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과 우장춘박사
“벼는 어떻게 되었나? 가지고 왔나?”
우장춘 박사가 임종하기 전 문병온 제자를 보자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병으로 쓰러지기 전에 다수확 벼의 개량종을 연구하였는데 제자를 보자 그것이
궁금하여 던진 질문이 애처럽습니다.
을미사변은 1895년 8 월20 일 새벽 민비가 일본의 낭인(浪人)들에 하여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입니다. 민비가 친러 정책을 쓰는데 앙심을 품은 일본인들은 재조선 일본인 공사가 총 지휘를 했고 하바드대, 동경 제대 등을 졸업한 엘리트 낭인들의 지적인 그러나 병든 애국심을 앞세워 민비를 살해 했습니다. 일본 낭인들은 조선의 군관(軍官)들의 경호와 안내로 궁녀의 복장을 한 민비를 살해하고 시간(屍姦)한 후 석유를 끼얹고 태웠다고 합니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일본인 고무라(小村)라는 사람의 딸을 민비의 양녀로 삼아 훗날 시해 할 때 이 아이가 민비의 신원을 확인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인들의 요청에 응하여 민비 살해에 가담했습니다. 그는 새벽 5시 넘어서 경복궁에 도착하여 일본인들은 6시가 돼서야 민비를 살해했습니다. 이는 대원군이 지시로 저지른 것이란 연극을 하기 위한 얕은 수작이었습니다.
70이 넘은 대원군의 민비에 대한 원한을 삭힐 때도 되었는데 기회만 있으면
며느리를 죽이고 집권하려는 노욕이 추잡합니다.
일본은 처음에는 대원군등 조선 사람들이 저지른 만행이라고 얼버무리다 차츰 진실이 들어나고 열강들이 경악하고 압력을 가하니까 자기들이 한 것이라고 자인했습니다. 대원군, 유길준, 우범선 훈련원 제 2 대대장, 송병준 사위인 구연수 등 많은 조선인이 민비 시해에 가답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민비가 복권되면서 사형당한 조선인도 많았고 대원군은 연금신세로 있다가 곧 죽었는데 고종이 장례식장을 찾지 않았습니다. 민비를 시해하는데 가담한 아버지가 너무나 증오스러웠습니다. 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전 세계가 분노했고 러시아 황제는 러시아군 2개 사단을 한국으로 보내라고 할 정도 였습니다. 일본은 가해자들을 재판에 회부했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전원 무죄 방면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참으로 잔인합니다. 청일 전쟁 때는 여순의 중국인을 거의 전멸시켰고 난징 학살 때는 30만을 죽였습니다. 7-8백년 무사 시대부터 눈만 뜨면 살육을 하던 그 피가 면면히 이어옵니다.
우범선(1857-1903)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대대로 무과 집안이었고 그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제 2 대대장까지 되어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었는데 그만 민비 암살의 대역죄를 저질렀습니다. 일본에 망명하여서는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인과 결혼 합니다. 1898년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자객 고영근에게 피살당합니다. 우범선과 사카이 사이에 난 큰 아들인 우 장춘은 홀어머니에게서 가난히 살다가 잠깐 절에 맡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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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조선 총독부에서 민비 살해에 가담한 조선인들에게 은급을 준다는 소식을 듣고 사카이는 조선 총독부로 건너와서 다달이 얼마 씩 받게 되어 가난을 해결합니다. 우장춘(1898-1959)은 일본 동경 제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워를 받은 농학자가 되어 일본의 연구소에서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동경제대 박사 학위는 한 반도의 큰 사건이었습니다. 역적 우범선의 아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수재가 있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하기야 역적질은 그의 아버지가 한 것이지 그와는 상광 없는 일입니다. 훗날 그는 말했습니다. 자기를 이 만큼 만든 두 여인이 있는데 가난 속에서 자기를 키워주며 항상 아버지 나라를 위하여 일하라고 한 어머니와 자기가 하는 일을 전력으로 지원해온 아내라고 했습니다. 아들보고 남편이 역적으로 몰린 나라에 가서 일하라고 한 어머니의 마음씨가단호하고도 아름답습니다.
1953년 3월 한국에 왔으나 아내나 자식들이 한국어를 못해서 혼자서
왔습니다. 실력있는 농학자로 이 나라의 후진적인 농학의 발전에 기여하려고
타국 같은 조국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아버지가 지은 죄업의
일부라도 씻어 보려는 순교자 같은 우장춘 박사.
올 때도 일본 국적을 버리고 이름도 우장춘으로 고치고 어머니가 말리는데도 아버지 묘를 참배하고 자청하여 밀입국자가 되어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귀국했습니다. 한국의 언론은 세계적인 육종학자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우리가 지금 먹는 개량 김치, 청정재배의 원조, 무병감자의 개발, 다 수확 벼의 개발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그의 출국을 금지했고 모친 상 때도 그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이래도 되는건가요? 영친왕 이은도 쓰러지기 전
여러 번 귀국하겠다고 요청하는 것을 이승만 정권은 거부했고 여권 발급도 거부했고 다른 왕족은 모두 매월 월급조로 얼마씩 주었는데 영친왕에게는 이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것도 그분은 잘하는데 아랫사람들이 잘못해서 인가요?
메르스 파동이 일었는데 박 대통령은 잘 했는데 아랫사람들이 못해서 일어났다고는 안 합니다. 어머니상에도 못 가게 하는 정권은 너무 잔인합니다.
연구소에서 어머니 위령제를 지냈는데 들어온 부의금은 모두 인근 주민들이 우물 파 주는데 썼다고 합니다. 우박사는 1959년 8월 지병으로 별세하였습니다.
슬하에는 딸만 넷 두었는데 막내 사위는 나중에 JAL 항공의 회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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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에 소개된 우장춘 박사의 연혁에서 그의 업적을 자세히 알수는 없으나
최초로 씨 없는 수박을 만든 농학(육종)박사라는 사실을 국민학교때 배운거로 기억 합니다.
씨없는 수박은 일본 사람이 처음으로 만들었고 우박사는 육종의 새로움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만들었다고 합니다. 우 박사가 이룩한 업적은 정치하는 사람 천 명이 한 것 보다 높지요.
우박사의 실험실이 부산 동네에 있었던것으로 기억되는데
제가 알고있던 씨없는 수박을 만든 사람이 우박사가 아니군요.
배고프던 시절에 서민들의 먹거리를 위해 노력하신 우박사님 아버지 때문에 역적의 자식으로 매도하는
우리사회의 풍토가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자신의 길을 간 우박사님은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오늘의 국회의원 관리들을 생각하면 역적의 아들 우박사님은 아버지가 저지른 죄를 애써 갚으면서
이 나라 농업을 상당한 수준으로 높였으니 요즈음 높은 사람들 우리는 미워할 자격이 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양님 고증이 맞습니다. 그가 우박사의 사위이고 일본을 상징하는 JAL의 회장이 된 것은 우리도 경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반역자의 아들로 평생 그늘에서 살던분의 사위가 일본을 상징하니 우리도 흐믓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