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사문이 어버이날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
한편의 영화 같은
----‘동산양개화상 사친서’
모든 출가자의 어머님과 자식 간의 심정
큰 스님들의 수행이야기 가운데
-----동산양개화상 사친서(洞山良介和尙 辭親書)가 있어요.
사친서를 읽다보면
출가한 스님들이
부모님께 어떤 마음이 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동산양개화상이
진리를 찾아 출가하자 모친은 며칠 동안 흘린 눈물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모친은 행여나 아들을 만날까, 동구 밖 주막에서 오가는 스님들의 발을 씻어주었지요.
스님의 왼쪽 발가락이 6개였기에 아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동산양개화상이 소문을 듣고 갔습니다.
대야에 오른 발을 담갔고 아들 발인지도 모르고 정성껏 씻어드리는데 왼발을 달라하니
----“다쳤다”고
발을 주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아들인 것을 알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말이 없었지요. 동산양개화상은 말없이 가던 길을 갑니다.
오늘은 제가 지난 2008년 5월 8일 어버이날을 맞아 월정사단기출가학교장 시절
동산양개화상의 사친서가 생각나서 어머님께 썼던 편지 내용을 여러분들께 읊어 드리고자 합니다.
어머니께 올리는 편지 - 동은
동산양개화상은 진리를 찾아 끝없는 길을 떠났고,
그런 아들을 그리며 흘리며 흘린 눈물로 어머니는 결국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그래도 행여나 한 번 즈음 어머니를 찾아올까 하며 동구 밖 어귀 주막에서 오고가는 스님들의 발을 씻어주었지요.
아들의 왼쪽 발가락이 6개였으므로 스님들의 발을 씻어주면 아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어느 날 동산양개화상이 길을 가다가 노파가 길가는 스님들의 발을 씻어 준다는 소문을 듣고 그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렇게 그리던 어머니가 아니겠습니까!
동산양개화상은 아무 말 없이 어머니가 씻어주시는 대야에 오른발을 담갔습니다.
앞을 못 보는 어머니는 그 발이 아들 발인 줄도 모르고 정성껏 발을 씻어 드렸지요.
오른발을 다 씻고 왼발을 달라고 하니 동산양개화상은 왼발은 다쳐서 씻을 수 없다하며 내밀지를 않았습니다.
물론 동산양개화상도 말없이 눈물을 흘렸지요.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말 없는 가운데 이미 모든 말을 해 마친 것이었습니다.
동산양개화상은 가던 길을 떠났고, 어머니는 말없이 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향해 합장을 했습니다.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은 장면입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프로그램 가운데 ‘부모님께 편지쓰기’가 있는데,
자료를 준비하다가 학인시절 눈물을 글썽이며 배웠던 동산양개화상의 사친서가 생각나 올려봅니다.
모든 출가자의 어머님과 자식 간의 심정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 문득 이 몸을 낳아 길러주시고, 출가사문의 길까지 허락해 주신 부모님의 은혜가 가슴에 깊이 사무쳐 아려옵니다.
부디 이 불효를 용서하시옵소서.
내 비록 당신의 몸 빌어 이렇게 가도 가도 끝없는 길을 떠나 있지만,
한시도 부처님의 은혜와 당신만의 내 어미가 될 수 있으리오.
순간순간 스치는 모든 인연 내 어머니 라 여기고 이 눈물 삼키겠나이다.
부디 부처님 말씀 등불삼아 어두운 이 길을 밝히고 가소서.
........
부모님은 교회에 가셨지요.
비오는 날, 집에 찾아와서 출가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니 어머니는 정말 깜짝 놀랐지요.
제가 맏이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 내 자식이 출가한다면 선뜻 권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저에게 스님으로 삼배로 예를 다하십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리가 된 겁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스님으로 삼배로 ‘예’ 다해
수타니파타 법구경보고 삶에 대한 의문 떨쳐
저도 어릴 적에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녔어요.
물론 군대에 있을 때 먹을 것 많이 주는 곳으로 갔지만요.(웃음)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런데 길을 가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겁니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혈액암’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한 느낌입니다.
그 당시는 혈액함에 대한 마땅한 치료 방법도 없었습니다.
출가자들을 보면 신심이 깊어서 출가하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이 인생의 큰 사건을 겪고 출가를 합니다.
예를 들어 연인이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으면 ‘사는 게 뭔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답을 얻고자 출가하는 경향이 많았지요.
저 또한 병을 얻고 한동안 방황을 했어요.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라는 마음 때문에 길가에서 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걸식하고 그랬어요.
한번은 시골에서 막차를 놓쳤습니다. 그곳에서 자야 되는데 아무집이나 들어가서 ‘재워 달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더 올라가면 토굴이 있는데 가면 재월 줄 거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토굴에 올라가서 그냥 잤어요.
아침에 일어나니 눈에 띄는 글이 보였어요.
수타니파타의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였습니다.
그 글을 본 순간, 방황이 정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죽어야겠다’고 어머니께 편지를 쓰고, 고향에서 머나먼 강원도의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했습니다.
월정사 삼성각에는 당시 불교병원 모금함이 있었어요.
제 주머니에는 유일하게 단돈 100원이 있었어요.
제 전 재산을 시주하며 부처님께
----“몸이 낫는다면 남은 삶을 부처님을 위해서, 아픈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
----고 서원을 했어요.
월정사에서 행자생활을 하게 됐는데 육체적으로 힘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기도는 집중하다보면 힘이 생깁니다.
기도는 내리는 비를 가려주는 우산과 같아요. 가피력으로 모진 고난을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꿨어요. 제가 탑 앞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데 야광보살이 벌떡 일어납니다.
꿈속이지만 너무 환희심이 절로 난 것이지요. 야광보살이 제 머리에 손을 얹자 몸은 전율이 일었어요.
그러다가 꿈을 깼어요. 새벽이었는데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그 생각을 골몰히 해 봤어요.
그 후로 저는 병원에 가 보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는 그 덤으로 산다고 봅니다.
제가 단기출가 교장도 맡아보고, 출가 상담도 해 봤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잘 먹고 잘 사는 겁니다.
대부분이 물질문명을 말해요. 그럼, 조선시대보다 더 잘 먹고 산다면 모두가 행복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내 삶을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출가수행이라 말하고 싶어요.
이것만큼 힘든 것도 없지만 내 자신을 위하고 공공의 행복을 위한 출가여행을 함께 떠나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