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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사회학자, 그리고 그러한 학문을 공부한 사람도 아닌, 시인이나, 소설가 극작가같은 문학가나 문장가도 아닌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2012년 대통령선거가 서민 민초 99%에게는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내 50줄 중반을 넘도록 살아오면서 몸뗑이 하나로 입에 풀칠하는 밥벌이 해온 나로서는 답답하고도 살아온 날들이 허망하기도 하고, 내가 이 아름다운 지구를 떠난 후 내가 낳았거나, 다른 민초가 낳았거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새끼들 그리고 그 자식들, 그리고 너와 내가 가슴을 기대며 살아오면서 한 마음 한 몸으로 얼키설키 부대끼며 살아온 날들, 어찌되었든지 서민 민초는 몸뗑이 하나로 살아가야 하는 삶인데, 내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답답하고 퍼런 멍들 정도로 슬픈 역사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때문에 지금 나도 덩달아 슬프고 가슴 아프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죄스러울 뿐이다. 그 분들은 불꽃처럼 산화하여 정신을 남기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가슴과 머릿 속에 기억이라는 불에 대인 흔적을 남겨 두셨다. 그 무슨 양심이라는 죄스러운 숙연함을 가슴안에 가득 담아주고 꽃길같이 아름답게, 꽃잎같이 해탈하시고 홀가분하게 저 푸르른 우주로 가셨다.
그래 우리도 해탈하자. 가신 님의 길위에서 해탈하자.
어제 안철수 서울대융합기술과학원장이 5.18 국립묘지에 가서 나와 같이 학교를 다니던 박관현 열사를 만나서 "고이 잠드소서"라고 참배하였단다.
나는 군대에서 제대하던 해에 박관현열사 앞에 오징어 한마리와 소주 한병을 올리고 내 죄스러움을 빌었다. "선배여, 잘가시오! 먼저 간길 내 언제쯤 따라갈런지 모르지만 편안히 가시오!" "내가 군에 있질 않고 광주에 있었더라면 글쎄 아마 선배 곁에 누워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살아서 이렇게 선배 앞에 서있습니다." 라고 돌아서 왔다.(박관현 열사는 고등학교 선배이면서도 그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고, 1980년 당시 5·18 직전까지 광주시민과 학생들의 반독재투쟁을 주도하다가 전두환 신군부가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동시에 보안사에서 재야 인사들을 체포하자 광주광역시를 빠져나가 여수로 도피했다. 82년 4월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50일간의 옥중 단식투쟁 끝에 세상을 떠났다.)
2012년 대선 정국에 5.16쿠테타와 인혁당 사건에 대한 여권 후보인 박근혜, 박정희 독재군주의 딸로서 살아온 대통령후보의 역사 인식에 대해 언론에서 이러쿵 저러쿵 딸 자식으로서 부모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라는 둥 아부하는 사람, 그래도 대통령 후보로서 아버지가 피해를 준사람들에게 사과하고 털고 가야한다고 하는 사람 등등등 많은 말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그녀는 박정희 의 딸이며, 그 핏줄 안에 흐르는 DNA, 그러니까 사람이란 태어나면서 부모 슬하에서 보고 배운대로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 판단이다. 왜냐하면 그 사고는 부모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기 때문인데, 나이가 들수록 더욱더 그 핏줄은 못속인다는게 생물학적 근거이다. 더욱 더 닮아 간다는 것이다.
나는 박 후보가 아버지의 잘못에 대해 조금은 알고 죄스러운 생각을 갖었으면 한다, 그러나 요즘 그녀의 행동과 언행은 "아, 인간이란 나이가 들수록 별반 달라지질 않는구나. 그 피는 속이질 못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더 깊어진다.그녀는 태어나면서 부터 어린시절, 청소년시절, 대학시절, 그리고 퍼스트레이디 시절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 박정희 의 모든 모습, 그 독재의 행위와 사고논리, 말투까지도 그대로 따라서 했을 것이고, 지금도 그 모습이 대통령 후보로서의 행보에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럴 때마다 섬득함을 느낀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카략이 뼈줏하게 서는 기분이 든다.그의 아버지의 독재시절을 다시 보는 듯하다는 생각에서이다.그러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눈안에 들기 위해 온갖 아부성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언론도 역시 마찬가지다. 온갖 논리를 다 모아서 그를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그녀가 대통령이 되었을 경우를 대비하는 아부성 발언 들이라고 생각되지만, 그 도를 넘어서는 것 같다.
여기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글 중에 5.16쿠테타와 인혁당 사건 시점을 앞과 뒤로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 과를 분명한 근거로, 그 당시의 피폐해진 경제의 현상과 서민 민초들의 죽음과 고통의 결과, 사회적 혼란과 예나 지금이나 그 독재와 강압에 의한 부자들의 부정 부패 데이터에 근거해서 그 치적의 부실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근거가 있다. 박근혜 후보와 그 지지자들이 일반적으로 공7 과3 이라는 말을 해대는 허구에 대해 철저히 반박한 근거로 평가해논 글이 있어 옮겨본다.
또한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독재시절에서 가장 정의를 신념으로 외쳤던 박형규 목사님, 길위의 목사님과 그 사건에 대한 대한민국 법관이면서 그 과거시대의 미래의 눈인 현재의 법관의 눈으로 판단한 한 검사의 신념에 찬 무죄구형!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불살라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무죄를 내려달라.” 라는 구형에 대해
과거가 아닌 현재의 재판부도 임 검사와 뜻을 같이 했다. 재판부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울였을 노력 등이 이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참으로 슬픈 역사 속의 한반도 서민들, 민초들의 한스런 생애가 그대로 역사속에 묻혀있다
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많은 사건들을 기억 속에 담고 살아가야 한다.
또 다시 반복되어 피지배 계층으로 전락한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역사학 관련 4개 단체, 14~15일 연합학술대회 개최한 내용을 옮겨 싣는다.
10월유신 선포 40년을 맞아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문제연구소, 역사학연구소, 한국역사연구회 등은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 학술대회를 열었다.
이들 학술단체들은 14일 오전10시 서울 종로구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502호, 503호에서 '유신체제와 식민지 유산'을 주제로 기생관광의 식민지적 기원, 친일세력과 박정희 정권 등을 내용으로 한 학술대회 1부를 진행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14~15일 이틀간 5부로 나눠 진행될 예정이다.학술대회 1부에는 연구원, 교수, 학생 등 50여명이 참석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 박수현 책임연구원, 김영미 국민대 교수, 이준식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 등이 발제를 맡았다.
또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용기 한국교원대 교수, 장신 역사문제 연구소 연구원등이 종합토론을 진행했다.
◈ 박근혜가 안철수 룸살롱 출입 논란에 시비 걸어?
▲ 유신선포 40주년을 맞아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라는 주제의 연합학술대회가 13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열렸다.
이준식 연세대 국학연구원 교수는 '박정희정권과 국책으로서의 성의 도구화'를 주제로 발제했다.
이 교수는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 성행했던 기생관광을 소재로 해 국책이라는 이름으로 어떻게 여성의 성을 도구화하려고 했는지, 성의 도구화가 식민통치의 잔재와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설명했다.
이 교수는 발제에 앞서 "7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은 이미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서 많이 알려진 얘기인데 아버지의 그늘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박근혜씨가 안철수씨의 룸살롱 출입 논란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전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은 경제성장에 필요한 외화획득을 위해서라면 기생관광도 애국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여성의 성을 도구화 했다"며 "기생관광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적극 장려된 일본인관광객 전용의 의사(疑似)공창제이자 국가매매춘"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이 교수는 "국가가 성매매를 장려하는 발상은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식민지 공창제 및 일본군위안부와 이어진다"며 밝혔다.
이어 "박정희 정권기 집권층 대부분이 일제의 황민화 교육을 충실하게 받은 세대"라며 "이것이 단순히 친일행적의 문제가 아니라 사익보다는 공익, 개인보다는 국가를 앞세우는 세계관을 내면화하게 된 것이 더 문제"라고 지적했다.
◈ 일제 강점기 체득한 군국주의 파시즘이 그대로 '유신체제'로..
▲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유신체제와 일제말 파시즘체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박 실장은 "유신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의 메이지유신, 쇼와유신에서 따온 것이며 유신체제를 뒷받침하는 정신적 구조와 통치제제의 근본원리, 수많은 정책들이 일본 파시즘의 그것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도입한데에는 그의 사고와 통치 방식에서 일제 강점기 학생이나 교사, 제국군인으로 체득한 일본군국주의 파시즘의 논리와 행동법칙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박 실장은 "유신체제는 반공에 입각한 통일을 내세우고 총력안보와 국민총화를 강조하면서 고도국방체제를 표방한 일제말 전시총동원체제와 유사한 경향으로 나아갔다"며 몇가지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새마을운동이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이나 농촌중견인물양성을 모범으로 삼아 농촌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쓰인 점 일제의 교육칙어를 본 뜬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등 몇까지 정책을 꼽아 유신체제와 일제강점기 파시즘 체제를 짚어봤다.
◈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독재체제 유지..유신체제까지 이어져
▲ 유신선포 40주년을 맞아 '역사가, 유신시대를 평하다'라는 주제의 연합학술대회가 13일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열렸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박정희 정권과 관련해 친일세력의 전반적인 추세와 지배층 분포, 그 특징 등을 설명했다.
그는 "1963년 야권에서 선거직전에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과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점을 폭로해 박정희의 친일 경력이 공론화 됐다"며 말을 이었다.
박 연구원은 "경제성장의 효과를 바탕으로 박정희의 독재체제가 강화됐고 독재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친일세력의 지배구조 또한 안정화됐다"며 "결국 유신체제는 친일세력의 입지를 더욱 강화시켰다"고 밝혔다.
또 그는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박정희 정권하에 유력한 친일파 230명을 꼽아 분야별로 나눠 설명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친일세력을 근간으로 설립했고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독재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해 유신체제까지 이르게 됐다는 점을 알렸다.
◈ "참다운 민주주의는 어디가고 부정투표의 현황이다"
▲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연 '유신 40년 특별전 식민의 유산, 유신의 추억'에서 박정희에 대한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김영미 국민대 교수는 경기문화재단에서 간행한 '평택 대곡일기'를 바탕으로 농민이 바라본 유신체제를 설명했다.
유신시대를 겪은 한 농민은 1959년부터 1979년(66,69,70년 누락)일상을 상세하게 기록했으며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의 비상계엄령이 발포되자 "아주 의외의 발표"라고 한 뒤 다음날 일기에 "어딘지 불안하다 평화시에 계엄령이란 참 어려운 일이다"라고 적어뒀다.
또 1975년 2월 12일 유신체제하 국민투표에서는 "대통령의 연임을 묻는 국민투표일에 공명선거는 말살하고 대리투표가 전반이며 현 정부의 홍보활동으로 개표는 하나마나다.
참다운 민주주의는 어디가고 부정투표의 현황이다"라며 기록했다.
김 교수는 "농민들의 동의의 대명사가 되고있는 농촌사회의 높은 투표율과 득표율의 이면에는 조직적인 선거부정이 뒷받침되어 있었다"며 설명했다.
한편 이들 학술단체들은 1부 행사를 마친뒤 오후 2시부터 2, 3부 학술대회를 이어서 개최했다. 2부는 '유신체제기 규율권력과 저항'을 주제로 유신체제를 지탱한 규율권력의 메카니즘을 해명하고 저항운동의 성격 등을 분석했으며, 3부는 '개발과 문화를 통해 본 유신정치'를 주제로 마산수출자유지역과 강남개발의 사례연구를 통해 개발독재의 실상을 조명했다.
15일 열리는 4부(10:00~13:00)는 '유신체제 형성과정의 재조명'을 주제로 한미관계, 남북관계의 전개와 경제적 사전 조치를 중심으로 유신으로 이행해가는 기반구축 과정을 분석한다.
이어 5부(14:00~18:00)에서는 '유신시대의 역사적 평가와 성찰'을 두고 유신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정치, 경제, 법 제도, 문화 등 각 분야의 시각에서 입체적으로 접근할 계획이다. ==2012.09.14민중의소리 전지혜 기자==
만약,1979년에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인혁당','5.16 군사 쿠데타' 등에 관한 발언으로 언론에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한 나라의 대통령 후보라면 반드시 지녀야 할 올바른 역사관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는 MBC 라디오 '손석희 시선집중'에 출연해 박 후보는 "(유신과 5ㆍ16의 경우) 그 당시 상황을 봤을 때 만약에 내가 지도자였다면, 이런 입장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이나 판단을 했을까 생각하며 객관적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며 "그런 부분은 객관적으로 역사가 판단해 나아가지 않겠나. 그것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 후보는 특히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가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셨다"며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함축돼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진정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박근혜 후보의 말과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박정희가 과연 나라를 위해 노심초사하면서 떳떳했던 인물인지, 그가 죽었던 1979년 상황을 돌이켜보면서, 우리 각자가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1979년, 그 암울했던 경제 상황'
박정희를 일컬어 산업화를 만든 장본인이라는 칭찬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럴 순 있습니다. (그 당시 독재자들이 어느 정도 산업화를 통해 경제력을 키웠던 시대 상황으로만 본다면) 그러나 그가 죽었던 1979년을 보면 산업화의 장본인, 경제 성장의 아버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대한민국은 경제난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 1979년 6월4일자 기사
◈ 1979년은 서민을 비롯한 자영업자, 중소기업 모두가 힘든 시기였습니다. 6월인데도 벌써 '물가 연말억제선'이 무너졌다는 기사가 나왔을 정도입니다. 1979년 5월 도매 물가는 10.5%,소비자 물가는 12.3%의 상승률을 기록해 정부가 정해놓은 물가억제선 도매 10%, 소비자 12%를 모두 넘었습니다.1978년은 식료품가격이 올라 물가인상으로 서민이 고통받았다면, 1979년은 수입원자재와 공산품까지도 가격이 올라, 소상공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의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 1979년의 경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나빠졌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2차 오일쇼크가 왔던 요인도 있지만, 석유제품의 가격은 59%, 전력요금은 35%까지 올라가 버렸습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점은 바로 부동산 투기로 인한 빈부격차가 최고조로 달했다는 사실입니다. 1970년대 하반기부터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는 1979년 토지가격을 무려 49%나 급등하게 했고, 이 때문에 집 없는 서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박정희가 산업화를 위해 농촌의 인력을 대거 도시로 끌고 와 나라 경제를 살렸다고 하지만 실제로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은 그의 정권 통치기간 내내 소모품으로 살면서 일의 대가조차 받지 못하고, 도시 극빈층으로 전락했을 뿐입니다.
◈ 박정희의 산업화가 왜 문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바로 재벌만을 위했던 그의 경제 정책입니다.
1979년 대한민국 제조업 출하액을 보면 상위 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6.3%, 10대 재벌의 경우 22.7%, 20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30.3%였습니다.
대한민국 제조업은 재벌들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이는 박정희가 정경유착을 통해 정치자금을 받고, 이를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1961년부터 잘살아보세를 외쳤지만 18년 동안 재벌만 잘살았던 것입니다.)재벌은 특혜 금융을 통해 자신들의 재산은 늘렸지만, 노동자의 임금과 복지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아 사회 빈부의 격차를 늘려놓았습니다.
아직도 박정희의 산업화 때문에 잘살게 됐다고 믿는 사람을 보면 '당신이 아닌, 재벌이었다'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당시 경제는 재벌을 위한,재벌만의 경제 정책이었습니다.
▲1978년에 발생한 삼성조선의 '산업스파이'사건, 삼성조선은 대한조선공사의 설계도와 기밀 서류를 빼돌리다 적발됐다.1978년 4월17일자 기사
◈ 박정희가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켰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당시 재벌들이 정부 보증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상위 5대 재벌이 되느냐 10대 재벌이 되느냐가 됐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재벌들이 자기 자본 없이 무조건 정부의 금융특혜로 기업을 키웠는데, 당시 중화학산업의 평균자기자본비율은 22%에 불과했고, 1979년 5월은 총투자규모의 30%가 투자 보류 내지는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재벌이 정당하게 기업 활동을 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가 인정을 받았겠지만, 정치자금을 내고 금융 특혜를 받으며, 기술력보다는 비리를 통해 재산을 늘리면서 정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 재벌의 모습은 독재국가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에 불과했습니다.
▲ 1965년부터 1983년까지의 물가지수. 출처:통계청
◈ 1970년부터 급등하기 시작한 물가는 점점 가면 갈수록 서민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경제 성장률은 1976년 14.1%,1977년 12.2%였다가 1978년 9.7%로 계속 내려갔습니다. 박정희가 사망했던 1979년 경제성장률은 6.5%였고, 국가채무는 200억 달러를 넘어 국가부도 사태까지 제기될 정도였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지 않았어도, 그는 결국 국가 경제의 부도로 하야했을 정도로 당시 경제는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
◈ 1979년 박정희가 죽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은 어떻게 됐을까?
'박정희의 죽음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1979년 '부마항쟁'입니다. 이 부마항쟁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재 여부와 그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통치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성중이던 YH여공들의 구호와 신민당사에서 경찰에 끌려나가는 여공들.경찰의 진압과정에서 김경숙이 숨졌다.
부마항쟁을 김영삼 제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필자는 YH무역 여공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YH무역이 공장문을 닫아 기숙사에서 잠자던 여공들이 쫓겨 나와 간 곳이 신민당사였습니다.
노동자들이 정치를 통해 유신독재의 경제정책 결과인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노동자가 야당과 연대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신민당사를 공격했고, 경찰진압과정에서 숨진 YH노동자 김경숙의 죽음을 절대 언론에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하면서 박정희의 산업화를 칭송하는 이들은 당시 배부른 돼지는 서민이 아닌 재벌뿐이었고, 대한민국 노동자와 서민은 굶주림과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는 노예였다는 사실을 절대 알고 싶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필자가 앞서 1979년 경제 상황을 말한 이유는 박정희가 만든 경제허상의 실체를 국민이 인식하고 반발하는 시점이 1979년이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특히 고도성장정책의 추진으로 빚어진 수없는 부조리. 그중에서도 재벌그룹에 대한 특혜 금융이 ....기업주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으며, 특수권력층과 결탁하여 시장을 독점함으로써 시장질서를 교란시켜 막대한 독점이윤을 거두어 다수의 서민대중의 가계를 핍박케 ...그뿐만 아니었다.
정부나 기업은 보다 많은 수출을 위하여는 저임금 외의 값싼 공급은 없는 것으로 착각하고 터무니없이 낮은 생계비 미달의 지불...극심한 소득분배의 불 균형 때문에 야기된 사회적 부조리를 상기해보라!” 10월16일 부산대 선언문 중에서
김영상의 제명 이후 불거진 부마항쟁은 유신이라는 정치적 독재 상황도 중요했지만, 당시 대다수 국민의 삶이 더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는 점도 원인으로 봐야 합니다.
▲ 부마항쟁 당시 비상계엄이 실시되면서 탱크가 도심에 진주하자 시민들이 놀란 표정으로 탱크를 바라보고 있다.
◈ 재벌과 박정희 산업화의 노예로 전락했던 국민이 경제허상을 자각하고 일어서는 시점에서 박정희는 부마항쟁을 단순히 위수령과 비상계엄령 등의 무력통치로 진압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것이 그동안 일어났던 학생운동과 본질에서 차원이 다른 사태라는 점을 파악했습니다.
"가혹한 처벌에도 불구하고 국민, 특히 학생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더욱 거세어졌고, 급기야 부산, 마산사태로까지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부마사태는 그 진상이 일반국민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산에는 본인이 직접 내려가서 상세하게 조사하여 본 바 있습니다만, 민란의 형태였습니다.
본인이 확인한 바로는 불순세력이나 정치세력의 배후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다 주고 피신처를 제공하여 주는 등 데모 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수십대의 경찰차와 수십개소의 파출소를 파괴하였을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체제에 대한 반항,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 및 조세저항이 복합된 문자 그대로 민란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는 당시 본인이 갖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되어 연쇄적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국민들의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은 일촉즉 발의 한계점에 와 있었던 것입니다.” (김재규의 증언)
김재규는 '부마항쟁'을 학생데모가 아닌 민란으로 규정했을 정도입니다. 만약 10.26으로 박정희가 죽지 않았더라면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과 물가고에 대한 국민의 반발로 발생한 부마항쟁의 끝은 사태가 잠잠해진 이후 다시 전국적으로 항쟁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고, 이는 4.19처럼 박정희가 하야하는 사태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전에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요?
▲굶주리고 억압받는 국민이 자유와 빵을 달라고 외치는데 총을 쏘겠다는 자를 독재자라고 부르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재라고 해야 하는가?
◈ 김재규가 부마사태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확산할 것이라고 하자, 박정희는 화를 내며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자유당에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당하였지만,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는가”라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 있던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백만명 죽인다고 까딱있겠습니까”라고 큰소리쳤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면 아마 광화문 네거리는 피바다가 됐을 것이고, 무력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차지철을 통해 한반도 역사상 가장 최악의 학살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 1979년은 대한민국 국민이 일어설 수밖에 없던 시기였습니다. 재벌과의 정경유착으로 정치자금 모으기, 언론통제를 통한 우민화 정책과 중앙정보부의 공작정치,유신체제를 위한 사법 살인으로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던 박정희 정권을 국민은 더는 두고 볼 수 없었고, 이는 그가 죽음으로 끝이 났었을 뿐입니다.
◈ 박정희를 믿을 수 있었을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가 유신을 종식하고 민간인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통해 그를 판단한다면, 박정희는 결코 그럴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정권이양을 하겠다던 박정희의 기자회견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해부터 국민에게 거짓말을 누차 반복했던 독재자였습니다. 군사혁명정부는 민간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떠나겠다고 했지만, 그의 말은 채 1년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통치 기간 내내 계속됐습니다.
◈ 혁명정부가 사용했던 복지국가
지금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내거는 공약 중에 복지국가, 경제 민주화가 있습니다. 그 말의 어원은 박정희입니다.
박정희는 혁명정부 기자 회견이나 언론보도를 통해 복지국가라는 말을 항상 사용했는데, 그가 복지를 "국민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경제생활에 국민이 그들의 욕구를 추구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혔습니다.
유신체제에서 국민의 기본인권이 지켜진 적이 있습니까? 인혁당 사건만 봐도 명백한 사법살인이었습니다. 고문과 투옥, 언론통제가 이루어진 나라, 재벌에게 특혜를 주고 노동자들은 분신자살과 경찰 진압으로 사망한 정권이 박정희 정권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복지를 내세우며 혁명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복지국가로 인도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억압과 독재, 인권 유린의 땅이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사건 8명은 판결이 내려지고 불과 18시간 후에 사형이 집행됐으며, 국제법학자협회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인간의 자유
박정희는 1963년 대통령 후보 라디오 연설에서 "외국대사관 앞에서 데모하는 것은 자유다 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유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자주,자립의 민족적 이념이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자유민주주의 인 것입니다"고 했습니다.
1971년 대통령 담화에서는 '최악의 경우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유의 일부도 유보할 결의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단어를 가지고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떠드는 사람이 추앙하는 박정희의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가 언제라도 박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이미 그러했습니다. 인혁당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에 박정희는 형법에 국가원수 모독죄를 제정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 이번이 마지막?
박정희는 군사쿠데타가 끝나자마자 정권 이양을 하겠다고 당당히 국민앞에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뻔뻔하게 대통령 선거에 계속 출마했습니다.1971년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 1971년 대통령 선거 유세 연설 관련 기사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후보 유세연설에서 "(야당은) "이번에 또다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 총통제를 만들어 박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하련다고 말하고 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여러분에게 대통령으로 한 번 더 뽑아주십시오' 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밝혀둔다."라며 '이번이 마지막 대통령 출마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1972년 유신헌법을 제정해 6년 연임제를 통과시키고, 1978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체육관 선거를 통해 5선에 성공했습니다. 그가 마지막이라고 외쳤던 것은 국민이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마지막이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언,
◈ 박정희는 대통령 후보 연설 중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내 재산이 문서로 발견되면, 그 돈을 도시의 판잣집을 기와집으로 고치거나 농민들의 영농자금에 쓰도록 내놓겠다'고 했습니다.
10.27일 전두환은 합수부를 통해 박근혜와 함께 청와대 비서실에 있는 '금고2'를 열었고, 여기에서 자기앞 수표 1천만원짜리 수십장, 5백만원짜리 수십장등 9억5천여만 원과 박근혜,박지만,박근영의 적금 통장을 별견했습니다.
전두환은 현금 6억 원은 박근혜에게 줬고, 비자금 장부와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습니다. 그런데 박정희 집무실에 있던 '금고1'은 박근혜가 챙겼다고 하는데, 과연 그 돈이 얼마인지 아직도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박정희 사망당시 궁정동 안가의 모습과 MBC드라마에 나온 장면.
필자가 지금 이 나이에 박정희의 죽음을 맞이했다면 9살 어린 나이 때와 많이 달랐을 것입니다.
비밀 안가에서 젊은 여자를 안고 술마시다 죽은 독재자의 죽음을 슬퍼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공과
박정희의 공과를 말하면서 그를 칭송하며 역사의 판단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점을 그의 공으로 생각해야 할까요? 재벌과 독재자를 위해 밤을 새우며 미싱을 돌린 대가가 '배고픔', '인권유린','자유의 억압과 탄압'이었는데 무엇을 칭송해야 합니까?
에즈라 보겔 하버드대 교수는 1991년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의 경제성장을 분석한 책 '네 마리의 용'에서 한국 경제 성장의 원인으로 북한의 위협으로 만든 사회적통합과 훈육된 인력, 국가에 대한 인식,엄청난 교육열을 손꼽았습니다.
박정희는 그저 18년간의 독재자였다는 말뿐이었습니다.
▲ 박정희와 전태일 열사 묘비
◈ 1979년 박정희가 후계자에게 권력을 물려줄 가능성이나 독재를 끝내겠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거의 없습니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는 일본군인의 단기(短氣:‘한다고 했으면 하는 성격)를 품에 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1979년 국민 대다수가 참고 참다가 마지막으로 일어설 전국적인 민주화 항쟁을 어떻게 진압했을지는 뻔합니다.
◈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에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했습니다. 전태일은 자신의 몸에 불을 놓으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각기 다른 인생을 살다 죽은 두 사람을 보면서 누구의 죽음을 안타까워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2012.09.14 오마이뉴스
아이엠피터==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 그리고 유신의 그녀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
5.16과 유신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 귀에 거슬려도 참으려 했다. 역사를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는 여당의 대선후보에 실망하면서도, ‘자식이 어찌 대놓고 부모를 비난할 수 있겠느냐’며 그나마 분을 온정으로 삭이려 했다. 많은 국민들이 이랬다.
진실 앞에 고개 돌리는 여당 대권 후보
맞아 보니 별것 아니다 싶었나. 정신 줄 놓은 듯 한참 더 나가고 말았다. 인혁당 사건과 관련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 있다고 주장했다. 무죄를 선고한 재심판결을 부정하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는 말이다. 유신반대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날조한 것으로 결론이 난 사건을 마치 실체가 있는 간첩사건인 것처럼 말해 유가족과 피해자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인혁당 재건위’의 배후조종을 받아, 반정부 운동을 전개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며 긴급조치 4호와 국가보안법을 내세워 1024명을 체포한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이들 중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불과 18시간 후인 4월 9일 새벽 사형이 집행된다. 억울한 시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울부짓는 유족들/1975년 4월 9일)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학생들을 탄압위해 날조된 사건으로 밝혀졌다. 2007년 이후 올해까지 재심을 통해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됐던 피해자들 모두 무죄를 선고 받았다. 2007년 8월 서울지방법원은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 국가가 총 637억여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인혁당 사건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사형판결 등은) 법적으로 결론이 난 사항들”이라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검사가 선고공판에서 “무죄 내려달라”, 사법사상 초유의 일
지난 6일 민청학련 사건으로 15년 형을 선고 받았던 박형규 목사에 대한 재심 선고공판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검사가 피고인에게 무죄를 구형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임은정 검사는 검사의 직분을 망각한 양 재판장에게 무죄를 선고해 달라고 청했다.
임 검사가 무죄를 구형하며 한 말이다. 매우 감동적이다. ‘권력의 검’이 아닌 ‘정의의 검’을 쥔 검사를 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기뻤다.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해 권력의 채찍을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간 사람들이 있었다.
몸을 불살라 칠흑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 분들의 가슴에 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게 됐다.
그러니 무죄를 내려달라.”
재판부도 임 검사와 뜻을 같이 했다. 재판부는 “장구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기울였을 노력 등이 이 판결을 가능하게 하였음을 고백한다. 이 판결이 부디 피고인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우리 사법에 대한 안도로 이어지길 소망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임은정 검사, 그는 ‘도가니 검사’였다
임은정 검사. 그 이름이 낯설지 않다. 2011년 9월 광주 인화학교 청각장애아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도가니’가 전국을 후끈 달구던 때, 검찰 내부통신망에 올라온 글 하나가 화제가 된 바 있다. 사건의 1심 공판검사가 그 영화를 본 뒤 수사 당시(2007년)에 썼던 일기를 공개한 것이다.
“어제 도가니를 보고 그때 기억이 떠올라 밤잠을 설쳤습니다”는 말로 착잡한 심경을 밝히며 공개한 임 검사의 일기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2007년 3월12일
....법정을 가득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짓밟힘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눈물을 말리며 그 손짓을, 그 몸짓을 그 아우성을 본다.
변호사들은 그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 수가 없다.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 것, 이들 대신 싸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볼만 한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
2009년 9월20일
도가니가....베스트셀러라는 말을 익히 들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잘 알기에...서점에 들렀다가 결국
구입하고 빨려들듯 읽어버렸다.
가명이라 해서 어찌 모를까? 아 ! 그 아이구나. 그 아이구나....
신음하며 책장을 넘긴다....1심에서 실형이 선고되었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는 뉴스를 들었다.
...정신이 번쩍든다. 내가 대신 싸워줘야 할 사회적 약자들의 절박한 아우성이 밀려든다.
그날 법정에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말려가며 한 다짐을 다시 내 가슴에 새긴다.
...정의를 바로 잡는 것. 저들을 대신해서 세상에 소리쳐 주는 것.
난 대한민국 검사다.
임 검사는 2011년 10월 국회 국감장에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공판 분위기와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는 아동 성폭력 수사에 대한 지침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고, 증인 심문과정에서 피해자 아동이 ‘거짓말쟁이’로 몰려 억울해 하는 것을 제대로 살펴주지 못해 아쉬웠다고 술회했다.
검사로부터 ‘무죄’ 구형받은 박형규 목사, 그는 누구?
사법사상 초유로 검사에게 무죄를 구형받은 피고인 박형규 목사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들은 그를 ‘길위의 목사’로 부르기도 한다. 현대사의 아픈 현장에서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4.19혁명 즈음 결혼식 주례를 보고 오던 길에 피 흘리는 학생을 보고 “엉터리 목사로 살아온 것을 뉘우치고 진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박 목사. 그의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에서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에게서 나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었다.”
유신 반대 투쟁에 앞장서 19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사건’을 주도했다. 4월 22일 새벽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 6만 여명의 신도가 운집했다. 이 자리에서 “민주주의의 부활은 대중의 해방” “주여 어리석은 왕을 불쌍히 여기소서” 등의 민주회복과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이는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박 목사는 내란예비음모죄로 기소됐고, 이후에도 반독재 투쟁을 벌여 6번이나 옥고를 치렀다.
평생 인권과 민주운동, 깡패 동원 예배 방해해 6년간 노상예배 드리기도
유신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 박 목사는 정권으로부터 감시당하던 학생들에게 마음껏 ‘거사’를 도모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했다. 그와 학생들이 모였던 곳은 서울 변방의 한 신학교. 고 김근태 고문 등이 그곳을 자주 들락거렸다. 박 정권은 시위하다 붙들린 젊은이들을 고문하는 현장에 그를 불러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직접 보게 했다. 이렇게 말하며 말이다. “당신 때문에 저렇게 당하는 거야!”
(끌려가는 박형규 목사)
아흔을 바라보는 노목사와 그 신학교와의 인연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성공회대학교는 지난 4월 박 목사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장로교 교단 소속 목사가 성공회대 최초의 명예신학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전두환 정권은 박 목사가 아예 목회를 하지 못하도록 탄압을 했다. 매번 깡패를 동원했다. 그가 목회하고 있던 서울제일교회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고 마구 폭력을 휘둘렀다. 교회에서 예배할 수 없게 되자 서울 중부경찰서 앞에서 교인들과 일반인까지 참여하는 노상 예배를 서울 6년 동안 드렸다. 이 사실이 외신에 의해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MB는 기독교 욕되게 했다” “박근혜 지지는 독재정권 다시 보자는 것”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따금하게 일갈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였을 때 박 목사를 만나 “나도 민주화 운동을 했고, 나도 크리스천이다”라고 자랑했단다. 하지만 박 목사는 이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한다 “크리스천이라는 간판만 달고 기독교를 욕되게 했다.”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는 “그를 지지하는 건 독재정권의 그림자를 다시 보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긴급조치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1975년 2월)
달라도 참 다르다. 한쪽에서는 과거의 암울한 역사를 치유하고, 그를 교훈삼아 더 나은 민주사회를 만들려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과거의 잘못된 역사에 어떻게 하든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려고 안달이다. 한쪽은 시대정신에 철저하고, 다른 쪽은 시대정신에 역행한다.
저들의 눈에 임 검사와 박 목사는 어떻게 보일까?
‘도가니 검사’와 ‘길 위의 목사’는 인권과 정의의 시각으로 과거를 보는데, 박근혜 후보와 그를 추종하는 이들은 ‘박정희 프레임’에 갇혀 뒤집힌 시각으로 과거를 본다.
진실은 하나다. 대법원 판결이 하나인 것처럼 진실도 두 개가 될 수 없다. 극과 극을 형성하는 두 시각, 한쪽이 진실이면 한쪽이 거짓이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는 게 옳은 일인가? 어느 쪽이 거짓인지 또렷해도 너무 또렷하다.
5.16쿠데타, 유신독재,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 장준하 선생의 죽음 등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보는 저들의 눈에 임은정 검사와 박형규 목사가 어떻게 보일까?
==2012.09.14오마이뉴스 우주르디사람과세상사이==
<인터넷 오마이뉴스,민중의소리에서 퍼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