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요한 14,27-3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릅니다.
세상의 평화는 긴장이나 문제가 없을 때 유지되지만,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 한가운데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고통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 고통이 끝이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이 평화는 때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불안 속에서도,
갈등 속에서도,
심지어 박해 속에서도
깊은 곳에서 흔들리지 않는 어떤 확신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어둠이 다가오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결정적인 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이 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완전한 순종에서 옵니다.
“세상이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고백입니다.
'나는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끝까지 순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삶으로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지요.
이 사랑이
바로 십자가를 통과하여
부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일어나 가자.”
이 마지막 말씀은 단순히 이곳을 떠나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의 길로 나아가자는 결단입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부르심을 듣습니다.
머무르지 말고,
두려움에 붙잡히지 말고,
사랑이 요구하는 자리로 나아가자고 말이지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14,27)
(정 루치아나 수녀님)
5월5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요한 14,27-31ㄱ
왜 주일 미사 한 번은 나와야 하는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찬미 예수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떠나셔야 하는 예수님의 고별사입니다.
스승이 떠난다는 사실에 제자들은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이상한 선물을 남기십니다.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평화'를 남기고 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왜 하필 평화를 남기셨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일주일에 한 번씩 주일 미사에 나와 그 평화를 받아 가야만 할까요?
제가 어렸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작은형과 단둘이 점심을 챙겨 먹어야 했습니다.
부모님은 모두 생계를 위해 일터로 나가신 상태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냉장고조차 없던 가난한 시절이었습니다.
부엌을 뒤져보니 밥솥에 밥은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반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배는 고프고 반찬은 없으니, 형과 저는 어쩔 수 없이 물에 맨밥을 말아 먹기로 했습니다.
맹물에 밥을 말아 몇 수저 떴지만,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서러운 마음에 부엌을 다시 샅샅이 뒤졌는데, 기적처럼 작은형이 구석에서 '총각김치'가 가득 든 통을 찾아냈습니다.
어머니가 일터로 나가시며 저희를 위해 숨겨두듯 남겨놓으신 반찬이었습니다.
그 맹물에 만 밥에 총각김치를 얹어 먹는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물 말은 밥을 먹던 저희 형제들의 마음속에 불안이나 원망이 있었을까요?
전혀 없었습니다.
집이 가난해서 어떤 때는 라면만 먹고 지내야 할 때도 있었지만, 저희는 부모님이 저희를 단 한 끼도 굶기신 적이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에 반드시 우리가 먹을 것을 다 준비해놓으셨을
것이라는 압도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세상에 나가 고생하시는 것도 다 우리를 먹여 살리기 위함이며, 결코 우리를 버려두고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화'입니다.
눈앞에 사랑하는 이가 없어도, 그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무언가(총각김치)를 발견할 때 영혼에 스며드는 절대적인 안정감. 저희 형제들이 아주 착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이 어쩌면 다 이렇게 착하냐"는 말을 종종 들었던 이유는, 바로 이 '보이지 않아도 믿어지는 평화'가 저희 내면을 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심리와 생태계를 관통하는 아주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안은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평화는 인간을 선하게 만든다'는 생존의 법칙입니다.
아이가 언제 악해지고 이기적으로 변할까요? 부모의 돌봄을 확신하지 못할 때입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불안정 애착(Insecure Attachment)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 나에게 평화(양식, 사랑, 보호)를 거저 공급해 준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아이는
'이제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하는 인간은 짐승의 본능으로 퇴행합니다.
남을 짓밟고 빼앗아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믿기에 악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에게 이 평화를 주는 존재여야 합니다.
훌륭한 어머니는 자신이 곁에 없을 때도 자녀가 평화를 누리도록 반드시 무언가를 남겨놓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매일 새벽 연탄불을 갈아주시던 그 소리와 온기 때문에 어머니가 안 계신 빈방에서도 늘 마음이 평화로웠다고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완벽한 어머니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의 빈자리에 불안을
남기지 않으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7)
그런데 예수님은 왜 굳이 제자들을 떠나셔야만 했을까요? 곁에 계속 계시면 더 평화롭지 않았을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14,28)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생존의 법칙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어머니가 곁에서 자녀를 계속 돌보고 싶지만, 자녀에게 양식(평화)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려면
반드시 집을 나서서 '더 큰 생명과 재화가 있는 곳(일터/남편)'으로 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이유는, 아버지가 바로 모든 생명과 은총, 평화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근원(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아버지께 가셔야만, 성령이라는 영원한 배송 시스템을 통해 하늘의 무한한 양식이 우리 식탁 위로 매일 배달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영원히 굶주리지 않을 우주적 공급망을 개통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의 공급망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약의 설계도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척박한 광야에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극도의 불안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며 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십니다.
하느님은 매일 새벽 만나를 내려주시며, 그들이 생존의 공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왕의 여유)'을 누리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아주 이상한 법칙을 하나 주십니다.
"만나는 매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어야 한다. 다음 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마라." (탈출 16,19 참조).
왜 그러셨을까요? 인간은 하느님을 쉽게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창고에 양식을 가득 쌓아두면, 인간은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가 아니라 내 창고의 크기를 믿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약속을 잊고 만나를 몰래 남겨두었을 때, 그것은 어김없이 벌레가 생기고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며 썩어버렸습니다. (출처: 『주석 성경』 탈출기 16장)
평화는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공급자와 접속하여 새롭게 받아오는 것입니다.
만나가 썩어버렸듯, 하느님과의 접속이 끊긴 인간의 영혼은 부패합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어둠으로 빠져드는 것, 이것이 인간 본성의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총각김치', 즉 평화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제대 위에서 쪼개어지는 그분의 '살과 피(성체)'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에서 성체를 떼어 주시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루카 22,19)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이 '기억(Anamnesis)'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주일 미사에 나와야 할까요?
교회가 정한 귀찮은 규칙이라서가 아닙니다. 엿새 동안 험난한 세상에서 바오로처럼 돌을 맞고
상처받으며 "내 생존은 내가 책임져야 해"라며 악바리처럼 버티느라 짐승처럼 변해가는 우리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서입니다.
주일 미사에 나와 성체를 모시는 순간, 우리는 어릴 적 맹물에 만 밥을 먹으며 총각김치를 베어 물었을 때의 그 절대적인 평화를 다시 '기억'해냅니다.
"아, 하느님 아버지가 나를 먹여 살리시는구나.
내가 버려진 고아가 아니라, 하늘의 모든 창고를 상속받은 하느님의 자녀구나!"
이 자존감을 회복하는 시간이 바로 미사입니다.
우리가 매주 미사에 나와 모시는 성체와 주님의 말씀은,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는 믿음을 줍니다. 거기서 오는 평화가 우리를 악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악에서 지켜줌을 상기합시다.
새롭고 대단한 맛이 아니더라도 매일 기도하고, 매일 성체를 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강론>
(2026. 5. 5. 화)(요한 14,27-31ㄱ)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그러나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27-31ㄱ).”
1)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는 말씀을 묵상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해야 합니다.
“나는(우리는) 정말로 간절하게 평화를 원하는가?”
인간들 가운데에는 평화보다 전쟁을 더 좋아하고,
평화보다 전쟁을 더 원하는 자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말에 ‘호전적’이라는 말이 있는 것은, 전쟁을(싸움을) 좋아하고 원하는 자들이 있음을 나타냅니다.
구약성경 역대기 상권에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라는 말이 있습니다(1역대 20,1).
이 말은, 정기적으로 스포츠 경기를 개최하는 것처럼 전쟁을 했음을 나타내고, 또 마치 스포츠를 즐기듯이 전쟁을 즐겼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들이 미개했던 옛날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전쟁을 좋아하고 즐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할 말은,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 26,52).” 라는 예수님 말씀뿐입니다.
2) “칼을 잡지 마라. 싸우지 마라. 평화를 추구하여라.” 라는 말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할 말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지킬 힘도 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간절하게 평화를 원합니다.
문제는 힘이 있는 자들입니다.
힘이 있으면 그 힘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인간들은 총을 가지고 있으면 그 총을 쏘고 싶어 하고, 칼이 있으면 그 칼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군대도 많고 무기도 많은 강대국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개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참아라. 용서해라.
앙갚음하지 마라.
사랑하여라.” 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고,
그 사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될 뿐입니다.
힘이 있는 자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강대국이, 또 힘이 있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인간 세상은 항상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신앙인은) 강대국들과 그 나라들의 정치 지도자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언제나 항상 ‘선한 약자들’ 편에 서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 26,53-54)”
예수님의 평화는 ‘십자가 희생’에서 비롯된 평화입니다.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이라는 말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로마제국 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한 군대라는 뜻인데, 인간 세상의 어떤 군대도 예수님의 군대에게는 상대도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힘이 없어서 당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힘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평화입니다.
반면에 세상의 평화는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강자들만의 평화’입니다.
그것은 평화가 아니라 거짓 평화이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것입니다.
4) “세상의 우두머리는 나에게 아무 권한도 없다.” 라는 말씀도, 힘이 없어서 수난을 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권한’이라는 말에서, 빌라도가 한 말이 연상됩니다.
“나는 당신을 풀어 줄 권한도 있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요한 19,10)”
빌라도의 권한은 ‘선과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의무와 하나로 묶어져 있는 권한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요한 19,4.6).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한으로 예수님에게
무죄선고를 내리고 예수님을 석방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압박만 두려워해서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권한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직무유기’이고, 하느님을 거슬러서 사탄의(악한 자들의) 편에 선 것입니다.
빌라도는 그렇게 해서 평화를 얻을 수 있었을까?
하느님을 거스르고 악의 편에 서서 ‘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5월5일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14,27-31
쉼 없이 요동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누리는 참 평화!
엄마 품에 푹 안겨 세상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한살바기 아기의 얼굴, 얼마나 평화롭던지요.
자신의 모든 것인 엄마와 함께 있고, 엄마가 항상 자신을 안전하게 돌보아 줄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기에, 그렇게 평화로운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역시 쉼 없이 요동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나를 돌보아 주실 것임을 굳게 믿을 때 참 평화가 가능합니다.
우리네 인생이란 것, 돌아보니 혼란과 불안, 부침과 우여곡절의 연속이더군요.
그래서 사람들은 꿈꾸는가 봅니다.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정말이지 평화로운 상황을 꿈꿔봅니다.
완만한 흐름의 맑은 강가, 멀리 강 건너편에는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남향 시골집, 철 따라 피고 지며 꽃 잔치를 벌이는 형형색색의 꽃나무들, 비옥한 텃밭, 거기에 항상 내 곁을 떠나지 않고, 항상 나만 생각해주는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수시로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세상 만물의 이치입니다.
장마철에 집중호우라도 한번 내리면 맑고 잔잔한 강물은 어느새 토사가 뒤섞인 흙탕물로 돌변합니다.
계절이 넘어가면서 한 폭의 그림처럼 화사하던 주변 풍경들은 어느새 쓸쓸하고 삭막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리도 깊이 의지하던 든든한 보루같던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더니 순식간에 늙고 병들고 약해집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의 평화는 ‘반짝’하며 지나갑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 참된 평화는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참된 평화는 영원한 보루이자 든든한 성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음으로 인한 평화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 지상적인 평화,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평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한 차원 높은 평화, 격이 다른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폭풍우 속에서도 내적인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보다 차원 높은 평화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과 시련, 고통과 슬픔, 다양한 인생의 부정적 경험 속에서도 담담한 표정으로 평정심을 간직할 수 있는 적극적인 의미의 평화입니다.
우리 인간들 삶이라는 것 언제나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때로 잠잠하다가도 어느새 우리는 폭풍우 한 가운데 서게 됩니다.
때로 만사형통하는가 하면 어느새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곤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하느님께서 든든히 자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외적인 바람에도 좌지우지 되지 않는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내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산란해지거나 겁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세상을 이기셨으니 우리 역시 그분과 함께 승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