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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시다
신 1:34-46
34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35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께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7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38 네 앞에 서 있는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하리라
39 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의 자녀들도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40 너희는 방향을 돌려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
41 너희가 대답하여 내게 이르기를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무기를 가지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4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하시기로
43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거리낌 없이 산지로 올라가매
44 그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이 너희에게 마주 나와 벌 떼 같이 너희를 쫓아 세일 산에서 쳐서 호르마까지 이른지라
45 너희가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46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머물렀나니 곧 너희가 그 곳에 머물던 날 수대로니라
신 1:34-46 / [믿지 않다가 벌받은 경위] 여러분의 불평을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크게 진노하시어 이렇게 맹세하셨습니다. 35) `내가 이미 너희 선조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저 좋은 땅을 볼 사람이 이 악한 세대, 이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36) 그러나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은 그 땅에 들어갈 것이다. 그가 의심하지 않고 충실하게 나 여호와를 따랐으므로 내가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그가 직접 가서 살펴본 헤브론의 비옥한 땅을 주겠다.' 37) 여호와께서는 여러분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38) 그러나 네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곳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어 영원한 소유지로 삼게 할 사람이니 그를 격려하여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라.' 39) 그리고 여호와께서 온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직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너희의 자녀들은 그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너희가 `원수들의 손에 사로잡힐 것이라'고 걱정하던 바로 그 어린아이들에게 내가 그 땅을 주어 그들이 그 땅을 차지하도록 하겠다. 40) 너희는 이제 여기서 길을 돌려 ㄱ)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들어가거라!' (ㄱ. 아카바만의 엘라트 쪽을 가르킨다) 41) [불순종과 패배] 그러자 여러분은 내게 이와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그 땅으로 올라가서 싸우겠습니다.' 그러고는 여러분의 마음대로 저마다 무장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가는 일을 그토록 쉽게 생각하였습니다. 42)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이와 같이 일러주어라. `너희는 올라가서 싸우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너희가 적에게 패할 것이다.' 43) 내가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으나 여러분은 그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무기의 힘만을 의지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올라갔습니다. 44) 그러나 그곳에 살던 아모리 족속들이 벌떼처럼 여러분에게 달려 나와 ㄴ) 세일 산지에서부터 브엘세바 근처의 호르마에까지 추격하면서 여러분을 쳐죽였습니다. (ㄴ. 그 당시에는 에돔 족속이 헤브론 근처에까지 올라와 살았기 때문에 그들이 사는 곳을 세일 산지로 표현한 것 같다) 45) 여러분이 지고 돌아와 여호와 앞에서 울며 부르짖었으나 이제는 여호와께서도 여러분의 음성을 듣지 않고 여러분의 호소를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46) 그래서 여러분이 가데스에서 ㄷ) 오랜 세월 동안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ㄷ. 38년의 기간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모든 출애굽 1세대를 광야에서 모두 죽게 하셨고, 그들의 통곡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34-39) 본 단락의 이 악한 세대 사람들은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 당시에 20세 이상의 성인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체험했으면서도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징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좋은 땅이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가나안을 의미하며 악한 세대 사람들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갈렙에게 “그가 밟는 땅을 주리라”고 하셨고, 갈렙은 헤브론 전체를 자신과 그 후손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수 14:6-15).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 후에 모세는 격분한 채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내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34:4-5). 그리고 모세의 사후에 여호수아가 후계자가 됩니다. 여호수아를 가리키는 “네 앞에 서 있는” 여호수아가 오랫동안 모세를 도와 보좌관 역할을 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담대하게 하라고 하신 것은 이제 그와 함께하심을 확신시켜 주어 모세의 뒤를 잇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모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보고를 했던 것을 기억하신 것입니다. 당시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처자가 사로잡힐 것이라고 낙심하며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자녀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때 그들은 20세가 되지 않았기에 법적인 책임이 면제되었기 때문입니다(민 14:3).
광야로 들어갈지니라(40-46) 가데스 바네아 당시에 이스라엘은 2년간의 광야 생활을 이어 왔습니다. 앞으로 38년을 더 광야 생활을 더 해야 했습니다. 38년 광야 생활은 가데스 바네아 반역 사건의 책임 있는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죽는 기간이었습니다(35, 36). 이스라엘 백성은 38년 동안 광야 생활을 더 해야 하는 하나님의 징벌을 면해보려고 뒤늦게 회개를 하며 올라가 치워보겠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인간적인 방법이었습니다(민 14:40). 기어코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산지로 올라갔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전쟁에서 그들은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통곡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진정한 회개가 아니라 패배로 인한 울분에 불과했습니다.
적용: 당신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아 발견하고 순종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기업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방식과 세상의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 교회의 일을 하려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세상의 방식은 눈에 보이는 실적과 결과에 중점을 두고 교회에서도 이러한 실적과 결과에 집착할 때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할 교회가 세상의 방식을 쫓아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 설 교 >
순종하는가? 거역하는가?
신 1:34-44 / 문기태 목사(창원교회)
한 여행자가 절벽 가장자리에 다가갔다가 발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벼랑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추락하다가 가까스로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고는 매달렸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어요? 누가 날 좀 구해 줘요!"
그러자 어떤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당신이 거기 계시다니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구해 주기는 하겠지만,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보겠다. 넌 나를 믿느냐?"
"주님, 제가 확실히 믿습니다. 저는 매주일 교회에 나갈 뿐만 아니라 기도회에도 열심히 나갑니다. 또 성경도 읽고, 매일 기도 시간도 가집니다. 헌금도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아니, 네가 정말로 날 믿느냐고?"
"제가 얼마나 당신을 믿는지 모르실 거예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정말 날 믿는다면 지금 붙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한참 동안 조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다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이는 없어요?"
믿음과 순종은 언제나 같이 붙어 다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도 자신은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고 마음을 다하여 순종하는 것을 눈 여겨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약속하신 하늘의 큰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를 믿음의 갈등으로 몰아 넣고 우리가 순종하는가? 거역하는가? 지켜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순종하여 하나님께 칭찬을 듣고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약속의 땅 가나안이 보이는 가데스 바네아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며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말했습니다. "우리가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사람을 뽑아 그 땅을 정탐한 후에 공격합시다." 모세가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열 두 명의 정탐 군을 뽑아 그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습니다.
열 두 명이 정탐을 하고 돌아와 보고를 합니다. "과연 그 땅은 너무 좋습니다. 얼마나 땅이 기름진지 우리가 그 땅에서 가져온 과일들이 얼마나 탐스러운지 보십시오. 그런데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은 우리보다 키도 크고 장대한 거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승산은 1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백성들은 순식간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낙심하였습니다. 모세가 "그들을 무서워하지 마시오.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십니다.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도 우리를 위하여 싸우실 것입니다. 광야에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먹이고 마시게 하시며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십니다." 하고 외쳤지만 백성들의 마음은 이미 굳어지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밤새 소리를 높이고 부르짖어 통곡을 하며 원망을 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차라리 광야에서 지나오다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게 될 텐데,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래. 지금이라도 지도자를 세우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노골적인 불신앙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격노하셨습니다. "이 세대들 중에는 내가 그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좋은 땅을 볼 자가 아무도 없으리라.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시에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던 너희 자녀들이 들어가게 하겠다. 내가 그들에게 그 땅을 주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방향을 돌려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여호수아는 온전히 순종하였은 즉 그 땅을 볼 것이요.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뒤늦게 백성들은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겠습니다."하고는 서둘러 무기를 갖추고 산지로 올라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 마라. 내가 이제는 너희를 떠나 함께 하지 않으니 너희가 적들에게 패할 것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산지로 올라가서 아모리 사람들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달라도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모든 사람이 다 거역의 말을 해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순종하십니까? 거역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즉시 순종하십니까?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치고 다 늦게 뒷북을 치십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즉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불신의 말을 삼가고 믿음의 말을 앞세우며 적극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1. 두려움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믿음으로 순종하라고 하실 때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싸워 주시려는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환경을 주시고 두려워 말라 내가 지켜주마 하실 때는 하나님이 도와 주시려는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기 위해서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손에 우리를 맡기고 나가면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운 나라들은 모두 이스라엘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애굽은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이룬 강대국이었습니다. 군대도 3500년 전이었음에도 당시 병거를 앞 세워 싸울 정도로 최강이었습니다. 홍해 바다에 가로막혀 있을 때에 애굽의 군대가 병거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군인들은 다음 날 모두 시체가 되어 홍해바다에 떠 올랐습니다. 하나님과 싸웠기 때문에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가나안에 거주하는 이방 나라들과 싸우시기로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이 싸우신다는 사실을 잊고 적들을 바라보니 두려움이 밀려왔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자신들을 바라보니 겁이 났습니다. 강력한 무기를 가진 거인들과 싸워야 하고 게다가 철옹성을 무너뜨릴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기가 꺾였습니다. 하얗게 질려서 도망갈 생각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하시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했어야만 했습니다. 두렵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곧 바로 요단 강을 건넜어야 했습니다. 두려움이 밀려올 그 때가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여러분, 두려움이 밀려올 때 두려움에 굴복하십니까? 믿음으로 극복하십니까? 어떻게 극복하십니까? 온갖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두렵게 하는 요소만 묵상하면 절대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용기가 솟아나고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바로 그때가 믿음을 보여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공격하는 적이 강하다고 겁을 집어 먹고 벌벌 떨면 두려움이 우리를 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두려움을 가져다 주는 적은 사라지고 승리하게 되며 축복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질병이 밀려온다고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패가 찾아와와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보다 크고 강력한 그 무엇이 여러분을 삼키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두려움을 극복하며 말씀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2. 순종을 훈련하여 기회가 오면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을 기대하며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가데스바네아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정작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는 하나님께 거역하고 불순종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순종하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늘 불순종했습니다. 홍해를 건너기 전에도 불신을 드러내며 원망을 쏟아냈습니다. 마라에서도 마실 물이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광야에서도 먹을 양식이 떨어졌다고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 외에도 번번이 불평과 원망을 앞세우며 불순종하였습니다. 한 번도 즐겁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하신 데는 믿음의 순종을 훈련하라는 뜻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좋은 기회를 모두 놓쳐버렸습니다. 믿음의 순종을 연습하지 않으니 오히려 불순종의 습관이 몸이 배고 말았습니다.
순종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순종은 하루 아침에 되기는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은 연습이 중요합니다. 매일매일 믿음을 훈련하며 좋은 습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우리가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까? 날마다 성경을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매 주일 예배를 빠짐없이 드려야 합니까? 목장모임에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합니까? 믿음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하나님이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실 때 거역하지 않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실 때 순종함으로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여 큰 축복을 받아 누리는 하나님 나라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큰 순종만 생각하지 말고 매일 매 순간 작은 순종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늘 가까이 하며 작은 것부터 순종하는 습관을 기르기 바랍니다. 사소하게 보이는 일부터 불평하고 원망하는 습관을 버리고 기쁘게 순종하는 훈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요한 명령을 하실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순종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믿음의 말과 불신의 말을 분별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정탐꾼들이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탐 보고를 하였습니다. 열 명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은 우리보다 키도 크고 장대한 거인들입니다.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길 승산은 거의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당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여호와가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온 회중이 갈렙과 여호수아를 돌로 치려고 하였습니다. 정말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열 명의 정탐꾼입니다. 왜요? 불신앙을 확산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는 이들입니다. 선합니까? 악합니까?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아주 악한 이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망하게 하는 결정적 동기를 제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지를 받고 믿음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자고 한 두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기롭게 어떤 말을 들어야 되는지 잘 분별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불신앙으로 가득 찬 말을 거부하고 믿음의 말을 따라 순종했어야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불신의 말이 더 많습니다. 그런 말에 영향을 받으면 우리도 분위기에 휩쓸려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됩니다. 들려지는 말을 다 듣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해야 합니다. 그럴싸한 논리에 속으면 안됩니다. 감정을 자극하는 말에 속아도 안 됩니다. 다수를 동원하여 옳은 것처럼 포장하는 위장에 속아도 안 됩니다. 오직 말씀에 담긴 진리와 일치하는가? 믿음의 편에 서 있는 참 된 말인가? 를 잘 분별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오늘을 해석하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셨던 역사, 하나님이 동행하셨던 역사, 하나님을 의지하여 순종하면 승리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면 패배하였던 역사를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앞에도 동일한 역사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순종할 것인가? 거역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결과를 내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역사를 떠 올리며 언제나 순종을 선택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
신 1:34-38 / 강용규 목사
성경에는 많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귀한 일을 행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 받아 120세까지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헤브론을 점령했습니다.
모세는 가데스바네아에서 열두 지파 대표자들을 선출해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돌아온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백성이 이스라엘 백성보다 강해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합니다.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에 빠집니다. 그 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일어나 백성들을 안심시키면서 “그 땅을 우리가 능히 차지할 수 있습니다. 그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므로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합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갈렙의 의견에 찬성한 사람은 여호수아 단 한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일은 열 명의 의견에 따라 포기되어졌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서는 분명 갈렙이 졌지만, 하나님은 그 논쟁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신명기 1장 36절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내가 그 땅에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들어가게 하리라. 그가 밟는 땅을 다 내가 그에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보면 다섯 군데에서 “갈렙이 온전하게 하나님을 좇았다”고 말씀합니다. 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을 좇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목적을 온전히 좇았을 뿐만 아니라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좇은 사람입니다. 그 결과 그 당시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갈렙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살다 보면 일이 잘 풀릴 때가 있고,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이 잘 안 된다고 우리의 인생이 실패한 인생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갈렙이 결국 승리한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을 하나님은 저버리지 않고 기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갈렙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1.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45년 동안 잊지 않고 기억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모든 땅을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까닭에 여호수아가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갈렙이 나서서 말합니다. “나이 40세에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헤브론 땅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내가 능히 그 땅을 취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나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갈렙 사이에 맺은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헤브론은 해발1,000m에 양쪽으로 골짜기가 깊이 파여 있고, 거대한 아낙 자손이 사는 곳입니다. 현실로 보면 그 땅을 차지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니 그 땅을 능히 차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전쟁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나서려할 때 그를 막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갈렙의 가족들이 나이를 앞세우며 갈렙을 막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전쟁에 나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그 앞길을 막은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였습니다. 갈렙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전쟁에 나섰습니다. 2009년, 우리 앞에 여러 가지 난관이 있겠지만, 갈렙처럼 헤브론 산을 점령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45년 전에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약속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약속이 더디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약속이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이루리라는 기다리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지가 벌써 3년이 넘었습니다.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아름다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줄을 믿습니다. 시편 시인은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오니,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림이 더 합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자에게 이사야 30장 18절은 “여호와도 기다린다.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여호와께서 지금 일어나신다.”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후 100세에 비로소 그 약속인 이삭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결혼하고 자식을 바로 얻은 것이 아니라 무려 20년 기도 끝에야 에서와 야곱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볏단들과, 별들과, 해와 달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그가 장성한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은 하나님의 때에 틀림없이 이루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흔들림 없고 온전하며 기다리는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갈렙이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갈렙과 그 자손들에게 “그 밟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에 패트릭 해밀톤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왕족의 아들로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구원을 사고팔던 시대였습니다. 그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전하자 구교에서는 그를 왕족의 아들이므로 죽이지는 못하고 독일로 추방시켰습니다. 시간이 흘러 다시 해밀톤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카톨릭에서는 왕족의 아들임에도 그를 붙잡아 세인트 앤드류 교회 마당에서 화형시켰습니다. 카톨릭은 그날로 개혁적인 신앙이 끝이 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구교에 반대하는 개혁적인 신앙이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해밀톤이 죽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입니다.”라는 말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
신 1:34-46 / 그린스보로교회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
앞으로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삶의 원리이죠.
가나안 정탐꾼 사건은 순종과 믿음이라는 두 가지 삶의 원리를 모두 거역한 사건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도 못하였고, 그 땅을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는 ‘믿음’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광야 40년의 삶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죠.
이제 모세는 정탐꾼 사건을 통해서 바로 이 ‘믿음’에 대하여 더 깊게 설명합니다. 표면적으로 오늘 본문 내용은 가데스 바네아서 있었던 정탐꾼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징계를 받았다는 것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애굽을 나올 때 살았던 1세대들은 광야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였고, 이제 광야 2세대가 가나안을 들어가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 말씀은 ‘듣다’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듣다’라는 단어로 끝맺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4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말소리를 ‘들으셨다’고 언급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말소리를 원망과 불평의 소리였죠. 가나안 정탐꾼 10명으로부터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게 하시기위해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냐고 하시면서, 오히려 애굽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들을 한 것이죠.
하나님은 그들의 그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는 진노를 발하시며 징계하신 것입니다.
반면에 45절에서 여호와께서 ‘듣지’아니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통곡하는 소리이죠. 하나님의 징계의 선포가 있은 후에 뒤늦게 자신들이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음을 알게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스스로 가나안에 전쟁을 하러 올라갔다가 아모리 족속에게 패하여 왔을 때, 하나님께 통곡한 그 소리를 듣지 않으신 것이죠.
히브리어에서 듣다는 귀로 듣는다는 의미와 함께, 그 말대로 실천하다라는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들으라’라고 하나님께 명령하시는 것은 단지 잘 들어야 한다는 뜻으로만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듣고 실천하여라라는 명령들인 것이죠.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은 우리 믿음과 큰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듣다’라는 단어로 전체를 요약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실천이 우리의 믿음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 없는 악한 자들의 바람대로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들의 불평과 원망을 들으시고 애굽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기를 바라는 그들의 바람대로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중심으로 광야 2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죠.
성경은 분명하게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으며, 영생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죠.
또한 분명한 것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믿음도 우리를 구원 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뒤늦게 가나안을 정복하러 올라가면서 마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려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길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패하고 말았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은 우리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방법으로만 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원리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광야 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믿음의 원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동행하며, 제자로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탐꾼 사건은 이 믿음의 원리를 분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지만, 믿음이 없이는 영원한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한 날의 삶을 믿음 안에서 살아가시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눈 앞에 보이는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더욱 견고해야겠습니다. 견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루를 사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패역한 나를 죽이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신명기 1:34–46
시작 기도 / 주님, 벌써 3월이 다 지나가고 있고 계절은 따뜻한 봄 날씨를 맞이합니다.
주님의 은혜는 만물을 소성케 하시고 생명의 풍성함을 얻게 합니다.
내 영혼에도 주의 생명으로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고 만족함 얻기를 소망합니다.
내 안에 죄와 허물로 더러워진 마음과 영혼을 주의 보혈로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주님과의 관계를 온전하게 세우고 그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게 하옵소서.
나를 구원하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은혜 받은 자의 합당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본문 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원망의 말을 들으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노하시고 그들이 조상들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한명도 들어가지 못할 것을 선포하신다.
다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적극적으로 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가 그가 밟은 땅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줄 것을 선언하신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은 모세에게도 진노하셨고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선포하시고 그의 직분을 여호수아가 이어 받고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자녀들이 가나안 거주민에게 사로잡힐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들의 말을 반증하듯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 갈 것을 선포하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이 가나안 방향이 아닌 홍해 길을 따라 광야로 가라고 명령하신다.
이때 하나님의 징계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범죄 했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족속과 싸울 것을 선언하고 가나안 산지로 올라가려 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이 올라가지 말도록 명령하시고 그들의 싸움에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심을 선언하시며 전쟁에 패할 것을 이야기하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산지로 올라갔으나 아모리 족속이 그들을 벌 떼 같이 쳐서 세일산에서 호르마까지(이스라엘 백성들이 진 친 북쪽 지역) 도망가게 만들었음을 지적한다.
전쟁에 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이 그 소리를 듣지 않으시고 외면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통곡이 진심의 회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하나님의 명령대로 광야로 돌이키지 않고 가데스 바네아에서 자기들이 머물고 싶은 대로 머물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했던 모습을 지적한다.
나의 묵상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통곡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그들이 이야기 한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하신다.
그러나 12명의 정탐꾼 중에 갈렙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며 가나안으로 올라가 그들을 정복하고자 했기에 하나님은 그가 가나안에 들어갈 것이며 그 땅을 차지할 것을 선포하신다.
또한 하나님은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므리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던 사건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가 그것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상실함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됨을 말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과 속죄를 통해 주어지는 거룩함과 정결함 없이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명령에 대한 순종 없이는 들어갈 수 없다.
이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며 사람의 능력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구약과 신약에서 동일하게 보여준다.
모세의 회상을 통해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결여 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원망하는 모습을 시작으로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산지로 올라가지 말라고 했는데도 올라간다.
또한 전쟁에 패배했으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홍해기를 따라 광야로 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며 반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통곡하며 부르짖었으나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이 외면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감정에 휩싸여 통곡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닌 자기기 원하는 것을 얻고자 힘쓰며 하나님을 자신의 만족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태도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충격적인 사실로 다가오며 수많은 기적을 경험하고도 바뀌지 않는 백성들의 패역함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런 패역함이 이스라엘 백성에 국한 되지 않고 나의 모습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죄에 관대하며 진실한 회개보다 형식적인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가 너무도 많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일깨우시고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온전케 하시는 은혜가 아니면 여전히 죄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은 이런 패역한 세대를 물리치시고 새로운 세대를 통해 가나안 정복을 이루어 가신다.
동일하게 내 안에 패역한 나를 죽이시고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의 자리로 이끌어 가신다.
십자가의 죽음에 동참케 하시고 생명과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바울은 육신을 죽이고 영으로써 생명과 약속의 기업을 얻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다.
고전 15:53~58 /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오늘도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하며 내가 아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손길에 반응하는 자가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교회의 모든 지체들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믿음에 거하고 자신이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한다.
묵상 기도
주님, 오늘도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그들을 죽이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주의 은혜와 사랑에 늘 감사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사는 자 되게 하옵소서.
나를 죽이시는 주님의 심판은 공의의 심판임을 고백하며 죽이신 후에 다시 세우시고 일으키시는 그 사랑은 갚을 수 없는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날마다 나를 죽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생명의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주어지는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도록 도와주시고 주님과 동행하도록 도와주옵소서.
함께 하시고 은혜로 인도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천 국
신 1:34-46
신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고 계시는가를 알지 못하고서 신앙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신자의 자리로 부르셨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하나님이 부르신 의도에 맞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나를 사랑하셔서 천국 보내주시고 세상에서 나를 지키셔서 평안하게 살도록 해주시기 위해서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하며 살아갑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서, 온 몸을 다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힘쓰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라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까? 설령 하나님이 사랑해주겠다고 찾아오셔도 부끄러워서 숨어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인감 됨을 안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버젓이 고개를 들고 '하나님 나를 사랑해주세요'라고 요청할 수 있으며 내 일이 잘 안된다고 하나님께 삿대질을 해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앙이 없는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단지 여러분을 천국 보내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신자로 부르셨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선택은 무엇을 위한 선택입니까? 하나님의 선택은 여러분을 도구로 삼기 위한 선택입니다. 어떤 도구인가 하면 이 세상의 악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입니다. 땅의 악의 정체를 파헤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창 3:15을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후 땅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터로 변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여자의 후손이고, 누가 뱀의 후손인가 하는 점입니다. 뱀의 후손이라고 해서 머리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뿔이 난 것도 아닙니다. 또 여자의 후손이라고 해서 얼굴에 광채가 나면서 어떤 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세상에 뱀의 후손, 즉 악의 정체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는 쪽으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통해서 시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별을 두고 대하신 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기준으로 두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아벨의 제사가 선해서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택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다만 선택된 자는 자기의 의로 인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인격과 자질과 가능성을 가지고 스스로 의를 창출해 내려고 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반발해서 아벨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선택된 자와 선택되지 않은 자, 즉 여자의 후손의 모습과 뱀의 후손의 모습을 특징지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선택된 자는 자신에게는 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선택되지 않은 자는 자신에게도 의를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서 기대를 걸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하신다는 문제에 대해서 반발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에게도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해 달라고 합니다. 선을 행할 가능성이 있고, 노력만 하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인간은 무능한 존재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이것이 악의 모습입니다. 이런 악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짓된 신은 인간의 노력과 정성과 행동에 대해서 칭찬해주고 거기에 합당한 상을 내려주는 우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자로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바로 이러한 악을 세상에 나타내라는 의도에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신자가 할 일은 부름 받은 자신에 대해서 대견해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오직 하늘로부터 주어진 의 때문에 생명을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은혜를 노래하는 것이 부름 받은 신자의 할 일입니다. 그런 신자를 통해서 세상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인간의 노력과 정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할 일을 만들어 내려고 하고, 자기의 열성을 의로움으로 치장하려는 인간의 정신이 곧 악의 모습인 것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즉 선택은 나의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를 나오고 하나님을 찾게 된 것을 가지고 다 끝난 것으로 여겨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종교생활 하면서 세상에서 편히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의 악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죄인 되었을 때 부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자각하면서 자기 의에 대해서는 포기한 채 오직 하늘에서 오신 의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여러분에게서 보여진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교 성적표를 만들어 놓고 점수를 매기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천국이 성적으로 들어가는 나라라면 하나님이 요구하는 점수는 몇점이겠습니까? 100점입니다. 완전한 100점이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께 선택되어진 은혜에 의해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 없고 자기에게 가능성을 둘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마치 하나님이 성적표를 들고 점수를 적고 계시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읽기 과목, 기도 과목, 헌금 과목, 봉사 과목 등등이 있고 우리에게 시험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하면 높은 점수를 줘서 나중에 천국에 가게하고 또 우등상도 준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방해자로 등장해 있는 실체입니다.
저는 현대 교회의 실체를 고발하는 것보다는 혹 은석교회가 하나님의 일에 방해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스스로 신자라고 큰소리치면서 오히려 사단의 하수인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서 살아가지 않는가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눈이 보이는 가시적인 교회를 선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배당에 모여서 하나님 부르고 기도하고 찬송 부른다고 해서 선한 모임이라고 단정짓지 마십시오. 복음이 바르게 설교되지 않으니까 악한 교회고, 바르게 설교되어지면 선한 교회라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즉 은석교회를 선한 교회로 여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바로 설교되어진다고 해서 선한 교회로 단정지어 버리면 여러분은 은석교회에 다닌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선한 쪽으로 생각해 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은석교회를 악한 교회로 보고 계십니까? 악한 교회로 보셔야 합니다. 만약 은석교회를 선한 교회로 보고 계셨다면 그것은 아마 내가 다니는 교회이기 때문일 수 있고, 아니면 죄가 무엇인지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35절에 보면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자녀들과 선악을 분변치 못하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악한 세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악한 세대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상식과 인생 경험을 토대로 해서 가능성을 판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상식과 경험을 가지고 약속의 땅의 들어갈 수 있는 여부를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못들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즉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그들의 상식과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고, 홍해를 건너고, 만나를 먹고, 수십 년을 다녀도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발을 부르트지 않는 것은 결코 그들의 상식과 경험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사람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지내온 힘을 은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자신들의 상식과 경험을 앞세워서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못들어간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이고 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은혜를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가능성을 두는 것은 무엇입니까? 열심히 하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자신만만해 하고, 열심이 없으니까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불안해하는 것이 과연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의 힘으로 종교생활을 해왔을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믿음이 오직 은혜였음을 아는 신자는 천국을 앞에 두고서 자신의 상식과 경험 열심을 토대로 해서 천국의 여부를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린 악합니다. 목사인 저도 악하고 여러분도 악하고 은석교회도 악합니다. 그 무엇도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 의지할 뿐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 속에서 천국 가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신 이유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에 자신을 내어 맡기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도해 주신 그 자리에서 나타내야 할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자리를 나름대로 정해놓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은혜를 노래할 조건들이 마음속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자리로 인도해 줬을 때 감사하고 기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신자는 기쁨과 감사의 자리를 스스로 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현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 신자입니다.
신자들이 천국을 상상할 때 떠올리는 것은 좋은 환경입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 천국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 할지라도 마음이 잘못되어 있으면 고통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과 근심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천국은 환경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좋은 환경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상태가 달라지기를 원하며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천국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마음 상태가 아니라 좋은 환경에만 관심을 둔 채 살아갑니다. 그 욕망이 이어지는 것이 좋은 환경으로서의 천국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욕망의 화신입니다. 욕망의 불길 속에 자기를 내던진 채 자신을 태워가고 있습니다.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는 조그마한 가능성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아가서는 가능성까지도 스스로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관심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나의 육신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다는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종교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사람들에 의해서 하나님이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한 세대의 모습입니다. 도무지 현재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모르십니까? 아신다면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에 실려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악한세대의 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신자로 부르신 이유도 여러분이 어떤 쓸모가 있고 사용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무가치한 것이 인간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소유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땅에 대한 소유의 가능성이 사라졌을 때 통곡을 하게 됩니다. 45절에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통곡 소리를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통곡은 자기를 앎에 대한 회개의 통곡이 아니라 욕망의 단절로 인한 통곡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통곡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세상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음대로 안될 때 분풀이를 하게 됩니다. 남자는 술을 마시고 여자는 눈물을 흘림으로서 자기 욕망이 차단되고 단절되는데 대한 화를 내뱉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망의 차단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41절에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선언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반발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 하였사오니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 하고 너희가 각각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가려 할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싸우지도 말라 내가 너희 중에 있지 아니하니 너희가 대적에게 패할까 하노라"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없다는 땅에 기어코 들어가 보겠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나안 민족과 싸우지 않겠다고 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다면 들어가 싸우면 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의 삶이 은혜의 체제가 아니기 때문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자기들의 행동에만 기준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안들어 간다고 해서 하나님이 화나신 것이라면 들어가 싸우면 된다는 생각은 결국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자는 식입니다.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화내신다면 기도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과 같습니다. 봉사하지 않아서 복을 못받는 것이라면 봉사하면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것을 막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멋대로 가지 말라한 길을 가고서는 자기 뜻대로 안된다고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면 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멋대로 기도하면 된다고 우겨놓고는 안들어준다고 성질 내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고, 높아지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인데도 인간될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통곡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세상일은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어떻게 자기 뜻대로 세상이 되어지기를 바랍니까?
여러분, 세상일이 누구의 뜻에 의해서 움직여져야 합니까? 내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세상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져야 한다는 것이 여러분의 생각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말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내 뜻이 무너지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만들어 준 상황에 대해서도 전혀 인정을 하지 않고 원망하고 울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천국은 우리의 힘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것을 아신다면 지금부터 자기의 힘으로 살지 말고,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 말고, 은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을 보이십시오. 달라진 인간의 모습을 보이십시오. 악한 세대의 악이 무엇인가를 보이십시오. 이것을 위해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은혜였음을 잊지 마시고 앞으로 남은 인생도 은혜를 따라 살기로 작정하십시오. 그리고 현재 주어진 환경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에게 되어진 일임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자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의 입에서는 통곡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외침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천국은 이런 신자가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