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7월22일 월. [(백)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1독서 아가 3,1-4ㄴ
복음 요한 복음 20,1-2.11-18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스승은 제자들에게 최고를 기대해야 한다.
2019년 다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스승은 제자들에게 최고를 기대해야 한다>
복음: 요한 복음 20,1-2.11-18
말 조련사 아버지를 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설계해 보라는 숙제를 내 주었습니다.
소년은 평소에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면서, 이 다음에
100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목장의 주인이 되리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7장의 종이에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과 일정을 꼼꼼하게
작성하여 다음날 선생님에게 제출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소년의 숙제에
빨갛게 x표를 치며 말했습니다.
“얘야. 너와 너의 아버지는 지금 너무 가난하단다. 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을 모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니? 좀 더
현실적인 계획표를 작성해 오면 그때 다시 점수를 주겠다.”
하지만 소년은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냥 x를 주세요. 저는 점수와 제 꿈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소년은 그의 꿈대로 100만평의 목장 주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늙은 노인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100만평에
달하는 엄청난 목장의 규모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목장 주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보게! 나를 기억하겠나? 30년 전 자네의 100만평 꿈에 x표를 했던
선생이라네. 아, 나는 수많은 아이들의 꿈에 x표시를 한 꿈 도둑이네,
꿈 도둑! 아, 그런데 자네만이 나에게 꿈을 도둑맞지 않았구먼.”
제가 강의하다가 천국에도 서열이 있다고 했더니 어떤 분들은 그것을
꽤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 중에 가장 큰 사람이기는 해도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엔 하늘나라에는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존재하려면 가장 큰 사람도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서열’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계명 하나라도 어기도록 가르치면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하늘에서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마태 5,19)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작은 사람을 나누는데
자꾸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실까요? 가르치는 사람은
‘기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더 높은 꿈을 주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이 더 높이 오르기를 기대하는 만큼 그 스승은
하느님 나라에서 더 높은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오늘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세상의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가장 높은 영성의 단계에까지 오른 여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마리아를 만나주신 데에는 그만큼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은 창세기에서
아담이 하와를 만나는 장면과 다르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이 하나의
정원인 것처럼 마리아도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처럼 사는 이들을 당신
옆구리에서 빼낸 피와 물로 새로 태어나게 하여 그것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창세기의 아담입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이들은 아담의
하와가 되어 아담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여기서는 “마리아!”
란 이름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라뿌니”, 즉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스승은 자신의 제자가 자신처럼 되도록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당신 자신처럼 성장시키고 싶은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고 하십니다. “나와 너의 아버지는 같은 하느님이시다.”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큰 죄인도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신 라뿌니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조던 피터슨은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성장할 무렵 자신의
동네에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당시 일자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아 자신보다 더 잘나고 운동과 공부를 잘했던 친구들도 대부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직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도시의 대학에 나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석학이 되었습니다. 현재 시골 친구들은 술과 세상사에 짓눌려 자신도
못 알아볼 만큼 완전 몸과 마음이 피폐한 채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큼 나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시는 분이 없습니다. 누가
나를 보며 “너는 하느님이야!”라고 말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런 꿈을
주러 오신 참 스승이십니다. 가장 높은 것을 기대하는 스승이시기에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이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그분에게서 배워 사도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웃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스승이 됩시다. 그러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가장 높은 이상을 바라시는 참 라뿌니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가 복음에 “일곱 마귀가 들렸던 여자”
(루가 8,2)로 나타나고 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실 때에 그 밑에 있던 부인들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으며
(참조: 요한 19,25),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일
먼저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알렸던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참조: 마르 16,9-11).
전승에 의하면,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로
보고, 통회와 관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공경해 왔다. 성령강림 후 마리아
막달레나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과 함께 에페소로 가서 선교하다가
그곳에서 선종 하였다고 한다.
복음: 요한 20,1-2.11-18: 왜 울고 있느냐? 누구를 찾고 있느냐?
마리아 막달레나는 복음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의 증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그런데 예수님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자기위주의
눈물 때문이었고, 그녀의 눈은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빈 무덤에
고정되어 있었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다. 돌아가신 것에만 그의 생각을 고정시켰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마리아!”하고 부르신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 한 마디로
“선생님!”하고 기뻐한다.
이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을까?
막달레나는 완전히 자기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밖에 보지 못하고 있다. 빈 무덤에서 눈을 돌리지
못하기에, 즉 자기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기에, 자신의 판단이 옳은
줄로만 알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도 흔히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면서 살아가기 일쑤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도 차디찬 무덤, 땅에만 쏠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곳에서 눈을 돌려 승리를 거두시고 서 계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체험이란 것은 이제 막달레나가 체험하는 것 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는 것 뿐 아니라, 그 체험을 전하는 것이다. 그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는다. 그리고
달려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부활을 매일 체험하여야 하며, 그 부활체험을 기쁘게
선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흔히 새로이 주님 안에 태어나는
삶의 모습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이 때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 수 있고 그것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주님을 애타게 찾았으나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수께서 먼저 다가가시고 마리아를
불러주시듯이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시고, 나를 먼저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나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을 때에는 내 옆에 계신 주님도 엉뚱한 동산지기로 만들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있는 자세로 그분을 뵙고
“나의 주님!”으로 맞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처럼 부활을 체험하고 그 체험을 용감히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7월22일 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 18)
비온 뒤 더욱 맑은 하늘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반성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사랑은 부활합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며 막을 수 없습니다.
맑은 사랑이 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한 여인의 애절하고 애틋한 사랑에서 부활은 눈물어린 빛이 됩니다.
사랑으로 만나는 시간이 부활의 빛입니다.
사랑 안에 참된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영혼을 더욱 아름답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서로를 위한 부활의 기쁨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생애 전부를 빛나게 하시는
예수님께서 다시금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사랑할수록 십자가도 무덤도 갈릴래아도 부르심도
첫 시작도 선물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다시 시작하는 빛나는 날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그분의 따뜻한 손길이 내 영혼에 닿는 순간 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2019년 다해 7월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그분의 따뜻한 손길이 내 영혼에 닿는 순간 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시름시름 앓고 있던 병이 깊어져, 회복의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삶이 참 막막할 때가 있었습니다.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한창
꽃피어 날 나이에 맨날 이 병원 저 병원 순례를 하다보니,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고 세상이 너무 싫었습니다.
하루 하루가 온통 짙은 회색빛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계절은 늘 혹독한
겨울이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니 매사에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졌습니다.
지나가는 아무 것도 아닌 말 한 마디에도 마음이 크게 상하고 가라
앉았습니다.
그 절박한 순간에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인자하신 한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저를 바라보는 눈길이 측은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분이
제게 건네시는 몇 마디에, 그간의 고통과 서러움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오랜 세월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몸과 마음은
늘 함께 갑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너무 비관적으로도
생각하지 말고, 일단 마음을 편하게 가지면 좋겠습니다. 병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꼭 낫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자상한 눈길, 따뜻한 음성이 제 지친 영혼을 어루만지는 순간, 저는
길고 지루한 병으로부터의 치유가 시작되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예수님 제자 중의 제자이자 여사도 마리아
막달레나도 비슷한 체험을 하셨습니다.
복음서의 표현에 따르면 그녀는 한때 일곱 마리 마귀가 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일곱 마리 마귀’란 표현 만으로도 그녀의 병세가
얼마나 깊었던가를 쉽게 짐작할수 있습니다. 한 마리 마귀 대적하기도
힘든데, 오랜 세월 동안 일곱 마리 마귀와 대적하느라 지칠대로 지친
심신을 이끌고 하루 하루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아마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빨리 세상을 하직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었던
그녀였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 생깁니다. 은혜롭게도 그녀는 삶의 막다른 골목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깊은 병고로 인해 언제 어딜 가든지 외톨이였고
천덕꾸러기였던 그녀였습니다. 끔찍한 그녀의 모습에 다들 외면하고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분으로부터 인간다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측은지심 가득한
눈길, 더할 나위없이 부드러운 음성, 따뜻한 손길이 그녀의 영혼과
육체에 닿는 순간, 혹독한 겨울은 즉시 물러가고 화사하고 따뜻한
인생의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마리아야,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네가 겪은 고생 내가 다
알고 있다. 이제 괜찮으니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시작이다. 나와 함께 새 인생을 시작하자!”
예수님의 따스한 눈빛은 깊은 구렁 어둠 속에 앉아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밝은 빛으로 끌어올리셨습니다. 연민과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그분의 음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몰골의 마리아를 본래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배려에 힘입어 마리아 막달레나는 일곱 마리
악령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죽음에서 되살아난 그녀의
선택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것,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하늘같은 그분의 은혜를 잊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 갚아드리는 것...
이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삶의 전부요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향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녔습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예수님과제자단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아우구스티누스 교부께서는 ‘사도들 중의 사도’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주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베풀어졌던
똑같은 방식의 은총과 축복이 반복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청주] 절망의 눈물을 거두어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7월22일 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요한 20,1-2. 11-18)
절망의 눈물을 멈춰라.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공허해지기도 합니다. 결국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 눈물은 절망의 눈물이기도 합니다. 인간적으로 다시 이룰
수 없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매춘부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개한 여인으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일곱 마귀에 사로잡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면서 생이 완전히 바뀐
여인으로,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께 순 나르드 향유를 부은 여인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합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는 세상 온갖 것에 시달리며
기구하게 살아온 슬픈 여인이요, 죄로 얼룩진 상처의 아픔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가족으로부터의 버림과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마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눈길을
보내시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리아는 본모습을 찾았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런데 그 은인이
죽임을 당하고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절망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례를 치르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누구보다도 먼저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동녘이 밝아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요한20,15) “누구를 찾느냐?” 라는 질문은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찾고 있었기에 ‘누구를 찾느냐?’는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았지만 하나같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몰려왔습니다. 안드레아, 베드로도 이스라엘을 독립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를 찾아서 왔고, 일반 군중들은 먹을거리를 찾아서
왔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얻으려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마리아가 무엇을 얻으려고 왔다면
“무엇을 찾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질문을 받을
수 있을 런지요?
마리아는 절망의 눈물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시신을 매장할 때도 거기 있었고 이제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지 않으시고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수난의 처음부터 죽음의
끝까지 함께한 충실성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수난의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두려움에 떨며 주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끝까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야!”부르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마리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제 “라뿌니!”,
“스승님!”하고 불렀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스스로 먼저 당신을
알려 주기 전에는 아무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
하고 전하여라. 이 말씀은 결국 “마리아야,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듯이
너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하느님의 딸이다. 나는 이것을 전하러
세상에 왔고, 너희도 하느님께 올라갈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부활의 세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천상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의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흔들림 없이 주님을 찾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기타] 7월 22일(월) - 다윗의 전도
오늘은 ‘다윗의 전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40편 10절 말씀에 “내가 주의 공의를 내 심중에 숨기지 아니하고
주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내가 주의 인자와 진리를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감추지 아니하였나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대한 공의를 마음에 숨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실과
구원을 선포하였으며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에
감추지 않고 당당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많은 회중 가운데서 소리쳐 입술을 닫지 않고 틈만 나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 찬양하는 모습이 주위 사람들 보기에 다 같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 기뻐했고, 수많은 재앙들이 자기를
덮쳐도 결코 본인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윗처럼 언제나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고
찬송이 입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직접 보게 하는 바로 이 다윗의 전도 방법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은 곰을 이겼습니다.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바로 그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였듯이 찬양으로 말씀으로 하나님의 사모하는
열정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 성도가 바로 이 대목에 눈길을 주시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의
모습을 통해서 입술에서 행동에서 보여주는 성도, 다윗의 모습 닮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언합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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