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0. 16. 수)(루카 11,42-46)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천해야 한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루카 11,42-44).”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루카 11,46).”
1)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 무덤’은, 무덤이라는 표시가
없어서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지나다니는 무덤입니다.
무덤에 몸이 닿은 사람은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되고,
반드시 정화 예식을 실행해야 합니다(민수 19,16).
표시가 없어서 모르고 접촉했더라도 부정하게 될까?
누구나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민수기의 가르침입니다.
물론 끝까지 모르고 있으면,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도
모를 것이고,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도 문제 삼지 못하겠지만,
나중에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 부정을 벗기 위한
정화 예식을 실행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지도자들이 위선자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고,
그들을 ‘거룩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생활과
가르침을 따라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데도 죄인 줄 모르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는 등, 위선자들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옳은 가르침이라고 믿고
따랐다가 죄를 짓게 되었다면, 따른 쪽의 책임이 아니라,
잘못 가르친 쪽의 책임이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잘못 가르친 자의 책임이 훨씬 더 크고(마태 18,6-7),
모르고 따른 사람의 책임은 작지만, 그래도 죄는 죄입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죄인 줄 몰랐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 되는 수도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무덤에 ‘회칠’을 하는 것은, 무덤이라는 것을 표시해서
사람들이 부정하게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회칠한
무덤’이 상반되는 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위선자들은
‘생명력 없는 무덤과 같은 존재’이고,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사실상 같은 표현입니다.
‘드러나지 않는 무덤’이라는 말은, 남을 부정하게 하는,
즉 죄짓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이고,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속은 거룩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하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입니다.>
2) ‘드러나지 않는 무덤’의 뜻을, “위선자라는 것을
남들도 모르고 자신도 모른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모릅니다.
바로 그 점이 위선의 위험한 점입니다.
모르니까 고치지 않고,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계속 잘못된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어쩌면 자기가 도달한 곳이 ‘멸망’인 줄도 모르고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끝나버릴지도 모릅니다.>
사실 위선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즉 모든 신앙인이 언제든지 위선이라는 함정에
빠질 수 있고, 위선자가 되는 줄도 모르는 채로
위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끊임없이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3)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라는
말씀은, “십일조를 안 내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십일조를
잘 내면서” 라는 뜻입니다.
위선자들은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내면서 자기는 남들보다 더 봉헌을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실천해야 하는 선과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일’만 잘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은 무시하면서 실행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또 남들이 볼 때에만 잘하고, 보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안 하는 것도 위선이고, 생색내기 좋은 일만 하고, 힘들기만
하고 생색내기가 어려운 일은 하지 않는 것도 위선입니다.>
“십일조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은 예수님께서 십일조
제도 자체는 인정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원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헌금이었습니다(신명 14,29).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는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즐기는
위선자들의 교만과 허영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 6장에 있는 ‘불행 선언’을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루카 6,26).>
46절의 ‘힘겨운 짐’은 일차적으로는 ‘율법 실천’을 뜻하고,
넓은 뜻으로는 ‘인생고’를 뜻합니다.
위선자들은 남들에게는 율법 실천을 강요하면서 자기 자신은
실천하지 않는 자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위만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은,
속은 거룩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하게 보이는 것에 초점을 맞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