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직에 있던 지난 89년 2월 하순 어느 날 오후였다. 서울지방 검찰청의 박광빈 검사라는 분이 사무실로 전화를 해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 지만 씨가 히로뽕 흡입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데 조사가 다 끝났으니 신병을 인수해 가라는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 가슴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차를 타고 오라는 곳으로 찾아가는 동안 갖가지 상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왜 그 짓을 했을까…. 2월 하순이라고 하지만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소매 깃의 바람이 차가웠다.
서초동에 있는 별로 크지 않은 건물 지하실에 마약 단속반 사무실이 있었다. 건물 앞에는 벌써 신문사 차가 서너 대 와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계단을 따라 내려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표정 한 수사관들이 대여섯 명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지만 씨가 한 수사관 앞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핼쓱한 얼굴에 초라하고 풀죽은 모습이었다. 나는 지만씨와 눈이 마주치자 울컥 목이 메어 와 아무말도 못하고 말았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니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박 검사라는 분이 전후 사정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지만 씨가 자술 해 왔고 또 모든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뉘우치기 때문에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병인수인으로 가족이나 친척이 아닌 나를 부르게 된 것은 지만씨의 요청 때문이었노라고 했다. 신병인수서에 도장을 찍어주고 지만 씨를 데리고 나왔다. 자식을 둔 부모의 심정은 누구나 다 같겠지만 만약 박 대통령 내외분이 살아서 이런 일을 당했다면 어떠했을까. 5월 16일 새벽, 혁명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게 됐다는 보고를 들은 박정희 장군 눈앞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세 살배기 지만군의 얼굴이었다고 한다. 자녀 교육에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쏟았던 육 여사는 아마 그 참담한 심경을 필설로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검찰에서 풀려나온 며칠 후에 지만씨에게 내가 "왜 그런 것에 손을 댔느냐"고 물었더니 지만씨는 "그 동안 너무 괴롭고 미칠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나면 어머니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다"며 말끝을 흐렸다. 육영수 여사가 8·15 광복 29주년 경축식장에서 공산주의자의 흉탄에 길지 않은 생애를 마친지 어언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국민의 가슴을 후비고 지나간 그날의 아픔은 세월과 함께 아득히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 병든 사람,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편에 서서 진심으로 그들을 도우려고 애썼던 육 여사, 어린이와 노약자 그리고 힘없는 사람들을 지성으로 보살피는가 하면 사랑하는 남편의 '밝은 귀'가 되어 국민의 소리를 바르게 전함으로써 국민과 위정자와의 사이에 신뢰의 가교를 놓으려고 노력했던 '청와대 야당'으로서의 육 여사는 많은 이의 가슴에 오늘도 살아 남아 있다.
육 여사의 결벽으로 인한 감사패 소동
육 여사를 알게 된 것은 1968년경 이었지만 내가 청와대 비서로 발탁되어 일하게 된 것은 지금부터 20년 전인 1971년 9월이었다. 첫 출근을 한 다음날 느닷없이 김정렴 비서실장이 비서실 전 직원에게 보내는 지시 공문을 받았다. 내용은 비서실 직원은 누구를 막론하고 청와대 문구류나 기타 용품 등을 절대로 사적으로 쓰거나 집에 가져가지 말라는 지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육 여사가 첫 출근한 나에게 주고 싶은 주의사항이었지만 혹 내 자존심이라도 건드릴까봐 김 실장을 통해 전 직원에게 알리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그 다음 해 어느 날 배문 중학에 다니던 지만군이 종이 몇 장을 달라고 해 무심코 내 책상 위에 있던 갱지를 30여장 집어 주었다. 지만군이 종이를 들고 사무실을 나가다가 육 여사와 마주쳤다. 육 여사는 그 종이를 되받아 나에게 돌려주며 나와 지만군을 함께 나무랐다. 사무실 용품을 대통령 가족이라고 해서 함부로 집어다 써도 안 되지만 더구나 갱지를 연습장으로 쓰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파기하는 서류 가운데서 한쪽만 인쇄된 종이를 모아 연습장으로 묶어 아들에게 주었다.
박 대통령 내외분의 근검절약 정신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두 분은 물 한 방울 종이 한 장을 아껴쓰는 철저한 수범을 보였다.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에 침실에 있는 변기 물통에서 물을 아껴쓰기 위해 넣어둔 두 개의 벽돌을 발견하고는 그 방을 정리하던 직원들이 함께 눈물을 흘린 일이 있었다. 내가 1975년 10월 부속실을 떠나 공보비서실로 자리를 옮겼을 때 박 대통령이 그 동안 수고했다는 뜻으로 나에게 약간의 위로금과 '건투를 기원합니다. 1975년 10월22일 박정희'라고 자필로 쓴 메모지를 봉투에 함께 넣어 주었다. 그런데 그 메모지 우측 상단에는 '1974년 월 일' 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박 대통령은 74년에 쓰다 남은 메모용지를 버리지 않고 75년 10월에도 계속 썼던 것이다.
육 여사는 한복이든 양장이든 외제 옷감으로 옷을 해입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육 여사가 새옷을 입으면 많은 여성들에게 같은 옷감이라도 더 고급스러워 보이거나 외국산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와대를 방문하는 여성 가운데는 간혹 육 여사에게 옷감 제조 회사를 묻거나 심지어 조용히 옆으로 다가가서 옷감을 만져 보는 여성들도 있었다. 육 여사는 천성적으로 결벽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서도 거의 완벽 주의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꺼림직하거나 의심을 살만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를 밝히고 넘어가는 성미였다.
1970년 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개관식 때의 일이었다. 서울 시내 국민학교 교장과 어린이 대표들이 초청된 가운데 개관식이 성대히 거행되고 있었다. 식순에 따라 어린이회관 건축에 협조한 20여 명에게 육 여사가 직접 감사패를 전달하게 되었다. 사회를 보던 내가 감사패 문안을 읽고 육영재단 상임이사 였던 정모 씨가 감사패를 육 여사에게 넘겨줬다. 그런데 감사패를 잘못 집어서 받을 사람과 상패의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그냥 전달했으면 식이 끝나고 나서 서로 바꾸어 찾아갈 수 있었을 텐데 육 여사에게는 그것이 통하지 않았다. 이름이 다르다고 정 이사에게 되돌려 주었다. 당황한 정 이사가 이것저것 감사패를 찾느라 마구 건드려 놓는 바람에 계속 감사패 이름과 사람이 틀려 나갔고 차곡차곡 쌓아든 감사패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식장안에 있던 어 린이들이 박장대소를 했다. KBS-TV가 그 행사를 중계했으니 개관 첫 날 어린이 회관은 크 게 망신을 당한 셈이었다.
아버지 (육종관 씨)는 후덕한 분이 아닙니다
1972년 10월25일자 모 경제신문에 대한 공론사에 재직했던 김봉기씨가 육여사의 가친 육종관씨에 관한 짤막한 글을 기고한 일이 있었다. 그 내용은 충북 옥천의 토호인 육 씨는 천성이 착하고 후덕하여 같은 마을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늘 보살피고 도와주어 인심을 크게 얻었다는 것이었다. 신문기고를 읽은 육 여사가 나를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아버지는 결코 후덕하고 인심 좋은 분이 아니었어요. 남의 사정을 이해하고 조그만 도움이라도 주셨던 분은 어머니였어요. 아버지를 잘 아는 옥천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무어라고 하겠어요. 김봉기씨에게 전화를 해서 글을 써주셔서 고맙지만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었다고 바로 잡아드려요." 나는 즉시 김씨에게 전화를 걸어 육 여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아무리 아버지의 일이라 하더라도 틀린 것은 바로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육여사였다. 나는 그 후 나로부터 그런 전화를 받은 김봉기씨가 그때 육 여사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졌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1972년9월 29일 부산 어린이회관 기공식 때의 일이었다. 육 여사는 그날 기공식에서 어린이들에게 축사를 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비행기 멀미를 몹시 한데다가 그날 따라 연설 원고도 없이 요지만 몇자 적어 갔을 뿐이었다. 연설을 시작하려고 했을 때 생각처럼 그렇게 조리있게 연설이 나오질 않았다. 육 여사는 그날의 연설이 실패였다고 단정했다. 무엇보다 어린이들에게 미안했다. "내가 온다고 잔뜩 기다렸을 텐데…"하며 육 여사는 내가 보기가 민망 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 날 대통령 부인을 수행한 내가 보기에는 연설이 흠잡힐 만큼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원고를 읽어나갈 때처럼 유창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육 여사의 심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박 대통령이 옆에서 보기에도 애처로울 정도였다. 어린이들에게 실망을 주었다는 사실이 못내 육 여사를 괴롭혔다. 박 대통령이 육 여사를 위로했다. "가정 주부가 대중 앞에서 연설을 잘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너무 잘 해도 이상하지 않아." 하면서 도대체 어느 정도였길래 저렇게 괴로워하느냐고 나에게 묻기도 했다.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육 여사는 부산 어린이회관 준공을 앞두고 위와 같은 어린이 예찬 비문을 붓글씨로 써서 보내며 몇 차례나 다짐하는 것이었다. "준공식 때는 부산 어린이들에게 멋진 선물을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육 여사는 그처럼 벼르던 부산 어린이회관 준공식에 참석치 못하고 타계했으며 이 글씨는 마지막 휘호가 되고 말았다.
육 여사는 늘 국민들과 청와대와의 거리를 가급적 좁혀 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는 시중의 여론을 굴절없이 박 대통령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육 여사는 틈나는 대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루에도 수십 통씩 날아드는 갖가지 사연이 담긴 편지를 열심히 읽고 그것을 통해 민심을 파악하기도 했다. 육 여사는 특히 권력 기관이나 고위 공직자에 의해 억울한 일을 당한 국민들로부터 편지를 받으면 끝까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육 여사는 본인 앞으로 오는 편지는 일체 민원 비서실에서 뜯어보지 못하게 했으며 그것은 최고회의 때부터 불문율이었다.
1973년 가을, 김숙희라는 이름의 한 여인이 육 여사 앞으로 애절한 사연을 진정서를 보내 왔다. 내용인즉 정보부 직원이 남의 재산권 문제에 개입하여, 자신의 남편을 정보부 지하실로 끌고가 마구 구타하여 거의 성불구자가 되어 병원에 입원 해있다는 것이었다. 김 여인은 편지에서 "중앙정보부는 공산당 잡으라는 곳이지 죄없는 사람을 잡아가서 나이 30대 초반에 병신이 되도록 하는 곳이냐"며 대통령을 원망했다.
정보부 상대로 억울한 민원해결 해주어
편지를 읽고 난 육 여사는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울었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육여사는 그 진정서를 박 대통령에게 주었고 박 대통령은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철저한 진상 조사를 지시했다. 며칠 후 이 부장이 박 대통령에게 조사한 내용을 보고했다. 김 여인의 남편인 이희규(가명)씨가 정보부원을 사칭하고 다닌다는 정보가 있어 불러 조사 하던중 평소 심장 질환이 있는 이씨가 졸도하여 현재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 병원에 입원 가료 중이라는 것이다. 보고서에는 이씨가 썼다는 자술서와 이씨가 타고 다녔다는 비상 라이트가 달린 자동차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믿을 수 밖에 없는 완벽한 보고서였다.
육 여사는 나에게 그 보고서를 내주면서 병원에 찾아가서 단단히 주의를 주고 오라고 했다. 매우 섭섭하고 일종의 배신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았다. 나는 이씨가 입원해 있는 적십자 병원을 찾아가 병실에 있는 이씨와 김여인을 호되게 나무랐다. 그러자 김여인은 그 동안 청와대 민원반, 검찰, 경찰, 정보부 등에 수 차례 진정을 했지만 그 때마다 "그런 사실없다"는 어처구니없는 회신을 받고 억울해 마지막으로 희망을 갖고 육여사에게 진정을 한 것인데 "결국 육여사도 별 수가 없군요"하면서 매우 실망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김여인의 항변을 그대로 육 여사에게 보고 했다.
이 씨의 진술에 의하면 비상등을 자동차에 달고 다닌 것은 사실이지만 정보부원 행세를 한 일은 없으며 더구나 심장병을 앓거나 간질을 앓은 병력도 없다고 했다. 병원에 비치된 기록에도 이씨가 쇼크 상태로 입원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박 대통령과 육 여사에게 내가 조사한 대로 보고 했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 부장과 나를 부르더니 정보부 보고서와 내 보고를 놓고 진위를 직접 체크했다. 부하들의 완벽한 보고서를 믿는 이 부장의 의견과 나의 의견이 일치 할 리가 없었다. 박 대통령은 서울시경 국장과 수사과장을 불러 사건 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경찰은 정보부 직원이 관련된 사항을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수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막연하게 구타당한 것으로 심증이 간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사필귀정이라고 할까, 며칠 동안 직접 내가 뛰어다니며 조사를 한 결과 그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단서를 잡았다. 그 날밤 육 여사가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그 내용을 보고했더니 매우 만족해하면서 내일 아침 곧바로 대통령께 보고 드리라고 했다. 이튿날 나의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은 확신이 선 듯 일사천리로 그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육 여사는 이 사건 조사 때문에 내가 혹시 정보부로부터 해를 입지나 않을까 무척 염려해 주었다. 박 대통령에게 보고하러 집무실 정문을 통해 들어가면 경호원들을 통해서 경호실장에게 보고가 되고 또 정보부에도 내가 보고했다는 것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던 것이다.
육 여사는 나를 뒷 정원으로 나오라고 해서 정원으로 나있는 대통령 집무실의 뒷문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육 여사가 먼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와 있다가 내가 정원으로 나가면 집무실 안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 다음 해인 1974년 8월, 육 여사가 서거했을 때 청와대 비서실 광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울며 분향을 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낯익은 남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바로 김여인 부부였다. 창백한 얼굴의 이씨가 김여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분향을 했다. 나는 저 만치서 몸을 숨기고 그들의 슬픔을 헤아리며 바라보았다.
경호원 없이 각계각층 국민들과 접촉해
박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난 2년후, 1981년 어느 봄날이었다. 말쑥하게 차린 중년의 신사가 청와대 비서실로 나를 찾아왔다. 그 신사는 자신을 이 아무개라고 소개했지만 나는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지난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금방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1973년 늦가을, 이씨는 육여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이씨는 성균관대 학 구내에 있는 유도회(儒道會) 건물에서 기거하면서 그 회의 일에 관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유도회 총무라는 사람이 이씨에게 좋은 사람을 한 사람 소개 해 줄 테니 만나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씨는 유도회와 관련된 일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약속 장소인 미도파 백화점 내에 있는 다방으로 나갔다.
그 날 이씨가 만난 정명악(가명)이라는 사람은 이씨보다 나이가 몇 살 위로 보였는데 그는 엉뚱하게도 정부를 비방하면서 은연중에 북한과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이 씨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명악은 이씨에게 자기가 하는 일에 협조와 동참을 요구했다. 겁이 난 이씨는 그의 요구를 거절하고 돌아왔는데 며칠후 중앙정보부에서 이씨를 연행해 갔다. 그 날 정명악과 이씨와의 대화 내용은 모두 녹음되어 있었으며 계속 그를 미행해 오던 정보부 직원들에게 정명악은 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 후 이씨는 수차례 조사를 받았고 정명악의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일이 있은 후 이씨는 요시찰 대상에 올라 관할 파출소로부터 항상 감시를 받았으며 대통령의 외부 행사가 있을 때면 경호실 지시라며 경찰관들이 찾아와 출입을 통제하기도 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취직이고 뭐고 되는 게 없었다. 더구나 그를 보는 주변의 차가운 눈초리도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씨는 요로에 수십번 진정서를 냈다. 그러나 매번 허사였다. 그러다가 누구한테 들으니 육여사에게 편지를 내면 바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래서 이씨는 모든 사연을 적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육여사에게 편지를 냈던 것이다.
이씨의 사연을 읽은 육 여사는 즉시 나에게 경호실에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나는 경호실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건의 내용과 담당자의 의견을 물었다. 자기들의 판단으로도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억울한 일을 왜 그토록 오랫동안 내버려 두었느냐고 했더니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육 여사는 나의 보고를 듣고 나서는 이런 일이 한두 가지 겠느냐면서 경호실장에게 연락해서 대통령께 말씀 드릴테니 그 사람을 즉시 구해 주라고 지시했다. 이씨는 그 후 자유롭게 되어 어느 골프장에 과장급으로 취직이 되었는데 나를 찾아왔을 때에는 사장까지 올라가 있었다.
1973년 그 해도 저물어 가는 성탄전야였다. 평소 일체 경호를 하지 못하게 했던 육 여사는 그날도 나만을 데리고 크리스마스 이브를 쓸쓸하게 지낼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육 여사가 찾아간 곳은 영등포 근로자 합숙소였다. 그 당시 서울에는 영등포 합숙소 이외에도 남대문과 동대문 근로자 합숙소가 있었다. 육 여사는 명절 때나 연말이면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았으며 근로자들도 그런 육 여사를 매우 반갑게 맞이했었다. 하루 일을 끝내고 막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노동자들과 육 여사는 난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근로자들의 애로사항, 정부에 대한 요망 등 이런 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고시 공부를 하다가 시험에 실패해 날품을 팔고 있다는 손근숙이라는 청년이 정부 시책에 대해 신랄한 비평과 불만을 털어놓았다. 태도가 매우 도전적이었으며 자포자기에 가까운 언행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길만 넓힌다고 되느냐, 공무원의 부패는 얼마나 심한지 아느냐는 등 육 여사로서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집요하게 들고 나왔다. 특히 서울시 민원창구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의 무사안일과 불친절을 사정없이 규탄했다.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을 민원 창구에 배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육여사는 끝까지 웃으면서 그외 불평을 들어주었다.
이서구·박목월 씨 등과 가까웠던 육 여사
이튿날 이른 아침에 육 여사가 집으로 전화를 해왔다. 지금 곧 합숙소 세군데를 들러서 손 청년과 근로자 몇 사람을 청와대로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9명을 데리고 들어갔더니 양택식 서울시장이 들어와 있었다. 육 여사가 부른 것이었다. 육 여사는 준비한 만두국을 일행에게 대접하면서 어젯밤 손 청년이 한 이야기를 양 시장에게 했다. 그리고는 "이 청년에게 맡겨 볼만한 자리가 없을까요" 하고 의견을 물었다. 육 여사의 뜻은 단순히 취직을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불만으로 가득찬 그에게 민원창구 공무원들의 고충을 경험시켜 줄 기회가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양 시장은 손 청년을 다음날 서울 시장실로 불러서 본인이 희망한다면 그를 임시직으로 채용할 용의가 있음을 일러주었다. 1974년 1월4일자로 손근숙 청년은 임시직으로 채용되어 관악구청 민원봉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민원창구에 앉은 그는 자신이 주장한 대로 열과 성을 다해 일을 했다. 그러나 그가 밖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다. 박봉에 힘겹고 고달팠던 것이다. 얼마 후 그는 결국 사표를 내고 관악구청을 떠나고 말았다.
육 여사는 작가인 이서구 씨나 박목월 씨 같은 분들과의 대화를 무척 좋아해 그 분들을 가끔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73년 늦은 봄, 어느 날 오후였다. 이서구 씨가 육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경호관계로 영업용 택시가 들어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가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와야 했다. 아니면 효자동이나 삼청동에서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가끔 비서실 차를 입구에 대기 시켰다가 손님을 모시기도 했지만 운전사들이 손님 얼굴을 몰라 실수를 저지르는 예가 있었다. 육 여사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겪는 이런 불편에 대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서구 씨도 자가용이 없어서 차를 빌려야 했는데 그날 따라 잘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육 여사가 나에게 지시를 했다. 경호 실장실에 이서구 씨가 타고 오는 택시를 본관까지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육 여사는 "시내에 돌아다니는 택시를 아무거나 타고 올텐데 그 택시 기사가 청와대로 올 줄 어떻게 알고 나쁜 짓 할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이서구 씨가 탄 택시가 본관 현관까지 올라왔다. 입구에서부터 경찰관이 동승해서 안내를 해 왔다. 아마 그 택시는 청와대 본관까지 올라 온 전무후무한 택시가 될 것이다. 요사이 나는 김포공항에 가끔 가게 되는데 경찰관들이 자가용은 검색을 하면서도 영업용은 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서 '이서구 씨의 택시'를 생각하곤 했다.
육 여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지성이었다. 성장기에 후덕했던 어머니 이경령 여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남편이 거사한 혁명에 대한 공동의 무한 책임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남편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황천의 객이 될지도 모를 혁명에 뛰어든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하든 이 민족의 가난 때문이었다고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이 나라 백성을 구해내는 일은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사고와 행동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1972년 9월6일, 날씨도 맑은 수요일이었다. 육 여사는 이날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 있는 음성 나환자촌인 상지원을 방문했다. 그 전부터 육 여사는 전국에 있는 나환자촌을 여러곳 방문했으며 알게 모르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71년 6월 경, 상지원 대표자의 부인이 그곳에 '부모 때문에 사회의 그늘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미감아들이 60여명 살고 있다'는 소개와 함께 한번 방문해 달라는 편지를 육 여사에게 보냈다. 육 여사는 시간을 내어 꼭 한번 가보겠다는 친서를 그에게 보냈다. 그러나 청와대의 여러 가지 행사와 바쁜 일 때문에 차일피일하다가 몇 달이 지나가고 말았다
첫댓글 아침부터 눈물한방울로 시작하네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