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이야기 706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3 : 경상도 명성 높았던 진해군항제
김해 바로 아랫자락에 있는 진해시의 풍속이 『관풍안』에는 “검소하고 소탈함을 숭상하는 풍속이다”라고 실려 있다. 『여지도서』에는 진해에서 서울까지의 거리가 887리로 10일 동안 가는 거리였다고 실려 있다.
불모산과 진해
끝없는 푸른 바다 여기저기 많은 산
한 조각 외로운 성에는 수십 채 민가.
나그네는 밤이 깊도록 잠 못 이루는데
달 밝은 남포 고기잡이 노래 들려오네.
김요가 이곳 진해의 제영(題詠)을 두고 노래한 진해가 역사 속에 각인된 것은 삼포왜란 때문일 것이다. 대마도주가 조선 정부에 울산의 염포, 동래의 부산포 그리고 지금의 진해인 웅천의 제포를 열어달라고 간청을 하자, 세종 8년에 그 요청을 받아들여 항구를 열고 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 뒤 잠시 동안 왜구의 침입이 잠잠했으나 중종 5년(1510)에 대마도주는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부산포를 함락한 뒤 웅천성을 점령하였다. 그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는 황형과 유담년을 보내 왜구를 모두 대마도로 보냈는데, 이 싸움을 삼포왜란이라고 부른다. 그런 탓인지 조그마한 어촌이었던 진해시는 러시아, 일본의 각축 속에서 1902년 군항으로 개발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해군의 요람이 되어 군항제와 벚꽃 축제의 도시로 변화하였다.
진해 군항제 (2) © 이혜민
벚꽃이 만발하는 3월 말~4월 초에 진해 군항제가 열린다. 충무공 이순신의 구국의 얼을 기리기 위해 추모제를 거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진해시 중심 제황산동에 자리한 제황산(帝皇山)은 지리도참설에서 ‘부엉산 동쪽에는 제황(帝皇)이 탄생할 명지가 있다’고 한 데서 기인한 이름이다. 이 산에 오르면 남쪽으로 펼쳐진 바다 경치를 볼 수 있고 동, 서, 북쪽의 산줄기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진해시가지의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어여라, 장독아. 장독지신을 올리자. ······ 진주 남강에 물을 실어 창원 덕산에 소금을 담아 한 독에는 된장을 담고, 어여라” 하는 「장독지신풀이」 속에 남아 있는 진해는 다시 변화의 물결을 타고 있는 중이다.
마산과 창원 그리고 진해가 합쳐져서 과연 어떤 도시로 탈바꿈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