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편집]
명태조는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가진 사람이었다.
-청나라 시대 고증학자 조익
그대들이 응당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을 왜구들로부터 지키는 것이고, 다른 것은 여기에 고려할 바가 못 된다. 압록강 일대는 엄중히 성곽을 축조하고 군대를 파견해 그곳을 수비해야 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군함도 건조해 방어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라.
백성들의 복을 빌고 성심을 다해 이러한 일들을 행한다면, 비록 백만 대군이라도 그대 나라를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제 돌아가서 그대들의 재상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하라.
"그들이 먹고 있는 것은 오직 백성들의 것이며, 그대들이 입고 있는 것도 오직 백성들의 것이며, 그대들이 부귀와 온갖 영화를 누리며 즐겁게 살고 있는 것도 오직 백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그대 나라의) 재상들이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숙고하여 삼한의 땅을 지킨다면, 가장 즐거운 것은 다름 아닌 누구이겠는가? 허니 더 이상의 잔꾀는 부리려 하지 마라. 하늘이 분노하고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다면, 실제로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2]
─ 고려사, 우왕 13년 5월의 조서[3]
명의 건국자. 묘호는 태조 고황제. 연호를 붙여서 홍무제라고도 불린다.
중국 역사 속 대표적인 토사구팽과 의심의 아이콘이자 세계사의 자수성가계 인물들 중 끝판왕[4]
2. 명 건국 이전[편집]
그는 1328년 9월 18일 중국 안후이성 봉양현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인 주세진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으며[5], 아명은 중팔(重八)[6]이었다. 그러나 그의 탄생을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의 부모는 배고픔과 영양실조로 얼굴이 누렇게 뜬 자식들을 보며 눈물 지었고, 입이 하나 늘었다는 부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태어난 시기가 원나라 말기로 국가 사회 자체는 막장일로를 걷고 있고, 심한 기근에 각지에서 도적들이 들끓으면서 어릴 때 꽤나 고생하였다. 주원장은 어머니의 메마른 젖을 빨면서 배고픔과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배고픔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소년 시절 지주의 소를 치기도 했었는데, 너무 배고픈 나머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먹고 꼬리만 남겨서 바위틈에 끼워 놓고는, 지주에게 송아지가 아무리 당겨도 나오지 않는다며 얼렁뚱땅 둘러댔다, 그러나 지주도 얼간이는 아닌지라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년들, 특히 사건의 주동자였던 주원장을 엄청나게 때렸다고 한다.
물론 이 일로 인해 주원장은 목장 주인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지만, 그의 친구들의 허기를 채워주기 위해서 과감하게 송아지를 잡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진 일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명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는 서달, 탕화, 주덕흥 등등이 당시 주원장과 함께 목동 노릇을 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해에 심한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에 전염병까지 돌아 마을은 줄줄이 초상집이 되었는데, 이러한 화는 주원장의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원장은 부모와 큰 형을 잃고 고아가 되어버렸다.
일단 주원장은 죽은 사람들의 장례라도 치르려 했지만 성대한 장례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고, 심지어 가족들을 묻을 땅조차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체 썩는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하자 마을 사람인 유계조(劉繼祖)가 그 광경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땅을 내놓아 간신히 매장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훗날 황제에 등극한 주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짐이 옛날에 가랑이가 찢어지게 가난했을 때, 우리 가족 가운데 목숨을 부지한 자는 먹을 것과 입을 옷이 없어서 고통을 당했고 역병에 걸려서 죽은 자는 그 시체를 급히 매장할 땅조차 구하기 어려운 형편이었지. 아,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이었던가."
의지할 만한 친척도 없던 주원장은 절에 가면 밥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머리를 밀고 황각사에 들어갔다. 그는 절에서 마당을 쓸고 종과 북을 치며 밥을 짓고 빨래를 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에 있는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원장이 황제가 되고 난 후,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편하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게 만들도록 명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절도 형편이 개판이기는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할 수 없이 탁발승[7]을 했다. 당시의 탁발승은 승려라기보다는 걸인 취급을 받았고, 주원장은 부잣집 대문 앞에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자신을 무척 초라하고 비굴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때 당한 굴욕감은 황제가 되고 나서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게 되었다.
그래도 탁발승으로 중국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실상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으며 산천, 지리, 풍속에 익숙해져 안목이 넓어졌고, 무엇보다도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글도 익혀서 까막눈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탁발승의 인생을 살다가 곽자흥 휘하의 홍건적에 가담[8]하였는데 그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튼 1352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홍건적 내에서 일개병졸에 불과했지만, 공훈을 세우면서 승승장구하여 실력으로 곽자흥 군단의 2인자 위치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곽자흥의 양녀(마씨)와 결혼을 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곽자흥이 주원장에게 상서로운 기운이 있어서 사위로 삼았다는 설과, 주원장의 능력을 질시하고 두려워하여 사위로 삼았다는 설이 있다.
1355년 곽자흥이 죽자 반란군의 지도자로 추대되었으며, 1356년에 난징을 점령하면서 사실상 남부지방에 할거하던 군벌의 한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여러 지역을 공격하면서 만난 지식인과 사대부들과 교류를 하면서 그들의 조언에 따라 세력을 운영하였으며, 이들을 기용하여 효과적인 행정 정책을 수립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게서 중국어와[9] 중국 역사, 각종 지식,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사실상의 제왕 수업을 받는다. 이 시기까지 주원장은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스스로를 오국공(吳國公)이라 칭했을 뿐이며 홍건적의 우두머리이자 송의 후계자를 자칭하고 있던 한림아의 신하에 머물러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원장은 원나라와는 별로 많이 싸우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원장은 다른 한족 세력들과 다퉜을 뿐, 원나라와의 다툼은 다른 한족 세력들에게 내버려뒀는데 이게 득이 되었다. 원나라를 뒤엎을 정도로 강력한 세를 가졌던 홍건군의 유복통이 차칸테무르에게 캐발린 뒤에, 주원장의 세력이 원나라의 사정거리 안에 들게 되었지만, 운 좋게도 차칸테무르가 원 내부의 내분에 휘말려 남하를 못하게 된 덕에, 주원장은 안심하고 진우량과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한 후, 1364년 최대의 적이었던 진우량의 세력을 격파하고 그 영역을 흡수한 후에는 스스로 '오왕'임을 선포하였고, 1367년 몽골족의 위험에서 한림아를 보호하기 위해 난징으로 모시고 오던 중에, 주원장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추정되는 침몰사고로 한림아가 익사하고, 또 다른 적수였던 장사성이 생포되면서 사실상 남부 지방의 패권을 휘어잡게 되었다.
이후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 북벌을 단행하고, 1368년 초 신하들의 권유를 받아 스스로 명의 황제가 되었음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3. 명 건국 이후[편집]
3.1. 통치[편집]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
치륭당송(治隆唐宋), 강희제 어필, 난징 효릉 |
1368년 여름에 원나라의 수도 대도(현재의 베이징)를 점령하고, 원나라를 만리장성 북쪽으로 밀어내면서 중국 대부분 지역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해서 중국 각지에 남아 있는 몽골족의 잔여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해온 까닭에, 실질적으로 중국 전 지역을 완전히 통일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중국 내 마지막 원나라 세력이던 윈난의 양왕을 섬멸한 1382년이 되고 나서였다.
수도도 지금의 북경이 아니라 남경에 있었는데, 명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강남에서 들고 일어나 전국을 장악한 왕조였다.[10] 중국 대부분을 장악한 것은 훨씬 전이지만, 1382년을 기점으로 잡는 이유는 이때부터 확장을 멈추고 수비로 돌아섰기 때문이다.[11]
하여튼 명나라 초기에는 몽골족과 싸우면서, 착실하게 원나라 말기 막장이 되었던 사회 기강을 바로잡고, 행정 체제를 정비하면서 명나라의 기틀을 닦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원나라 시기에 있었던 과거 제도를 철저하게 시행 및 감독하여, 유능한 인재들을 관료로 등용하려 하였다.[12]
특히 어렸을 적 고생의 영향으로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끔찍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하였다. 그리고 오랜 혼란으로 황폐화된 토지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리며 사회를 안정시켰다. 훗날 청나라 강희제가 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 송나라와 같다는 의미의 '치륭당송(治隆唐宋)'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명태조 주원장은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의 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13] 아무것도 없는데 허세만 부릴 줄 알았던 유방이나 돗자리를 팔던 유비와 마찬가지로 주원장도 하루하루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궁핍한 평민이었다. 그는 가장 밑바닥 계층 출신으로 시작하여 천하의 대권을 잡은 황제로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다.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출신 성분과 이후의 치적으로 백성들 사이에서는 명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지만, 신하들 사이에서는 폭군이란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는 개국공신들을 쥐 잡듯이 족쳤기 때문이다. 개국 3대 공신 중 유기, 이선장 등이 비참한 말로(末路)를 겪었으며, 그나마 살아남은 공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족쳤다.[14] 게다가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패는 일이 잦아서[15] 더더욱 심했다.
다만 백성들에겐 명군인데 신하들에겐 폭군이라고 엇갈린 평가를 받는 이유는, 아무래도 역사를 쓰는 사람들이 신하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도자의 권력 한계상 백성과 신하 둘 중 하나만을 챙길 수밖에 없는데, 신하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태평성대라고 봤기 때문이다.[16]
특히 군주의 전제권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에 걸핏하면 공신들이 죽어나갔다. 숙청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인데, 명나라 건국 이후 죽어나간 공신과 그 가족들의 수는 수만 명에 이른다. 주로 초창기에는 공신들 중에서도 무장들이 많이 숙청되었으며, 말기로 가면서 행정 체제가 점점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권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3.2. 아내[편집]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위 사진의 사람은 주원장의 아내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 마씨(1332~1382)였다. 이름은 수영(秀英). 회서 숙주 신풍리 출신이라고 하며 위에서 언급된 곽자흥의 양녀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자한 국모로 꼽히는 사람이다. 마씨는 성품이 인자했으며, 지략과 통찰력이 있었고 경서를 가까이 했다. 주원장은 개인 서찰을 모두 마씨에게 관리하게 했으며, 주원장을 모함하는 말을 듣고 곽자흥이 그를 의심하게 되면, 언제나 마씨가 곽자흥의 부인을 잘 섬김으로써 남편이 누명을 벗게 도와주었다. 그녀는 수시로 병사들의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공급했으며, 주원장이 용만에서 진우량과 결전을 벌일 때는 궁중의 모든 금은보화와 비단을 털어 군사를 위로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가능한 한 사람을 죽이지 말고 천하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했으며, 주원장은 마황후의 말을 명심했다.
주원장과 금슬이 매우 좋았던 듯하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미움을 받아 감금당했을 때, 그녀는 남편이 자주 굶는 모습을 보고 몰래 찐빵을 훔쳐 가슴에 화상을 입으면서까지 먹을 것을 품에 숨겨 남편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일화가 있으며, 그녀는 평소에 말린 고기를 충분히 준비하여 남편에게 제공했지만, 자신은 언제나 배부르게 먹지 않았다. 훗날 주원장이 마황후가 어질고 후덕한 황후라고 칭찬하고 자랑하자, 그녀는 자신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면서 겸손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발이 매우 컸기 때문에[17] 민간에서는 '큰 발 마황후'라고도 불리었다고 한다. 주원장과 결혼했을 때 첫날밤에는 주원장이 발이 크다고 이야기하자, "나도 당신의 못생긴 얼굴을 보고도 좋아하니, 당신도 나의 발을 좋아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한 일화도 있으며, 한 번은 민간에서 마황후를 큰발이라며 비웃는 그림이 나붙었는데, 마침 암행 중이던 주원장이 이를 보고 그림 앞에서 낄낄거리던 백성들을 처형하려 하자 황후가 "제가 발이 큰 건 사실이니 그런 일로 처형하지 마시라"고 간언하여 주원장도 그들을 살려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런 일화에서 보듯 마황후는 매우 어질고 현숙하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여장부였다. 평생 주원장의 옆을 지키며 주원장에게 정확하고도 옳은 헌책을 거듭하였고, 주원장은 그런 마황후의 이야기를 잘 따랐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가혹한 주원장이 신하들을 족치면 신하들은 마황후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고, 마황후는 이들을 슬기롭게 두둔하고, 마황후가 두둔하면 주원장도 마음을 바꾸어 신하들을 용서했으며, 주원장이 숙청을 하려 하거나 숙청을 하면 식음을 전폐하면서 말렸다고 한다. 이러한 마황후 때문에 주요 공신과 많은 신하들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태자 주표의 스승이자 대학자였던 송렴이다. 그도 죽을 위기가 있었는데 마황후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호유용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마황후는 그가 누명을 쓴 것을 알고 주원장에게 간곡히 화를 풀라고 부탁했으나, 웬만하면 마황후의 말을 듣던 주원장도 이번에는 마황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마황후는 명태조의 수라상을 직접 들고 왔는데, 뜻밖에도 술과 고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명태조가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소첩이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송 선생을 위하여 재계(齋戒)하고자 주육(酒肉)을 올리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재계란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의식인데, 난 당분간 채식할 것이므로 그때까지 우리 집에 고기 반찬이란 없다 당신도 술과 고기를 당분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간접적인 경고였다. 그러자 명태조는 송렴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젓가락을 던지고 나가버렸다. 다음날 그는 송렴을 사면하고 무주로 유배를 보내 목숨은 살려주었다. 그런데 결국 유배 가던 중에 병으로 죽었으니 주원장에게 숙청된 것이 맞다
또한 마황후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여, 매우 검소하게 황궁의 살림을 꾸려간 것으로도 유명했다. 나라에 흉년이 들면 자신은 푸성귀 반찬을 먹으며 하늘에 기도했고, 관리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의 질을 개선하는 등의 일을 앞장서서 한 훌륭한 황후였다. 이런 훌륭한 마황후는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임종에 즈음하여 그녀는 주원장이 보낸 어의도 만나지 않고 그들이 처방하는 약도 거부하고 죽었다. 이유는 점점 의심이 많아지던 주원장이 자신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어의들을 처형할까봐 걱정해서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죽을 때에도 유언으로 "폐하께서는 널리 현자를 구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국가를 처음 세웠을 때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황실의 자손이 모두 현명하고 신하와 백성이 각기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얻기를 바랍니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주원장은 마황후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 하였으며, 약 일주일 동안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마황후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한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주원장은 이후 더 이상 왕비를 들이지 않았으며, 마황후의 죽음 이후 폭주하여 온갖 공신을 때려잡는 황제가 되어버린다.
3.3. 숙청[편집]
주원장의 역사상 유명한 행적이라면 숙청을 빼놓을 수 없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모든 신생국가의 숙명이긴 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송나라처럼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가능했던 경우도 있긴 있었다. 문제는 주원장의 명나라는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
우선, 명나라는 중국사상 기존의 한족 왕조나 한화족 왕조를 전조로 두지 않은 유일한 통일왕조였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다른 신생 왕조들과 달리, 오랑캐의 침탈과 방만한 통치로 인해 흩어진 한족 중앙정부와 황실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송나라가 오랑캐 몽골에게 망해서 한족 중앙정부와 황실의 권위가 바닥을 쳤는데다 몽골인들의 행정력이 워낙 병맛이었던 탓에 명나라 건국 직전의 남중국에서는 신사-향리층이라 불리는 토착세력가들이 중앙이고 뭐고 상관없이 알아서 멋대로 놀고 있었다. 중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를 박멸하려면 시범케이스가 제대로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려 광종처럼.
그리고 주원장의 출신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아무리 주원장이 몽골족을 쫒아내고 한족왕조를 다시 세운 영웅이었다 해도 그는 본질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난 내추럴 본 흙수저였고, 머리깎고 중이 된 것도 말이 좋아 중이지 좀 지나서는 구걸하러 다니느라 바빴다. 그리고 그마저도 안되니 도적단에 들어갔다가 본격적으로 일어선 것이다. 길바닥에서 언제 비명횡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거렁뱅이 도적놈이 시류를 타고 능력을 발휘해서 중화제국의 태조가 됬긴 했지만, 그는 출신이 미천할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재산과 학식도 없었고 성리학자가 싫어할 승려에 빼박 범죄자인 도적이기까지 했으니 기존 기득권층이 그를 우습게 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해서 황제가 안됐으면 모르되, 황제가 된 이상 숙청을 통해서라도 권위를 세울 필요성이 덧붙여지는 것이다. 특히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주원장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주원장은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하고,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 명태조는 이러한 자격지심 때문에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항주의 유생 서일기가 올린 하표에 "광(光)천지하 천생(生)성인 위세작칙(則)"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다스리는 법칙으로 삼았다'라는 뜻으로 명태조를 성인으로 추켜세운 극찬의 글이었다. 그러나 명태조는 이 문구를 읽고 대노했다.
'생(生) 자는 승(僧)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중 노릇을 했다고 비난했고'
'광(光) 자는 독(禿) 자와 의미가 통하므로 그가 대머리라고 비난했고',
'칙(則) 자는 적(賊) 자와 발음이 비슷하니 그가 도적 노릇을 했다고 비난한 것'
이라 주장 하며 참수하라고 명했다. 물론 억지였지만, 황제의 명령이고 반발 잘못했다가는 공신숙청 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라갈 판이니 그대로 집행되었다. 근데 나라 이름도 밝을 명(明)인데? 그뿐만이 아니다. 뛰어날 수殊자를 쓴 사람도 죽였다. 이유가 뭐냐면 저 글자를 파자해보면, 살바른 뼈 알歹자와 주원장의 성씨 주朱로 나뉘니, 이것은 주씨 일족의 살을 발라 죽이겠다는 뜻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쯤되면 그냥 가져다 붙이면 되는 수준이다.
단 정치적으로 필요했던 주원장의 숙청에 잘못이 있었다면 방법이 너무 잔인했다는 것이 문제. 주원장은 몽골제국의 행정상 무능 때문에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체계를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리는 방식으로 다시 세우려 했는데,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를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다. 주원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 흠좀무.[18]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梳洗)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과 뱀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그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하는 데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에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게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에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하였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에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사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게 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명태조를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안심이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주원장은 그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주원장이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 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특히 호유용의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때 남옥을 포함해 호서파 15,000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자 주표가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주원장은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19][20]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3만여 명의 권신들과 그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재상 제도를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하였다. 여기에다가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내서 모든 것을 황제의 밑에 두었다. 다만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았고, 그냥 국경 관리만 맡았다. 당연히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서 쳐들어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을 버리고 친족들에게 맡긴 것. 또한 친족에 대한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둘째부터 넷째 아들의 봉지는 모두 붙어있어서, 한쪽이 딴 생각을 하면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둘째와 셋째 아들이 먼저 죽어버렸다. 그래도 넷째 아들이 황제에 올랐으니, 자신의 자손들이 황제에 오르는 체제는 확실히 구축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이들이라도 안전한 건 아니라서 건문제는 숙부 숙청 작업을 천천히 진행했었는데 당연히 영락제도 숙청의 대상이었다. 결국 어차피 가만히 있다 죽기 vs 제위를 향한 목숨을 건 도박이라도 하기가 영락제의 유일한 선택거리인데, 영락제가 무엇을 선택할 지는 뻔해도 너무 뻔하다. 둘다 죽는 건 매한가지고 도박이 성공하면 황제가 되니까. 생각해보면 영락제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한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거두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주원장은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하였다.[21] 대신에 아들들을 모아놓고 "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하였지만, 이들도 숙청대상 인 건 다를 게 없었다.
주원장은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현대식으로 따지면 컴퓨터 작업을 위해 필요한 키보드나 마우스 정도로 봤기 때문에,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말 안듣는 마우스는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까. 하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그나마 주원장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고[22] 숙청의 목적은 언제까지나 황권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이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서,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숙청은 그의 후대 황제들이 신하들에게 권력을 빼앗겨서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고, 아예 황후를 중심으로 한 외척 세력이나 환관들이 정치에는 얼씬도 못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했으므로, 필요악이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국가 성립 초기부터 개천에서 용이 나올 길이 막히면 그 나라가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라[23] 군주 입장에서는 필요하다면 인위적으로라도 기존 지배 계층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후일 영락제와는 이 점에서 많이 다르다. 어쨌건 그 영향으로 홍무제의 황실 공식 어진은 위에 나온 것처럼 상당히 선하고 어진 임금의 인상이지만, 사대부 쪽에서 그린 어진은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흉악한 폭군(...)이나 다름없다. 다만 이렇게까지 한 것에는 어렸을 때 그런 막장 테크를 직접 체험한지라 벼슬아치(혹은 높으신 분들)에 대한 혐오감이 심했던 탓일 수도 있으며, 실제로 명 초기 부정부패나 계급 고착화가 사라진 데는 주원장의 역할이 상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목영, 탕화,[24]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고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25]이다. 여기에 지나치게 만연하게 늘어지던 문장을 일소하고 실용적이고 간소한 문장을 지향하며 관리들을 처벌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문자의 옥마냥 여러 꼬투리를 잡아 죽이거나 탄압하고 연관되지 않은 사람까지 여럿 희생시킨 점은 비난받는다.[26]
이것 때문에 환관의 발호를 불러 일으켰다는 말도 있지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고, 홍무제는 태종처럼 환관들도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으며,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하였다.[27][28] 그래도 지나친 숙청과 형벌 그 자체로 비판을 받는다.
3.4. 대외 관계[편집]
이러한 점은 외교 관계에도 적용되어, 주원장 시절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는 험악해져 갔다. 조선의 왕 이성계는 상당한 무공을 세운 명장이었고, 명 건국 이후 철령위 설치 등의 문제로 인해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 여기에 정도전이 사병 혁파를 위해 군제 개혁을 벌이는 것이 주원장을 자극해 매우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었고, 정도전 파 사신들이 명에서 모욕을 받거나 사사당하면서[29] 급기야 양국 간 무력충돌로 발전될 기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주원장과 정도전이 죽으면서 명과 조선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한다.
그러나, 주원장은 대외정책에 있어서 엄포만 놓았지, 실제로 다른 나라를 친다는 생각은 안 하는 실리주의자였다.
사방의 제이(制夷)는 모두 산으로 막히고 바다로 떨어져 있어 단지 한 모퉁이에 치우쳐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땅을 얻어도 산물을 가져올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어도 감히 부릴 수 없다. 만약 그들 스스로가 살피지 못하고 우리 변경을 소란하게 한다면, 이는 그들에게 좋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중국의 걱정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가 가벼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한다면, 역시 좋지 못할 것이다.
나는 후세의 자손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단지 한때의 전공을 탐하여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할까 그것이 두려우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라. 다만, 호융(胡戎 : 몽골)과 중국은 국경이 붙어있어 오랫동안 전쟁을 펼쳐왔으니, 반드시 좋은 장수를 가려 뽑아 병사를 훈련시켜 그들에게 대비하여야만 한다.
이제 나는 정벌하지 말아야 할 여러 나라의 이름을 열거하겠다.
동북에서는 조선국. 정동편북에서는 일본국. 정남편북에서는 대유구국, 소유구국. 서남에서는 안남국(베트남), 진랍국(캄보디아), 섬라국(태국), 점성국(참파), 소문달랍국(수마트라), 서양국(인도 남부), 일형국(말레이시아), 백화국(자바섬), 삼불제국(팔렘방), 발니국(브루나이).
─ 황명조훈 中
짐이 조선과의 분쟁을 그치고자 하는 것은 단지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라!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정벌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과정이란 백성들에게 있어 재앙이 되지 않겠는가? 예부로 하여금 문서로 그들(조선)을 질책하도록 하고, 그래도 그들이 뉘우치지 않는다면 그때 토벌을 이야기해도 실로 늦지 않을 것이다.
─ 명태조실록 권 257, "조선을 공격하자는 신하들의 제안을 묵살하며"
그러면 고려와의 철령위 분쟁이나 조선 초 갈등 등은 무엇인가 할 수도 있는데, 본래 주원장은 고려 외에 일본에 대해서도 실제 칠 생각은 전혀 없었으면서도 틈만 나면 "내가 친히 군사를 몰고 가서 너희들을 치겠다. 알아서 잘 해라" 라는 식의 협박을 반복했다. 진짜로 전쟁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유난스러울 정도로 블러핑을 적극적으로 일삼았다는 것.
고려가 멸망한 뒤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조선의 국왕 이성계에게 대놓고 "내가 보기에 넌 왕을 할 자격이 없다. 자꾸 까불면 치겠다" 고 서신으로 협박을 일삼으면서도,[30] 실제로 "조선을 치자" 는 여론이 나오자 이를 대번에 묵살해버린다.
주원장의 인식에서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인식은, 중국은 이미 충분히 큰 나라이자 자급자족할 수 있는 농업국이고, 노동력도 충분한 데다 당시의 수준으로 상공업 및 해외 시장이 필요하지도 않으니 '경제적 차원' 에서 타국을 치는 건 '무의미한 짓' 이었고, 이미 중국에 땅이 충분하고 사람 또한 넘치도록 있는데 풍속이 전혀 다른 나라를 점령해봐야 쓸모 있는 영토를 얻을 수도, 의미 있는 노동력을 얻을 수도 없었다는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아니러니하게도 그의 아들 영락제는 아버지 홍무제가 신신당부라고 남긴 황명조훈을 곧바로 위반하는 웃픈 상황에 직면하고 만다. 영락제는 "대외 원정을 자제하라. 아니, 하지 마라" 라는 주원장의 유훈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50만 대군을 다섯 차례 동원하여 북방 원정에 나섰고(이른바 오출삼려(五出三犁)), 그 유명한 '정화의 대함대' 를 조직하여 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는 영락제 시기에 이르러 주원장 말기에 비교해 60개국 이상 늘어났다.
"성조(영락제)는 무력으로 천하를 평정하고 자신의 위광으로 만국을 통제하기를 바랐기에 사방에 사자를 보내 조공을 재촉했다. 이에 서역의 대소 국가들은 신종하지 않을 수 없어 앞을 다투어 조공을 했다. 그래서 북으로는 사막에 닿고 남으로는 대해에 이르렀으며, 동서로는 태양이 뜨고 지는 지점까지 이르렀으매, 대략 배와 마차가 갈 수 있는 곳이라면 모두 성조의 위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 명사 서역전
이렇게 서로는 티무르 제국과 다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일본의 아시카가 요시미츠와 관계를 맺었으며, 브루나이와 말라카, 술루 등 머나먼 곳에 있는 나라의 국왕들은 자신들의 일족과 수하 수백 명을 이끌고 쉴 새 없이 자금성에서 영락제를 알현했는데, 홍무제가 알았다면 아마 기겁을 했을 듯(...)
3.5. 사후 후계자 다툼[편집]
원래 장남인 주표가 황태자로 책봉되어 후계자로 공인되어 있었으나, 주원장은 넷째 아들인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주원장은 "공신들은 닥치고 버로우!"로 일관하고 있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결국 의문태자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계승 원칙을 지켜 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지명하였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주원장은 1398년 사망하였는데 죽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모든 것을 혼자서 담당해왔으나, 돌이켜 보면 이는 너무나도 괴로운 일이었다. 다음 대를 잇는 이는 신하를 믿고 일해야 한다."
공신들 : ㅅㅂ 다 죽여놓고 무슨 소리야?
1398년 주원장이 숨을 거두면서 손자 주윤문이 건문제에 올랐지만, 1402년 연왕 주체가 조카를 쫓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이 사람이 바로 영락제로, 정화의 해외 원정과 몽골 원정, 북경 천도 등을 단행한 황제다.
4. 외모[편집]
어진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얼굴로 그려졌다는 특징이 있다. 왼쪽처럼 조작된 혹은 황제에게 아부하려고 훈훈하게 후덕하게 조춘처럼 잘생긴 초상화도 있는 반면, 오른쪽 같이 이말년 화법의 얼굴형이 스크루지 맥덕이나 다크윙 덕처럼 턱과 입이 길게 나온 데다 곰보 자국 투성이인 못생긴 도날드 상 초상화들도(최소 2점 이상. 얼굴에 곰보 자국은 없지만 턱은 여전히 튀어나온 초상화도 존재) 있다.[31][32] 그러나 기록[33]을 볼 때는 오른쪽처럼 곰보가 많은 얼굴이긴 했던 것 같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잘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주원장의 이미지와 위엄을 고려하여 미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34] 반면에 요즘 기준으로 못생기게 보이는 초상화가 오히려 당시 기준에는 귀와 코가 크고 턱이 튀어나온 것은 오악과 같고, 얼굴의 곰보 자국은 하늘의 72 별자리와 같아 천하영웅의 상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여, 잘생긴 초상화가 사실에 가깝고 오리처럼 턱과 입이 나온 못생긴 초상화가 프로파간다용이라는 주장도 있다.[35]
여담으로 이 두 초상화는 언뜻 보면 굉장히 달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와 수염의 형태는 거의 똑같다. 정형화된 형식이 다를 뿐, 같은 얼굴을 묘사한 것이 맞는 듯하다. 사실 똑같은 얼굴인데, 그림체 때문에 벌어진 논란이라고 한다 카더라 당장 중국의 역사 인물들 문서에 실린 초상화들은 오른쪽처럼 단순화되어 비슷한 그림체가 많은데, 실제 얼굴은 세밀하게 묘사된 좌측의 어진이 더 실제와 가깝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5. 그 외[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