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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보낸 38년
신 2:1-15
1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3 너희가 이 산을 두루 다닌 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4 너는 또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주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이 사는 지역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스스로 깊이 삼가고
5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6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8 우리가 세일 산에 거주하는 우리 동족 에서의 자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며 엘랏과 에시온 게벨 곁으로 지나 행진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지날 때에
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10 (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12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주하였는데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같았느니라)
13 이제 너희는 일어나서 세렛 시내를 건너가라 하시기로 우리가 세렛 시내를 건넜으니
14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
신 2:1-15 / [광야 여행] 그래서 우리는 가데스에서 길을 돌려 아카바만의 홍해 길을 따라 다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랫동안 세일산 일대를 맴돌고 있었는데 2) 마침내 여호와께서 내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3) `이만하면 너희가 이 산을 충분히 맴돌고 돌아다녔으니 이제는 북쪽으로 올라가거라.' 4) 그때에 주께서는 이 백성에게 하시는 명령을 내게 내리셨습니다. `너희는 세일산에 사는 에서의 후손 곧 너희 동족의 지역을 통과할 것이다. 그들이 너희를 보고 두려워할 것이니 너희가 아주 조심스럽게 통과하고 5)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과 싸우지 말아라. 그들의 땅에서는 발 디딜 만큼도 주지 않겠다. 세일산지는 내가 이미 에서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소유지로 떼어 주었기 때문이다. 6) 너희는 에돔 땅을 지나면서 아무 것도 약탈하지 말아라. 식량도 그들에게 돈을 주고 사서 먹고 우물물도 그들에게 돈을 내고 사서 마셔라.' 7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모든 일에 복을 주셔서 그대로 다 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께서는 저 드넓은 광야에서 여러분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주께서 40년 동안 여러분과 동행하시며 돌보아 주셔서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는 세일 산지에 사는 에서의 후손들, 곧 우리 동족의 땅을 지나서 북쪽으로 올라갔고 엘랏과 에시온게벨에서 사해 남단으로 통하는 저지대의 길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압 땅의 남쪽 경계선에 이르렀을 때에 9) 또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셨습니다. `너희는 모압 족속들을 공격하지도 말고 그들과 싸우지도 말아라. 내가 그들의 땅은 조금도 너희에게 떼어 주지 않겠다. 모압 족속은 롯의 후손들인데 나는 이미 그들에게 아르 지역을 영원한 소유지로 떼어 주었기 때문이다.' 10) 모압 땅에는 본래 엠 족속이 살았습니다. 그들은 크고 강한 백성이었으며 아낙 족속처럼 키가 엄청나게 큰 거인들이었습니다. 11) 그들도 아낙 족속처럼 ㄱ) 거인족으로 소문난 사람들이었는데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엠 족속이라고 불렀습니다. (ㄱ. 가나안 땅 원주민으로 라파 거인족을 가리킨다) 12) 세일 산지에도 본래는 ㄴ) 호르 족속이 살았으나 에서의 후손들이 그들을 쫓아내어 멸종시키고 대신 그 땅을 차지하여 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에서 그들이 원주민들을 내쫓고 산 것과 똑같은 일들입니다. (ㄴ. 훌족) 13) 마침내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기를 `이제는 세렛 시내를 건너 모압 땅으로 들어가거라.' 하셔서 우리가 그대로 하였습니다. 14) 우리가 가데스바네아를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 38년이 지났습니다. 그 당시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을 원망한 군인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내리신 형벌을 받고 저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15)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을 내리치셔서 우리들의 부대 가운데에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그들을 모두 제거하셨습니다.
모세는 에돔과 모압 땅을 지났을 때를 회상합니다. 이 문맥의 핵심 구절은 “주지 아니하리니”입니다(5, 9, 19).
에돔과 모압 땅을 지났을 때를 회상함(1-9) 가데스 바네아에서 패배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들어가 세일 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세일 산은 에돔의 조상인 에서가 야곱과 이별하고 이주한 곳이며, 그 자손들이 정착한 곳입니다(창 36:6-8). 에돔의 큰 길로 지나게 해 달라는 모세의 요구를 에돔 왕이 거절하자(민 20:14-21), 이스라엘 백성은 지름길을 포기하고 먼 길로 우회합니다. 모세는 그때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회상합니다. 그 명령(2-6)은 “에돔 사람들을 두렵게 하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 말고, 어떠한 약탈행위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5). 오랜 광야생활로 지친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보고 군침을 삼킬 법하였지만, 순종하므로 그 땅을 우회하여 모압 광야 길로 들어섭니다. 이때에 모세는 그들에게 주신 여호와의 위로의 말씀을 회상합니다(7). 곧 “광야 생활의 고단함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또한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기업이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모세는 모압 땅을 지났을 때를 회상합니다(9). 에돔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모압을 괴롭히지 말고 그와 싸우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자손들이기 때문입니다(창 19:36-38). 하나님의 복은 조급함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림으로 얻는 것입니다.
모압과 에돔의 역사(10-12) 이 구절은 모압과 에돔의 정착의 역사입니다. 모압 이전의 주민은 에밈이고, 그들은 아낙 족속 같이 거인족이며, 에돔의 땅 세일의 원주민은 호리 사람입니다. 두 민족의 공통점은 자기보다 강한 민족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실은 가나안 정복사의 모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뻐하시는 자, 곧 이스라엘에게 주실 것입니다.
삼십팔 년(13-15) 이스라엘이 모압 남부 경계에 있던 세렛 시내를 건넜는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그때에 출애굽 1세대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습니다. 이는 1세대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적용: 내 것이 아닌 것을 조급하게 취하려 한 적이 있었는지 지난 과거를 회상해 보세요.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 앞에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사라지게 될 때가 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땅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오랜 세월 방황하게 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명령이라면 우리는 여러가지 상황과 환경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어가는 자가 될 것입니다.
< 설 교 >
그 시대에 멸망한 백성
신 2:1-15, 사도행전 3:22-24 / 이성희 목사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루터가 목숨을 담보로 하는 개혁 95개 조항을 비텐베리크 교회 정문에 붙이고 결연한 자세로 성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날을 기념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 중심의 삶, 날마다 새롭게 개혁되는 우리교회,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혁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가나안을 향하여,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진행적 삶이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나는 기원전 8세기 아밋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엘리사 이후 아모스와 호세아 선지자 직전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에 앗수르는 항상 이스라엘에게 위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원수 같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적극 거부하여 반대방향으로 갔습니다.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남 유다의 욥바까지 가서 거기에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왜요? 앗수르의 니느웨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셨다가 고기가 토하여 나와서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외치게 하십니다. 요나서 마지막 장면에는 박 넝쿨 얘기가 나옵니다. 요나는 박 넝쿨 밑 그늘에서 쉬고 있었는데 작은 벌레가 나와서 넝쿨을 갉아 먹었습니다. 그늘이 없어진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죽는 것이 내게 낫겠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네가 수고도 아니 한 박 넝쿨을 아꼈거든,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 명과 가축을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세요. 요나가 회개시킨 앗수르에 의해 북 이스라엘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나님께 대한 일반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멸망시키는 이스라엘의 신이라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죽이라”, “돌로 치라”, “삼사 대까지 멸하리라”고 하신 사랑이 아닌 살인의 하나님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요나의 교훈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한 영혼까지도 사랑하십니다. 마태복은 18:14은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뜻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입니다”(요12:47).
복음의 요약이며 루터가 ‘작은 복음’이라고 한 요한복음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왜 멸망하고, 왜 심판 당하고, 왜 죽음을 당합니까?
인간이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인간이 멸망당하는 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사람 탓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오해는 그 멸망이 하나님의 탓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거역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불순종의 가장 확실한 징후는 불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과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하고 원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불평과 원망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며, 어떤 이는 이런 것들을 망국 백성의 근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는 “세상은 술 취한 농부를 닮았다. 말안장 한쪽으로 올려놓으면 곧 다른 한쪽으로 넘어가 버리고 만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육체는 항상 술취한 사람처럼 어는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입니다. 탕자 같은 명백한 불순종이 아니면 장자 같은 위선적 순종, 둘 중의 한쪽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나안에 염려하지 말고 들어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는 직선거리가 약 130km입니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38년 동안을 헤매었습니다. 그들의 오랜 세월의 유랑과 고난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 때문입니다. 그들이 방황한 것은 하나님의 징벌 때문이었음을 명백히 상기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잘 듣고 천국을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순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백성들이 가나안 목전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신명기 2:14에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라고 합니다.
민수기 1장에 보면 출애굽 2년 2월1일 시내광야에서 제1차 인구조사 결과 20세 이상으로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자가 603,55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정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이 불순종의 결과로 광야에서 38년을 헤매다 다 죽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에 정탐꾼을 보내어 미리 약속의 땅을 보게 하시고 가나안으로 진격하여 들어가라고 하셨지만 이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한 죄를 지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20세 이상 된 사람들 즉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은 전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하나님이 살게 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민수기 14:28-3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생명이고, 불순종은 죽음입니다.
베드로전서 2:6에는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8절에는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라고 합니다. 6절의 ‘믿는다’와 8절의 ‘불순종하다’는 서로 반대의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믿는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탄의 시험에는 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우리 안에서 욕구를 일으킵니다. 둘째는 의심을 하게 합니다. 셋째는 거짓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마지막 넷째는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는 법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까지는 일주일 만하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38년을 헤맸습니다. 이 말은 출애굽 1세대들은 목적지인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못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출애굽한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목적 앞에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억울한 일이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적지가 눈앞에 있을 때 잘해야 목적을 성취합니다. 어느 보고를 보니 장거리 운전을 하는 중에 가장 사고가 많이 날 때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5분 전이라고 합니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하게 되면 마음이 해이해져서 사고가 많이 난다고 합니다. 목적지에 안착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인터넷의 어느 동영상을 보니 자전거경기를 하는데 선수에 있던 선수가 결승점을 약간 앞두고 일등을 했다고 두 팔을 들고 환호하다가 자전거가 삐끗하며 흔들려 넘어졌습니다. 2등으로 오던 선수가 앞서 가니 눈앞에서 자전거를 다시 타려다 타지 못하고 끌고 뛰어 들어갔는데 2등을 했습니다. 눈앞에서 놓친 우승이었습니다.
출애굽의 목적지는 광야가 아닌 가나안입니다. 광야에서 죽으면 허사입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목적을 눈앞에 두고 이루지 못하면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1952년 7월 4일 수영선수 플로렌스 채드윅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카탈리나섬에서 해안까지 수영으로 도전하였습니다. 그녀는 영국 해협을 횡단한 최초의 여성입니다. 강도 높은 훈련 끝에 도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했고, 차가운 물과 거친 파도에 시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15시간 55분간의 수영 끝에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포기한 후에 기자들이 질문하였습니다. “포기할 당시 도착 예정이던 해안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까?” “나는 목표 지점을 볼 수 없었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해안만 보였더라도 끝까지 해냈을 겁니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고 그녀의 도전은 실패하였던 것입니다. 두 달 후 9월에 그녀는 다시 도전하여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여전히 안개도 파도도 방해가 되었지만 끝까지 도전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성공 후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목표 지점을 마음속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끝까지 헤엄칠 수 있었습니다.” 목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목적지를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절대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도전해야 합니다.
히말라야 고산을 등정하는 등산가들이 악천후로 말미암아 목표를 눈앞에 두고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목표를 눈앞에 두고 실패한 것입니다. 물론 자연조건으로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신의 부족이나 준비 부족으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므로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이 군관학교를 다닐 때에 교관이 물었습니다. “같은 병력과 같은 무기와 같은 전력을 가지고 있는 두 군대가 전투한다면 어떤 군대가 이기겠는가?”. 그 때 나폴레옹은 “최후의 5분을 잘 싸운 군대가 이길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끝까지 우리의 목적지인 하늘나라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절대 불순종하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순종하면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가야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농구경기에서는 버저비터로 승리가 바뀔 수가 있습니다. 축구에서는 인저리타임에 골을 넣기도 합니다. 골프나 다른 게임에서 서든데쓰라는 제도도 있습니다. 게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끝내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가나안인 천국을 향해 가는 자세입니다.
둘째, 불순종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치셔서 멸망하게 하셨습니다.
신명기 2:15에는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고 합니다. 출애굽 1세대는 38년 동안 광야를 헤매다 모두 죽었습니다. 그들은 늙어서 죽은 자연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징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애굽하게 하신 백성을 이유 없이 죽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가나안을 주시려고 출애굽하게 하셨는데 광야에서 죽이겠습니까? 순종하지 않은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느 부부가 여행 도중에 남편 생일을 맞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여보, 미안해요. 내가 선물 준비를 못했네요. 깜빡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남편은 “괜찮아, 여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 존중해 주는 것, 내게 순종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아내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니요. 여보, 내가 그냥 선물 사 드릴께요” 하더랍니다. 순종은 누구에게나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도 사람에게도 순종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의 불순종을 보세요. 그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영적 자살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결국 하나님이 손보십니다. 하나님이 멸망하게 하십니다.
불순종은 마귀의 특허입니다.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의 자녀는 사탄에게 순종하고, 하나님께는 불순종합니다. 에베소서 2:2에는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사탄의 밥이 됩니다.
가지치기를 하는 시기의 길이와 그 정도와 깊이는 다양하지만 가지치기는 영원히 하지는 않습니다. 쳐야 풍성하게 되고,
쳐야 열매를 많이 맺고, 쳐야 나무가 튼튼해집니다. 하나님이 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셔야 풍성하게 되고, 열매를 많이 맺고, 튼튼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세게 때리다’(smite)란 말에서 ‘은 세공인’(silversmith)이라는 단어의 일부인 ‘대장장이’(smith)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장인은 스스로 만족하게 완성됐다고 생각할 때까지 두들깁니다. 자기 얼굴을 비추어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자기가 만든 것을 문질러 윤을 냅니다. 두드리는 것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윤을 내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를 아름답게 짓기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마음에 들 때까지 두드리십니다.
에베소서 5:6에는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사람은 인간에게 온갖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부모를 거역합니다. 살인합니다. 간음합니다. 도둑질합니다. 거짓 증거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계명을 어기면 인간에 대한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때리셔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순종의 아들들에게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나안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이미 약속하신 땅입니다. 이 약속을 절대 변치 않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선악과를 동산 가운데 두신 목적이 그것을 따먹고 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따먹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욥기 5:17에는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 자신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을 업신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매 맞지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 안에서 흥하고, 복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결 론
목사님이 천국이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설교를 듣던 청중 가운데 한 분이 “목사님은 천국에 가보지도 않으셨는데 어떻게 그렇게 천국이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쉽게 알 수 있지요”. “어떻게 쉽게 알 수 있습니까?” “천국에 간 사람 가운데 지금까지 한 사람도 돌아온 사람이 없잖아요. 좋으니까 안 돌아왔지요”.
천국은 온갖 좋은 것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저의 선친께서 병상에 계실 때에 “천국에 갔다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떻습디까?” 라고 물었더니 “너무 좋더라”고 하셨습니다. 너무 좋은 것은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데 얼마나 좋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선친께서는 “너무 좋아서 말로 다 형언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갈 천국은 이렇게 좋은 곳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 우리의 천국을 눈앞에서 잃지 말고,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 천국을 얻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시련중에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신 2:1-7 / 김광찬 목사
시험은 성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이 편안한 것을 좋아하고,선보다는 악을 즐기려고 하며,진리에 순종하기 보다는 악 인줄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라가며 그렇게해서는 않된다는 사실은 잘 알지만 절제하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이 인간이다.
물론 성도라하여 이런 사실과는 다른 삶을사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 못하다. 조금 절제를 할지는 모르지만 결국은 같은 삶을 살고있다. 그러나 성도가 일반인과 다른 점은 성도가 이땅에 살면서 시험을 통해 자기가 가지고있던 것을 잃게되면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절망하거나 원통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며 그 결과 자기가 원하는 최고의 것은 하나님임을 알게된다는 것이다.이런 사실은 긴 기간 시험을 통해 하나님 알기를 원하는 것이 단기간에 이루어 지는것이 아니고 오랜 시간 인내해야만 얻을 수 있음도 깨닫게 된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깨달음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이 땅에서 원하는 것의 정반대 상황을 이용하시어 우리를 훈련시키신다.이런 일들은 아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고 실제로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시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더 강해질 수 밖에 없다.그러므로 시험을 받으면서 넘어지고 애통해하며 부끄럽지만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자.이 사실은 성도의 삶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사도들은 자기들의 서신을 통해 이것을 강조한다(약 1:2, 벧전 1:6-7. 롬 8:28).
특히 베드로는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말한다(벧전 3:!7).
믿는 자는 선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되어있어야 한다.
믿는자의 선이란 세상 사람같이 잘 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이땅의 삶을 하나님 뜻대로 살며 죽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선을 이루는데 지장이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선을 이루어야 한다. 고난의 쓴잔을 마시고서라도 선을 이룰 수 있다면 정말 달게 마셔야 한다.
그러나 이 시험을 통과하기는 결코 쉽지않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상태에 너무나도 미달되자 주시는 시련에 대해 말하며 그시련 기간 중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보호하시고 그 시련이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본문에는 그들이 왜 이런 시련이 왔고 어떤 고난을 받았으며 그 기간이 어느 정도되는지에 대한 말들이 없기 때문에 간단하게 생각할 수 도있으나 이 시련의 기간은 정말로 오랜 기간이었다.이 사건은 민13~14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곳을 보면 호렙산을 출발하여 가나안으로 가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러 적의 성을 정탐하고 정복하자고 제의하여 12명의 정탐꾼을 뽑아 적의 성으로 잠입하여 정탐하게 된다,그성은 모든 것이 풍족하였다.그러나 그성의 백성들은 거대한 인종이었다.자기들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보였다.또한 성이 너무도 튼튼해 정복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그래서 돌아온 정탐꾼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만 제외하고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땅이라고 결과를 보고한다.이에 백성들이 동요되어 종으로있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행동을 한다.이에 하나님이 진노하시여 그들을 다 없애고 모세의 자손으로 다시 민족을 만들어 새로운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겠다고 말씀하시나 모세는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드려 결국 하나님의 뜻을 꺽고 용서를 받는다.그러나 하나님은 이 민족이 성장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시여 그들을 다시 왔던 광야로 내모시고 38년을 방황하게 하시며 당시 성인이던 모든 자들은 갈렙과 여호수아만 빼고 모두 죽도록 하신다.
38년의 광야생활,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그러나 이 시련 기간에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도와주셨고 결국 시련의 때가 끝난다.징계하셔도 버리지는 않으신다.도리여 강하게 만드신다.그래서 시련이 당하는 당시에는 어려운 것같아도 엄청난 진전을 우리에게 주므로 감사함으로 받아야한다.
본문의 사건을 통하여 시험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고,시련중인 자가 어떤 자세로 시험기간을 잘 통과할 수 있을까 방법을 배워보며 주시는 은혜를 받자.
1. 시험은 반드시 있고 처절하다.(1)
간단하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이 받은 시련은 엄청난 것이었다.시험의 정도가 14~15절에 기록되어있다.'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 팔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대로 진 중에서 다 멸절되었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 중에서 멸하신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14~15)
하나님은 일단 시험을 하시기로 하셨으면 반드시 실행하신다.그것도 철저히 하신다.마치 정금을 얻기 위해 광석을 완전히 녹여야 하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히 변화될 때까지 계속 하신다.그러므로 시험은 절대 단 기간에 끝날 수 가없다.또한 적당히하다 말 수도 없다.온전해질 때까지는 계속된다.욥은 하나님께 그가 시험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맞는 말일 수 도있다.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은 꼭 받아야할 이유가 있어서 주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임의로 줄 수 도있다는 사실을 욥이 알 때까지 계속된다.욥은 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한다. 그렇다! 시련은 꼭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받는 것만은 아닐 경우도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6)
욥은 고난받을 죄가 있어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다.그러나 그는 알지 못하여 하나님께 무례한 언사들을 사용하였다. 이 말을 회개하는 것이다. 비록 몸의 고난은 계속되고 있지만(티끌과 잿더미에 앉아)깨달음을 얻고 하나님을 대면한 후 찾아온 마음의 평안은 무엇이라 표현할 수가 없다.모든 의심과 고통이 한 순간에 다 해결되었다.샘솟듯 마음에 기쁨과 평안이 찾아든다.
모든 재산, 자녀들, 미치도록 힘든 병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
고난은 하나님의 영역이시다.자기 의로 따질 영역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 지기만을 기도할 따름이다.
2. 시련중에도 계속 돌보아 주신다.(7)
시험중이라고 하나님이 우리을 외면하시는 것은 아니다.
훈련을 시키시면서도 계속 우리를 돌보고 계신다.
백성들의 불 순종은 극에 달했지만 그래서 혹독한 훈련이 필요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에게는 선을 베푸시고 계신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너무나도 실망시켜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광야생할을 하면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광야생활 내내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시고 계신다.
우리도 이 사실을 깊이 마음속에 간직하자.하나님이 시험을 통해 나를 단련시키시고 계시나,이 순간도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도와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3. 시련중일지라도 신실한 삶을 살아야한다(4-6).
시험을 주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그분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도 한번 준 땅은 그들의 것으로 인정하신다.기분에 따라서 주었다가 뺏는 분이 아니시다.이런 분을 믿는 우리들은 그분의 성품을 닮아야한다.비록 시련중일지라도 아무리 어려움중일지라 해도 그분과 같은 신실함을 유지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에돔땅으로 거쳐 나아가야 한다.그땅을 빼앗아서도 않되며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아서도 않된다.시련으로 아무리 어려운 삶이라 해도 위법을 한다든지 남의 것을 임으로 취하는 행동이 있어서는 않된다.어려워도 신실하게 살아야한다.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아마 시험의 때도 줄여주시지 않겠는가?
4. 시련의 끝은 반드시 온다.(2~3)
'여호와께서 내게 고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산을 두루 행한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2~3)
너무 오랜 세월 극심한 고통이지만 회복되는 날은 반드시 오고 전보다 더 큰 회복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향하여 시련이 끝났음을 선포하신다.('북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를 계속해서 책망하시지는 않으신다.시험은 정한 때가있다.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세우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고 계시는 것이다.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시련의 기간도 끝나게 하신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시103:10)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시련이 어려울지라도 소망을 버리지말고 그때를 기다리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그렇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하여 시험을 주신다.그러나 그분도 육체로 계실때 시험을 받은 일이 있으시다.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육체의 약함을 잘 알고 계신다.그런 그분을 진정으로 의지하면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사 시련의 때를 잘 지내게 도와주신다.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신명기 2:1-7 / 피영민 목사
신명기 1~4장은 고대 언약 문서의 역사적 서언에 해당하는 부분인데, 지난 40년의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40년 동안 숱한 사건들이 있었지만, 모세는 여기서 두 가지 사건만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출애굽 제1세대의 가데스 바네아에서 불순종한 사건, 두 번째 사건은 출애굽 제2세대가 성공했던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물리쳐 승리하고 요단 동편의 땅을 차지하게 된 순종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하고 성공한 시간차는 38년입니다. 그간의 방황에 대한 기록은 본문에 단 한 구절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7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우 놀라운 말씀입니다. 광야 38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복을 누린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의 징벌을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징벌이 아니라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0년 동안 너희에게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성도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갈지라도 하나님이 늘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분임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분임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친히 나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족함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가 들으면 정신이상자로 알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목자 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성경 전체에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신다는 내용이 참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세 구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Ⅰ.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는 분이시다(신 2:7)
광야 40년 중 38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벌을 받은 세월입니다. 그런데도 7절 전반절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복을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징벌 중에도 복을 베풀어 주시는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38년 동안 베풀어 주신 복들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험악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큰 고통 중에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도의 사정을 다 알고 계실까요? 물론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바쁘신 하나님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의 사정까지 다 아실 수 있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27절에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의 원통한 것을 하나님이 몰라주신다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정을 다 아시고 원통한 것도 다 아시고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어려움을 다 알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광야 생활 중에도 진 안에는 성막이 있고 성막 안에는 지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늘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늘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토록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성도들과 거처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 38년 동안 벌을 받고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정을 다 알고 이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제가 책을 읽다가 이런 요지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가 직업이 군인이었는데, 아들이 20대가 되어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탕하게 사고를 치고 다녀서 아버지가 아들을 총으로 쏴 죽여야겠다고 결단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집에서 죽일 수 없으니 지리산에 가서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들과 함께 지리산을 올라가는데, 한참을 올라가니 다리가 아파 잠시 벤치에 앉아 쉬었답니다. 그런데 아들이 대뜸 이런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제가 지금 스무 살이 되도록 아버지와 등산해 보는 것 처음이네요. 아버지와 등산해 보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매일 나라를 지킨다는 핑계로 아들과 단 한 번도 등산을 해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된 것은 자신에게도 큰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 후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한 후 함께 하산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벌을 받게 되더라도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면 그것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을 잘 아시고 이들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는 중에도 늘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넉넉하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내주셔서 낮의 해가 상치 못하고 밤의 달도 해치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천사의 음식인 만나를 내려주셨고, 메추라기 떼를 보내어 고기도 실컷 먹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물이 없어 극심한 갈증에 허덕일 때 반석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수많은 백성들이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고, 옷이나 신발도 해어지지 않게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장 21절에 “사십 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세탁소, 양장점, 제화점, 구두 수선점이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몸이 점점 커져도 옷이 작아서 입질 못하거나 신발이 작아서 버려야 하는 일들이 없었습니다. 발이 커지면 신발도 발 사이즈에 맞도록 늘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전능한 분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차원에서 전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전능한 능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돈도 넉넉히 주셨습니다. 광야의 마지막 40년째 되던 해 두 번째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해서 에돔 땅 세일산과 모압 땅을 지나고자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돈을 주고 음식을 사 먹고 물을 사 마셨습니다. 5~6절에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너희는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으며 돈으로 그들에게서 물을 사서 마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돈을 주셨던 것입니다. 만나를 주식으로 공급해 주시고, 나머지 음식들은 돈을 주어 먹고 마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각 개인에게 부족함 없는 은혜를 공급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장 7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이스라엘 무리에게 공급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이 각 사람에게 임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신 하나님의 복이 불특정 다수에게 두루뭉술하게 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 사람, 개개인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 같이 허물 많은 사람들에게도 부족함 없이 은혜를 주시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갖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다 실패한 발람이라는 거짓 선지자는 민수기 23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은 성도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옷을 입혀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비록 죄와 허물이 있더라도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선언하신대로 광야에서 살다가 죽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족함 없이 의식주를 다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4장에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 모였고,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면 약 2만 명이 넘는 수많은 인파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몰려들었습니다. 저는 궁금한 것이 예수님이 이 당시 마이크 시스템 없이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아마 기적적으로 예수님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았다면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해가 저물어 저녁 시간 될 때까지 열정적으로 설교하셨는데 군중들은 허기졌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빈들이었고,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건의했습니다. “예수님, 이제 군중들을 해산시키시고 마을로 들어가 자기 돈으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태복음 14장 1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전능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 단순한 믿음을 가진 안드레가 한 아이의 도시락을 예수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도시락 안에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도시락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니 그 많은 군중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엄청난 기적의 도시락이 되었습니다. 남은 것을 모으니 열 두 광주리에 담길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더라도 하나님이 부족함 없이 공급해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목회자들이 인생길에 가장 어려울 때가 신학교를 막 졸업했을 때입니다.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마치면 지역 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녹록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졸업했을 때 대흥침례교회 전도사 봉급이 5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 유치원 한 달 양육비가 5만원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참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부족함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그 비용도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지금 이 자리에서 설교할 수 있는 이 순간까지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Ⅱ. 이스라엘 군사를 축나지 않게 하신 하나님(민 31:49)
민수기 31장 49절에 “그에게 고하되 당신의 종들의 영솔한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쟁에서 축나는 군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5장에는 유명한 싯딤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발람의 계교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 중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의 미인계에 넘어가 우상숭배와 간음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장소가 싯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염병으로 인해 24,000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민수기 31장에 보면 미디안 사람들이 너희에게 못된 짓을 했으니 전쟁을 통해 이들을 죽이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지파 별로 1,000명씩 뽑아 12,000명이 전쟁에 출전하게 됩니다.
이들이 전쟁에 나가는데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나팔을 주어 불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미디안 연합군의 다섯 왕을 죽이고 거짓 선지자 발람도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리품도 취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군사들은 진 밖에 일주일 동안 격리되었다가 다시 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31장 49절은 이 상황에 대한 구절입니다. 아무도 축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전쟁에 참전한 12,000명이 모두 살아 돌아왔습니다. 단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의 속전으로 전리품으로 얻은 것 중 금 6,750세겔을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돈으로 환산하면 약 90억 정도 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12,000명의 군인이 단 한 사람의 축나는 일 없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리 수월한 전쟁이라 할지라도 아군의 희생이 조금은 있게 마련인데, 한 사람의 목숨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보호인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민수기 10장 9절에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 시 나팔을 불 때 승리를 주시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전사자가 나지 않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느하스가 나팔을 울려 불었을 때 한 사람도 죽지 않고 큰 승리를 거두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했고, 더불어 자신들이 행할 부분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족함 없는 은혜를 공급해 주실 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안전운전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안전벨트를 착용해야 합니다. 중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병원에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실 때 의사를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만 하지 말고 약을 사다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사를 두고 마귀라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병에 걸렸을 때 의사를 찾아 가는 것을 믿음이 없는 행위라고 폄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면 성실히 사업을 경영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기도만 한다고 사업이 흥왕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은 기도하며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고 좋은 대학에 합격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적인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축나는 일이 없이 모두 다 천국에 들어가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택하여 맡겨 주신 영혼들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모두 영생을 얻게 하시고 천국에 거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천국에서 축나는 일이 없습니다. 물질에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시고 영적으로도 부족함이 없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항상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Ⅲ. 부족함 없이 채워주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아야 할 성도들(눅 22:35)
성도의 말에는 불평과 불만이 없어야 합니다. 설령 내게 부족함이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을지라도 부족함이 있다고 고백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잃었습니까? 굶어죽기를 합니까? 얼어 죽습니까? 자동차가 없습니까? 특별히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부족함 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35절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돈도 주지 않으셨고, 신발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함이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제자들은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가령 은퇴 이후 물 좋고 공기 좋고 산 좋고 사람 살기 좋은 한적한 곳으로 이사해 살고자 계획을 세우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산이 좋아봤자 길어야 한 달입니다.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계속 흘러가기만 하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좋아도 하루 이틀인 것입니다.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사람들 인품이 좋다는 말도 옛 말인 것 같습니다. 하수구를 왜 이쪽으로 배출시키느냐며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다퉈서 살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해서 갔던 사람들이 다시 집을 팔고 도시로 나와 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 동안 잔디를 가꿔 볼 기회가 있었는데, 얼마나 힘이 드는지 제가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아주 결심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은퇴 이후에도 교회 가까운 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배당에 나와 엎드려 기도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는 것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교회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가서 새벽예배 참석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편안하게 예배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노후를 준비하는 것은 성도의 바른 삶의 자세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유학을 가더라도 무조건 명망이 높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 보다는 자녀들이 건강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복음적인 교회가 있는 지역에 속한 대학인지를 고려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주일성수하면서 하는 성도와 그렇게 하지 않고 하는 성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주일성수를 한두 번 포기하기 시작하면 돈을 벌어도 헛일이 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차라리 주일날 문을 열지 않은 것만큼이나 수익이 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는 불신자들의 삶의 방식과 확연한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정신 나간 사람입니까? 그가 이런 고백을 드릴 만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었습니까?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시편 34편 9~10절에도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시편 84편 11절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에 넉넉하게 채우시고 아끼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 불평과 불만거리가 많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말씀을 들으시고 결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앞으로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결 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부족함 없이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다는 진리는 이미 입증된 진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200만 명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며 매일 같이 이 진리를 입증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더 이상 입증할 필요가 없는 검증된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시고 항상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학교로의 초대
신 2:1-15 / 박봉수 목사(상도중앙교회)
성경을 보면 ‘광야’가 참 많이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여정을 밟은 곳이 이 광야입니다. 저들이 홍해를 건넌 뒤 여러 광야들을 지났습니다. 예를 들어 수르광야, 신광야, 바란광야 그리고 시내광야입니다. 다음으로 가나안 땅 안에도 광야가 있습니다. 바로 유대광야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신 곳이고, 다윗이 도피생활을 했던 곳이고, 그리고 세례요한이 사역했던 곳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광야들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40년을 살았던 미디안광야와 바울이 3년 훈련을 받았던 아라비아광야 등입니다.
그러면 이 광야는 어떤 곳일까요? 글자 그대로 ‘넓고 거친 들’입니다. 일반적으로 광야는 연평균 강수량이 200미리 이하입니다. 물이 없어서 가축을 기르기도 힘들고, 농사는 더더욱 힘든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살지 못하고 버려진 곳입니다. 게다가 길을 찾기도 힘들고, 뜨거운 태양을 견디기가 힘들고, 일교차가 커서 특별한 사람들 아니고는 여행조차도 힘든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 광야는 특별한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 광야를 히브리어로 ‘미드바르’(םדבר)라고 합니다. 이 말에서 ‘미’는 “~으로부터”라는 뜻이고, ‘드바르’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어로 볼 때 글자 그대로의 광야의 뜻은 말씀이 나오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땅’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참 중요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광야가 말씀이 들려오는 곳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은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요 그래서 버려진 땅으로 생각했지만,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곳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땅 다시 말해서 거룩한 땅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출 3:5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쯤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려 하오니 가도록 허락하소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려고 했던 곳이 광야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광야로 사흘 길이나 가는 저 깊은 광야로 가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제사드리며 주의 말씀을 듣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른 곳입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쓸모없는 땅이고 가서는 안 되는 땅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거룩한 땅이고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가야 하는 땅입니다.
신명기는 모세가 40년 광야생활을 마감할 즈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유언처럼 마지막으로 남기는 설교를 모은 책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지나온 광야생활을 회상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광야를 지나며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를 되돌아보며 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백성에게 광야생활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광야로 보내셨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돌려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광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세는 이스라엘백성이 가데스바네아라는 곳에서 겪었던 일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도대체 이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광야로 내보내신 것일까요?
민 14장에 이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저들이 출애굽하여 시내광야에서 1년을 머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셔서 출애굽 제 2년 2월 20일에 시내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땅 문턱인 가데스바네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저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정탐꾼을 들여보내 가나안땅의 상황을 살펴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12명중 10명이나 되는 정탐꾼들의 보고가 부정적입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사람들이 너무나도 막강해서 자기들은 도저히 정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이 소식을 듣고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처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백성의 여정을 뒤로 되돌리셨습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으로 가야할 이스라엘백성이 다시 광야로 나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광야에서 38년을 더 방황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백성을 광야로 보내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이스라엘백성을 더 훈련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모세는 신 8:2에서 이점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를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게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광야학교’에 입학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백성으로 더 철저하게 훈련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광야학교]라는 책은 고영완 목사라는 분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일종의 간증집입니다. 이 책에는 이 분이 겪은 고난 이야기가 절절하게 쓰여 있습니다. 어머니, 아내, 그리고 아들과 사별하는 견디기 힘든 순간들, 그리고 개척교회를 하며 겪었던 그 힘든 이야기들이 숨 막히도록 쓰여 있습니다.
이분은 그 어렵고 힘든 순간을 지나며 참 많이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하나님께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항변도 해 보았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던 어느 순간에 자기가 지금 광야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으며 성경과 씨름을 시작했답니다.
결국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 안에서 답을 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광야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에 감사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광야 같은 세월을 겪게 됩니다. 그 때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남다르게 재수 없는 일이고, 팔자가 사나워서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학교에 들여보내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광야 같은 상황 가운데 있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왜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주시냐고 따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서 이 고통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부르짖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지금 광야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광야학교로 초대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하셨다.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40년 동안 광야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하면서 온 몸으로 체험하며 깨닫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광야학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배워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실제로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의 명을 거역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가나안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 보면 자기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기들 힘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셔서 애굽의 군대를 물리치고 출애굽한 바가 있습니다. 당시 애굽의 군대는 가나안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입니다. 결코 자기들 힘으로 맞설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그런 군대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물리쳤던 이스라엘백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나안 사람이 두려워서 가나안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40년 광야생활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광야학교에서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됐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수 없이 듣고 또 나름대로 믿는다고 고백도 참 많이 해왔습니다. 그러나 내 앞에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닥치면 믿음이 흔들립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주저합니다.
우리가 다시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눠온 가까운 친구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미국과 영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지금 신학교교수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함께 기도했기 때문에 유학생활하면 이 분이 겪었던 일들을 잘 압니다. 한국을 떠날 때 가진 돈이 별로 없었습니다. 학비내고 학교 앞 작은 집을 얻고 나니 통장에 잔고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식구가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더랍니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에 응답하시기 시작하시더랍니다. 뜻하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내셔서 도우셨고, 뜻하지 않았던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벌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7년 유학생활에 돈이 없어서 굶거나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한 것이 없었답니다.
이분이 돌아와서 제게 하는 말이 유학생활 내내 광야를 깊이 묵상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제 저 천국 갈 때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점이랍니다. 그래서 이제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됐고, 또 어떤 일을 명하시든지 순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시더라도 아멘하고 순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내보내신다.
다시 본문 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이스라엘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백성이 짧지 않은 세월인 40년을 광야에서 보냈지만 결국은 광야에서 나오게 됐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광야에서 나오게 하십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것도 아닙니다. 이 광야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움 받는 곳이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훈련받는 곳입니다. 마치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면 학교를 졸업하듯이 광야는 훈련기간이 지나고 나면 나오게 되는 곳입니다.
유대인의 구약성경해설집인 미드라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반지가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반지 세공사를 불러 말했다.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하나 만들되, 내가 승리를 거두고 너무 기쁠 때에는 교만하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에 빠지고 시련에 처했을 때엔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넣어라."
세공사는 반지를 만든 후 좀처럼 다윗이 말한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좋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지혜의 왕 솔로몬을 찾아갔다. "왕자시여, 다윗 왕께서 기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망에 빠졌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반지에 새기라고 하시는데 어떤 글귀면 좋겠나이까?" 솔로몬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도 지나갈 것입니다. 결국은 코로나19사태도 끝날 때가 올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각자가 겪고 있는 힘든 시절도 끝날 때가 올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까지 이 광야에 머무를 것이 아니고, 이 광야를 벗어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우리를 이 광야에서 내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광야를 지나면서 무엇을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광야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나간 뒤 우리 삶이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다윗왕과 그 아들 솔로몬왕을 비교해 보곤 합니다. 다윗왕은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기간 내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비록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지만 바로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다릅니다. 왕에 올라 자리를 잡고 왕권이 공고해 지자 이방여인과 결혼하며 타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유언대로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바쳤지만 또한 이방여인들이 가지고 들어온 이방신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이후 나라가 분열되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습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광야학교 여부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광야에서 10년여 도망자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고, 생존의 위기도 넘겨야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지켜주신 뼈저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솔로몬은 왕자로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광야를 겪지 못한 채 왕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광야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학교 출신들은 그 믿음이 다릅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코로나19사태가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광야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광야학교로 초대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들을 겪게 하셨습니다.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때 우리가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기를 겪을 때 광야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광야를 학교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더욱 성장해 가시기 바랍니다.
특별은총과 일반은총
신 2:1-9 / 피영민 목사
신명기 1장의 장소와 2장의 장소가 똑같습니다. 가데스바네아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1장과 2장 사이에는 광야 38년의 세월이 과감하게 생략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불신앙으로 인한 불순종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38년을 헤맨 후에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기 때문에 신명기 1장과 2장은 장소가 같지만 시간은 무려 38년이 흘러 간 것입니다.
모세는 38년을 헤맨 사실을 단지 신명기 2장 3절의 말씀으로 간단히 요약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산을 두루 행한지 오래니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38년 동안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빙빙 돌기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아무리 앞을 향해 열심히 가도 결국은 제자리에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었으므로 이제는 돌이켜서 북으로 나아가라.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할 때가 됐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신명기 2장은 좀 이상합니다.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벌을 받고 있는 38년의 세월은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불신앙으로 인해 벌 받은 세월입니다. 그런데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년 동안을 너와 함께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신 2:7)고 또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벌 받는 시절에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았다”고 하셨습니다. ‘알았다(watch)’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방황하는 것을 위에서 다 보고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혹시 잘못 가지는 않는지, 혹시 다치지는 않는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일일이 관찰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먹을 것이 부족하면 먹을 것을 주시고 마실 것이 부족하면 마실 것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벌을 주시면서 또 복도 더불어 주셨습니다.
자녀를 기르면서 자식이 가끔 잘못하면 체벌할 때가 있습니다. 벌주거나 체벌 하면 자식들은 울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밥도 먹지 않습니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가 제대로 있는지 살펴보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문을 살짝 열고 넣어줍니다. 자녀를 때렸지만 마음이 더 속상한 것은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신앙으로 권징하시면서도 이와 같이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벌주시는 가운데에도 복을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징계하실 때 한계를 가지고 징계하십니다. 때가 되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악명 높은 아모리 백성 산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지만, 신명기 2장에서는 에돔과 암몬과 모압의 경계선을 따라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편안한 길을 택해서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2장을 주목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에돔과 암몬과 모압 사람들과는 다투지도 말고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도 말며, 괴롭게 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 족속의 땅을 지나게 되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할 것인데 그들은 전멸시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명기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과 주변국가들 간의 관계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과연 주변의 불신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는지를 신명기 2장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광야 40년 방황의 이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게 된 근본 이유는 불신앙입니다. 신명기 1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과 불순종과 두려움 때문에 방황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신명기 2장의 사관은 조금 다릅니다. 신명기 2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자 해도 아직 아모리 족속의 때, 하나님께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계시해 주신 장면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2-16)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지만 애굽에 가서 40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40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께서 애굽을 징치하실 때에 그 자손들이 큰 재물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고 또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신명기 2장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방황하게 된 이유를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극한에 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아모리 족속을 쫓아낼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면서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과 일반 백성들, 즉 믿지 않는 백성들과 상호 연관하여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만 역사를 진행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장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은혜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은혜 받지 못한 세상의 사람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라고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의 은혜(saving grace)입니다. 구원의 은혜는 특별은혜(special grace)라고도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백성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시며 부르시고 의롭다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주십니다. 구원의 은총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구원은 택자에게 베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은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무런 은혜도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 5:45)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들에게도햇빛도 주시고, 비도 주시고, 지식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예술적인 능력을 주십니다. 이 은혜를 가리켜 일반은혜(common grace)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saving grace)를 받고, 일반 사람들은 일반은혜(common grace)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해서 우리가 그 음악을 듣고 즐기지 않습니까? 소설가 헤밍웨이도 불신자이지만 좋은 소설을 썼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즐겨 읽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모두 신자는 아닙니다. 정치가들도 모두 신자는 아니지만 그 분들이 정치를 이끌어가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먹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일반 은혜, 일반은총인 것입니다.
2. 대항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예절과 상식으로 대하라
그러면 구원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반은총을 받은 세상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까요? 신명기 2장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은 암몬, 모압, 그리고 에돔 세 족속이고 대항하는 족속은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입니다.
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중국의 유명한 두 지도자 장개석과 모택동이 힘을 합쳐 일본에 항거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에 두 사람이 모여서 통일된 중국을 이루고자 했으나, 그 계획이 깨져버리고 결국 1946년부터 3년 동안 중국에 내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장개석 군대와 모택동 군대가 싸우게 된 것입니다. 장개석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졌고, 모택동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습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지원하는 장개석이 승리했으면 좋았겠지만, 장개석의 군대는 패배하고 대륙을 떠나 결국 대만을 차지하였고 모택동 군대는 승리하여 대륙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왜 모택동은 승리하고 장개석은 졌을까요? 정사(正史)에는 나오지 않지만, 야사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택동은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에게 “너희는 어느 지역을 가든지 민폐를 끼치지 말라. 거기서 여자를 겁탈하지 말고 양식을 빼앗지 말아라. 사람들을 절대로 괴롭히지 말고 조용히 주는 것만 먹고 지나가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치는 사람을 엄벌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 군대는 가는 곳마다 민폐를 끼쳤기 때문에 민심이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장개석 군대는 자유 민주주의를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대만으로 쫓겨나고 모택동 군대가 결국 대륙 중원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대항하지 아니하는 세상 백성들에 대해서는 예절과 상식을 가지고 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는 다투지도 말고 괴롭게 하지도 말고 싸우지도 말고 그들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지도 말고 양식과 물이 필요하면 돈을 주고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돔, 모압, 암몬 백성들은 악한 백성들이요, 우상숭배하는 백성들이요, 부도덕한 백성들이지만 그래도 너희를 대항하지 않고 너희에게 길을 내어줄 것이니 그들과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민폐를 끼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이라고 하는 조그만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몰아넣고 거기서 억지로 살게 하셨는지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 차라리 애굽과 모압, 암몬사람들을 전부 쫓아내고 그 넓은 땅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살게 하시지 왜 조그마한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을까요? 그것은 세상 백성들을 모두 쫓아내거나 죽이고 하나님의 백성들만 끼리끼리 모여 살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은혜를 베푸실 때에는 일반은혜를 받은 죄인들 가운데서 택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일반은혜를 받은 죄인들이 없다면 특별은혜를 베풀 수 있는 하나님의 터전도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 의인이 됐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는 죄인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들로부터도 혜택을 많이 받습니다. 그들이 길을 닦아놓으면 우리가 자동차 타고 달리고, 장사하면 가서 물건도 사고, 죄인들이 의사가 되면서 병도 치료하고 수술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특별은혜를 받아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죄인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마 13:29-30) 죄인들은 추수 때에, 예수님의 재림 때에 심판 받고 멸망하게 되어 있지만 최후 심판 때까지는 의인과 함께 이 세상 가운데 섞여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기독교인과 불교 신자와 박수무당과 이슬람 교인들이 다 섞여 살아도 서로 해치지 않는 이상 예절과 상식을 지키면서 공존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은혜받은 것을 이유로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존재가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대하면 우리 신앙은 무례하고 상식 없고 거칠기 짝이 없는 그런 저급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여자가 예수님을 믿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 10년 이상 출석한 후 권사가되었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의 남편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매일 약주를 드시고 해서 소리 지르며 집기들을 때려 부숩니다. 권사님이 남편을 보고 “이 마귀야! 이 사탄아!”라고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바로 상식 없고 무례한 신앙인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 3:1)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술 취해서 집에 들어와도 예수님을 믿는 아내가 남편을 욕하면 남편은 속으로 ‘우리 마누라 교회 나가더니 말만 늘고 욕만 늘었구먼. 예수 믿어도 아무 소용없네. 나는 술을 먹어도 마누라보다는 나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술 취하고 들어와도 그 부인이 “여보. 오늘 약주가 과하셨군요”라고 말하면서 신발과 양말도 벗겨드리고, 발도 닦아 드리고, 아침에는 해장국도 끓여 드리며 잘 모시게 되면 아무리 술 취한 사람이라도 ‘역시 마누라는 교회 다녀야 돼. 마누라는 예수 믿는 여자가 훌륭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에 술 먹으러 가도 “이보게. 자네 마누라 예수 믿나? 안 믿지? 역시 마누라는 예수를 믿어야 되는 거야. 예수 믿는 우리 마누라는 내가 술 취하고 들어가도 나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라고 자랑하게 되고, 후에 자기가 병들어 약해지게 되면 “여보. 나도 당신이 믿는 예수님을 믿어야겠소”라고 말하며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무리 불신자라고 해도 이처럼 예절과 상식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제가 전에 비행기를 타고 가는데, 좁은 통로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서더니 갑자기 성경책을 들고 “예수 믿으시오.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안 믿으면 지옥갑니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스튜어디스도 지나가지 못하도록 통로를 막고 전도를 하는데 물론 ‘담대하고 믿음 좋은 분이구나’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저 사람처럼 전도했다가는 믿을 사람도 안 믿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승객들이 얼마나 기독교가 몰상식하고 무례한 종교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우리는 불신자들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상식과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복음적인 양심이나 정직을 내세워서 사람들에게 상식이하의 행동과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전도하겠다고 사람들에게 갑자기 “여보시오. 내가 보니 당신들 안에는 귀신이 스무마리나 들어 있소. 당신들은 지금 죽으면 지옥 갈 것이고, 하나님께서 지금 당신들을 향해 진노의 손을 들고 계시오”라고 말한다면, 이런 무례한 말을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물론 불신자들이 지옥에 간다는 말은 맞긴 하지만 정직과 양심을 핑계로 이렇게 예절 없고 무례한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이 정직은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 수준 이하의 기독교를 보여주면 어떻게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특별은혜를 받았다면 더욱 상식과 은혜와 예절과 보편타당한 사회의 질서를 존중하면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3. 대항하는 백성들과는 싸우라
그렇다면 교회를 대항하는 불신자들, 하나님의 백성을 대항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앞서 싸우시고 그들을 진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암몬, 에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에게도 예절과 상식으로 대했습니다. “내가 그데못 광야에서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이르기를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대로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 너는 돈을 받고 양식을 팔아 나로 먹게 하고 돈을 받고 물을 주어 나로 마시게 하라 나는 도보로 지날 뿐인즉”(신 2:26)이라고 예절을 갖추어 정중히 요청하였으나 헤스본 왕 시혼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신 2:30)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다”(신 2:34). 아모리 왕 시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길을 막고 방해하다가 결국 진멸 당했습니다. 바산왕 옥은 또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는지라”(신 3:1) 바산 왕 옥도 하나님과 이스랑레 백성을 대적하여 싸웠기 때문에 성읍 60개를 모두 빼앗기고 결국은 남녀노소 유아까지 모두 전멸당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부서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눈동자입니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불신자들과 섞여서 삽니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대적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그들에게 일반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 사회가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지 않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5.31 지방선거에서도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지 않는 사람들이 당선되게 하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가 당선이 되면 우리 사회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 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우리를 위해 주는 사람들과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갑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 백성들이 선할 때는 예절을 가지고 대하고 악할 때는 우리도 싸워야 합니다. 예절을 갖출 때도 있고 싸울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가나안 땅, 우리가 짓지 아니한 성읍과 우리가 쌓아두지 아니한 물건이 가득한 집과 우리가 파지 아니한 우물과 심지 아니한 과수원을 얻을 수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방 사람들의 악함과 선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쳐서 복종하며 믿음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아무개 때문에 어려워. 아무개 때문에 축복을 못 받는 것 같아”라는 불평은 그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별력이 생명이다
신 2:1-15 / 이덕신 목사(시카고 하나로교회)
오늘도 찬양을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신 줄 믿습니다. 저들의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되길 바랍니다. 주와 같이 가리라! 그것은 분별력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찬양인 줄 믿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 아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가치있고 멋지게 보람 있게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피조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이 동물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 그리고 재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한번 사는 인생 동물과는 다르게 보람 있고 가치있게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바로 그 길을 오늘 안내 받고자 합니다. 바로 잘못된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창세기3장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나’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설교도 나 중심으로 듣기 때문에 갈등을 느끼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정말 인간답게 가치있게 살기를 원한다면 나의 기준을 바꾸어야 합니다. 원래 나의 기준은 나중심, 우리 가정 중심입니다. 여러분의 인생관은 누구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타락은 자기 중심에서 나왔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이 없습니다. 자기 몸을 위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사랑하는 남편에게도 주었는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인생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사단은 자기 중심으로 살도록 했습니다. 자기 성공을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은 보이는 것에 있습니다. 나 중심적인 창세기3장 인생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면 상상할 수 없는 하늘보좌를 알아가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물질 중심으로 살았지만 귀하게 여겼던 보화들을 잃고 난 뒤 인생을 깨닫게 됩니다. 보이는 물질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를 알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른 점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신명기의 목적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을 회복입니다.
신1:11) 너희 조상의 여호와께서 너희를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시며 너희에게 허락하신 것과 같이 너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신명기는 모세가 죽기 전에 후손들에게 과거를 회상하며 후손들이 고난 받지 아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길, 바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고 간곡히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후손들이 앞으로 가치 있고 보람있게 살기를 원하시면 자녀들과 함께 계속해서 신명기를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신명기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항상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가는 인생은 가치 있습니다. 말씀회복의 축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를 전하는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증거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이미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불의한 재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불의한 재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주인이 창조자 하나님이심을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타성적으로 다니고 익숙한 신앙생활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라가는 신앙인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원래 자기의 모습대로 살아가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분별력이 생명이다’ 기억해야 합니다. 분별만 잘해도 이 세상을 성공할 수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기준의 분별력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분별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인생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에서 해방 받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 2년 사이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고, 이웃사랑의 돌판을 주셨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 2년만에 왔는데 강만 건너면 약속의 땅을 갑니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면 되는데 자기 기준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정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을 가기만 하면 정복할 줄 믿습니다. 그 땅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많은 족속들은 매우 용맹스러운 자들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 같다고 보고 했습니다. 좋은 것은 갖고 싶지만 정복할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광야 38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회복과 불신앙을 제거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러 날 동안 세일 산을 두루 다녔더니
2)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돌이켜 북으로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방황합니다. 창세기 3, 6,11 장 속에서 성공 하는 듯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방황하는 인생입니다.
창세기 3, 6,11 장 속에서 성공 하는 듯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방황하는 인생입니다. 이때 인생에 대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날 전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이 먼저 복음을 이해하고 잘 누리시길 바랍니다.
3) 광야길에서도 성령의 인도 받고, 분별력 있는 삶
가나안 땅으로 전진하던 도중에 거쳐야 했던 에돔, 모압, 암몬 족속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과 전쟁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이요, 모압과 암몬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습니다.
에돔 족속과 암몬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가면 불신자들은 두려워 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싸울 대상이 아닙니다. 언약 가진 자는 모든 사람을 살려야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세일땅은 에서에게 허락하신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들 지역들을 지날 때에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을 사서 먹고 물도 사서 마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축복을 받았다고 불신자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은 복을 받았다고 불신자들 앞에 너무 자랑하면 안 됩니다. 힘 있을 때 우리는 더 낮아져야 합니다.
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해야 진정한 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가슴에 안고 인도하시만 불신자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도 되시지만 너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지만 다른 사람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신2: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다님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셨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시기로
신2:9)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히지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이르기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하면 되는 것입니다. 모압의 여인을 통하여 예수님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과 계획은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습니다. 강단의 말씀을 하나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인생을 보호하십니다. 거지근성,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어려우면 기도하면 됩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
요셉은 이 언약을 깨닫고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실히 살았습니다. 모세도 처가살이 했지만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성실하고 공교롭게 양치기를 하는 가운데 골리앗을 넘어 뜨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무나 하고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만 받아도 너무 많습니다. 남의 것을 절대 탐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의 불신앙을 제거해야 합니다. 나의 불신앙과 싸워야 합니다.
세상 것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천명, 소명, 사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울 것을 우리 인생을 실패케 하는 사단과 싸워야 합니다.
그 속에서 후대들을 가장 멋지게 양육하는 최고의 부모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언약기도]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자기 감정으로, 자기 기준으로 사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분별력이 생명이오니 하나님이 주신 분별력을 가지고 이땅을 정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내 기준속에 사랑해야 되는 대상과 싸우지 않게 하시고 참된 원수와 싸울 수 있도록 축복하오소서. 같은 민족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남북으로 나뉘어 총을 겨누며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 비참함이 우리 후대들에게 임하지 않도록 복음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신명기 2장을 깨달을 수 있는 북한 되게 하시고 남한 위정자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