한 부탁의 편지였다.
“어떻소?”
“네네 각하, 제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가나야마는 그 편지를 절차상 일본 외상에게 먼저 제출 하도 록 돼 있었지만 그렇게 원칙 대로 하면 박대통령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수상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수상을 설득했다.
“수상각하, 일본 외교의 핵심은 강대국에 있지 않고 한국에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수상각하에게 부탁하는 것이니 각하께서 직접 해결해 주시면 두 나라 관계가 돈독해 질 것입니다.”
그는 외교에 대한 해박한 지식 으로 수상을 설득했다. 밤중 이었다.
수상이 일본의 제철왕 이나야마 를 불렀다. 밤중에 달려온 제철왕에게 수상이 말했다.
“한국 포항에 제철공장을 지어 줍시다.”
“수상각하, 이 무슨 뚱딴지같은 제안입니까? 한국은 지금 손톱 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합 니다. 이런 나라에 무슨 제철 공장입니까? 헛수고만 하는 것입니다. 뭘 모르고 부탁하는 것이니 무시하십시오.”
이에 가나야마가 나섰다.
“회장님,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육사를 나온 수재 입니다. 추진력과 애국심이 대단한 인물입니다. 새마을운동에 착안한 인물 입니다. 모처럼 수상각하께 직접 부탁한 것인데 가벼이 여기면 일본외교에 데미지가 큽니다.”
이에 수상이 입을 열었다.
“이나야마 회장님, 공장 지어 줍시다.”
청구권 자금 중에서 1억 2천만 달러를 풀어 103만톤 규모의 제철공장을 건설했다. 공장 전체가 일본의 기술과 설계와 감리와 부품들로 구성됐다. 박태준은 철저한 현장관리자 였다.
1973년 7월이었다. 5년이 지난 1978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을 존경한다고 말해오던 등소평이 일본 동경 부근에 있는 ’기미쓰‘ 제철공장 을 찾았다. 그를 안내한 이나 야마 회장에게 등소평이 간청 했다. “포항제철과 같은 공장을 중국에 지어줄 수 있겠습 니까?” 이에 이나야마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어서 어렵습니다.” 이에 등소평이 박태준을 초청 했다. 이처럼 제철공장은 모든 국가의 로망이었던 것 이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 고속도로에 필이 꽂혔다. 미국과 세계은행들을 찾아 갔지만 모두 다 콧방귀만 뀌었다. 이 역사 돌파구는 일본뿐이었다. 일본이 청구권 금액에서 690만 달러를 투입하는데 동의 해주었다. 이후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울산 정유공장, 나주 비료공장, 소양강 댐 그리고 수많은 산업 기반 구축 사업들에 투입 되 었 다.
6.3 사태
[국가와 혁명과 나],
박정희가 혁명을 하면서 손글을 쓴 메모 형 책자다. 이 책에는 박정희가 경제에 대해 고뇌한 흔적이 실려있다.
실업률은 30%이상인데 인구증가율은 높고, 먹거리는 고갈되고, 그나마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인체에 기생충들이 들끓어 영양을 빨아가고, 전염병은 도는데 약은 없고, 미국이 주는 원조로는 현상유지조차 어려운데다 미국의 원조는 돈이 아니라 잉여농산물과 유연탄과 석유이기 때문에 이를 가난한 한국시장에 팔아 그 돈으로 세출예산을 세우면 그나마 고관대작들이 달려들어 축재수단으로 떼어가고 있는 현실을 한탄하는 글들이었다.
농업경제시대, 경제의 터전인 농촌은 미국에서 잉여농산물이 유입되면서 곡물값이 떨어져 사람들은 서울로 올라오고, 그나마 남은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놀음하고 마약하고, 술 마시며 자학하는 세월을 보내 고 있었다.
서울의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조센진‘이라 부르며 ’조센진이 뭘 해?‘ 자학하는 것 으로 우국지사처럼 행동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우리 모두 함께 잘살아보자” 직접 노래를 지어 ’새마을운동‘ 을 펼쳤다. 농촌에 읽을 것들을 보내주고, 새마을 성공스토리 를 전파하고, 새벽종이 울리면 마을의 길을 만들고 공공시설 을 만들고 지붕을 개량하고 종자를 개량했다.
쥐털로 코리안밍크를 만들어 해외에 내다팔고,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수출했다. 월남전에 파병하고, 월남의 더위와 정글에서 단련된 제대병을 뜨거운 모래바람 세차게 몰아 치는 중동지역에 건설전사로 내보내 월남특수와 중동특수를 만들어 산업자금을 마련했다.
얼굴에 살이 붙을 여유조차 없이 자다가도 일어나 아이디어 를 내고, 골똘히 생각하며 추진하고 있는 이 국가건설 현장에, 말 공양을 퍼붓고 박수를 쳐주어도 시원치 않을 눈물 나는 노력에, 뛰어들어 깽판을 치는 협작꾼 들이 나타났다.
북한 김일성 집단이 뛰어들었고, 간첩의 조종을 받는 학생시위, 노동자시위가 있었고, 이들을 선동하는 건달정치꾼들이 나타난 것이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방해하기 위해 인부들이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 작업현장 으로 달려가 큰 대자로 누웠다. 이들에는 인부고 땀이고 보이는게 없었다.
간첩 ’이석‘으로 하여금 4.19 폭동을 사주시켰던 북한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가로막기 위해 학생들을 선동하여 1964년 6월3일, 이른바 6.3사태를 일으키게 했다.
여기에 앞장선 학생들이 바로 이명박이고 이재오이고 손학규였다.
이재오는 1979년 일망타진된 남한 최대의 간첩 사건인 ’남민전‘의 골수 멤버 였고, 손학규는 기업도산을 일삼던 위장취업자였다.
이명박은 서울시장을 하면서 평양에 참모들을 세 차례씩 이나 보내 평양시를 리모델링 해주겠으니 자기를 초청해달라 했고, 대통령이 되면 경제를 도약시키겠다며 ’경제대통령‘을 세일즈 간판으로 내걸어 국민을 선동했지만 정작 대통령이 되자 경제에 대해서는 상황처리에만 급급했을 뿐, 새로운 먹거리 기반을 만들어낸 것이 없다.
그는 경제인이 아니라 청계천 사업과 4대강사업에 제한된 토목건설자에 불과했고, 대통령이 돼서도 낮에는 우익 행세, 밤에는 좌익단체들에 돈봉투를 보내는 이중생활을 했다.
마치 월남의 고위장성 이나 고관대작들이 출근길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베트콩 에 금일봉의 뇌물을 준 사실들 과 일맥상통하는 그런 이중 생활 이었다...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