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05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웅장한 지체와 명망이 영남 으뜸인 김해
창원시 동쪽에 김해가 있다. 조선 후기에 ‘살 만한 곳으로는 왼쪽에 울산, 오른쪽에 김해’라는 말이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습속이 억세고 간소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남명 조식을 모셨고 『신산서원기(新山書院記)』를 쓴 배대유는 “김해는 옛 가야로 웅장한 지체와 명망이 영남 고을 가운데 으뜸이다”라고 하였는데, 김해시의 이름난 놀이가 바로 석전石戰놀이였다.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성 남쪽에 모여들어서 석전을 연습하고 단옷날이 되면 장정이 다 모인다. 좌우로 패를 갈라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펄쩍펄쩍 뛰고 돌을 비가 쏟아지듯 던져서 승부가 결판난 다음에야 그만둔다. 비록 사상자가 나더라도 그만두지 않으며 수령도 금지하지 못하니, 정오년에 왜를 정벌할 때 돌을 잘 던지는 자를 선봉으로 삼았더니 적군이 앞으로 나서지 못하였다. 갑신년에 석전을 하다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없애버렸다”라고 하였던 것으로 보아 1960년대까지 전국의 마을마다 대보름날 즈음 하던 석전놀이가 4월에서 5월 단오경까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 이 놀이는 사라지고 말았다.
또 하나가 칠석놀이였다. 『여지도서』에 실린 글에 따르면, 관아의 서쪽에 위치한 이촌면과 하계면 두 마을 주민들이 해마다 7월 6일이 되면 커다란 장대 깃발을 이용하여 밤중에 태종산(太宗山)에 올라가서 음악을 베풀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날이 환히 밝은 다음에 내려와 청천(淸川) 사정(射亭)에서 어른과 어린이 할 것 없이 서로 씨름을 하며 승부를 겨루는데, 이 놀이를 칠석놀이라고 하였다. 이 또한 사라지고 없다.
정몽주는 “옛 가야 터”라고 기록하였고, 양숭선의 「동헌기(東軒記)」에는 “산천이 빼어났고 아름다우며 인물이 번성한다. 세 갈래 물이 빙 둘렀고 칠점산(七點山)이 얼기설기하다”라고 실려 있는 김해의 칠점산은 『여지도서』 양산 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아의 남쪽 50리 바닷가에 있다. 마치 점을 찍은 듯한 일곱 개 봉우리를 가진 산이 있으므로 ‘칠점산’이라고 하였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가락국 때 참시선인(旵始仙人)이 노닐던 곳이다.
김해는 가야 또는 금관국으로 불렸다. 김해 근처에 죽도(竹島)와 불암(佛巖)이 있는데 ‘불암 모기는 죽도 모기와 혼인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불암 사람들이 죽도 사람을 천대해서 만들어낸 말이다. 또 ‘죽도 모기들이 9월 9일 중양절에 왔다 갈 때에는 떡장수의 치마 속을 문다’라는 말도 있는데, 이 역시 죽도 사람들이 천박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다. 이러한 상황을 조선 후기에 이곳 김해에 유배되어 왔던 이학규가 한 편의 시 속에 남겼다.
죽도 모기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니
불암 모기떼와 견줄 만큼 많구나.
서리 전에 주둥이를 작살처럼 찔러 대니
중양절에 떡장수 치마폭이 걱정되는구나.
김해시 동쪽을 흐르는 낙동강 삼각주에 있는 명지도(鳴旨島)에 대한 첫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명지도는 김해부의 남쪽 40리 지점에 있으며, 그 둘레는 17리이고, 큰비, 큰 가뭄, 큰 바람이 있기 전에는 반드시 천둥소리나 북소리, 종소리 같은 소리를 내며 우는 섬이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곳에 무성했던 갈대가 바람에 부대껴 내는 소리를 두고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1861년에 작성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상부 삼각주라고 볼 수 있는 대저 지역이 큰 섬으로 표시되어 있고, 명지도 부근은 염전 지대로 표시되어 있으면서 을숙도, 진우도, 대마등, 신호도 등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진우도, 창자도, 대마 등은 1920년 무렵부터 나타났고, 새등은 1970년, 맹금머리등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나타났다.
명지도의 소금은 예로부터 이름이 높아서 『태종실록』에는 “소금은 오곡 다음가는 중요한 것으로, 낙동강변 사람들은 명지 소금을 먹고 살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정조실록』에도 명지 소금이 언급되고 있다.
명지는 섬이라서 소금의 이익이 많아 영읍(營邑)의 소금 굽는 가마가 곳곳에 있지만, 판매에 절제가 없어 민폐가 가지가지입니다. 이에 산산창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어 염정(鹽政)만을 담당케 하였는데도 관리가 어렵습니다. 매년 11월에 경상도 감영의 쌀 천오백 석을 소금 굽는 백성에게 빌려주어 소금을 구울 때 양식으로 삼게 하고, 쌀 한 석에 소금 두 석을 쳐서 이듬해 봄에 2천 석, 가을에 1천 석을 나누어 받아 낙동강으로 운반해 시가에 따라 팔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해 명지 염장에서 3천 석의 소금을 생산했으며, 소금 굽는 사람들을 상대로 관청에서 고리대금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김해에 있던 삼분수(三分水)에 대한 이야기가 민간에 전해오는데, 『여지도서』에 실린 글 한 편을 보자.
낙동강 물줄기가 남쪽으로 흘러 북쪽 뇌진에 이르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 옥지연(玉池淵)과 황산강을 이루며, 또 남쪽으로 흘러서 관아의 남쪽 취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며, 예성강 물줄기와 합쳐져 흐른다. 서로 번갈아 가며 조수(潮水)가 나라의 맥을 지키고, 땅의 결점을 보완해 서로 응한다. 이로 인해 고려 문종 때 김해를 오도도부서(五道 道部署) 본영으로 만들었다. 그 뒤 도부서사(道部署使) 한충이 도내가 멀다고 조정에 아뢰니, 세 개의 도(道)로 나누어 각각 본영을 설치했는데, 그날 저녁 황산강 물이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 바다로 들어갔기 때문에 ‘삼분수’ 또는 ‘삼차수(三叉水)’라고 하였다 한다. 양산군 칠점산이 세 갈래로 갈라진 사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