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고 아래 본문에서와 같이 증거되어 있는 예수님의 명령은 바꾸어 말하면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게 하라는 의미인 것으로..
실상 그와 같은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은 그 전에 반드시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자들만이 가능한 것임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아담과 하와 때부터 죄악과 진노와 사탄과 음부와 사망과 심판들의 영적 노예 상태에 빠진 모든 인생들에 있어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마치 목욕하듯 통째로 하나님의 것이 되며..
직접적, 현실적, 경험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의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정말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고, 본질적으로는 말씀이신 하나님의 것, 말씀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 진정 말씀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이며, 원론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자들만이 제대로 된 말씀의 신앙, 온전한 말씀대로의 믿음이 가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되어 하나님의 것이 된 자들만이 처음에 믿음으로 구원에 참예케 된 사랑, 이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어떤 식으로든 구주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특히 사도 바울과 같이 순간순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고 붙잡으며 그 이름으로 기도하고 찬미하면서 바로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과 은혜와 실제를 덧입어..
죄악들, 악학 세력들, 온갖 시험과 유혹들, 연약과 한계들 등과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것이고, 혹 범하게 된 죄악들에서는 최대한 빨리 자복하고 돌이키면서 다른 그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말씀을 정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모하고 가까이하며 읽고 들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며 증거하는 등과 같은 결단과 몸부림들로 나아가고 또 나아감으로 인해 진정한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은 계속해서 직접적으로는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으로, 근원적으로는 말씀으로 하나되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뻐 역사하심이 됨으로 인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치열하게 죄악들과 싸울 수 있게 하고 더더욱 뜨거운 말씀의 열정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특히 아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강조 및 명령하신 세례는 하나님 아버지의 창세 전부터의 뜻과 약속과 섭리 안에서 오직 한 분 구주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해, 또한 직접적으로는 그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으로 인한 시공을 넘는 하늘의 힘과 실제로 인해 값없이 구원에 참예케 되고 실제로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백성으로 뒤바뀌게 된 처음의 믿음에 있어 그 당사자의 믿음을 공적인 구조나 형식이나 틀이나 현장 안에서 여러 증인들 앞에서 정식으로, 공개적으로, 공식적으로 확정하는 의식이자 절차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그에 있어서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만으로, 또한 구주 예수님만으로, 그리고 성령님만으로는 가능할 수 없는 것으로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고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심으로만 가능한 것으로 다르게 표현하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대표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는 것이며, 참으로 구주 예수님께서 그렇듯 굳이 드러내시고 강조하실 정도로 세례에 있어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중요성은 크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이며 잘 통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들에서 주요 직분자를 임명할 때도 그렇게 굳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해 드러내고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역시 마찬가지인 것으로 사실상 조금만 따지고 봐도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에 있어서, 진정 일반 은총이든지 특별 은총이든지 간에 어쨌든 모든 은혜들에 있어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모든 중심, 근본, 실체이심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실제로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자체부터가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일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며 완전히 하나되어 한 뜻을 이루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으로..
실상 그러한 모든 일들 중 세례나 직분자의 임명 등이야 말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으로 인한 대표적인 역사들인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이고, 그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 구주 예수님, 성령님 각 위격에 있어 그 위치와 역할들이 반드시 함께 포함되고 완전히 조화되며 전적으로 하나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모든 사실들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며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안인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도와 그로 인한 응답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인 것임이 분명하지만 다만 그때는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모든 대속과 중보와 길이신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고, 그와 함께 직접적, 실질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성령님께서 애초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믿음이 되게 하신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시간과 계획 안에서 여러 모양의 응답과 역사와 치유와 이적과 예비들 등을 실제로 하나하나 나타나고 생생히 누리며 더 나아가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으로..
그러한 기도의 방법과 형식과 의미와 실제에 있어서는 세례나 직분 임명 때 등과 같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선포하거나 기도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는 것이며, 조금만 찾아봐도 구주 예수님께서도 기도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 간구하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그와 함께 직접적, 경험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실제와 누림들이 되게 하신 것이고, 사실 잠시만 통찰해 봐도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간구한 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상하게 되는 것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면에서 천주교에서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의 기도는 삼위일체적으로 통찰해 볼 때 무리가 될 수 있고, 마리아나 성자나 교황 등과 관련된 해석적 사안들에 있어서도 삼위일체적으로 따지고 볼 때는 이상하거나 혼란을 줄 수 있는 여지들이 많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초기부터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부분을 잃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은 귀하다 할 수 있을 것인데..
역으로 개신교를 포함해서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는 바로 그러한 천주교에서 직접적으로는 면죄부나 행위 구원적인 측면에서의 문제 제기 등과 함께 종교 개혁을 통해 새롭게 출발한 개신교는 개선되거나 장점인 부분들도 적지 않음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한 여러 배경 속에서 태생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있어서 그 중 이신칭의와 함께 구주 예수님에 대한 부분만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각되고 강조되며 치우치게 된 면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의 역사들 자체에 있어서도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구주 예수님에 대한 측면, 특히 십자가가 우선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강조되지 않으면 안 되는 면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부분, 성령님에 대한 부분, 그리고 각 위격 간의 조화와 하나되심의 부분에 있어서 결코 간과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실질적으로 개신교의 시작과 진행과 성장들에 있어서 개신교 입장에서는 천주교의 모든 부분들에 있어 개혁을 한다고 해도 결코 삼위일체적인 부분들은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사안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각보다는 개신교에서 삼위일체에 있어서의 중요와 우선과 강조 등에 있어 많이 멀어져 있다고 볼 수 있고, 교계 전반적으로 심각할 정도로 무지한 현실인 것임도 수없이 발견하게 되는 것으로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개신교에서의 종교개혁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고, 특히 구약과 신약 성경 중심의 모든 하나님의 세계, 복음의 세계, 구원의 세계, 믿음의 세계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요소와 영역인 삼위일체에 대한 부분을 등한시하게 된 적잖이 미흡하고 불완전한 개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대한 근본과 실제와 중요성과 위급성과 절대성 등을 잘 통찰하고 납득하며 회복하는데 가장 큰 중심과 우선을 둔 제 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고 절실하며 어떤 면에서는 심히 긴박함 것임이 아닐 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28:18~20)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8월 19일(월)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